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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택 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 1985 東洋學國際學術會議論文集 Vol.3 No.1
연암 박지원은 중국을 다녀와서 그 견문을 엮어 일부의 저서를 남겼다. '열하일기'가 그것이다. 그는 이것을 탈고하고서 자신의 구고들을 폐기했다고 한다. 열하일기만 있으면 다른 글은 족히 후세에 전할 필요가 없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이 열하일기는 발표된 당초부터 문제작으로 파문을 일으킨바 있었거니와 지금은 '실학의 전서'로 중요시되고 있다. 국왕 정조가 소위 문체반정의 정책을 펼 당시에 직접 교시한데서 보이듯 문풍이 바뀌어 타락한 원인을 전적으로 연암에게 돌려 문책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건 열하일기는 국왕까지 '열람'하였다고 할 정도로 독서층에 비상한 관심과 흥미를 끌었음이 확실하다. 이 영향은 문풍으로 반영되어 연암체라는 하나의 독특한 문체를 성립시키기에 이르렀다. 결국 열하일기는 문체반정에 비화되어 마침내 불온한 서적으로 낙인찍혀 이조 체제 하에서 끝까지 금서처럼 취급받았다. 열하일기는 근대적 시각에 의해 인식이 확실히 달라졌다. 그런데 지금 대개 연암은 북학파이며 열하일기는 북학론을 대변하는 저서라고들 말한다. 이것은 오늘날 일반화된 상식이다. 북학론적인 인식이 연암의 진의와 고심처를 참으로 꿰뚫어 본 것일까? 선진기술을 배우고 도입하자는 이런 북학론으로 연암은 자기 시대의 고민을 모두 해결할 수 있다고 신념하였을까? 북학론적 인식 역시 일면적 타당성은 인정되나 중대한 오류를 내포한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