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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帝下 基督敎 民族運動의 政治經濟思想 : 安昌浩·李承晩 계열을 중심으로

        장규식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0 국내박사

        RANK : 248669

        본 연구는 韓國 近代民族主義의 사상이론을 계통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그 한 축을 이루고 있었던 基督敎 民族主義를 일제하 기독교 민족운동을 통해 살펴본 것이다. 대한제국 말기 新民會와 皇城基督敎靑年會를 거점으로 대두한 기독교 민족운동은 관서지방의 신흥상공인층과 신지식층, 기호지방의 신지식층과 개혁관료층을 주축으로 하는 基督敎 政治社會勢力化의 한 매듭이었다. 이 시기 기독교 민족운동 세력은 독립협회 이래 漸進的 文明開化論의 연장선상에서 宗敎·敎育·殖産運動을 전개하면서, 기독교를 통해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실력양성의 기반이 되는 근대적 시민의식과 지식을 습득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韓日合倂’과 일제의 무단통치는 근대시민의 육성을 통한 자유문명국가, 실력양성을 통한 근대 자본주의국가의 건설이라는 그들의 당초 구상을 뿌리채 흔들어 놓았다. 그러한 가운데 ‘105人事件’을 거치며 새로운 청년 학생세대들에 의해 武裝鬪爭論이 제기되었다. 더불어 일제 무단통치를 정당화하는 社會進化論的 强權主義에 대한 이론적 극복이 시도되었는데, 그것은 共和主義와 人道主義의 수용으로 나타났다. 이 때 인도주의와 民族自決主義는 기독교세력이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에 이르는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한편 워싱턴軍縮會議를 전기로 민족자결주의가 퇴조하고 부르주아민족운동 내부에 실력양성 노선이 전면화하는 가운데, 기독교 민족운동의 개량주의적 재편이 기독교 선교의 양대 거점인 평양과 서울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안창호 계열의 平壤YMCA·修養同友會·基督信友會 등과 이승만 계열의 中央YMCA·興業俱樂部·積極信仰團으로 대표되는 기독교계 개량주의적 민족운동의 진영이 형성되었다. 3·1운동 이후 기독교세력은 平和的인 방법으로, 世界改造의 새로운 기운에 부응하는 正義와 人道의 실현으로서 한국의 독립을 전망하고, 그 방략으로 外交論과 實力養成論을 제기하였다. 한편 1920년대 중반 대두한 사회주의자들의 反宗敎運動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세력 내부에 민족문제인식, 사회인식상의 일정한 편차가 나타났다. 그것은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사상적 결합과 민중적 기독교를 모색하는 基督敎社會主義, 近代主義에 입각한 社會福音主義로 대별되었다. 신간회의 출범 이후 기독교계의 사회참여 논의가 활발해지는 가운데 예루살렘 국제선교대회를 거치며 맑스주의와 구별되는 기독교적 사회실천의 이론으로 ‘基督主義’가 등장하였다. 1929년 기독신우회의 ‘宣言’을 통해 공식 천명된 기독주의는 대공황기 반종교운동과 엇물리면서 反唯物論 이념투쟁으로 굴절되었는데, 그것은 이후 기독교계 내부에 冷戰意識이 자리잡는 과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였다. 한편 실력양성론과 더불어 일제하 기독교 민족운동을 특징짓는 또 다른 논리는 宗敎→敎育→實業→政治로 이어지는 漸進主義였다. 기독교세력은 근대 시민의식의 형성을 목표로 하는 종교·문화운동을 모든 운동의 근본운동으로 설정하고, 그에 기초하여 교육·경제적 실력양성과 정치적 방면의 민족적 합동을 이룸으로써 자주독립의 기초를 마련하려 하였다. 그러한 선상에서 그들이 설정한 새로운 독립국가의 모델은 국가를 개인의 단체적 결합으로 파악하고, 國家에 대한 市民社會의 가치우위를 내세우는 自由主義 國家였다. 그런데 일제 침략으로 시민사회의 자율성 확보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그같은 국가론의 기조는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에 대한 非妥協의 원칙과 시민사회적 이해 사이에서 나타나는 갈등구조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 때 갈등의 소지가 된 문화운동과 정치운동 사이의 긴장관계를 일체의 정치색을 배제한 人格修養이라는 논리로 끊어버린 李光洙의 「民族改造論」은 당시 일제의 민족분열정책으로 동요하던 기독교계 민족부르조아지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이에 대해 신간회운동기 趙炳玉, 朱耀翰의 修養同友會 改造運動과 안창호의 大公主義는 민족해방을 최우선의 과제로 부각시키고, 신자유주의 국가관을 수용하여 사회전체의 공익을 위한 ‘사회적 국가’의 개입을 정당화함으로써 시민사회의 사적 영역에 안주하려는 그같은 경향에 대응하려 한 경우였다. 이와 더불어 대공황기를 거치며 이승만 계열 일각에서는 申興雨와 그가 조직한 적극신앙단을 중심으로 파시즘을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일제하 기독교 민족운동의 민족경제건설 노선은 평양과 서울을 양대 거점으로 하여 전개된 자본주의 경제운동과 농촌운동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曺晩植을 구심점으로 物産奬勵運動·企業設立運動·節制運動 등의 방면에 걸쳐 전개된 관서 기독교계의 자본주의 경제운동은 ‘庶民型’ 中小資本家의 이해를 대변하는 가운데, 국가권력과 구별되는 시민사회의 자율성 논리에 기초하여 생산·유통·소비에 걸친 自作自給과 內資蓄積을 통한 自立的 近代化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기호 기독교계의 實業敎育運動은 근면성 성실성 책임감과 독립자영의 능력을 갖춘 基督敎的 市民層, 自立的 中産層의 양성에 촛점을 맞추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계열의 인사들은 外資導入論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한편 기독교계의 농촌운동은 YMCA연합회 농촌부와 장로회총회 농촌부를 양대 축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먼저 신홍우를 비롯한 이승만 계열 인사들에 의해 주도된 YMCA 農村事業은 産業化를 통한 농촌 과잉인구의 도시 흡수, 아일랜드를 모델로 한 유상매상·유상분배의 農地改革, 덴마크를 모델로 한 協同組合의 조직을 농촌재건의 밑그림으로 하는 近代主義的 農村運動이었다. 다음으로 안창호·조만식 계열에 의해 주도된 長老會 農村運動은 농촌의 경제적 파산과 문화적 낙오, 도덕적 타락을 한데 아울러 농촌피폐의 원인으로 파악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모범농촌을 건설함으로써 그같은 문제들을 풀어 나가려 한 福音主義的 農村運動이었다. 이와같이 일제하 기독교 민족운동은 개인의 自我革新 곧 近代 市民意識의 형성을 운동의 출발점으로 삼아, 이를 中産層의 육성과 中小資本 중심의 資本主義 近代化, 협동조합 등을 통한 自立的 小農體制의 확립으로 연결시키고, 나아가 시민사회의 輿論政治 원리에 입각한 민족적 대동단결과 자주독립을 전망하였던 민족개량주의운동이었다. 그러한 면에서 기독교 민족운동의 정치경제사상은 新興 中間階級의 이해를 대변하는, 自由主義 원리에 기초한 市民社會論的 民族主義였다. 그런데 이 시기 기독교세력은 양반 대지주 출신과 소빈농·노동자계급의 중간에서 市民革命論·絶對獨立論이 아닌 漸進的 文明開化論·民族改良主義 노선을 선택하면서 대지주·자본가와 계급적인 연합을 하였다. 그리고 反唯物論的 사상의식과 自由主義的 市民社會論의 이론적 정합성을 기초로 해방후 남한 자본주의국가의 체제이념과 자유민주주의 논리를 확립하는 데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일제하 기독교 민족운동이 해방후 분단체제의 형성과 관련하여 갖는 역사적 함의는 바로 여기에서 찾아질 수 있다. This thesis explores the christian nationalism on the basis of christian national movement in the period of Japanese colonial rule, through which we can systematically clarify the traditional ideas of modern nationalism of Korea. In the late Daehan Empire period, christian national movement, which was based on the Shinminhoe(New People's Society) and the Hwangseong(Seoul) YMCA, represented the politicalization and socialization of christian power. It prevailed into the independent middle class in Kwanseo(Northwest) area and into the reformist bureaucrats and the new educated class in Kiho(Central) area. In this period, the christian nationalists developed the new movement in religion and education, insisting on learning the modem citizenship & knowledge and on expanding the independent spirit through christianity. However, the forceful occupation and military rule of Japan made their early plans fruitless. Their plan was to establish a civilized nation and a modem capitalistic economic system in Korea. Meanwhile, a group of new younger students introduced the armed independence movement through the 105 In Sageon (Incident of 105 People). At the same time, it was tried to overcome the social-evolutionary authoritarianism theoretically, which resulted in acceptance of republicanism and humanism. The humanism and the principle of self-determination of peoples had become the ideological background of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While the principle of self-determination of peoples decayed and the idea of fostering real ability surged, the reorganization of christian national movement according to the policy of gradual improvement developed in the two top christian centers of Seoul and Pyongyang. In the process of this change, the christian nationalist camp along the line of gradual improvement formed, which included the groups following the lines of An Changho and Rhee Seungman respectively. After March lst Movement, christians anticipated the independence of Korea as a realization of justice and humanism and they raised diplomacy and fostering real ability as a strategy. In the middle of 1920s, there were two tendencies among christian nationalists in response to Anti-Religion Movement of socialists. They were christian socialism, which was based on the combination of christianity and socialism, and social gospel, which was based on the modernism. After the appearance of Shinganhoe(National United Front), a new christianism was introduced as a christian practical morality, which was raised through Jerusalem Meeting of the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distinguishing itself from marxism. The christianism interacted with Anti-Religion Movement and developed into an ideological fighting against materialism. This event had become a case of settling down of the cold war mentality in christian society. Another logic of christian national movement was characterized by the gradual progressivism, which panned to take the steps of religion, education, industry, and politics successively. All the christian groups set the movement of religion and culture as a base of all kinds of social movements. With this idea, they were willing to establish the base of the self-independence of Korea by fostering real ability in education and economy and by making a national union in political aspects. In this situation, their new model of independent state was based on liberalism, which regarded a nation as a union of people and gave priority to the civil society over nation. However, under the situation of Japanese colonial rule, it was impossible to protect the self-autonomy of civil society and as a result liberalism could not take root. It was the conflict structure between the principle of uncompromization with Japanese imperialism and the interest of civil society. In this social situation, Lee Kwangsu introduced his idea of remodelling a national movement, which represented for the position of christian national bourgeoisie. His opinion is that the tension between cultural movement and political movement can be solved by the cultivation of personality without political color. Against this ideological tendency, Suyang Dongwoohoe(Mental Training Society) Reforming Movement under the leadership of Chu Yohan and Cho Byongok and Daegongism of An Changho were raised, which were based on the new liberalism. They hilighted national liberation as a primary task, and justified the government intervention in social affairs for the public interest. Meanwhile, along the line of Rhee Seungman, the movement of accepting fascism appeared centering around the Jeokkeuk Shinangdan(Positive Faith Team) under the leadership of Cynn Heungwoo. We can examine the ideas of national economic construction through capitalistic economic movement and rural movement, which centered in two central cities, Seoul and Pyongyang. Economic movement of Kwanseo(Northwest) area christians spoke for the small and medium capitalists, was based on the self-regulation of civil society distinguished from the government power, and pursued the independent industrialization through the self-sufficiency and the national capital accumulation. In addition, the vocational training movement of Kiho(Central) area christians focused on fostering christian civil class and independent middle class, who was qualified on diligence, sincerity, and spirit of independence. In this process, people following the line of Rhee Seungman suggested the introduction of foreign capital. The rural movement of christians expanded centering around the YMCA and the Presbyterian Church. First, the rural work of YMCA, which was led by the people in line of Rhee Seungman, was rural reconstruction movement based on the westernization theory. The idea centered on the creation of cooperatives following the model of Denmark, agricultural reforms based on the model of Ireland, and absorption of surplus agricultural population into cities through industrialization. Second, the rural movement of Presbyterian Church, which was led by the people in line of An Changho and Cho Mansik, was a movement based on the christianism. They recognized the causes of the rural problems as economic bankruptcy, cultural degradation, and moral depravity. And they were willing to build the model rural community centering around the church. Christian national movement under the Japanese colonial rule started as a policy gradual improvement, stressing the importance of personal self-reformation or creation of modem citizenship. It also pursued industrialization centering around small and medium enterprise, and around rural reconstruction based on independent small-farm system such as cooperative. It anticipated national union and liberation, too, which was based on the principle of pubic opinion of civil society. In this respect, the political-economic ideas of christian national movement was a nationalism of civil society which was based on the principle of liberalism and tried to protect the interest of a new middle class. In this period, the groups of christian nationalists tried to associate with the landlords and the capitalists, not tenants and laborers. And it was supported by the political line of gradual progressivism, not of the civil revolution and an absolute liberation. After the Korean Liberation, they participated in establishing the ideas of capitalism and the principle of liberal democracy in South Korea. It is in this point that we can relate the historical implications of the christian national movement with the division of Korean Peninsula.

      • 우보(牛步) 민태원(閔泰瑗) 연구

        권문경 인하대학교 일반대학원 2009 국내석사

        RANK : 248604

        Few researches have been published about Min Tae-Won, the writer of 『A Praise to Youth』, and further, some of the existing dissertations are full of fallacies. The purpose of the thesis is to rectify those errors on his life and writings, and to establish the groundings for the study of Min Tae-Won. Existing studies brand him as a pro-Japanese with no reliable supporting evidences. The thesis also investigates this assertion along with his personal life and work. Known as the author of an essay 『A Praise to Youth』, Min Tae-Won was actually a renowned journalist in 1920's. His adapted stories such as 『Aesa』, 『Duckweeds』 and 『An Iron Mask』 were serially published in newspapers and he also wrote quite many books of various genres, although most of them have been undiscovered. One of his books, 『GoGyun Guhsa or Kim Ok-Gyun, the Revolutionist』featuring Kim Ok-Gyun has been recognized as noteworthy materials among historians, while it has not been highly regarded in literature. The debate (in literature) only highlights it to be one of the epics of Kim Ok-Gyun, a man who lived in a colonial era, and the circumstantial evidence of Min Tae-Won's pro-Japanese disposition. The thesis reviews the meaning of 『GoGyun Guhsa』 in the context of the times he lived. The thesis discovers through the comparison of 『GoGyun Guhsa』 and 「Gabsin Ilrok or Diaries of 1884」 of Kim Ok-Gyun, that Min Tae-Won took 「Gabsin Ilrok or Diaries of 1884」 as the principal resources to write his book 『 GoGyun Guhsa』. The thesis deliberates Min Tae-Won's consciousness by analyzinghis social activities and writings in general. He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journalism at that time and actively got involved in the associations of journalists. His social disposition makes him a reformer within the boundary of legitimate system as he regarded Japanese Government-General a counterpart to negotiate with, not an enemy to fight against. He can be described in short as a capitalist, a modernist, an illuminator or a nationalist. On the other side of his self-consciousness like this, there was an awareness of hatred toward feudal customs, anti-socialism, anti-Japan. In conclusion, he inclined to be a national reformer. The activities of national reformers in mid-1920's were based on their 'doctrine of autonomy' which has subtle similaritiesto that of Japanese Government-General, and some of them leaned to be pro-Japanese more evidently towards 1930's. These similarities between national reformers and Japanese Government-General have been formed by the sense of crisis with the rise of socialism and its expansion. In the social circumstances like this, the question of Min Tae-Won's tendency to be pro-Japanese should be verified by his activities after mid-1920's. The evidences of such activities were not discovered in the research. His self-consciousness was a stream of meaningful awareness in Chosun during the colonial period. It has a progressiveness, though clearly with the limitations of its own. The thesis reviews as many writings of his as possible but excludes his adapted novels since they are irrelevant to the theme of the thesis. They are worthy though to study further and should be on the list of research assignments in the future. 민태원은 「청춘예찬」 작가로 알려져 있다. 민태원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하며 기존의 연구서라고 할 수 있는 몇 편의 소논문조차 오류로 가득 차 있는 실정이다. 본고는 민태원의 생애와 저서들에 대한 이러한 오류들을 바로잡고 민태원의 기초자료들을 확정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또한 기존의 연구서들은 민태원을 친일인사로 규정하고 있으나 그러한 규정에 대한 근거는 없는 형편이다. 본고는 민태원의 생애와 저서들에 대해 점검하면서 민태원의 친일문제도 함께 점검해 보았다. 민태원은 「청춘예찬」이란 수필로 유명하지만 실상 민태원은 1920년대에 유명한 언론인이었으며 『애사』, 『부평초』, 『무쇠탈』 등 여러 편의 번안소설들을 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장르의 수많은 작품들을 썼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사장되어 있는 실정이다. 민태원의 작품 중 『오호 고균거사』는 김옥균을 소재로 하여 쓴 글인데, 이 글은 사학 쪽에는 일찍부터 김옥균과 갑신정변 자료로 인정받고 있으나 문학 쪽에서는 거의 외면된 채 사장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유일하게 논의된 방향은 식민지 시대 김옥균 서사 중의 하나이자 친일담론으로 논의된 것이다. 본고에서는 『오호 고균거사』의 의미를 시대와 관련하여 재조명하고자 하였다. 이와 더불어 『오호 고균거사』와 김옥균의 「갑신일록」의 비교를 통해 민태원이 「갑신일록」을 주요한 자료로 삼아 『오호 고균거사』를 저술하였음을 밝혀냈다. 민태원의 사회활동과 저서에 대한 개괄적인 검토를 통해 민태원의 의식을 고찰해 보았다. 민태원은 당대의 언론계에서 상당히 무게 있는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언론인 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민태원의 사회적 성향은 일본 총독부를 적이라 규정하고 항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닌 ‘교섭’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제도권 내에서의 합법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성향이었다. 대략 몇 가지로 민태원 의식의 키워드를 정리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적’ 혹은 ‘근대주의적’, ‘계몽주의적’ 혹은 ‘민족주의적’이 그것이다. 이 의식들의 반대편에는 봉건적 유습에 대한 혐오감, 반사회주의, 그리고 배일 의식이 있었다. 이와 같은 정리를 통해 볼 때 민태원은 민족개량주의의 성향을 지녔다고 보인다. 민족개량주의자들의 활동은 1920년대 중반부터 ‘자치론’을 들고 나오면서 총독부의 ‘자치론’과 미묘한 접점을 보이다가 결국 1930년대로 넘어가면서 보다 선명하게 친일로 경사되는 자들이 생긴다. 친일과의 미묘한 접점의 형성은 사회주의 운동의 대두와 확산이 가져온 위기위식과 맞물려 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놓고 볼 때 민태원의 친일 문제는 1920년대 중반 이후의 활동을 통해서 입증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민태원의 자료를 조사하면서 민태원이 친일행동을 했다는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민태원의 의식은 일본 식민지란 조선의 상황에서 의미있는 의식의 한 흐름이었으며 나름의 진보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인다. 물론 자기 한계 안에서의 진보성임은 명확하다. 본고에서 민태원의 저서들을 개괄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했지만 번안소설들을 여기에서 다루는 것은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에 제외하였다. 이것들은 따로 연구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차후의 연구과제로 남겨 놓겠다.

      • 구로이와 루이코의 수용과 1910년대 한국의 번안소설

        권문경 인하대학교 대학원 2014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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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로이와 루이코는 『요로즈쵸호』의 사장이자 메이지기의 유명한 번안소설가였다. 자신의 번안소설을 『요로즈쵸호』에 연재했는데 이 신문은 그 덕분에 당대 최고의 판매부수를 올릴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조선에서도 그의 번안소설은 인기였고 동양서원의 민준호, 박문서관의 노익형, 보급서관의 이해조 그리고 『매일신보』의 기자들인 조중환, 이상협, 민태원 등 당대의 굵직한 작가들이 구로이와 루이코를 중개자로 한 소설들을 번안했다.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 중 한명인 쓰루미 슌스케에 의하면 구로이와 루이코는 자유민권운동가이자, 메이지 전 기간을 통해 국권주의자 이토 히로부미를 공격한 자유주의자였다. 또한 『소설신수』 이래 일본의 문예 사상이었던 자연주의에 반대하고 예술미 외에도 윤리미가 있다는 것을 호소하며 자신의 소설이 대중들의 교훈에 이바지함을 강조한다. 『불여귀』(1912년), 『쌍옥루』(1912년), 『장한몽』(1913년) 등의 가정소설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릴 무렵 『지환당』(1912년), 『도리원(상)』(1913년), 『누구의 죄』(1913년) 역시 출판되었다. 이 세 텍스트들은 모두 정탐소설이란 공통점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신문관에서 나온 아동문학을 제외하면 이 시기 번안소설을 가정소설/ 정탐소설의 두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조중환은 ‘조선화’와 ‘인정’을 그리는 것을 번안의 목표로 삼았고 그의 번안 전략은 성공해 인기의 최고점을 누렸다. 조중환의 성공을 보면서도 세 텍스트의 번안자들은 하나같이 그의 번안전략, 즉 ‘조선화’를 택하지 않았다. 장소는 모두 프랑스 파리이며 인명 역시 한국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이름들이다. 세 텍스트는 공통적으로 서양의 민주적 제도, 만민의 평등을 구현하는 재판, 과학적인 정탐수사 등을 묘사하고 있고 이것들은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들이기 때문에 서양소설 그대로의 전략을 채택했다고 생각된다. 과부가 된 여성들의 재가를 당연하게 여기고 자유나 평등, 자유연애를 스스럼없이 얘기할 수 있는 것도 서양을 배경으로 할 때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조선이 배워야 할 것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계몽적 입장은 정탐소설이 채택될 때 의도적으로 개입되었다고 보인다. 다음으로 구로이와 루이코의 번안소설을 선택한 이는 이상협이었다. 『정부원』을 연재하기 전에 쓴 글을 통해 우리는 그의 번안관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서양소설은 서양소설’대로 번역해야 하며 ‘소설 가운데의 지명과 인명을 우리의 입으로 옮기기 쉽고 우리의 귀에 익도록 고쳤으나’ 허물이 적지 않다는 생각이다. 근대적인 번역관을 최초로 피력한 경우일 것이다. ‘서양소설을 서양소설 같이’는 정탐소설의 성격이었다. 이상협은 이 모토를 통해 번안소설에 대한 자신의 지향이 조중환과 같은 ‘조선화’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는 서양이 우리와 물정 풍속은 좀 달라도 인정은 우리와 다를 것이 없다는 ‘인정’에 대한 언급이다. 조중환이 조선화’를 바탕으로 ‘인정’을 그린 『장한몽』을 썼다면 이상협은 ‘서양소설대로’를 바탕으로 ‘인정’을 그리고자 한다. 이상협의 말대로라면 인명을 조선식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 서양과 조선의 ‘인정’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원』의 인물들은 서양 무대에 서양의 옷을 입고 있는 조선인들이다. ‘지명과 인명’을 바꾼 것을 자신의 ‘허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이상협 역시 『장한몽』의 성공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정탐소설을 잇고 있으면서도 가정소설의 인기를 무시할 수 없었던 이상협의 번안소설에 대한 모색이 『정부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협은 『해왕성』에서 근대적 의미로서의 ‘번안’이란 단어를 최초로 썼다. 더 나아가 가정소설과 분리의 선을 긋는다. 자신 역시 전례에 벗어나지 못해 두세 번 가정소설을 게재한 적이 있으며 『해왕성』이 가정소설이 아니어서 많이 주저했다고 밝힌다. 이런 점에서 『해왕성』은 이상협의 말처럼 “대담한 시험”이다. 『해왕성』을 연재한지 근 6개월 만에 이상협은 反 가정소설의 번안관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정부원』은 가정소설과 정탐소설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이상협은 『정부원』이란 과도적 모색을 통해 『해왕성』이란 번안소설의 길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알렉산드르 뒤마의 세계명작 『몬테크리스토 백작』이었다. 또한 『해왕성』의 시간적·공간적 배경은 구로이와 루이코의 『暗窟王』과 완전히 다르다. 주무대는 중국이고 때는 1894년 청일전쟁 즈음이며 루이 18세는 서태후로, 나폴레옹은 손문으로 바꿔놓았는데 『해왕성』의 배경을 조선의 상황과 좀 더 가깝게 치환하고자 했던 이상협의 계산으로 보인다. 주인공 장준봉이 복수할 대상인 양보천, 황대팔, 양운 등이 서태후와 권력을 나누고 있는 지배계층이란 점, 또한 서태후와의 대립 구도가 손문이라는 것은 일본을 포함한 조선의 지배층 역시 언젠가는 복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상협이 보여주고자 했다고 생각된다. 민태원의 『애사』는 1918년 7월 28일부터 1919년 2월 8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 1918년은 매우 다사다난했던 시기였다. 아미앵 전투로 제1차 세계대전의 전선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고 일본에서는 1918년에 쌀폭동이 일어났다. 같은 해 일본은 조선에 ‘곡류수용령’을 공포했는데 조선쌀의 일본 반출로 굶어죽는 조선인들이 많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같은 해에 세계적인 인플루엔자가 유행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연감에 따르면 국내에서 14만 518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상황에서 『레 미제라블』을 번안한다는 것 자체가 그 밑바탕에 계몽적 태도가 깔려있음은 자명할 것이다. 이해조나 이상협은 직역에 가까운 완역을 했지만 민태원은 조금 다른 방식, 즉 조선식 표현이나 조선식 관용어로 번안하기 시작한다. “화수분”, “털찝”, “총냥 이” 등의 조선식 어휘에서부터 “여편네 꼴이 박히어서”, “월궁의 선녀 같고 물 찬 제비같이” 등의 관용적인 표현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조선식 표현으로의 변용은 인물들에게 생동감을 부여하기도 하는 등 소설에 윤기와 재미를 부여한다. 조선식 표현의 변용과 토속어의 발견을 통해 순한글문장은 질적 비약을 이루며 『애사』의 인물들은 때로는 고뇌하며 때로는 생동하며 근대적 인물로 거듭난다. 민태원은 이상협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란 세계명작을 이어받아 『레 미제라블』을 선택했다. 세계명작을 번안한다는 것은 1915년경 성립한 문예주의적 태도를 바탕에 두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길을 조금 더 가다보면 창작소설/번역소설로 나뉠 수밖에 없으며 거기에 번안소설이 낄 틈은 없다. 다시 말해 세계명작의 길은 번안소설의 최고점이면서 종착점이란 의미이다. 민태원은 이상협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란 세계명작을 이어받아 『레 미제라블』을 선택했다. 세계명작을 번안한다는 것은 1915년경 성립한 문예주의적 태도를 바탕에 두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길을 조금 더 가다보면 창작소설/번역소설로 나뉠 수밖에 없으며 거기에 번안소설이 낄 틈은 없다. 다시 말해 세계명작의 길은 번안소설의 최고점이면서 종착점이란 의미이다. 한일 병합 이전의 번역·번안 서사는 대체로 애국계몽적 입장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1910년대 초기 민준호, 노익형, 이해조 등은 병합 이전의 계몽적 입장을 이어받아 구로이와 루이코를 번안했고 이상협과 민태원 역시 한편으로는 이들의 계몽적 입장을 받아들였고, 다른 한편으로 이상협은 근대적 번안 개념을, 민태원은 조선식 표현 등을 통해 순한글문장의 질적 비약을 이뤄냈다. 다시 말하자면 조중환으로 대표되는 『장한몽』 등의 가정소설과는 다른 번안소설의 흐름이 1910년대에 있었고 그 중심에 구로이와 루이코의 번안소설이 있었던 것이다. 핵심어: 구로이와 루이코, 번안소설, 번역소설, 매일신보, 요로즈쵸호, 번안개념, 애국계몽, 민족개량주의, 정탐소설, 순한글문장, 레미제라블, 세계명작, 문예주의, 조선식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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