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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宗時代의 鸞壇道敎

        김윤수(金侖壽) 한국동양철학회 2008 동양철학 Vol.0 No.30

        한국 최초의 본격 도교 扶鸞의 鸞壇인 無相壇은 信仰 仙으로 關聖帝君, 文昌帝君, 孚佑帝君의 三聖帝君을 한국적 특색으로 최초로 통합 숭배하고 신앙하며 鸞書, 善書를 편찬, 간행, 보급, 전파하였다. 無相壇이란 명칭을 사용하기 전 壇이란 존재로 徐珽이 關聖帝君聖蹟圖誌全集, 關聖帝君聖蹟圖誌續集, 海東聖蹟誌 통칭 關帝三誌를 간행할 때 난단활동을 전개하여 丁鶴九, 劉雲, 崔煥 등과 함께 하였다. 이를 무상단 直前派로 구분한다. 無相壇은 고종 14년(1877,정축) 봄에 성립되었다. 무상단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등장한 문헌은 현재로선 동년 3월 경에 문창제군이 “乃下雲頭於無相壇”이라고 한 衆香集의 서문이다. 無相壇 直前派와 本派 출신 道士들은 三聖에 대한 통합 신앙서와 개별 신앙서를 출판하여 보급하였다. 개별적 신앙서로는 關聖帝君에 대한 것으로 過化存神 등 4종, 文昌帝君에 대한 것으로 南宮桂籍 등 모두 6종으로 가장 많이 간행되었다. 孚佑帝君에 대한 것으로는 心學正傳 등 3종이 있다. 三聖에 대한 통합 신앙서로는 三聖寶典이 있다. 無相壇의 구성원은 壇下八士, 곧 壇下八弟子이니 무상단 8도사라고 하겠다. 모두 8명으로 좌반과 우반으로 분반되었고 우반의 영수는 淸虛子 丁鶴九이다. 헌종, 철종 시대부터 善書 보급에 큰 공을 세운 妙虛子 崔晃 본명 崔煥 (1813~1891)이 무상단 직전파부터 본파를 거쳐 무상단 중건파에 이르기까지 무상단 3단계에 가장 오래, 다 참여하였다. 관성제군, 문창제군 仙 신앙의 도입과 보급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남관왕묘 도사 淸寧子 徐珽이다. 淸蓮子 劉雲(1821~1884)은 일명 劉聖漢, 자는 岫卿, 호는 無心翁, 蓮華齋, 법호는 光居士, 일호는 光堂學人, 법명은 普圓, 도호는 如是觀主人, 淸蓮子, 劉淸蓮法師 등이다. 본관은 강릉(고호 溟州)이다. 嘉義大夫 行龍衛護軍의 무관직 고관으로 東關王廟의 관리 道官이었다. 劉雲은 순조 21년(1821)에 태어나 고종 21년(1884)에 향년 64세로 별세하였다. 29세 때인 憲宗 15년 (1849)에 불교거사로 삼교회통사상가인 月窓居士 金大鉉(~1870)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불교의 妙蓮社의 난단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하여 불교의 난서를 편찬하였다. 善書로 昨非菴詩話를 편집하였다. 유운은 道佛會通의 전형을 보여준 居士 겸 道士라고 하겠다. 울진군의 寧靜樓에서 玉皇上帝를 모시는 난단 활동을 하던 徐蘭瓊은 서울등지로 이주하여 조석린의 開化壇에서 활동하고 이어서 이진순의 照廣壇에서 활동하다가 독자적으로 光三壇을 개설하여 활동하였고 곧바로 무인년(1878,고 종15) 가을에 중단된 無相壇을 계미년(1883,고종20) 7월에 중건하여 활동하였다. 여러 鸞壇에서 활동하던 도사인 徐蘭瓊이 본래 옥황신앙의 소유자라서 無相壇을 중건하여 활동한 뒤로 무상단은 三聖 信仰에서 玉皇 信仰으로 다변화되었으니 변모된 것이다. 이를 이전의 무상단과 달리 보아 無相壇 重建派라고 별칭하여 연구의 편의를 도모한다. 無相壇 重建派도 활발한 난서 출판 활동을 벌여 중건 이듬해인 고종 21년(1884,갑신)에 6종의 난서 도경을 편간하였다. 무상단 도사들은 대부분 관성묘 道官들이다. 조선 전기 국립 도교 기관인 昭格署의 존재를 유학자들이 증오하여 기어이 혁파시켰는데 임진왜란 때 명군의 관왕신앙 전파에 의해 설치된 관왕묘가 이후 국립 도교 기관으로서 역할하더니 마침내 결실하여 조선말기 난단도교가 이에서 발흥하고 많은 선서와 난서들이 편찬, 간행되었으니 關王廟는 조선후기 유일의 道觀이라고 할 것이다. 관왕묘를 통하여 한국도교사의 3단계 곧 官方道敎, 修鍊道敎, 鸞壇道敎 가 정립될 수 있었으니 고마운 존재이다. 無相壇의 설치 장소 및 徐珽, 劉雲, 徐蘭瓊 등 무상단 도사들의 전기자료와 무상단 간행 난서들의 실체나 思想的 특징이라든가 무상단과 무상단 중건파와의 전환 관계 및 고종 이전이나 이후의 다른 난단 도교 정황 그리고 고종황제의 도교신앙 등 밝혀야 할 과제들이 있다. 韓國最初本格道敎鸞壇, 乃是無相壇。他所信仰的乩仙, 乃是關聖帝君, 文昌帝君, 孚佑帝君之三聖帝君。最初統合而崇拜之信仰之, 這是韓國的特色。 以其鸞書, 善書編纂而刊行之, 普及而傳播之。 朝鮮末期本格的鸞壇道敎於是展開。 無相壇未成立前, 以無名之乩壇, 展開活動, 徐珽刊行關帝三誌時, 與丁鶴九, 劉雲, 崔瑆煥等共參鸞壇, 名此無相壇直前派. 無相壇是高宗14年(1877,丁丑)春始成立。無相壇的名稱, 最初所載文獻, 乃是同年3月降云“乃下雲頭於無相壇”的衆香 集文昌帝君序。無相壇直前派及其本派出身道士, 對于三聖統合信仰書與個別信仰書, 出版而普及之。個別信仰書有關聖帝君過化存神等4種, 文昌帝君南宮桂 籍等6種, 孚佑帝君心學正傳等3種。統合信仰書有三聖寶典。 無相壇成員是壇下八士, 或云壇下八弟子, 乃是無相壇八道士。總共8人, 分左班與右班。右班領袖是淸虛子丁鶴九。憲宗, 哲宗朝普及善書大有功的崔瑆煥(道名崔晃,1813~1891), 最長且多參加無相壇直前派本派與無相壇重建派的三段階活動。 對于關聖帝君與文昌帝君乩仙信仰, 大有功於導入與普及之人, 乃是南關王廟道士徐珽。 淸蓮子劉雲(1821~1884)一名劉聖漢, 字岫卿, 號無心翁, 蓮華齋, 法號葆光居士, 一號葆光堂學人, 法名普圓, 道號如是觀主人, 淸蓮子, 劉淸蓮法師, 貫鄕江陵(古號溟州)。 他是嘉義大夫行龍驤衛護軍武官職高官, 乃是管理東關王廟的道官。劉 雲29歲時憲宗15年(1849), 受學于佛敎居士三敎會通思想家月窓居士金大鉉(~1870)門下。 活潑潑地參與佛敎妙蓮社之鸞壇活動, 纂述佛敎鸞書。他編輯善書 昨非菴詩話劉雲是有道佛會通典型的居士兼道士。 徐蘭瓊原來在蔚珍郡寧靜樓, 侍奉玉皇上帝, 展開鸞壇活動。自移住漢城以後,活動于趙錫麟之開化壇, 李瑨淳之照廣壇。獨自開設光三壇而活動之。戊寅年 (1878,高宗15)秋旣已中斷的無相壇, 癸未年(1883,高宗20)7月他自重建而活動之。 衆多鸞壇活動道士徐蘭瓊, 本來有玉皇信仰者。自重建無相壇以後, 無相壇從三 聖信仰擴于玉皇信仰多邊化。此與以前無相壇有相異處, 名曰無相壇重建派, 以供 硏究者便宜。無相壇重建派亦展開活潑潑的鸞書出版活動, 重建的翌年高宗21年 (1884,甲申)編刊6種鸞書道經。 無相壇道士大槪是關聖廟道官。朝鮮前期國立道敎機關是昭格署。儒學者嘗憎惡之,畢竟革罷之。壬辰倭亂時明軍以關王信仰傳播于朝鮮, 設立關王廟。以後以國立道敎機關的身分大有功於道敎信仰活動。朝鮮末期鸞壇道敎發興於此, 衆多善書鸞書編刊於此, 關王廟乃是朝鮮後期唯一道觀。因此關王廟, 定立韓國道敎史三段階卽是官方道敎, 修煉道敎, 鸞壇道敎, 宜所感謝之存在。 無相壇設置場所尙無知之, 及其徐珽, 劉雲, 徐蘭瓊等無相壇道士傳記資料又其 無相壇所刊鸞書實體及思想的特徵尙無明徵之, 無相壇本派與無相壇重建派轉換關 係及高宗以前以後其他鸞壇道敎情況, 而且高宗皇帝道敎信仰, 尙待考究, 以期後 日詳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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