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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護法政府와의 외교관계 검토

        이재호(Lee, Jae-ho)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5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0 No.52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초기 廣東省 廣州의 護法政府에 申圭植을 特使로 파견하여 정부 승인을 받고자 외교활동을 전개한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신규식의 방문으로 호법정부의 孫文은 임시정부를 인정하고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기로 약속하였고, 손문을 계승한 蔣介石의 국민당정부도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임시정부가 호법정부에 신규식을 특사로 파견한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임시정부를 승인받는 것이고, 두 번째는 호법정부에서 태평양회의에 대표를 파견할 경우 한국 문제를 지원해달라는 것이었다. 신규식은 1921년 9월 30일 상해를 출발하여 10월 2일경 광동성 광주에 도착하였다. 광주에 도착한 신규식은 손문과 두 차례만났다. 10월 3일 신규식은 손문을 처음 만나 임시정부의 승인과 태평양 회의에서 한국 문제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손문은 이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하였다. 이어 두 번째 만남에서는 國書를 봉정하는 정식 접견이 이루어졌다. 임시정부 특사로 분주하게 활동하던 신규식은 1921년 12월 13일 상해로 귀환하였다. 신규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호법정부는 북경정부와 갈등으로 태평양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지 않았다. 또한 태평양회의에서 한국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못하였고, 한국 대표의 참석도 불가능하였다. 태평양회의에 공동 대처하기로 하자는 손문과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임시정부는 손문의 호법정부를 상대로 정부로서 인정을 받았고, 한국 청년들의 군사 인재양성 약속도 지켜졌다. 신규식의 호법정부 방문 성과는 차관교섭 실패와 태평양회의에 대한 참석 불가로 당시로서는 보잘 것 없이 여겨졌을지라도 이후 한중 관계와 독립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한국독립운동 지원을 요청할 때 손문의 뜻을 받들어 나갈 것을 강조하였고, 중국 국민당 인사들은 항일전쟁 시기 한중 양국의 우호 관계를 회고하면서 손문의 호법정부를 그 사례로 들고 있다. 특히 임시정부 요인 嚴恒燮은 손문의 호법정부가 임시정부를 승인한 것은 국제법상으로 효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혁명투쟁 과정에서 이를 계승하여 왔으며, 이는 사실상의 승인으로 볼 수 있다고 하여 호법정부의 임시정부 승인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임시정부가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한중 관계를 우호적으로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신규식과 손문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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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해임시정부의 초기 재정운영과 차관교섭 :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역할을 중심으로

        고정휴(Ko Jung-hyoo) 고려사학회 2007 한국사학보 Vol.- No.29

        상해임시정부는 국내와 국외(주로 하와이와 미주) 교민에 의존하는 재정수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1920년대 초부터 대외차관 문제를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 대상은 신생 소비에트 러시아와 중국 광주에 자리 잡고 있던 호법정부였다. 이 논문에서는 기왕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상해 임정의 초기 재정정책과 그 실태를 개관한 후, 이송만의 상해체류기(1920.12~1921.5) 이른바 기호파 내각에서 수립한 차관 구상과 이를 바탕으로 한 소비에트 러시아 및 중국 호법정부와의 차관교섭 시도를 검토하고 있다. 상해임정의 그러한 시도는 일본의 엄중한 감시와 서구 열강의 의혹에 찬 시선을 피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전말을 파악한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단편적인 몇 가지 새로운 자료(특히 러시아 측 자료)에 의거하여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하고 있다. 통합 상해임정의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이 소련의 레닌정부와 교섭하여 금화 200만 루블의 자금지원을 약속받고 그 중 60만 루블이 상해로 유입된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논저에서 검토된 바 있지만, 임시대통령 이승만과 그의 ‘신내각’의 대소 차관교섭 시도는 아직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한편 상해임정과 중국 호법정부와의 교섭에 대한 기왕의 연구들은 주로 양국 정부의 ‘승인’ 교섭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런데 상해임정의 대외차관 교섭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1921년 임정의 호법정부에의 ‘특사’ 파견이 소련 정부와의 차관교섭의 연장선상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요컨대 이 시기 임정의 대외 승인교섭은 차관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PGRK) initially relied on financial support from Korean ?migr?s, principally in Hawaii and America. Subsequently, however, starting in the early 1920s, PGRK began to consider seeking foreign financial loans in an effort to overcome its financial difficulties. The target countries from which the PGRK considered seeking loans were the newly-founded Soviet Union and China's Guangdong Government. Drawing upon previous research, this study provides a conspectus of the early PGRK's financial policies and status. This study also examines the attempts at loan negotiations with the Russian and Chinese governments, based on plans by Syngman Rhee and his new cabinet during Rhee's Shanghai stay (December 1920 through May 1921). Because of the highly secretive nature of the PGRK's work, it is not easy to gain detailed information about those efforts. Due to watchful observation by the occupying Japanese government and suspicion on the part of the Western great powers, it was necessary for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to keep its activities under wraps. However, based on some newly-found information, particularly from Russian sources, this study expands and sheds new light upon previous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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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파 박찬익의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성주현(Sung, Ju-Hyeon) 한국사학회 2010 史學硏究 Vol.- No.97

        南城 朴贊翊은 1884년 1월 2일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에서 출생하였다. 일제 강점 직후인 1911 년 2월 만주로 망명하여 중국관립학교에서 중국어를 배웠다. 그의 중국어 실력은 훗날 임시정부에서 외교활동을 전개하는데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다. 박찬익은1921 년4월 임시의정원 경기도 의원으로 임시정부에서 첫 공식 직함을 갖게 되었다. 이어 외무부 외사국장 겸 외무차장대리의 역할을 맡으면서 임시정부의 초기 외교업무를 관장하였다. 박찬익의 주요 외교활동은 대중외교였다. 광동의 호법정부의 임정 주재대표, 봉천군별 장작림과의 관계모색, 중국 국민당 요인과의 회담 둥을 통해 임시정부의 위상을 제고시켰다. 또한 재중한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외교를 전담하였던 것이다. 1930년대 초 임시정부 복귀전에는 한국독립당의 외교활동을 전담하였다.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외교업무를 지원하였다. 1932년 윤봉길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나 항주, 기강, 유주, 장사 등지를 전전하였다. 이 시기 박찬익은 임시정부의 재정을 담당하는 한편 붕괴된 통신연락망을 재구축하는 등 임시정부의 위상을 확립하는데 노력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박찬익이 1939 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정부에 복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후 박찬익은 국무위원겸 법무장, 임시의정원 의원, 무임소국무위원 등으로 임시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활동하면서 1945 년 8월 15 일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에는 재중한인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 및 귀환을 담당하는 주화단대표로 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가 환국하는데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박찬익의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임시정부 초기 외교활동, 둘째는 임시정부 복귀 후 국무위원 등 중요 요직 참여, 셋째는 해방 후 재중한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 및 귀환활동이었다. 박찬익은 1921 년 4월 첫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1948년 4월 고국에 귀환할 때까지 임시정부와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활동하였지만 대중외교를 통해 임시정부의 위상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또한 임시정부가 정부로서의 주요한 역할인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역할에도 그 책임을 다하였다. Nam Pa Park Chan-Ik was born in Paju County Juna face in January 2, 1884. he defected to Manchuria in February 1911. He studied Chinese in China government institution school. His Chinnese language skills were to take an important share Development diplomatic activities in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e worked member of the provisional National Assembly in April 1921. He represents Gyeonggi Province. And he was in charge of Foreign Affair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In particular, he was responsible diplomatic relations with the China. He was responsible for life and property of Korean people in China. He charged of diplomatic activities of the Korea Independence party. And He has supported the diplomatic activitie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0f the Republic of Korea. Yoon, bong-gil stood up against the oppressive rule of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at Shanghai in 1932.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ad to leave due this accident.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were going from Shanghai to Hangzhou, Qijiang, Liuzhou. This time, he was in charge of provisional government finances. And he installed collapse server network. This was established phase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e has come back to provisional National Assembly in 1939. He worked in provisional government as Cabinet member, Justice Minister, member of the provisional National Assembly. Korea was liberated from Japan on August 15, 1945. After the liberation, he was in charge of life, property and safe return of Korean people in China at Delegation Foreign Affairs to China(駐華代表團). His actions may be look into three in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The first, he contributed diplomatic activities in Provisional Government. The Second, he was valuable part of n Provisional Government as Cabinet member, Justice Minister, member of the provisional National Assembly. The third, after the liberation, he was in charge of life, property and safe return of Korean people in China, after all the analysis of his activitie, He led the independence movement of Korea. The especially, he was valuable role diplomatic activities in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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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회의와 신규식

        김희곤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2022 東洋學 Vol.- No.87

        Shin Kyusik is a representative figure who prepared a bridgehead for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Shanghai in the 1910s. He was fluent in Chinese and interacted with Chinese revolutionaries after stepping into the 1911 Revolution in China. His activities laid the foundation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in Shanghai.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he was sick and took a step back. Then in December 1920, when the temporary president Rhee Syngman visited Shanghai, Shin Kyusik actively took the lead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In April 1921, when the Guangdong Government of China was established, and Rhee Syngman left Shanghai in May, it was Shin Kyusik who led the political operation at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Here, a cooperative relationship was established between the two. As Rhee Syngman left without being able to recover from the chaos of injury, he needed a person to perform two tasks. The one was stability of the political situation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the other was to conduct diplomatic activities to the Guangdong Government of China to obtain approval or to establish a cooperative relationship. Moreover, Rhee Syngman, who heard the news of the Pacific Conference as soon as he arrived in the U.S., needed Shin Kyusik's performance. This is because Shin Kyusik was considered the most suitable person to draw cooperation with the Guangdong Government of China in the Pacific Conference. He asked for two things on the spot. One is to approve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and the other is to jointly respond to the Pacific Conference. Sun Wen(孫文) agreed with this, and began to subsidize the cost of staying as diplomats from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allowed them to stay in Guangdong. In addition, although there are some limitations in form, the Guangdong Government of China actually approved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This was an achievement of Shin Kyusik’s diplomatic activities. However, the Pacific Conference eventually turned a blind eye to Korean issues. When the U.S. also invited Northern Government of China, the representative of the Guangdong Government of China refused to participate in the Pacific Conference and turned around. Therefore, the Korean problem was not selected as a topic at all. The aftermath was fierce. Confusion and conflict around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which had slowed down for a while, were reenacted and intensified again. As a result, Shin Kyusik who had usually suffered from illness, rapidly weakened and died. His diplomatic activities against the Guangdong Government of China were the last winning move. He cried out that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should be saved until the moment he took his last breath. That was the reason why the Chinese newspaper evaluated his death as a “Martyrdom for country.” 신규식은 1910년대에 상해에 한국 독립운동의 교두보를 마련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신해혁명에 발을디딘 뒤로 중국 혁명인사들과 교류하였다. 그의 활동은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질 수 있는 토대를만들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 뒤, 그는 몸이 아파 한 발 물러나 있었다. 그러다가 1920년 12월 임시대통령이승만이 상해를 방문하자, 신규식은 다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역으로 적극 나섰다. 1921년 4월 광동에서호법정부가 세워지고, 5월에 이승만이 상해를 떠나 하와이로 향하게 되면서, 정국 운영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신규식이었다. 여기에서 두 사람 사이에 협력관계가 성립되었다. 이승만이 상해의 혼란 정국을 수습하지 못한 채 떠나면서, 그에게는 두 가지 업무를 수행해낼 인물이 필요했다. 정국 안정은 말할 것도 없고, 마침 세워진 광동정부로부터 외교활동을 펼쳐 승인받거나 협력관계를 맺는것이 주요 과제였다. 더구나 미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듣게 된 태평양회의 개최 소식에 이승만으로서는 신규식의 활약이 더욱 필요했다. 이승만에게는 광동정부로부터 태평양회의에 대한 협조를 이끌어내는 데 신규식이가장 적합한 인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미국이 태평양회의에 광동정부 대표 파견을 요청하자, 신규식은 이들 대표와 공동대응책을 만들어낸다면 외교활동에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계산했다. 그래서 그는 국무총리와 법무·외무총장을 겸직하면서, 한편으로는 이승만에게 필요한 서류와 자료를 만들어 보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광동정부로 가서 손문을 만나 도움을 청했다. 신규식은 그 자리에서 두 가지를 요구했다. 하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 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태평양회의에 공동대응하자는 것이다. 손문은 이에 찬성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관이 광동에 머물게 허락하면서 체류비도 보조해 주기 시작했다. 또한 손문은 형식적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것은 신규식의 외교가 거둔 성과였다. 하지만 태평양회의는 끝내 한국문제를 외면하였다. 미국이 태평양회의에 중국 북방정부도 참가시키자, 광동정부 대표는 참가를 거부하고 돌아섰다. 따라서 한국문제는 아예 주제로 선정되지도 못했다. 그 후폭풍은 매섭게 몰아쳤다. 잠시 주춤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변의 혼선과 갈등은 다시 재연되고 격렬해졌다. 이에 평소병에 시달리던 신규식은 급격하게 쇠약해져 순국하고 말았다. 그가 펼친 광동 호법정부와의 외교활동은 마지막으로 던진 승부수였다.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살려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중국신문이 그의 죽음을 ‘자결순국’으로 평가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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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1독립운동 전후 쑨원(孫文)의 한국 인식 연구

        김승일(Kim Seung-Il)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연구소 201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0 No.37

        3 · 1독립운동 성격의 비폭력성에 대해서는 역사적 측면에서만 검토되었지, 법적인 검토는 안 이루어졌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법률적 차원에서의 검토 결과와 역사연구의 결과가 연결되어지는 새로운 연구방법론이 대두되었다. 즉 3 · 1독립운동에 참가하여 체포된 수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내란죄 및 소요죄, 그렇지 않으면 구한국의 법률인 보안법과 출판법, 총독부의 정치범죄처형령 등의 법에 적용되어 구속되었었는데, 최종심리가 진행된 고등법원에 이르면 이들 법을 그들에게 적용하기가 곤란하여 당시 판결을 내려야 하는 담당자들이 대단히 곤란해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결과 당시 실무자들이 적용한 법률과 그 결과에 대한 재검토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에 의해서 새롭게 3 · 1독립운동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각을 통해서 여심→지방법원 판결→복심법원 판결→고등법원 판결을 계통적으로 정리하면 3 · 1독립운동의 비폭력적 성격을 보다 명확하게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어, 일본기독교대학의 사사가와 노리가츠(笹川紀勝) 교수와 필자가 이들 판결문을 수집하고 정리하기에 이르러, 『3 · 1독립운동 판결정선』이라는 책을 출간하였고,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나머지 판결문을 찾아서 정리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판결문을 중심으로 3 · 1독립운동의 성격에 대해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3 · 1독립운동을 옆에서 눈여겨 본 쑨원이 한민족의 역량을 재평가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해가는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본 논문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쑨원의 한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 상황을 3 · 1독립운동이 끝나가는 무렵인 1920년대 전반기를 전후하여 비교 연구한 것이다. 이러한 검증을 바탕으로 향후에는 3 · 1독립운동이 쑨원의 삼민주의 사상 정립과 연아용공 정책에 미친 영향, 그리고 3 · 1독립운동을 기점으로 쑨원의 일본관 변화의 추세도 추적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문에서 살펴본 바처럼, 쑨원은 초기에는 한국을 중화주의적 영토관념에서 보아왔고, 그러한 관점하에서 본 한국의 식민지화는 중국의 것을 일본이 빼앗아 갔다는 강대국 간의 이해관계에만 머물러 있었기에, 초기한국 독립운동당인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무창혁명 과정에서 보여진 한국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본인이 이끌고 있던 호법정부의 미약함에 의한 의지처의 탐색, 그리고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따른 친일적 감정의 쇠퇴 등에 따라 서서히 한국독립운동가들과의 교류가 본격화 하게 됐고, 급기야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주고받으며 약소국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3 · 1독립운동과 5 · 4운동을 통한 민중의 역량을 보면서 중국의 민족모순을 갈파하게 되었고, 그 결과 지나청년과 한국인청년단과 쑨원 3자가 연결되게 되었으며, 결국 조선의 독립운동과 쑨원의 동지적 관계가 굳건하게 되어져 갔던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조선 망국의 비극을 교훈으로 삼으며 일본의 침략적 팽창정책을 전환하도록 요구해 나가게 되었던 것이니, 쑨원은 대일투쟁에 온 힘을 기울이던 한국의 현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고, 그 결과 한국 독립운동에 대해 열심히 원조하게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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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米國의 對日占領政策과 在日韓人의 経濟的 權利

        金太基(Kim, Tae-Ki) 한일민족문제학회 2012 한일민족문제연구 Vol.23 No.-

        この硏究は(1)米國政府の解放後在日韓人に對する保護および生活に關する経濟政策, (2)SCAPの在日韓人の経濟的な權利(持參金, 雇用, 特別配給, 生活保護法, 財産稅など)に對する政策について考察した。 米國政府の在日韓人経濟政策において, 日本の植民地支配の犠牲者としての在日韓人に對する経濟的配慮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ない。米國政府の政策的な立場が明確であったならば, 在日韓人の経濟的な權利に對するSCAPの態度も変わったはずである。しかし, 米國政府の在日韓人に對する経濟政策は在日韓人に決して友好的なものではなかった。 結局, SCAPが在日韓人を経濟的にどのように認識したかということが重要であるが, 最も重要な担当部局であるESSの担当者は, 在日韓人の植民地支配からの解放がどのような意味を持っていたのか理解しようとしなかった。むしろ在日韓人は日本の侵略戰爭に積極的に協力し, 富を蓄積したという認識を持っていたし, 在日韓人は植民地支配の犠牲者ではなく, 日本人と同じ侵略者であり, 解放された後, 自分たちの立場を急に変えた裏切り者と見なした。解放初期の無秩序な狀況の中で, 敗戰に失望に陷っている日本人とは對照的に解放を喜んで, 日本社會から解放された民族として, 自由に行動し, 場合によっては, 日本の公權力さえ無視する在日韓人をSCAPは否定的に見ていた。 SCAPに在日韓人は日本経濟にとって負担になる存在であり, 経濟的に特に配慮する価値のない存在であった。在日韓人という解放民族が長い間日本の植民地支配を受けてきた被害者であるという認識と政策が彼らに完全に欠けていたため, SCAPは現實的な立場のみに立って, 日本を統治する支配者, すなわち日本政府を代弁する統治者の立場から在日韓人問題を見, 経濟的な權利についてもそのような立場で對處した。彼らの政策のの基準は日本の政治, 経濟, 社會秩序の維持であり, 反共という政策であった。 これらのSCAPの方針が反映されて, 在日韓人の持參金は制限され, 雇用は差別され, 特別配給も受けられなかった。生活保護法も限られた人々のみ對象となり, 財産稅を納付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結局, 在日韓人の生活は改善されず, 日本社會の中で安定した生計手段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結局多くの在日韓人は生計のため占領後も違法な商行爲をした。日本政府はこれを彈壓し, 在日韓人はこれに抵抗した。 This paper is to review (1) the U.S. government’s basic recognition and policy about the economical problems of Koreans in Japan after World War Ⅱ and (2) SCAP(General Headquarters of the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s policies concerning the economical rights(Property Individuals to carry on Living Japan, Employment Supplementary, Ration, Livelihood Protection Law, Capital Levy etc.)of Koreans in Japan during Occupation Period. First of all, the policies of U.S government over economical problems of Koreans in Japan was limited to only in basic protection and support. In addition, there were no consideration of economical rights of Koreans in Japan who were liberalized after Japan’s colonization. U.S. government’s economical policy to Koreans in Japan was not amicable at all to Koreans in Japan. If U.S. government had ordered specific direct on the employment and public assistance toward Koreans in Japan, SCAP would have handled economical rights of Koreans in Japan based on U.S. government’s keynote. Based on no specific direct, SCAP in the end, decided economical rights of Koreans in Japan based on their own judgement. After all, how SCAP perceive Koreans in Japan and economical rights of Koreans in Japan became important. Related to economical rights of Koreans in Japan, the most profound Section ESS(Economic and Scientific Section), never tried to understand the existence of Koreans in Japan who were liberated from colonization of Japan. Rather, they had a prejudice that Koreans in Japan positively cooperated Japan’s invading war and accumulated wealth, that they were not the victim of colonization, that they were the same invader as Japan, and regarded them as apostates who changed their footings post liberation. SCAP looked negatively at Koreans in Japan who were congratulating the liberation and who, as a indep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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