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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왕릉 관련 문헌의 서지적 연구

        최지선 성균관대학교 2006 국내석사

        RANK : 1886

        조선시대 왕릉 관련 문헌의 서지적 연구 王陵은 서울 인근에 문화 관광유적지가 부족한 우리나라의 도심 속 쉼터와도 같은 존재이며 조선의 역사를 그대로 알 수 있어 역사 교육의 산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王陵은 그 중요성에 비해 안내가 부족하고 해설과 연구가 초보적이며 王陵 자체에 관한 학술적 성과가 없는 실정이다. 이에 조선시대 王陵 관련 문헌을 모두 조사&#8231;분석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문헌에 근거하여 더 정확하고 올바른 王陵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연구자들에게는 王陵 관련 연구를 위한 선행연구이자 가장 기본이 되는 자료가 되고자 한다. 본고는 조선시대 王陵 관련 문헌을 모두 조사하여 목록을 작성하며 同一本과 底本, 異本 관계를 정리하고 그 내용을 파악하였으며, 작성된 목록을 바탕으로 王陵 관련 문헌의 유형별, 시대별, 판본별, 소장처별 특징을 찾아보았다. 유형별로는 地理類에는 陵誌, 王陵圖 등이 있으며 政書類에는 謄錄, 量案, 日記, 儀軌, 祝文 등이 있고 傳記類에는 史補, 先生案, 誌狀 등이 있으며 金石類에는 陵表, 陵神道碑, 陵誌文 등이 있고 雜史類에는 史略, 紀事가 있으며 總集類에는 輓章 등이 있다. 시대별로는 문헌이 발행된 년도를 기준으로 조선초기인 太祖~明宗年間(1392~1567年), 조선중기인 宣祖~肅宗年間(1568~1720年), 조선후기인 景宗~正祖年間(1721~1800年), 조선말기인 純祖~純宗年間(1801~1910年), 일제시대(1911-1945年)로 나누었다. 판본별로는 크게 寫本(358종)과 刊印本(102종)으로 나눌 수 있다. 刊印本은 木板本, 活字本, 石印本, 油印本, 拓印本으로 나누어지며 活字本은 다시 木活字本과 金屬活字本으로 나누어진다. 소장처별로는 藏書閣(46.74%)과 奎章閣(29.13%)에 가장 많은 문헌이 소장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王陵 관련 文獻 중 가장 최초의 문헌은 1409년에 拓本된 태조의 <健元陵碑文>이다. 1409년을 시작으로 일제시대 까지 모두 460종의 王陵 관련 문헌이 편찬되어졌으며, 王陵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문헌은 陵表, 陵神道碑, 陵誌, 儀軌, 謄本으로 이 문헌들은 거의 대부분의 王陵에 편찬되어졌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王陵 관련 문헌으로는 陵誌를 꼽을 수 있다. 陵誌는 당시 역대 모든 王陵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총 42基 중 34基 王陵에 대한 陵誌만이 남아 있다. 현존하는 陵誌는 대부분이 일제시대 李王職에서 기존 陵誌를 再編하여 筆寫 정리한 자료들이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자료들은 도서관이 아닌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연구 목적으로 보관이 되어 있어 조선의 王陵 관련 문헌을 대표하는 귀중한 자료임에도 체계적인 정리가 되어있지 않아 많은 연구자들에게 제공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 風水, 建築, 造景, 歷史 등 많은 王陵 관련 연구가 진행 되고 있지만 陵誌를 참고문헌으로 삼은 연구가 없음이 이러한 이유이다. 조속한 시일 내에 陵誌를 왕실도서관인 藏書閣으로 인수하여 체계적으로 정리·보관·열람되어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 살펴 본, 조선시대 王陵 관련 문헌의 전체적인 성격은 조선 역대 왕의 생애ㆍ업적ㆍ평가, 陵域 조성에 필요한 물적ㆍ인적 자원, 陵域의 외형ㆍ보수ㆍ이동, 王陵에 남아있는 懸板ㆍ齋室ㆍ詩文 등 사소한 기록부터 후대가 평가한 왕에 대한 재평가까지의 왕과 王陵에 관한 모든 기록의 결과물이다. 이는 조선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한 인물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 자료라 할 수 있다. 주제어 : 王陵, 陵誌, 儀軌, 誌文, 山陵

      • 尤庵 宋時烈의 碑誌文 硏究

        박관규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1 국내박사

        RANK : 1547

        본 論文은 557편에 달하는 尤庵 宋時烈(1607-1689)의 碑誌에 초점을 맞추어 尤庵 碑誌의 主人公인 墓主의 性向과 主題의 主要 領域 및 時代的 位相을 종합적으로 고찰함으로써 尤庵 碑誌의 具體的 面貌를 파악하였다. 그 결과 17世紀 朝鮮의 知性界에서 碑誌의 制作이 전대에 비하여 활성화되게 된 文化的 實狀과 原因, 特徵의 實態를 감지할 수 있었다. 尤庵은 17世紀 朝鮮 性理學의 수준을 대변하는 巨儒이자 山林으로서 그 학문적 位相과 정치적 지위가 뚜렷하다. 그는 文章에만 치력한 文士가 아니었다. 그러나, 평생 동안 講學과 作文 活動을 왕성하게 전개하여 그의 문집 &#985172;宋子大全&#985173;에는 그 누구보다도 한문학의 제 문체가 풍부하고 충실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551 편에 달하는 碑誌는 그 양적 부분이 매우 압도적이다. 특히 우암의 碑誌文은 淸陰 金尙憲(1570∼1652)과 谿谷 張維(1587∼1638)의 계보를 이어받아 당대에 일가를 이루었는데, 그의 필력은 웅혼하였고 韓愈와 歐陽脩의 영향 하에 주자의 문체를 參用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尤庵 硏究는 朝鮮 後期를 이해하는 關鍵, 혹은 關門이라는 전제 하에 현재까지 철학과 사학 분야에서 연구가 꾸준하게 진행되어 왔으며 2007년 ‘우암 탄신 400주년’을 전후하여 학술 발표와 토론회가 개최되는 가운데 우암에 대한 여러 방면의 학술적 관심이 고조된 바 있다. 그러나 우암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17세기 이후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전제로 하여 우암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거나 혹은 부정적인 것으로 양 극단에 치우쳐 그 실상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부족한 실정이다. 우암에 대한 褒貶은 주로 그의 정치적 처신과 행적에 대한 후인들의 이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객관적이며 심도 있는 접근 방식과 연구 결과는 현재 미진하다. 본 논문은 기존의 우암 연구에 있어서 제한적인 시각의 범위를 확장하기 위한 일환으로 작성되었다. 일단 우암의 저작 가운데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550여 편에 달하는 尤庵의 碑誌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우암 비지가 획득한 존재의 실태와 문학적 수준, 시대적 위상을 도출해 내어 아직까지 활성화되지 못한 碑誌 硏究에 대한 한 대안을 모색, 17세기 비지 찬작의 정채로운 한 현장의 단면을 우선 밝혀내었다. 尤庵의 碑誌文에 대한 구체적이며 본격적인 접근은 17세기 비지 찬작의 실태와 수준을 파악할 수 있는 시금석이다. 우암은 栗谷의 생애 및 학문과 관련된 碑誌 2편, 孝宗(1619∼1659)의 생애를 정제된 구조 안에서 펼쳐 낸 &#65378;寧陵誌文&#65379; 등 陵誌 3편을 포함하여 약 557 편의 비지를 찬작하였다. 우선 조선시대를 통 털어 가장 다수의 작품을 찬작해 낸 점에서 그 사적 위상과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 尤庵 碑誌가 양적으로 풍부하게 된 배경에는 이미 20대에 沙溪 金長生(1548∼1631)의 문하에 입문한 이후 西人系 名家 및 名人들과 인적·학적·정치적 교류의 범위가 확대되고 심화된 점과 무관치 않다. 청탁과 수락의 과정에서 우암은 비지에 대한 자신의 기본 관점과 서술 과정에 있어서 撰作의 動機와 敍述의 方向, 墓主-被撰者에 대한 자신의 시각과 평가의 방향, 교정의 세부 내용 등 비지에 관한 제반 미학적, 수사적 담론을 치밀하고 다양하게 전개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557여 편의 방대한 양을 자랑하는 尤庵의 碑誌 전체에 우선 초점을 맞추어 찬작의 주요한 배경을 간파하기 위하여 우암 및 그 주변 인물들이 전개한 방대한 담론의 양상을 검토할 뿐만이 아니라 우암 비지와 직접 관련된 기사를 우암의 詩, 疏箚, 書, 祭文, 序文, 記文, 跋文 등에서 우선 두루 섭렵함으로써 당시 우암과 교류의 양상이 뚜렷한 17세기 지성들의 증언까지 함께 고찰하였다. Ⅱ장에서는 우선 17세기에 비지의 찬작이 유행하게 되는 분위기 속에서 비지의 功效에 대한 당대 인식과 우암 비지에 있어서 주요한 인물의 양상을 검토하였다. 이 검토를 통하여 우암이 비지를 다작하게 된 이유와 당시 우암의 지위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설명해 보았다. 우암이 다작을 하게 된 일차적인 배경에는 王室의 요청 및 17세기 西人系 家門의 성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특히 우암 및 그 주변 인물들의 비지에 대한 소통의 양상을 우암의 서간문 전체와 주변 인물들의 언급 등 방계 자료를 면밀히 조사하고 검토하여 비지의 功效와 찬작의 일반적인 관행, 우암의 기본적인 찬작 성향을 중심에 두고 찬작을 둘러싼 제반 논의들을 통하여 17세기 서인계 문인 사회에서 비지에 대한 제반 주요 논의의 양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Ⅲ장에서는 우암 비지에 形象化된 主題의 主要領域을 時代相의 反映, 君臣 知遇와 尊周大義의 追求, 正學 守護와 時流 批判, 政治的 危機와 晩節의 闡揚 네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밀도 있게 고찰하여 보았다. 이들 주제의 주된 영역은 尤庵의 碑誌에 있어서 가장 비중 있는 墓主의 삶을 대변하고 있는데, 우선 17세기 시대적 한계와 특수성 속에서 당대 명인들의 인상적인 삶을 양상과 지향, 시대에 대한 고민을 파악 가능케 한다. 우암은 시대의 폭압 속에서 명멸해 간 명인들의 삶을 애도하고 동조하였으며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는 개인의 삶을 보여주는 가운데 시대와 인간 가치에 대하여 當爲의 準則을 제시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이들 조선 명인들의 삶을 통하여 우암이 지켜내고 현양하고자 한 삶의 가치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17세기 사대부 사회에서의 삶의 지향이 갖는 보편적 분위기와 전후의 시대와는 매우 변별적인 특성 등을 파악하는 가운데 우암 비지의 주요 작품이 획득하고 있는 미적 수준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우암이 채택된 어휘의 심각성, 시대상의 면모를 통하여 비지의 찬자로서 우암의 시각과 문제의식 등이 구조적, 형식적으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 지 그 미적 수준의 정도를 간파되는 것이다. Ⅳ장에서는 17세기 비지의 찬작 현장에서 우암 비지의 위상을 정리하였다. 우암은 당시 정치와 문화의 중심으로 부상한 서인계 명가 뿐만 아니라 왕실과 학계로부터 비지의 찬작이 쇄도할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비지의 문체 자체에 대한 인식과 그 사적 전개 양상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였다. 그리고 당시 557편에 달하는 비지를 요청 받아 생산해 내는 과정에서 조선시대의 여타 문장가들보다 비지의 서술 방향과 표현 방식에 대한 의미 있는 담론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17세기 비지의 찬작 현장과 작품 활동 양 측면에서 우암 비지의 위상은 간과할 수 없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본 장에서는 우암 비지에 대한 당대의 평가와 비지에 대한 우암의 기본 시각이 갖는 의미, 우암 비지에 관류하는 주제의 영역이 보여주고 있는 시대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 17세기 비지의 정채로운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우암 비지의 성격을 도출하였다. 우암은 그의 일생 동안 문장가로 자부했던 인물은 결코 아니다. 그의 인생 목표는 문장가로서의 삶이 아니라 전도된 시대의 가치를 교정하고 正學의 계보를 정립, 수호하는 학인으로서의 삶이었다. 우암 비지는 17세기의 주요한 역사적 사건을 대변하는 주요한 시대적 소산으로서, 時代의 價値를 고수하면서 生死를 불고하다 명멸해 간 17세기의 지성과 명인들에 대한 尤庵의 哀悼이자 獻辭라고 하겠다.

      • 조선시대 왕릉 재실의 배치 및 평면형식의 시대적 변화

        엄지혜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9 국내석사

        RANK : 1546

        조선왕릉은 왕과 왕비의 사후공간으로 국가에서는 왕릉에서 제례를 지냈으며 왕릉에 대한 보존과 관리를 엄격하게 시행했다. 왕릉에서 재실은 제례를 준비하고 왕릉을 보존·관리하는 중요한 건물이다. 재실은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지내오면서 많은 변형과정을 거쳤으며 현재 원형보존이 되어 있는 곳이 거의 없다. 그러나 조선왕릉과 관련한 여러 기록문헌들을 통해서 당시 재실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고 특히 간략한 평면도 형식의 그림인 재실도면을 통해서 재실의 배치와 평면분석이 가능하다.본 연구는 조선왕릉 관련 문헌에 수록된 17개 재실도면을 대상으로 왕릉재실의 배치와 평면형식의 시대적인 변화에 관하여 논하고자 한다.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재실의 배치형식은 향대청중심형, 과도기형, 齋室중심형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향대청중심형에서 과도기형을 거쳐 齋室중심형으로 변해간다. 향대청중심형에서 齋室중심형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변화의 흐름은 배치상의 중심영역과 실질적인 중심영역의 변화이다. 이 두가지 측면의 중심영역은 향대청중심형에서는 향대청영역으로 일치하고 齋室중심형에서는 齋室영역으로 일치한다. 과도기형에서는 향대청영역에서 齋室영역으로 중심영역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배치상의 중심영역과 실질적인 중심영역이 불일치하면서 과도기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즉 향대청중심형에서 齋室중심형으로 갈수록 중심영역이 향대청영역에서 齋室영역으로 변화한다.둘째, 영역과 대문과의 배치관계에서 대문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영역은 향대청영역임을 알 수 있으며 영역과 대문과의 배치관계의 변화를 보면 향대청중심형에서는 대문이 1개이므로 향대청영역쪽에 배치되고 齋室중심형에서는 대문이 모두 2개이므로 齋室영역과 향대청쪽에 배치된다. 과도기형에서는 대문의 수가 1에서 3개 까지 나타나므로 대문이 배치되는 영역도 다양한 것을 볼 수 있다. 셋째, 영역내의 주요건물과 부속건물과의 배치관계 변화를 보면 향대청중심형에서 齋室중심형으로 갈수록 齋室과 전사청영역에 부속건물이 없어지면서 齋室과 전사청이 단일건물로 배치되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향대청영역에는 부속건물이 거의 없다가 齋室중심형에서 부속건물이 많이 배치되는 것을 볼 수 있다.넷째, 건물별 평면형태의 변화를 보면 향대청중심형과 과도기형에서는 齋室과 전사청이 一자형혹은 ㄱ자형의 평면을 갖다가 齋室중심형으로 갈수록 齋室은 一자형 전사청은 ㄱ자형의 평면을 갖는다. 향대청과 제기고는 모두 一자형으로 변화가 없다.다섯째, 건물별 규모의 변화를 보면 향대청중심형에서는 齋室, 향대청, 전사청의 규모가 약 8칸으로 유사하다. 과도기형에서는 齋室의 규모가 점점 커져 11.5칸의 규모까지 되고 향대청은 6칸으로 줄어들어 일정하게 유지된다. 전사청은 규모가 점점커지면서 약 10칸정도의 규모로 정착한다. 齋室중심형에서는 齋室의 규모가 12칸으로 일정해지고 향대청은 여전히 6칸을 유지하면서 齋室의 규모가 향대청의 규모에 2배가 된다. 전사청은 약 10칸 정도의 규모가 유지된다. 제기고는 齋室중심형이전에는 2칸의 규모를 유지하다가 齋室중심형이 되면서 2-3칸의 규모를 갖는다. 여기서 齋室의 규모가 증가하게 된 것은 방의 칸수의 증가에 의한 것이고 향대청의 규모가 감소하게 된 것은 방의 칸수의 감소에 의한 것이다.마지막으로 향대청중심형에서 과도기형을 거쳐 齋室중심형으로 변하는 원인은 중심적으로 상징하는 공간의 사용방식의 변화에 의한 것으로 추정해 본다. The aim of this study is to discuss the historical change of the site design and plan of Royal tomb, which is called 'Jaesil(齋室)' in Joseon Dynasty, by analyzing the seventeen drawings that have existed in the literature of the Royal tomb. Followings are the results of this study. First, the site design of the Jaesil can be classified into three types : Hyangdaecheong(香大廳)-centered arrangement , Transition period arrangement, and Jaesil-centered arrangement. The site design of the Jaesil changes from Hyangdaecheong-centered arrangement to Jaesil-centered arrangement. The most important change of site design of the Jaesil is the change of central realm in site design and central realm in reality. These two central realms are same as Hyangdaecheong-realm in Hyangdaecheong-centered arrangement and Jaesil-realm in Jaesil-centered arrangement. These central realms are not same as transition period arrangement. That is, the central realms change from Hyangdaecheong-realm to Jaesil-realm in changing, as they change from Hyangdaecheong-centered arrangement to Jaesil-centered arrangement.Second, Hyangdaecheong-realm is the most important realm in arrangement-relation of the gate with realm. The change of the relationship of arrangement between the gate and realm is as follows. The gate is located toward Hyangdaecheong-realm , because the number of gate is one in Hyangdaecheong-centered arrangement. The gate is located toward Jaesil-realm and Hyangdaecheong-realm, because the number of gate is two in Jaesil-centered arrangement. The gate is located toward various realms, because the number of gate ranges from one to three.Third, the change of the relationship of arrangement between a main building and secondary building within the realm is as follows. The secondary building tends not to be located in the realms of Jeonsacheong(典祀廳) and Jaesil in Jaesil-centered arrangement. However, in many cases, secondary building tends to be located in Hyangdaecheong-realm in Jaesil-centered arrangement.Fourth, in the change of the plan of each building, Jeonsacheong and Jaesil is 一 plan or ㄱ plan in Hyangdaecheong-centered arrangement and Transition period arrangement. Jaesil is 一 plan and Jeonsacheong is ㄱ plan in Jaesil-centered arrangement. Hyangdaecheong and Jegigo(祭器庫) is in all cases 一 plan.Fifth, in the size of Hyangdaecheong, Jaesil and Jeonsacheong is same as eight kan(間) in Hyangdaecheong-centered arrangement. The size of Jaesil and Jeonsacheong becomes bigger and bigger in Transition period arrangement. However the size of Hyangdaecheong decreases and maintains six kan. The size of the Jaesil is twelve kan and the size of Hyangdaecheong is six kan in Jaesil-centered arrangement. The size of the Jaesil becomes double in Hyangdaecheong. The size of Jeonsacheong maintains as ten kan. The size of Jegigo maintains two kan before Jaesil-centered arrangement, and becomes two kan or three kan in Jaesil-centered arrangement. The size of the Jaesil increases because of the increase of the number of kan of the room. ; the size of Hyangdaecheong decreases because of the decrease of the number of kan of the room.Finally, the cause of historical change is considered the change of the using system of main 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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