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日本の古代文学における「新羅」と「高麗」 - その用例の文化史的考察 -

        袴田光康 단국대학교 일본연구소 2017 일본학연구 Vol.51 No.-

        본고는 일본 고대문학에 있어서 「新羅」와 「高麗」의 용례에 관하여 고찰한 것이다. 8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 일본 문학 안에는 고대 한국의 국명으로 고려, 백제, 신라, 발해 이 4 개의 이름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용례 수가 많은 것은 「新羅」이다. 8세기에 쓰여진 『고지키(古事記)』에서 「新羅」의 용례는 6례이지만, 이들은 2개의 신화에 집중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여기에서 「新羅」는 물질적인 풍요와 선진적 기술을 소유한 나라로 묘사되는데 풍요에 대한 동경(憧憬)이 거꾸로 「新羅」를 정복해야 할 적국(敵国)으로 자리매김하게 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고대문학에 있어서 「新羅」는 적국 또는 라이벌 국가로 부(負)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요슈(万葉集)』 이후는 신라의 적대적 이미지가 희박화되고 10세기가 되면 용례 수 그 자체도 감소하게 된다. 「新羅」 다음으로 많은 용례를 볼 수 있는 것이 「高麗」이다. 「高麗」는 4가지 의미로 사용되는 점이 특징이다. 첫째는 고대의 고구려, 둘째는 한반도 전체, 셋째는 발해, 넷째는 왕건에 의해 918년에 건국된 고려이다. 흥미롭게도 한시문에 있어서는 「渤海」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으나 동시대의 가나(仮名) 문학에서는 「渤海」의 용례는 전혀 없고 오직 「高麗」만 사용되고 있다. 가나 문학이 매우 포괄적인 의미로 「高麗」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 것은, 「新羅」가 적대적인 이미지를 띠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高麗」가 우호적인 이미지를 전통적으로 지니고 있어서 「渤海」도 그 연장선상에 위치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新羅」를 대신하여 「高麗」의 용례가 증가한다고 하는 변화는 율령체제의 붕괴 안에서 형성된 가나 문학의 새로운 가치관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This paper deal with the legend “Silla” and “Korea” in the ancient Japanese literature .In Japanese literary works written from the 8th century during the 11th century “Korea”, Baekje, Silla and Bohai are seen as a country of ancient Korea. The largest number of examples is that “Silla”. In Kojiki, written in the 8th century “Silla” examples in 6 patients, and they are intensively marked two myths. “Silla” is portrayed as a country with advanced technology and material wealth in there, but the longing for its richness made “Silla” as the enemy to be conquered .As a result, “Silla” became an enemy or rival countries with negative images in ancient Japan. However, the hostile image of Silla diluted after ‘Manyoshu’ and the examples of the number decreased in the 10th century. On behalf of this, “Korea( Koma)” got to see many examples in the 10th century. “Koma” was used in the four senses; One is Koguryo in ancient, the second is the Korean peninsula whole, the third is Bohai , the fourth is Goryeo founded in 918 by Wang‐gon. Interesting that the name of the “Bohai” clearly wrote in ancient Chinese literature in Japanese, but in contemporary Japanese Kana‐literature had no examples of “Bohai” at all. “Koma” is used exclusively in Kana‐literature. The Kana‐literature used word “Koryo” in a very inclusive sense, because “Silla” was tasked with a hostile image as opposed to “Koryo” with traditional friendly image, and “Bohai” positioned on the extension. The change increases the “Koryo” legend “Silla” on behalf of the subject reflect the new values of Kana‐letters formed in the collapse of the old Chinese rule of law system.

      • KCI등재

        일반논문 : 平安佛敎における<外來神>

        袴田光康 연민학회 2011 연민학지 Vol.15 No.-

        日本の京都比叡山の西阪本にある赤山禪院は,延曆寺第三代天台座主であった円仁(慈覺大師,794~864) によって,唐の登州赤山の法華院の「山神」を日本に勸請したものであると傳えられている.『慈覺大師傳』によれば,円仁入唐の際,赤山法華院を訪れ,そこに祀られていた「山神」に加護を祈願し,無事に日本に歸國することができたならば,「山神」のために禪院を建立することを發願したが,円仁の生前に果た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ため,その遺命を受けた弟子たちの手によって,仁和四年(888) に創建されたと記されている.これまで赤山禪院の赤山明神については,新羅人の土俗的神であるとか,円仁自身が感得した神であるとか,三井寺の新羅明神と同一であるとか,泰山府君と同體であるとか,樣タな說が言われているが,その正體は定かではない.從來の論の多くは,新羅明神との對立關係や神佛の習合を前提とした中世以降の資料に依거しているが,赤山信仰が円仁と深く關わることからすれば,円仁自身の旅行記である『入唐求法巡禮行記』(836~847)や,天慶二年(939)成立の『慈覺大師傳』を分析してみる必要がある.特に,『慈覺大師傳』の諸本の中でも,三千院本は,菅原道眞(845~903)の原作に近い可能性があり,9世紀の円仁の傳記と赤山神の由來譚として,最も注意すべき資料である.赤山神への円仁の誓願について比較すると,『慈覺大師傳』では,登州赤山の『山神』とされているが,『赤城大明神綠起』「赤山事」では,「明州」とされている.また,『入唐求法巡禮行記』では赤山に滯在したことは記しているが,円仁の誓願については全く記されていない.興味深いことに,『慈覺大師傳』では,円仁の誓願と呼應するような,その夜の円仁の夢が記されている.その夢は,「商人」が三千世界を量る秤を円仁に與えるというものであったが,それは赤山の「山神」が円仁に佛敎的奧義を窮めさせることを保障する意味を持つものであったと考えられる.これは,會昌の廢佛のために迫害されていた唐の佛敎が,円仁を通して東方の日本へ齎されるという<佛敎東漸>の思想とも深い關係があると見られる.史實としての赤山法華院は,當時,東アジアの海上貿易を支配した新羅人の張保皐の創建したものであった.唐における円仁の不法滯在は,この法華院を中心とする在唐新羅人の援助によるものであり,それは新羅人のネットワ一クによる織的な支援であった.円仁はれそ れゆえに,在唐新羅人たちは,円仁への援助を惜しまなかったのであろう.このような円仁と在唐新羅人らと深い繫がりを見るとき,張保皐や新羅人らの庇護のもとにあった円仁は,山の 「山神」 が彼らの守護神であるがゆえに自らの守護を祈願し,彼らへの恩に報いるために歸國後,赤山神を祀ることを決意したものと考えられる. 慈覺大師傳 は, 入唐求法巡禮行記 からこうした円仁と新羅人社會の連帶感を讀み取り,その東アジア的連帶を円仁の求法の旅の主題として描いたものと考えられる.それゆえ,円仁の夢に現れた 「商人」には,張保皐や在唐新羅人らのイメ一ジが投影されることにもなったのであろう.『慈覺大師傳』が,佛敎を共有する東アジア的連帶の象徵として円仁の赤山信仰を描いたのに對して,後世の赤山明神の綠起類は,神が佛敎に救いを求める神佛習合の論理をなぞるように,赤山神自身が日本に救濟を求める形へと變化していく.こうしたことからも,『慈覺大師傳』の赤山神の由來譚の極めて古い形であり,この話が,円珍による新羅神の請來譚などの外來神由來譚の原型をなすものであったことが窺われる.

      • KCI등재

        『入唐求法巡礼行記』に描かれた在唐新羅人

        袴田光康 열상고전연구회 2015 열상고전연구 Vol.43 No.-

        엔닌(円仁)은 9세기에 활약한 일본의 승려이다. 그는 불법을 공부하기 위해 당 에 건너가 9년간 체재하였다. 그동안 그는 계혹 여행기를 기록하였는데 그것이 바 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라고 불리는 책이다. 이 책은 당시 재당 신라인들에 대한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그 신라인 들이 엔닌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다는 점이다. 재당 신라인들이 엔닌에게 왜 협조적 이었을까? 그 가장 큰 이유로 재당 신라인들의 리더였던 장보고(張保皐)가 엔닌 을 원조하였던 사실을 들 수 있다. 엔닌은 장보고가 적산(赤山)에 창건한 사원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받아 그곳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나타나는 재당 신라인들은 무역활동을 통해 일본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 었고, 또한 국적과 신분에 얽매이지 않은 집단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들은 엔닌 을 원조하였고 엔닌도 그들에게 깊이 감사하였다. 엔닌의 전기에 의하면 그는 귀 국 후 적산의 신을 위해 절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9세기에 쓰인 엔닌 자신 의 여행기와 10세기에 쓰인 엔닌의 전기 사이에는 확연한 차이가 발견된다. 적산 의 신은 이국(異國)의 신에서 일본의 수호신으로 변용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적산신의 변화는 9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일본에서 외교적, 그리고 문화적 전환 이 발생하였음을 의미한다. 엔닌이 살았던 9세기 이후. 일본은 급속히 자폐성(自 閉性)과 자국주의에 빠져 들기 시작한다. 엔닌과 장보고의 시대는 동아시아적 공 동체의 마지막 번영기가 되었다. Ennin was a Japanese Buddhist in 9th century. He migrated to the Tang China to learn the Buddhism and stayed there during 9 years. A period of his travel, he kept writing his travel diary called Ennin's Travels in Tang China . In this travel book he recorded about Shragi's people who lived in the Tang. Special mention means putting is the case that the Shragi's people did much aid very kindly to Ennin. Why were the Shragi's people so cooperative to him? Because Chang Boko who was a leader of Shragi's people in the Tang supported him. He permitted boarding at Shragi's temple built by Chang in Sekizan and could be helped by Shragi's people in there. Chang Boko and Shragi's people met a close relation with Japan through their trading. And they didn't stick to the nationality and status. So they supported Ennin generously. He thanked them deeply. According to Ennin's biography he built a temple for God of Sekizan after returning his home country. But it is clearly different from Ennin's travel book written in the 9th century to his biography written in 10th century. God of Sekizan had changed from a foreign god to a Japanese palladium. The Change means that the gig diplomatic and cultural conversion has formed in Japan from the 9th to the 10th. After the 9th century, Japan rapidly became the autism and the nationalism. The time of Ennin and Chang Boko was the last blaze of East Asia collective.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