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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세기 고구려의 몽촌토성 점유 양상에 관한 연구

        홍승연(Seungyeon Hong) 한국상고사학회 2024 한국상고사학보 Vol.123 No.123

        본고는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후 고구려가 어떠한 방식으로 몽촌토성을 점유하였는지 알아보 기 위해 작성되었다. 몽촌토성은 한성기 백제의 중심지로 활용되었으나, 고구려의 남진정책 하에 서 고구려군의 중부지방 지배를 위한 군사 거점으로 기능했다고 알려졌다. 최근 서울대학교박물관 의 1980년대 발굴조사 재보고 성과와 한성백제박물관의 북문지 권역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고구려의 몽촌토성 내부 점유 양상을 구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었다. 고구려의 몽촌토성 점유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 몽촌토성 동남·서남지구에서 토기 밀도의 공간 분포를 살펴본 후, 유물과 유구의 세부 현황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는 백제의 주요 시설 일부를 선택적으로 재활용함과 동시에 일부 공간을 새롭게 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백제 의 원통형·플라스크형 저장공을 재활용에 동물뼈나 철제 무기, 토기 등을 매납한 정황이 파악된다. 또한, 몽촌토성 내에 공간을 구획하고 도로, 집수지, 건물지, 저장시설 등을 다양하게 조성한 양상은 고구려의 전략적 점유 계획을 암시한다. 남쪽 고지대와 북문지 일원에서 출토된 철제 무기 류와 농기구를 통해 주둔 기간동안의 농사 및 군사 활동을 추정해볼 수 있으며, 취사·배식용 토 기와 더불어 원통형삼족기·광구장경사이옹 등 특수 토기 기종도 함께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남진을 위한 거점으로 몽촌토성을 전략적으로 개발하며 장기간 주둔하였다. 고구려군 이 몽촌토성을 사용한 주요 시간대를 파악하고자 성내 고구려 수혈과 도로에서 얻어진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치를 검토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는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몽촌토성 을 점유했을 가능성이 크며, 일정 기간동안은 인접한 한강 유역 보루군과 함께 남진정책을 위한 주요 군사 거점으로 기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processs of regeneration of Mongchontoseong by Goguryeo, following Baekje’s relocation of its capital to Ungjin. Drawing upon the artifacts from 1980s excavation and the recent fieldwork findings, this study explores the spatial and temporal reorganization in the Mongchontoseong after 5th century AD. The spatial distribution of the pottery from the southern part of the inner Mongchontoseong site was first explored. Goguryeo strategically reused places previously built by Baekje, including storage, ponds, and pits, and also altered the built environment. The features, iron weapons, farming tools, and pottery type also reveal the diverse aspects of the long-term occupation of Goguryeo, taking the roles of domestic housing, rituals, agricultural activities, and storage. The radiocarbon dating results from the pits and roadways show Goguryeo’s active engagement in infrastructure reconstruction from the late 5th century to the middle of the 6th century, predating the reoccupation by the allied forces of Baekje and Silla in 550 AD. The material evidence reveals Goguryeo’s prolonged regeneration of the site for the southward expansion, as sociopolitical strategies in the context of warfare in the Korean Peninsula during 5-6th century AD.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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