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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尹瓘九城再考 : 九城設置 範圍를 中心으로

        方東仁 백산학회 1976 白山學報 Vol.- No.21

        이 글은 1976年 6月 12日 韓國史硏究會 月例發表會에 서 발표한 「尹瓘九城再考」중의 일부분이다. 이 곳에서는 「尹瓘의 九城設置範圍」만을 槪略的으로 살펴보고 다음 음기회에 「尹瓘의 九城州鎭 檢討」에서 종합해서 다루려고 전체를 構成하였음을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尹瓘의 九城設置 지역은 咸興平野에 局限된다는 이른바 「池內宏說」이 현재 學界에 根著되어 있고 九城 하나하나의 絶對位置까지도 咸興平野를 중심으로 適宜히 배치되어 있음을 본다. 歷代 官撰地理志들은 그 범위를 豆滿江北七百里까지로 기록하였고, 또 그를 보다 현실적으로 규명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尹瓘이 九城을 설치했던 지역은 女眞에 이어 元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麗末鮮初에 들어와서는 明과의 사이에 國境의 確定이란 문제를 놓고 外交的인 해결을 모색한 것이었다. 그러나 女眞후예의 朝鮮에 대한 父母之國이라든가 一視同仁觀은 그들이 豆滿江流域一帶에 安居를 위한 수단이 되었고 그것은 또 그들의 生活根據地 확보란 문제와 결부됨으로써 來附에서 背叛이란 결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尹瓘招地의 北限界 지역까지의 國境線 劃定은 이룰 수가 없었다. 世宗14年에는 世宗은 金宗瑞에 命하여 尹瓘史蹟등을 조사케 했다. 그의 實地探査 與否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先代以來의 舊地의 心想은 來附해 오 는 女眞後裔들의 尹瓘史蹟에 대한 所傳과 探見에서 確信을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더우기 太祖戊寅年(1398) 慶源府修城時에 발굴된 「匡州防禦之印」이란 銅印은 한층 尹瓘의 拓置지역을 확신케 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豆滿江北一帶의 상황은 朝鮮人에 의해 반드시 探査되지 못한채 豆滿江을 國境으로 확정해 버림으로써 江北地域은 하나의 舊地였다는 心想으로 남게 되고 그럼으로써 이후의 관찬지리지들은 古蹟條에 실리게 되었으며 더 이상의 확인 노력도 기울여지지 않았다. 이는 明과의 外交的 關係의 順坦으로 인한 현재적 관계유지에 급급함으로써 철저했던 麗末鮮初의 舊地意識이 消滅되어 버린데 그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앞에서 論한 것 중 「鐵嶺以北 豆滿江以南」이란, 麗末鮮初의 舊地意識에 의한 心想을 현실적으로 收復코자 한 確信이었고, 그 意識은 尹瓘의 拓置지역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尹瓘의 山征目的은 「舊地收復과 胡患永絶」의 실현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出征目標地點은 舊地의 界限인 弓漢里(吉州)였고 關防設置地點은 「甁項」(鏡城)이었다. 그러나 그는 舊地收復 결과 새로운 地理知識을 얻게 됨으로써 「胡患永絶」이란 命題를 실현키 위해 애당초의 目標點에서 보다 北上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의 合理化를 위해 그곳이 高句麗의 舊地였다는 사실과 土地가 비옥하다는 사실, 高麗民이 살 수 있을 만큼 좋은 땅이라 하여 移民의 適合性을 내세우고 있음을 본다. 더우기 女眞과의 경계를 정하여 스스로 女眞族과의 種族的인 구별을 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지금까지 論考된 咸興平野說 · 吉州以南說 · 其他說을 조선초기의 官撰地理志 및 麗史를 검토해 본 결과 前者들의 문제점은, 高麗의 舊地意識과 疆界, 高麗의 覇?州 설치지역 한계, 曷懶甸의 법위와 擴大과정 등의 인식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의 문제점의 검토 결과 (1) 高麗가 認識하고 있고, 또 對外的(遼나 女眞)인 舊地의 界限운 弓漢里(吉州)였다는 點 (2) 따라서 舊地意識의 근거는 그들이 肅宗9年(1104) 覇?州를 상실하기 전까지는 弓漢里를 界限으로 覇?州가 설치되어 있었다는데 있었고. (3) 曷懶甸이란 애당초는 豆滿江流域(吉州以北鍾城지역)의 호칭이었으나 肅宗代에 고려 覇?州를 放棄한 후로는 지금의 咸南北을 포괄하는 명칭으로 變轉되고 있는 點(그 治所가 鏡城→北靑→咸興으로 變轉되고 있음) (4) 林彦의 英州壁廳記의 「其地方三百里」의 해석은 尹瓘이 舊地收復을 완수하고 보다 北上하여 새로이 개척한 지역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재에 이 지역에의 探査가 불가능하다는 制約性은 있다 하더라도 1930년대에 滿洲吉州省局子街부근에서 발굴한 古碑斷片은 윤관이 豆滿江北에 진출하였으리라는 可能性을 명백히 하고 있는 증거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九城州鎭 검토」에서 하나하나 地名 比定을 하게 되겠거니와 우선 尹瓘의 九城범위는 先學들이 立論한 咸興平野 · 吉州以南說은 修正되어야 하며 오정려 鮮初의 官撰地理志가 기록하고 있는 범위가 眞實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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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風納里土城의 歷史地理的 檢討

        方東仁(Pang Dong-in) 백산학회 1974 白山學報 Vol.- No.16

        The Poongnam-ni(風納里) mud fortification, which is designated as hitorical spot No.11, is located in the Poongmap-dong, Sorigdong―Ku, Seoul(서울城東區風納里). This mud fortification dates from an early period of the Paekche(百濟) Kingdom. There is a reference to the Sa-song(蛇城) in the clonicle of King Chaekke(責稽) and of King Kaero(蓋鹵) which are contained in the Samkuk Saki(三國史記) i.e. History of the Ancient three Kingdoms. however it is uncertain that whether these references pertained to the Poongnamni mud fortification. It is unknown when the Sa-song was first built, its location and ext―ent. However we can deduce the reasons for it’s construction and loca―tion from two references contained in the Samkuk Saki. The first reference in from the clonicles of King Chaekke(286A. D.) where expresses: auxiety about a possible invasion from the Kokuryo(高句麗) Kingdom, and accordingly Acha-sansong(峨嵯山城) and Sa―song were built to prevent such an envasion. The second reference is from the clonicles of King Kaero (475 A.D.):in order to prevent erosi―on of houses and farms, there was built along the river a mud forti-fication extending east from the Sa-song to north of Mt. Sung-san(崇山), and trees were planted on this bank. The first reference shows the important function of the Acha-sansong and Sa-song toward guarding the capital area of the Paekche Kingdom. On the other hand, the second reference seems to designate that a mud fortification was located somewhere on the shore of the Han River(漢江) and linked with banks. However the location or extent of this mud fortification is unknown. Further reference to the mud fortifications can be found in the Mun -hun-biko(文獻備考) i.e. Encyclopedia of the Yi Dynasty, and Taedong Chichi(大東地志) which means The Korean Topography. Here the Sa―song is designated the mud fortification Pyongko-song(坪古城) is dis―cribed as being located apposite to the Kwangchin-song(廣津城) across the Han River. The Kwangchin-song located in the middle of a level plain has a circumference aproximately 7 Li (2.8km). It used as a for―tress during the Paekche period. From these reference, it is clear that the Pyorigko-song is the mud fortification in Poongnam-Ni. This mud fortification was called Poongnarn-ni To-song after the name of the village Poongnam-ni by Japanese scholars in the 1930s. However, other theories claim that this mud fortification is id-entical with the Hanam Wire-song(河南慰禮城) or Sa-song of the Paekche period. It seems that these theories are based on the above geo―graphical references. The content of this so-called Sa-sung theory is: ① The expression for the Chinese derived Sa-song is Paramdri(바람드리) which was confused with the word Paearndri(비암드리). ② The geographical records of the Yi Dynasty seem to suggest that two different local names were used to indicate the one mud for’ tification i.e. Pyongko-song and Sa-song. However, it seems to unreasonable to assume the Poongnarn-ni mud fortification as indicated by the local name Sa-song in the Samkuk Saki, and to identify Sa-Song with Pyongko-song in the Munhon-bi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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