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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상공회의소연합의 설립과 초기 활동에 관한 역사적 고찰(1927-1947)

        신민하(Shin, Min-Ha) 한국인도학회 2016 印度硏究 Vol.21 No.1

        본 연구는 영국 식민정부와 인도국민회의가 자리를 바꾸는 역사적 과도기에 해당하는 1927-1947년 기간을 중심으로 인도상공회의소연합의 설립과 초기 활동에 대해 고찰하였다. 이 기간 동안 인도상공회의소연합은 정치적 · 경제적 측면에서 다양한 활동을 수행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보여준 입장과 태도는 정치와 경제에 대한 정교한 인식과 전략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즉 인도상공회의소연합은 인도 자본가들의 기득권과 이익을 대변하는 경제단체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식민정부와 인도국민회의 사이에서 균형적인 입장을 유지하면서 두 주체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인도상공회의소연합이 이 기간 동안 달성한 목표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인도국민회의가 주도하는 민족주의운동을 지원함으로써 자신들이 협소한 계급적 이익이 아니라 국익을 위해 노력하는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였다. 둘째, 인도국민회의로부터 얻어낸 정치적 지원을 통해 식민정부로부터 자신들의 요구에 대한 보다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셋째,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토착 상공업 부문의 경제적 이권을 수호하는 경제단체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해 나갔다. 결론적으로 인도상공회의소연합은 민족주의운동과 제국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사회주의 세력이 부상하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정치와 경제에 대한 정교한 인식과 전략을 가지고 적절히 대응하면서 경제단체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해 나갔으며, 이 과정에서 ‘계급’으로서의 지위를 스스로 획득하였다. This study attempts to describe and analyze the process of the emergence of the Federation of Indian Chambers of Commerce and Industry (FICCI) and its initial activities during the period of 1927 to 1947. In this transitional period from colonialism to Independence, FICCI had been primarily concerned with both political and economic issues of the time, and its comprehensive activities were based on politically conscious recognition and strategy. That is to say, while maintaining its primary identity as a business organization pursuing economic profits, FICCI also conceived its role as a mediator between the Indian National Congress and the British colonial government. As a result, FICCI had attained three important objects. First, while supporting the freedom struggle by financial assistance either directly to the Indian National Congress or indirectly to its leaders, FICCI had been seen as speaking in the interests of the Indian nation as a whole and not as pursuing their narrow class interests or putting class before the nation. Secondly, political support from the Indian National Congress and its leaders had granted FICCI a bargaining power in the negotiation process with the colonial government. Lastly, in the process of attaining the above two objects, FICCI could strengthen its identity as a guardian organization protecting the interests of the Indian business as a whole. Given this background, despite the growing popularity and strength of the Left stream within the nationalist movement, no programme was adopted that would involve the overthrow of capitalism. Consequently, FICCI had emerged as a politically conscious organization representing the interests of all-India business class. It reflects the maturity with which organized Indian business conducted for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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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파키스탄 분립 과정에 나타난 무슬림 진영의 경제적 인식: 전인도무슬림상공회의소연합의 설립과 초창기 활동을 중심으로 1940-1947

        신민하(Shin, Minha) 한국아시아학회 2021 아시아연구 Vol.24 No.4

        본 연구에서는 1940-1947년 사이 인도-파키스탄 분립과정에서 무슬림 진영의 정치 지도자들과 대자본가들이 어떠한 경제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 전인도무슬림상공회의소연합의 설립 과정과 초창기 활동을 통해 살펴보았다. 진나를 중심으로 한 전인도무슬림연맹은 파키스탄을 위한 경제적 프로그램을 수립하는데 있어 전문가도, 충분한 시간도 갖지 못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무슬림 대자본가들을 결집하여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신생 국가 건설을 위한 예비 작업, 특히 경제 부문에 있어서의 실질적 준비 단계로 삼고자 하였다. 인도의 무슬림 자본가들은 진나와 전인도무슬림연맹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며 협조하였다. 그들은 힌두 자본가들과의 경쟁에서 뒤쳐진 것을 인식하고 있었고, 향후 인도국민회의와 비무슬림 자본가들이 결탁할 경우 인도에서 무슬림의 입지가 더욱 좁아질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무슬림 자본가들은 인도가 힌두 자본가들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하듯이 파키스탄은 무슬림 자본가들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진나와 무슬림 대자본가들은 인도 무슬림들이 처한 경제적 후진성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인도 무슬림 자본가들의 단합을 이루는데 반드시 필요한 전국 규모의 경제단체로서 전인도무슬림상공회의소연합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 조직은 파키스탄 분립운동의 막바지에 중요한 동력을 제공했으며, 특히 인도 무슬림 자본가들 사이에서 경제민족주의적 감정을 더욱 견고하게 조직화하여 파키스탄 분립 요구를 더욱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This study focused on the economic perceptions of Muslim political leaders and capitalists on the partition between India and Pakistan through the founding process and early activities of the Federation of Muslim Chamber of Commerce and Industry of India. Jinnah and the Muslim League sought to bring together Muslim-capitalists to form an economic network in order to overcome the lack of time for building a new nation, especially as a practical preparation step in the economic sector for Pakistan. Muslim capitalists in India cooperated with Jinna and the Muslim League with full support. They were aware of falling behind in competition with Hindu capitalists and feared that Muslim capitalists" positions in India would become narrower if the Indian National Congress and non-Muslim capitalists colluded in the future. Muslim capitalists expected Pakistan to offer Muslim capitalists opportunities, just as India offers many opportunities for Hindu capitalists. Jinnah and Muslim big capitalists have pushed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the Federation of Muslim Chamber of Commerce and Industry of India as a nationwide economic organization that is essential for the unity of Indian Muslim capitalists. This did not have a direct political effect on its initial activities, but provided a significant driving force to the end of the separation movement for Pakistan. In particular, it is significant that the establishment of the Federation had organized sentiment among Indian Muslim capitalists, making Pakistan"s somewhat unclear and ambiguous demands more tangible.

      • KCI등재

        국장(國章) 제정과정에서 나타나는 인도의 국가정체성 형성에 대한 연구: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의 국가비전을 중심으로

        신민하(Shin, Minha) 한국아시아학회 2021 아시아연구 Vol.24 No.1

        본 연구에서는 1947년부터 1950년 사이 진행된 인도 국장 제정과 관련된 일련의 과정과 함의를 살펴보았다. 1950년 1월 26일 공식적으로 채택된 인도의 국장은 1905년 사르나트에서 출토된 아쇼까 황제가 세운 석주의 주두를 장식하고 있던 네 마리 사자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인도의 국장은 독립 당시 인도 국가 건설 과정에서 초대 총리 네루의 주도로 채택되었다. 국장의 제정은 네루의 단독 결정에 가까웠는데 그 배경에는 아쇼까에 대한 네루의 오랜 기간 지속된 관심과 애정이 투영된 측면이 컸다. 네루에게 아쇼까와 그의 통치방식은 신생독립국 인도 정부가 해야만 하는 일들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것이었다. 네루는 독립 당시 인도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였던 국가 통합을 위한 모든 해답을 아쇼까의 통치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인도-파키스탄의 분립과 그에 따른 난민 유입 문제로 인한 종교갈등이 지속되고 있던 상황에서 아쇼까의 여러 가르침들 가운데 네루가 독립에 즈음하여 가장 특별하게 공감했던 부분은 세속주의와 관련된 것이었다. 네루는 국기와 국장에 아쇼까의 상징물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당시 극우 성향의 힌두들이 세속주의와 다원주의적 국가 건설에 가장 큰 위협으로 성장하고 있던 상황에서 어떤 특정 종교로부터도 자유로운 세속주의 국가 인도를 상징하기 위한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네루는 독립 인도가 처한 또 다른 중요한 문제로 국제 관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네루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본격화하기 시작한 냉전체제하에서 인도가 두 강대국 진영으로부터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독립된 주권 국가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국제관계를 형성하기를 희망하였다. 이를 위해 네루는 독립 이전부터 비동맹 개념을 인도 외교정책의 기본원리로 상정하였으며, 인도가 국제사회에서 평화유지군 또는 평화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찾은 것이 평화, 비폭력, 관용의 메시지를 세계에 전파하고자 했던 아쇼까 시대의 국제주의적 면모였다. 독립 인도가 지향한 국가정체성을 가장 시각적으로 집약하고 있는 국장은 아쇼까 시대로 대표되는 고대의 이상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도 국민들의 삶 모든 영역에서 평등과 사회정의를 수호하겠다는 일종의 서약이었으며, 세계 평화의 중재자가 되겠다는 네루의 염원을 담은 아쇼까 석주의 20세기 버전으로 볼 수 있다. This paper focused on the processes and implications related to the establishment of the national emblem of India from 1947 to 1950. The motif of the national emblem, formally adopted on 26 January 1950, was based on the lions of capital adorning the stone pillar erected by Emperor Ashoka. Newly independent India"s national symbols, such as national flag, national anthem, national emblem, were adopted under the leadership of the first Prime Minister, Nehru. Among others, the enactment of the national emblem was close to Nehru"s sole decision and it was based on Nehru"s long-standing interest and affection for Ashoka. For Nehru, Ashoka and his governance were not only suggesting the direction of the newly independent government of India but also a constant reminder of what it had to do. Nehru saw that all the answers to India"s biggest problem at the time of independence could be found in Ashoka"s rule. In particular, at a time when religious conflicts continued due to the separation of India-Pakistan and the subsequent influx of refugees, the most special part of Ashoka"s teachings for Nehru was related to secularism. Nehru used Ashoka"s symbol both for the national flag and emblem, which was intended to symbolize India’s future goal as a secular and pluralistic state free from any particular religion. Nehru, meanwhile, was keenly interested in international relations, another important issue facing independent India. Under the Cold War which began in earnest after World War II, Nehru hoped that India would maintain a certain distance from the two power blocs and form an independent international relations in the world politics. To this end, Nehru introduced the concept of non-alliance as the basic principle of India’s foreign policy even before independence, and declared that India would serve as a peacekeeper or peacemaker in the international community. The basis for this argument was an internationalist aspect of the Ashoka eara, not only based on the message of non-violence, peace and tolerance, but also sought to spread the messages to the world. The most visually integrating the identity of the state directed by independent India was to reaffirm the ancient ideals of peace, non-violence, and tolerance. It was a kind of pledge to protect equality and social justice in all areas of the lives of the Indian people, and can be seen as a 20th-century version of Ashoka pillar, which contains Nehru"s desire to be a peacemaker for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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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대 초반 영령 인도의 신수도 입지 선정 과정에 내재된 정치적 함의에 관한 연구

        신민하(Shin, Minha) 호서사학회 2017 역사와 담론 Vol.0 No.83

        본 연구에서는 1912년 3월 설립된 델리도시계획위원회의 설립과 활동을 중심으로 영령 인도의 신수도 입지 선정 과정과 그 속에 내재된 식민정부의 정치적 의도에 대해 고찰하였다. 1911년 12월 12일 캘커타에서 델리로의 수도 이전 결정 발표는 벵갈분할령의 시행 및 철회를 계기로 표출되기 시작한 인도 민족주의 진영의 격앙된 반영(反英)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영국이 인도에서 물러날 의지가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목적에서 급박하게 결정된 사안이었다. 따라서 수도 이전 및 도시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생략되어 있었다. 이에 식민정부는 수도 이전 결정 발표 직후부터 당대 최고의 도시계획 전문가들로 구성된 델리도시계획위원회의 설립을 본국 인도부에 요청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설립된 델리도시계획위원회는 두 차례에 걸친 인도 현지조사를 통해 당시까지 황무지에 가깝던 샤자하나바드 남서쪽 지역을 신수도 입지로 선정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식민정부에 제출하였다. 그런데 본 연구에서 델리도시계획위원회의 설립 및 활동 과정을 면밀히 살펴본 바에 따르면 델리도시계획위원회 보고서의 실질적인 작성과정에 식민정부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식민정부는 위생과 건강, 토지 확보라는 표면적인 이유 뒤에 내재된 중요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식민정부는 과거와 같은 통치 방식으로는 급격히 성장하고 있던 인도 민족주의 진영을 감당하는데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인도 민족주의 진영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요소들을 최대한 피하는 동시에 대영제국의 우월한 근대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초근대적 도시 건설을 위해 샤자하나바드 남서쪽 지역을 수도 입지로 선정함으로써 실추된 정치적 위상을 복원하고 통치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process of selecting the site for the new capital of India during the early 1910s and its political implications. In the year of 1911, the Government of India decided the transfer of capital from Calcutta to Delhi to display firm commitment to British rule in India while appeasing the fiery sentiment of anti-British colonialism. However, the Government of India did not have a specific plan regarding the transfer of the colonial capital as well as town plan. Consequently, the Government of India began to pressing the Secretary of State for India in London to locate the best experts to serve on the Delhi Town Planning Committee (DTPC). After surveying the potential sites in Delhi for the new imperial capital, DTPC selected the area to the south of Shahjahanabad as the building site for new imperial capital. It should be noted here that the Government of India had a powerful but invisible influence in the process of selecting the building site for new capital by the DTPC and also had objectives similar to the decision of the transfer of the colonial capital from Calcutta to Delhi. Although the Government of India, thanking to the official reports of the DTPC, emphasized the need for sanitary and room for future expansion as major reasons for the selection of the area to the south of Shahjahanabad, this article suggests that its aim was also to display the British commitment to colonial rule in India while appeasing the Indian nationalist sentiment of anti-British coloni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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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國歌) 제정과정에서 나타나는 인도의 국가 정체성 형성에 관한 고찰

        신민하(Shin, Min-Ha) 한국인도학회 2020 印度硏究 Vol.25 No.1

        본 연구에서는 1905년부터 195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인도의 국가 제정과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살펴보았다. 1950년 1월 24일 인도 제헌의회에서 채택된 인도 국가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지은 자나가나마나이다. 그런데 인도에서 국가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1905년부터 독립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인도 대중들 사이에서 국가처럼 받아들여졌던 노래는 반데 마따람이다. 반데 마따람은 벵갈분할령에 반대하는 극단주의 성향의 힌두 엘리트들이 벵갈분할령으로 촉발된 민족주의운동에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1930년대까지 인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노래가 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부터 무슬림 진영에서는 반데 마따람 제창에 대한 반대 입장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무슬림들은 반데 마따람의 기원과 내용이 반무슬림 정서를 지니고 있으며, 이를 국가로 제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도국민회의는 무슬림들을 의도적으로 차별하며 인도를 힌두 국가로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인도국민회의는 무슬림 진영의 격앙된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힌두와 무슬림 사이의 감정은 1940년대 접어들어 더욱 악화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독립 인도의 초대 총리가 된 네루는 독립 직후부터 반데 마따람은 국가로서 부적합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네루에게 국가는 인도 국내외 행사에서 악단이 연주하기 쉬운 노래여야만 했고 인도의 모든 집단들이 반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어야만 했다. 세속주의를 독립 인도의 가장 중요한 국가 정체성으로 상정하고 있던 네루는 독립 직후부터 국가 제정과정에 깊숙이 관여하여 자나가나마나를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네루는 다인종, 다언어, 다종교 사회인 인도에서 국가 상징으로 사용될 노래는 다양성 속의 통일성에 기여해야만 하며, 인도 국민들이 지켜나가야 할 세속주의적 의무에 대한 간곡한 권유를 상징하는 것이어야만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에 비추어 볼 때 1940년대까지 커뮤널리즘과 연관되면서 호전성과 배타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게 된 반데 마따람은 국가로 제정하기에는 부적합한 것이었다. 반면 자나가나마나는 음악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그 내용의 측면에서 이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데 마따람에 국가에 준하는 지위가 부여되었는데, 이는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요구를 최대한 포용하고자 한 네루의 정치적 결단과 독립 인도가 추구하는 세속주의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이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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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년 영령(英領) 인도의 수도이전에 관한 연구

        신민하(Shin, Min-Ha)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도연구소 2016 남아시아연구 Vol.22 No.2

        본 연구에서는 1911년 영국 식민정부가 140여 년간 수도로 삼았던 캘커타에서 델리로 수도이전을 결정하게 된 배경과 논의의 전개과정에 대해 고찰하였다. 식민정부는 거대한 면적과 인구를 가진 벵갈 지역의 행정적 효율성 제고를 목적으로 1905년 벵갈분할령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그 근본적인 배경에는 당시 캘커타 지역을 중심으로 급부상하고 있던 벵갈리 힌두들이 주도하는 민족주의운동의 기세를 꺾어 놓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식민정부는 벵갈분할령 시행을 통해 무슬림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행정구역을 신설하여 벵갈 지역 힌두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분쇄하는 분리통치의 이상적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이미 성숙해 있던 벵갈리 힌두들을 주축으로 한 인도국민회의는 벵갈분할령 시행의 정치적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즉각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하였다. 벵갈분할령에 대한 초창기의 온건적 성향의 대응방식은 상이한 정치의식을 가진 집단과 그들이 설립한 조직들의 등장으로 인하여 점차 급진적•폭력적 성향을 동반하기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고조되기 시작한 힌두-무슬림 갈등과 그에 따른 종교폭동을 수반하면서 식민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반영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식민정부는 사태해결을 위한 대안으로써 벵갈분할령의 철회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단독으로 시행될 경우 식민정부의 실정(失政)을 인정하는 것이 되며, 더 나아가 인도 민족주의 진영으로부터 정치적 굴욕으로 비화될 가능성을 고려하여 고도(古都) 델리로의 수도이전을 함께 결정하였다. 이를 통해 식민정부는 인도 민족주의 진영의 격앙된 반영(反英) 감정을 누그러뜨림과 동시에 벵갈분할령 철회가 불러 올 국내외로부터의 정치적 굴욕을 최소화하고, 인도에서 물러날 의지가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식민정부의 이러한 정치적 의도와 달리 벵갈분할령의 철회와 수도이전 결정은 영국 제국주의와 인도 민족주의 진영의 전세(戰勢)가 명백하게 역전되는 분수령이 되었다. This article is to examine the background of the decision-making process for the transfer of the colonial capital from Calcutta to Delhi and the process of discussion on the subject. In the year of 1905, the Government of India decided to partition Bengal into two provinces primarily for administrative reasons. However, its fundamental purpose was aiming at the growing solidarity of the Bengali-speaking hindu people in the area, whose feelings and sentiments of nationalism was rapidly growing. For this, the Government of India partitioned the province into two. In the population structure of the new province of East Bengal, Muslims were in majority and the capital of this province was Dacca. Against this measure, there was a fierce agitation in the country, especially among Bengali hindus. They managed to win the nationalistic emotions of the Bengal area on their side with the new concepts came to be formulated, Swadeshi or Boycott movement. However, the political situation in the country was going from bad to worse with the emergence of Extremist and Terrorist activists. In addition, Hindu-Muslim communalism attended with violence was also born. The Government of India had ultimately to revise its decision in 1911 but could not escape from its consequences. Accordingly, the transfer of the colonial capital from Calcutta to Delhi was decided as an additional device to appease Indian people’s. The government expected that if the revision of the partition of Bengal was solely decided, it would be struck at most vulnerable point by the Indian nationalist leaders, mainly Bengali speaking hindu people. Accordingly, with the decision of the transfer of colonial capital, while appeasing the fiery sentiment of anti-British colonialism, they wanted to show their firm faith not to give up British rule in India. However, against their expectations, the decision to revise the partition of Bengal and to transfer of the colonial capital from Calcutta to Delhi marks a turning point in the history of British imperialism as well as Indian nation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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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대 초반 영령 인도의 신수도 뉴델리 도시계획 수립 과정에서 나타나는 식민지 근대성에 대한 고찰

        신민하(Shin, Min-Ha) 한국인도학회 2019 印度硏究 Vol.24 No.1

        본 연구에서는 1910년대 초반 영령 인도의 신수도 건설을 위한 도시계획 수립 과정에서 나타나는 식민지 근대성에 대해 고찰하였다. 본 연구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영령 인도의 새로운 수도 뉴델리 건설을 위해 작성된 도시계획안은 표면적으로 향후 통치 과정에서 인도인과의 협력을 지향하는 새로운 방향성의 일환으로, ‘평화로운 지배’와 ‘위엄 있는 통치’라는 기치 아래 서구의 합리성과 과학에 기반을 둔 ‘초근대적 도시’ 건설을 위한 계획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영국 식민정부는 도시계획을 통하여 대영제국과 인도 사이에 지배-피지배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기존 델리와 유적들로 대표되는 인도의 역사를 신수도 도시계획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접목하고자 시도하였다. 먼저, 영국 식민정부는 기존 델리와 역사적 유적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라이씨나 언덕을 총독 관저 입지로 선정하여, 영국을 인도의 오랜 역사에서 명멸했던 수많은 제국들 중에서 최종 승자로 등극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영국 식민정부는 무갈제국의 역사와 전통을 보존하고 있는 올드델리 지역을 ‘무질서’와 ‘혼란’의 대명사로 규정함과 동시에, 그러한 올드델리 바로 옆에 기하학적으로 균형 잡힌 도로망, 쾌적한 공원, 정비된 상하수도 시설, 각종 여가 활동 시설이 완비된 ‘초근대적 도시’를 표방하는 뉴델리를 건설함으로써 영국의 합리성과 과학적 우수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고자 하였다. 이것은 영국(지배자)과 인도(피지배자)의 차이점과 우열을 극대화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의 발현에 다름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영국의 인도 지배를 통틀어 가장 엄격한 방식으로 인종과 계급에 근거한 거주지 분리 정책을 적용하였는데, 이 또한 도시 공간 속에 영국이 지향하는 권력구조를 각인 시키는 한 방법이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도시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인도인들의 의견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는 사실이다.

      • KCI등재

        1910년대 초반 뉴델리 식민정부 건물 건축양식 선정과정에 내재된 정치적 함의에 관한 연구

        신민하(Shin, Min-Ha) 한국인도학회 2018 印度硏究 Vol.23 No.2

        본 연구는 1910년대 초반 뉴델리 건설에 적용될 건축양식 선정을 둘러싸고 진행된 논쟁과 그 정치적 함의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1911년 12월 12일 델리에서 개최된 즉위식에 직접 참석한 영국 국왕 조지 5세는 캘커타에서 델리로의 수도 이전 계획을 전격 발표하였다. 수도 이전 결정은 캘커타를 중심으로 벵갈 전 지역에서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던 반영(反英) 운동의 분위기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영국이 인도의 통치를 지속할 것이라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수도 이전 결정 발표 직후부터 수도 입지 선정, 도시계획, 건축양식 선정 등 다양한 사안들에 대한 상이한 입장들이 인도 국내외적으로 표출되었는데, 특히 식민정부 건물에 적용될 건축양식 선정 문제는 영국 내에서 의회, 언론, 건축 분야 전문가 및 유관기관들이 가세하면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왔다. 영국 본국에서 건축양식 선정을 둘러싼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인도의 식민정부는 독자적인 방안을 마련하고 있었다. 하딘즈 총독은 새로운 수도 건설에 적용할 건축양식으로 완전한 서양식도 혹은 완전한 동양식도 아닌 인도식 모티프를 혼합할 것을 제안하였다. 하딘즈는 식민정부 건물의 설계를 담당할 건축가로 선발된 에드윈 루티엔스와 허버트 베이커에게 자신이 제안한 건축양식을 적용하도록 지속적으로 설득하였으며, 그 결과 총독 관저와 식민정부 행정청 건물의 내외부에는 인도의 역사, 신화, 상징들을 표현하는 다수의 요소들이 첨가되었다. 그런데 본 연구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식민정부 건물에 적용될 건축양식 선정과 관련된 제반 사안들이 논의되는 이면에는 정치적 논리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하딘즈가 인도식 모티프가 혼합된 건축양식을 적극 지지하고, 공모전 실시를 통하여 인도인 건축가들에게 수도 건설에 직접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며, 인도인 건축장인들을 양성하는 스튜디오를 건립하고 인도인을 책임자로 임명하려한 일련의 노력들의 근저에는 인도인들의 반영 감정에 대한 고려가 중요하게 깔려 있었다고 해석된다. 다시 말해, 하딘즈는 앞서 언급한 사안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인도인들이 자신들의 수도 건설에 직접 참여한다는 자부심과 함께, 인도인들을 배려하는 식민정부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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