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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世紀 중반 揚州學派 劉毓崧의 實學的 通學

        李元錫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1 동국사학 Vol.51 No.-

        본고는, 19세기 중반 揚州學派劉毓崧(1818~1867)의 학술을 분석한 것 이다. 그 접근법은 유문기가 기초를 마련한 가학의 계승과 발전, 그 결과로 수립한 실학적 통학의 규모와 내용 및 성격을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 19세 기 초에 전성기를 맞이한 청조의 고거학풍이 19세기 중반에 어떠한 단계에 이르렀는지를 고찰한 것이다. 儀徵劉氏의 가학은 유문기(1789~1854)가 기틀을 만들었다. 그의 전공 은 1828년 연구결사를 통해 春秋左氏學으로 확정되었다. 그는 ⌈春秋左氏 傳舊注疏證⌋작업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로 ⌈左傳舊疏考正⌋을 출간하였다. 이 연구는 孔潁達이 ⌈오경정의⌋에 반영된 杜預의 주소를, 청대 고거학자들 의 주소연구를 참작하여 賈逵服虔鄭玄의 漢注로 복원하는 것이었다. 또 한, 史志學은 ⌈揚州水道記⌋, ⌈楚漢諸侯疆域志⌋와 각종 지방지의 편찬으로 구체화되었다. 평생 준직업으로 종사한 校?校勘도 가학의 일부였는데, 송 대 彭叔夏가 지은 ⌈文苑榮華辨證⌋의 체례를 중시하였다. 그러나 미완의 ? ⌈좌전구주소증⌋의 완성은 가학의 유업으로 전해지고, 또한 공영달의 ⌈오경정의⌋를 비판하는 주소학도 가학으로 계승 발전된다. 優貢生유육숭은 史志學에서 역사지리를 계승하는 한편 한위?명청 교체기의 역사인물과 사적에 대한 연구로 관심을 옮겼는데, 주로 춘추의 의리를 규명하는 작업이었다. 예제 예학으로 좌전을 해석하는 방법론과 연구의 축적은 춘추좌전학에서 춘추학 전반으로, 그리고 주역과 예학으로 발 전하였는데, 특히 예학의 발전으로 경세성의 보강과 함께 양주학파의 실학 적 특징이 제고되었다. 교수교감은 이른바 活校法으로의 발전과 함께 對校 의 대상이 크게 확대됨으로써 實事求是的인 접근이 강화되었다. 여기에는 반관반재야적인 전문가의 생존양상도 투영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杜預와 孔潁達의 주소학에 비판적인 시각은 ⌈좌전⌋을 넘어 ⌈周易⌋, ⌈尙書⌋, ⌈毛詩⌋, ⌈禮記⌋에 관한 ⌈舊疏考正⌋을 저술하여 注疏學을 확대하였다. 춘추좌전학은 외견상 도리어 축소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

      • KCI등재

        19世紀 중반 揚州學派 劉毓崧의 實學的 通學

        이원석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1 동국사학 Vol.51 No.-

        본고는, 19세기 중반 揚州學派 劉毓崧(1818~1867)의 학술을 분석한 것이다. 그 접근법은 유문기가 기초를 마련한 가학의 계승과 발전, 그 결과로 수립한 실학적 통학의 규모와 내용 및 성격을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 19세기 초에 전성기를 맞이한 청조의 고거학풍이 19세기 중반에 어떠한 단계에 이르렀는지를 고찰한 것이다. 儀徵劉氏의 가학은 유문기(1789~1854)가 기틀을 만들었다. 그의 전공은 1828년 연구결사를 통해 春秋左氏學으로 확정되었다. 그는 『春秋左氏傳舊注疏證』작업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로 『左傳舊疏考正』을 출간하였다. 이 연구는 孔潁達이 『오경정의』에 반영된 杜預의 주소를, 청대 고거학자들의 주소연구를 참작하여 賈逵 服虔 鄭玄의 漢注로 복원하는 것이었다. 또한, 史志學은 『揚州水道記』, 『楚漢諸侯疆域志』와 각종 지방지의 편찬으로 구체화되었다. 평생 준직업으로 종사한 校讎校勘도 가학의 일부였는데, 송대 彭叔夏가 지은 『文苑榮華辨證』의 체례를 중시하였다. 그러나 미완의 『좌전구주소증』의 완성은 가학의 유업으로 전해지고, 또한 공영달의 『오경정의』를 비판하는 주소학도 가학으로 계승 발전된다. 優貢生 유육숭은 史志學에서 역사지리를 계승하는 한편 한위․명청 교체기의 역사인물과 사적에 대한 연구로 관심을 옮겼는데, 주로 춘추의 의리를 규명하는 작업이었다. 예제 예학으로 좌전을 해석하는 방법론과 연구의 축적은 춘추좌전학에서 춘추학 전반으로, 그리고 주역과 예학으로 발전하였는데, 특히 예학의 발전으로 경세성의 보강과 함께 양주학파의 실학적 특징이 제고되었다. 교수교감은 이른바 活校法으로의 발전과 함께 對校의 대상이 크게 확대됨으로써 實事求是的인 접근이 강화되었다. 여기에는 반관반재야적인 전문가의 생존양상도 투영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杜預와 孔潁達의 주소학에 비판적인 시각은 『좌전』을 넘어 『周易』, 『尙書』, 『毛詩』, 『禮記』에 관한 『舊疏考正』을 저술하여 注疏學을 확대하였다. 춘추좌전학은 외견상 도리어 축소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춘추좌전』의 연구에서 축적된 예학과 의리, 그리고 춘추필법 등을 토대로 古學과 諸子學으로 연구 분야를 확장하여 ‘六經皆史論’을 제출하여 경학과 제자학을 融會貫通하였다. 심지어 謠諺 地方史志 逸文이나 또한 小學, 今古文學, 陽明學, 古學, 漢學(蜀學) 등을 아울러 광대한 通學의 학술체계를 구축하였다. 그의 학술은 학문연구방법론으로 소학을 통한 實事求是的인 접근으로 微言大義의 발명을 추구하였고, 그 성격은 실제 생활에서 실용 실천 경세의 내용을 중심으로 미언대의(義理)를 회통한, ‘實學的 通學’이었다. 그의 학술종지는 吳派와 皖派의 장점을 겸용한 부친의 입장을 바꾸어 미언대의와 경세성을 크게 강화함으로서 환파 지향으로 전환하였다. 유육숭의 실학적 통학에 보이는 경학의 ‘通經化’나 ‘廣經化’, 六經皆史論, 儒家諸子同源論, 西學中源說 등은, 서구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양무운동기 이전인 19세기 중반에, 청대 考證漢學이 도달한 종점이자 중국전통학술의 최후단계였다. 이에 따르면, 경학․경전․공자의 상대화로 인해 그 지위가 격하되었고 양무운동기의 사상을 모색한 측면에서 근대 지향성도 담보하고 있었다. 왕조교체기의 인물과 사적에 대한 연구로 경세성이 제고되었다. 다만, 주자학의 학술종지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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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世紀) 중반 양주학파(揚州學派) 유육숭(劉毓崧)의 실학적(實學的) 통학(通學)

        이원석 동국사학회 2011 동국사학 Vol.51 No.-

        본고는, 19세기 중반 揚州學派 劉毓崧(1818~1867)의 학술을 분석한 것이다. 그 접근법은 유문기가 기초를 마련한 가학의 계승과 발전, 그 결과로 수립한 실학적 통학의 규모와 내용 및 성격을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 19세기 초에 전성기를 맞이한 청조의 고거학풍이 19세기 중반에 어떠한 단계에 이르렀는지를 고찰한 것이다. 儀徵劉氏의 가학은 유문기(1789~1854)가 기틀을 만들었다. 그의 전공은 1828년 연구결사를 통해 春秋左氏學으로 확정되었다. 그는 『春秋左氏傳舊注疏證』작업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로 『左傳舊疏考正』을 출간하였다. 이 연구는 孔潁達이 『오경정의』에 반영된 杜預의 주소를, 청대 고거학자들의 주소연구를 참작하여 賈逵 服虔 鄭玄의 漢注로 복원하는 것이었다. 또한, 史志學은 『揚州水道記』, 『楚漢諸侯疆域志』와 각종 지방지의 편찬으로 구체화되었다. 평생 준직업으로 종사한 校수校勘도 가학의 일부였는데, 송대 彭叔夏가 지은 『文苑榮華辨證』의 체례를 중시하였다. 그러나 미완의 『좌전구주소증』의 완성은 가학의 유업으로 전해지고, 또한 공영달의 『오경정의』를 비판하는 주소학도 가학으로 계승 발전된다. 優貢生 유육숭은 史志學에서 역사지리를 계승하는 한편 한위·명청 교체기의 역사인물과 사적에 대한 연구로 관심을 옮겼는데, 주로 춘추의 의리를 규명하는 작업이었다. 예제 예학으로 좌전을 해석하는 방법론과 연구의 축적은 춘추좌전학에서 춘추학 전반으로, 그리고 주역과 예학으로 발전하였는데, 특히 예학의 발전으로 경세성의 보강과 함께 양주학파의 실학적 특징이 제고되었다. 교수교감은 이른바 活校法으로의 발전과 함께 對校의 대상이 크게 확대됨으로써 實事求是的인 접근이 강화되었다. 여기에는 반관반재야적인 전문가의 생존양상도 투영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杜預와 孔潁達의 주소학에 비판적인 시각은 『좌전』을 넘어 『周易』, 『尙書』, 『毛詩』, 『禮記』에 관한 『舊疏考正』을 저술하여 注疏學을 확대하였다. 춘추좌전학은 외견상 도리어 축소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춘추좌전』의 연구에서 축적된 예학과 의리, 그리고 춘추필법 등을 토대로 古學과 諸子學으로 연구 분야를 확장하여 ``六經皆史論``을 제출하여 경학과 제자학을 融會貫通하였다. 심지어 謠諺 地方史志 逸文이나 또한 小學, 今古文學, 陽明學, 古學, 漢學(蜀學) 등을 아울러 광대한 通學의 학술체계를 구축하였다. 그의 학술은 학문연구방법론으로 소학을 통한 實事求是的인 접근으로 微言大義의 발명을 추구하였고, 그 성격은 실제 생활에서 실용 실천 경세의 내용을 중심으로 미언대의(義理)를 회통한, ``實學的 通學``이었다. 그의 학술종지는 吳派와 환派의 장점을 겸용한 부친의 입장을 바꾸어 미언대의와 경세성을 크게 강화함으로서 환파 지향으로 전환하였다. 유육숭의 실학적 통학에 보이는 경학의 ``通經化``나 ``廣經化``, 六經皆史論, 儒家諸子同源論, 西學中源說 등은, 서구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양무운동기 이전인 19세기 중반에, 청대 考證漢學이 도달한 종점이자 중국전통학술의 최후단계였다. 이에 따르면, 경학·경전·공자의 상대화로 인해 그 지위가 격하되었고 양무운동기의 사상을 모색한 측면에서 근대 지향성도 담보하고 있었다. 왕조교체기의 인물과 사적에 대한 연구로 경세성이 제고되었다. 다만, 주자학의 학술종지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이 보이지 않고, 體用, 師儒, 의리 실용 등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과 성격을 담보하는지에 대한 견해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 것은 한계였다. 요컨대, 유육숭의 실학적 통학은 청대의 건가고증학에서 19세기말 근대 유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형태였고, 실로 유사배 국학의 기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本稿考析了十九世紀中半揚州學派劉毓崧(1818~1867)之學術,其中的主要觀點是劉文淇(1789~1854)確立了家學的繼承和發展過程,劉毓崧將家學發達到通學的規模·其內容及性格,以及淸朝考據學的發展樣相和意義.首先,儀徵劉氏家學之奠基者是劉文淇,他治學專攻於1828年通過硏究結社確定了春秋左傳學.他推進了對『春秋左氏傳舊注疏證』的硏究,刊行了『左傳舊疏考正』.他參酌淸代漢學家之注疏,把杜預之注疏反映於『五經正義』辨證,取代了漢代賈逵服虔鄭玄之注疏.再者,史志學是家學之一,構成了『揚州水道記』,『楚漢諸侯疆域志』及各種地方志的編纂.校수校勘是他生平之準職業,重視了彭叔夏『文苑榮華辨證』的體例.但硏究未完的『左傳舊注疏證』是傳承家學的遺業,批判『五經正義』的注疏學是繼承發展了家學.劉毓崧身爲優貢生但屬下層紳士,령一方面他繼承了史志學的歷史地理,而且轉換硏究了漢魏明淸交替期的歷史人物和史籍,幷闡明了春秋義理.以禮制禮學分析『左傳』的方法和硏究蓄積是源自於對春秋左傳學乃至春秋學全盤和『周易』三禮.特別是禮學是揚州學派重視的學術特徵,實學的通學之重要部分的.校수校勘是發展爲所謂活校法,擴大互校之對象,提高了實事求是的實證性,這里反映了半在野的準職業家之生存樣相.對於杜預和孔潁達之注疏學批判的視覺超越了『左傳』,針對『周易』,『尙書』,『毛詩』,『禮記』,著述了『舊疏考正』,從而擴大了注疏學.外觀上雖縮小了春秋左傳學,但以春秋左傳學的禮學,義理及春秋筆法爲基礎,擴張了古學和諸子學提出``六經皆史論``,幷融會貫通經學和諸子學,更擴展至於謠諺地方史志逸文,而且小學,今古文學,陽明學,古學(漢學蜀學),構築了廣大的通學之學術體系.其學術是在學問硏究方法上接近小學的實事求而發明微言大義,其性格是在於日常生活以實用、實踐、經世爲中心,會通微言大義的``實學的通學``.學術宗旨是代置劉文淇的立場,他是兼用吳환派之長點,這裡加上一層幷强化了微言大義和經世性,從而轉換了환派的性向.他的學術內的經學的``通經化``,``廣經化``,六經皆史論,儒家諸子同源論,西學中源說等是十九世紀中半淸代考證漢學達到的終點,是中國傳統學術的最後階段.由上可知,因經學,經傳,孔子之相對化而降低타之地位.對摸索洋務運動期的思想,兩者都保持了近代的指向性.對王朝交替期之人物和史籍硏究提高了經世性.但其中對朱子學的學術宗旨體系的批判曖昧模糊,是問題點乃至限界.總結以上,劉毓崧之實學的通學是起自淸代乾嘉考據學至十九世紀末近代儒學過渡期的形態,提供了劉師培的國學基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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