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인기 검색어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遷葬 過程을 통해 본 正祖의 風水認識 = King Jeong-jo's understanding of fengshui from a perspective of the royal tomb relocation process

    한글로보기

    https://www.riss.kr/link?id=T14783797

    • 0

      상세조회
    • 0

      다운로드
    서지정보 열기
    • 내보내기
    • 내책장담기
    • 공유하기
      • URL 복사
    • 오류접수
    인용문이 복사되었습니다.

    부가정보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 22대 왕인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가 영우원에서 수원 화성 소재 융릉으로 천장하게 된 이유를 풍수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아울러 천장의 ‘정치적·풍수적’ 배경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조선왕조실록, 홍제전서, 일성록 등의 문헌을 토대로 천장결정 전과 후의 풍수적 판단을 대비하고 실제 현지조사를 통해 문헌과 실지(實地)의 부합여부를 확인하였다.
    思悼世子墓所都監儀軌에 영우원은 풍수적 길지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천장이 결정되기 전까지도 정조는 풍수적으로 길지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장이 결정된 후에는 영우원을 풍수적으로 흉지(凶地)라고 함으로써 동일한 장소에 대한 풍수적 판단이 완전히 상반된 평가를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초장 시 풍수사가 작성한 기록과 弘齋全書를 토대로 한 풍수 이론적 판단과 현장 분석을 통해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 영우원은 고전과 비교적 부합되는 장소로 초기 풍수사들의 판단이 대체적으로 풍수이론과 현지지형에 맞게 판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조는 地理新法 등 각종 이기론을 동원하고 제원을 달리하여 현지지형과 상이하게 판단하는 부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결국 영우원을 풍수적 흉지라고 결론내림으로써 천장의 명분을 만들어 나간 것이라 볼 수 있다.
    융릉에 대해서는 정조를 비롯한 대신들과 많은 풍수사들이 용혈사수가 진선진미(盡善盡美)하여 흠잡을 곳이 없는 길지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현장확인 결과 고전과 부합되지 않은 부분 또한 일부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길지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융릉은 과거 두 번이나 왕릉으로 거론되었을 정도로 긍정적인 풍수판단이 있었던 곳이다. 정조는 융릉조성 후 끊임없이 수목 식재와 만년제(萬年堤) 건설, 청룡과 안산 등에 대한 보토 등을 통해 비보작업을 하였다. 이는 정조 또한 융릉에 흠결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결국 비보 등으로 보완하여 융릉을 명당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정조는 영우원을 천장하기 위해 풍수를 공부 하였으며 천장 시 그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천장 과정에서 본 정조의 풍수 특징은 이기론 보다는 형세를 위주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형세와 이기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으로 보아 이기론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좌향을 결정함에 있어서도 패철과 방위에 의한 결정보다는 형세와 천성(天星)에 입각하여 결정함으로서 과거 왕릉과는 다른 새로운 풍수 기법을 적용하고 있었다. 또한 천광 및 혈의 깊이에 있어서는 토색(土色)과 토성(土性)에 따라 신축성 있게 적용하고 있었다. 이는 기맥선(氣脈線)을 타기 위해 요량(料量)하여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또 재혈(裁穴)을 중요시 여겼으며, 택일 부분에 있어서는 이장지를 결정한 뒤 연운과 산운의 적합한 때를 위해 13년을 기다릴 만큼 대단히 중요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우원의 풍수적 조건에 대해 초기 풍수사의 판단이 상당부분 풍수이론에 부합되었고, 형세 적으로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융릉으로 천장을 단행한 이유는 크게 정치적 배경과 풍수적 배경이 작용하고 있었다.
    먼저 정치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도세자의 추숭을 염두에 둔 천장이라고 볼 수 있다. 정조는 즉위 하면서 양부 효장세자는 추숭하였지만 정작 생부 사도세자는 선왕 영조와의 약속 등으로 추숭치 못하였다. 따라서 추후 추숭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왕릉에 걸맞게 명당으로 회자되고 있는 길지에 조성하였다. 이는 철저히 계획된 것이며 고도의 정치술이 가미된 풍수의 정치적 활용이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정통성 확보와 왕권강화를 위한 천장이었다. 능침은 왕실의 권위와 왕권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직ㆍ간접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즉위하였다.
    따라서 세손 시절에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자료들을 세초하여 줄 것을 요청하는 등 소극적으로 대응하였으며, 즉위 후에도 영우원이 길지라고 하면서 관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정조는 비밀리에 천장을 준비하였고, 정국을 완전히 장악한 정조 13년 융릉으로의 천장을 단행하였고 왕릉에 버금갈 정도로 묘를 조성하였다. 이는 결국 왕권 회복과 아울러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셋째, 왕업의 연장을 위해 명당 길지를 찾아 자손번성과 부귀영화를 도모하고 왕업의 계승(繼承)과 국운의 창성(昌盛)을 기하고자 천장을 도모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풍수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영우원의 흉지론이다. 영우원은 선정과정에서 길지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하였고, 배봉산 주변에 대한 풍문은 정조로 하여금 흉지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각종 이기론을 동원하여 무난한 영우원을 흉지화 시키고 이를 증명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둘째, 융릉 명당론이다. 융릉은 왕릉으로 거론 되었던 지역이며 선인(先人)들이 극찬할 정도로 풍수적 장점이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조상숭배와 부모에 대한 효심에 근거하여 흉지에서 길지로 이장한다고 하여, 천장에 대한 반대의 명분을 차단하였던 것이다.
    셋째, 불운 극복을 위한 풍수적 대안 이였다고 할 수 있다. 문효세자가 정조 10년에 사망함에 따라 천장당시 정조는 후사가 끊어진 상태였다. 따라서 명당 길지로의 천장을 통해 풍수적 발복을 기대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종합적으로 형기론으로 보았을 때 그다지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초장지에 대해 정조측은 각종 이기론을 동원하여 문제가 있는 땅으로 증명해 나갔다. 이는 결국 천장을 결심하고 천장을 위한 근거로서 영우원의 풍수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천장은 사전 치밀하게 준비된 계획된 천장 이였다. 천장의 배경에는 생부에 대한 추숭과 왕권강화, 왕업연장 등 정치적 배경과, 조상숭배와 효심에 기인한 흉지에서 길지로의 이장, 그리고 풍수적 발복을 염원하는 풍수적 배경이 혼합된 풍수의 정치적 활용 이였다고 볼 수 있다.
    번역하기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 22대 왕인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가 영우원에서 수원 화성 소재 융릉으로 천장하게 된 이유를 풍수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아울러 천장의 ‘정치적·풍수적’ 배...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 22대 왕인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가 영우원에서 수원 화성 소재 융릉으로 천장하게 된 이유를 풍수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아울러 천장의 ‘정치적·풍수적’ 배경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조선왕조실록, 홍제전서, 일성록 등의 문헌을 토대로 천장결정 전과 후의 풍수적 판단을 대비하고 실제 현지조사를 통해 문헌과 실지(實地)의 부합여부를 확인하였다.
    思悼世子墓所都監儀軌에 영우원은 풍수적 길지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천장이 결정되기 전까지도 정조는 풍수적으로 길지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장이 결정된 후에는 영우원을 풍수적으로 흉지(凶地)라고 함으로써 동일한 장소에 대한 풍수적 판단이 완전히 상반된 평가를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초장 시 풍수사가 작성한 기록과 弘齋全書를 토대로 한 풍수 이론적 판단과 현장 분석을 통해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 영우원은 고전과 비교적 부합되는 장소로 초기 풍수사들의 판단이 대체적으로 풍수이론과 현지지형에 맞게 판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조는 地理新法 등 각종 이기론을 동원하고 제원을 달리하여 현지지형과 상이하게 판단하는 부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결국 영우원을 풍수적 흉지라고 결론내림으로써 천장의 명분을 만들어 나간 것이라 볼 수 있다.
    융릉에 대해서는 정조를 비롯한 대신들과 많은 풍수사들이 용혈사수가 진선진미(盡善盡美)하여 흠잡을 곳이 없는 길지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현장확인 결과 고전과 부합되지 않은 부분 또한 일부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길지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융릉은 과거 두 번이나 왕릉으로 거론되었을 정도로 긍정적인 풍수판단이 있었던 곳이다. 정조는 융릉조성 후 끊임없이 수목 식재와 만년제(萬年堤) 건설, 청룡과 안산 등에 대한 보토 등을 통해 비보작업을 하였다. 이는 정조 또한 융릉에 흠결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결국 비보 등으로 보완하여 융릉을 명당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정조는 영우원을 천장하기 위해 풍수를 공부 하였으며 천장 시 그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천장 과정에서 본 정조의 풍수 특징은 이기론 보다는 형세를 위주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형세와 이기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으로 보아 이기론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좌향을 결정함에 있어서도 패철과 방위에 의한 결정보다는 형세와 천성(天星)에 입각하여 결정함으로서 과거 왕릉과는 다른 새로운 풍수 기법을 적용하고 있었다. 또한 천광 및 혈의 깊이에 있어서는 토색(土色)과 토성(土性)에 따라 신축성 있게 적용하고 있었다. 이는 기맥선(氣脈線)을 타기 위해 요량(料量)하여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또 재혈(裁穴)을 중요시 여겼으며, 택일 부분에 있어서는 이장지를 결정한 뒤 연운과 산운의 적합한 때를 위해 13년을 기다릴 만큼 대단히 중요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우원의 풍수적 조건에 대해 초기 풍수사의 판단이 상당부분 풍수이론에 부합되었고, 형세 적으로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융릉으로 천장을 단행한 이유는 크게 정치적 배경과 풍수적 배경이 작용하고 있었다.
    먼저 정치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도세자의 추숭을 염두에 둔 천장이라고 볼 수 있다. 정조는 즉위 하면서 양부 효장세자는 추숭하였지만 정작 생부 사도세자는 선왕 영조와의 약속 등으로 추숭치 못하였다. 따라서 추후 추숭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왕릉에 걸맞게 명당으로 회자되고 있는 길지에 조성하였다. 이는 철저히 계획된 것이며 고도의 정치술이 가미된 풍수의 정치적 활용이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정통성 확보와 왕권강화를 위한 천장이었다. 능침은 왕실의 권위와 왕권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직ㆍ간접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즉위하였다.
    따라서 세손 시절에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자료들을 세초하여 줄 것을 요청하는 등 소극적으로 대응하였으며, 즉위 후에도 영우원이 길지라고 하면서 관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정조는 비밀리에 천장을 준비하였고, 정국을 완전히 장악한 정조 13년 융릉으로의 천장을 단행하였고 왕릉에 버금갈 정도로 묘를 조성하였다. 이는 결국 왕권 회복과 아울러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셋째, 왕업의 연장을 위해 명당 길지를 찾아 자손번성과 부귀영화를 도모하고 왕업의 계승(繼承)과 국운의 창성(昌盛)을 기하고자 천장을 도모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풍수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영우원의 흉지론이다. 영우원은 선정과정에서 길지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하였고, 배봉산 주변에 대한 풍문은 정조로 하여금 흉지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각종 이기론을 동원하여 무난한 영우원을 흉지화 시키고 이를 증명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둘째, 융릉 명당론이다. 융릉은 왕릉으로 거론 되었던 지역이며 선인(先人)들이 극찬할 정도로 풍수적 장점이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조상숭배와 부모에 대한 효심에 근거하여 흉지에서 길지로 이장한다고 하여, 천장에 대한 반대의 명분을 차단하였던 것이다.
    셋째, 불운 극복을 위한 풍수적 대안 이였다고 할 수 있다. 문효세자가 정조 10년에 사망함에 따라 천장당시 정조는 후사가 끊어진 상태였다. 따라서 명당 길지로의 천장을 통해 풍수적 발복을 기대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종합적으로 형기론으로 보았을 때 그다지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초장지에 대해 정조측은 각종 이기론을 동원하여 문제가 있는 땅으로 증명해 나갔다. 이는 결국 천장을 결심하고 천장을 위한 근거로서 영우원의 풍수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천장은 사전 치밀하게 준비된 계획된 천장 이였다. 천장의 배경에는 생부에 대한 추숭과 왕권강화, 왕업연장 등 정치적 배경과, 조상숭배와 효심에 기인한 흉지에서 길지로의 이장, 그리고 풍수적 발복을 염원하는 풍수적 배경이 혼합된 풍수의 정치적 활용 이였다고 볼 수 있다.

    더보기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dentify the geomantic and political background of the relocation of the grave for Prince Sado(思悼世子), the father of the 22th king Jeong-jo of the Joseon Dynasty.
    It was Youngwoowon(永祐園) where Prince Sado was buried for the first time. This place was said to be a good site from a perspective of Fengshui when it was selected as the grave site. But it changed into the inauspicious site in terms of Fengshui after Jeong-jo was enthroned. So the grave site for Prince Sado was relocated to Yungneung(隆陵) located in Hwaseong(華城), Suwon(水原) City.
    Result of on-spot survey show that Youngwoowon(永祐園) was made in accordance with the Fengshui theory. But King Jeong-jo concluded that it was the site that ran counter to Fengshui from a perspective of the compass school.
    Yungneung(隆陵) is the site that King Jeong-jo and many Fengshui specialists judged to be a good one in terms of Fengshui. Field study show that some part of it runs counter to the classical theory but it generally is a good site from a perspective of Fengshui.
    King Jeong-jo studied Fengshui for the purpose of relocating the grave site for Prince Sado to another. It could be proved through several literatures in the process of relocating the grave site for his father to Yungneung(隆陵). In particular, Youngwoowon(永祐園) is the site judged to have few problems from a perspective of the form school. But it is judged that he proceeded to make the grounds for grave relocation while proving it to be the bad site in accordance with the compass school.
    Results of this study showed the following geomantic background related to the relocation of the grave site for Prince Sado:
    The first background for the grave relocation was to exalt his father, Princess Sado, to the actual kingship. That is, he relocated the grave site for his father not actually enthroned to Yungneung(隆陵) that was auspicious in terms of Fengshui and made to an extent equal to the royal mausoleum. For this purpose, King Jeong-jo exalted his father, Prince Sado, to the position tantamount to the kingship.
    The second background for the grave relocation was to secure the reinforcement and legitimacy of his kingship. That is, King Jeong-jo became the king when Noron(老論) driving his father into death had a great political influence. So he behaved irrespectively of his father's death in the days of his princeship and assumed a careful attitude for a given period even after he was enthroned as the king. But he made clandestine preparation for the relocation of the grave site for his father for that period. His kingship was reinforced as he relocated the grave site for his father to Yungneung(隆陵) 13 years after his enthronement of the king.
    The third background for the grave relocation was to maintain the Joseon Dynasty. There is a logic of Fengshui that the posterity prospers if the grave site for the father is good. Accordingly, his attempt to relocate the grave site for his father to the good one was for both King Jeong-jo and his son to receive a good influence.
    On the one hand, there was the following geomantic backgrounds: First, it was contended that Youngwoowon(永祐園) was the bad site in terms of Fengshui. Actually, Youngwoowon(永祐園) belonged to the good site from a perspective of the form school. But King Jeong-jo could secure the justification for relocating this grave site to a good one by adopting the compass school.
    Second, Yungneung(隆陵) is the site that is good in terms of Fengshui. This site belonged to the good one in terms of Fengshui as it was the one which had been mentioned as the grave site for previous kings. Accordingly, he justified the relocation of the grave site for his father from the bad one to the good one for the cause of filial piety towards parents.
    Third, King Jeong-jo's attempt to relocate the grave site for his father was to eliminate his own bad fortune. That is, he had no son who succeeded to his kingship as his son died in childhood. Accordingly, he had a geomantic wish to get the son who could succeed to his kingship by getting the geomantic fortune through the relocation of the grave site for his father.
    In conclusion, he made clandestine preparation for the relocation of the grave site for his father in advance. The background for it included filial piety towards his father, an attempt to exalt his unenthroned father to the position tantamount to the kingship, a wish to maintain the Joseon Dynasty for a long time by relocating the grave site for his father to the good one and thereby exerting a good influence on both himself and his son, and so on. Accordingly, the relocation of the grave site for Prince Sado was that which considered even the political factor as well as the geomantic factor.
    번역하기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dentify the geomantic and political background of the relocation of the grave for Prince Sado(思悼世子), the father of the 22th king Jeong-jo of the Joseon Dynasty. It was Youngwoowon(永祐園) where Prince Sado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dentify the geomantic and political background of the relocation of the grave for Prince Sado(思悼世子), the father of the 22th king Jeong-jo of the Joseon Dynasty.
    It was Youngwoowon(永祐園) where Prince Sado was buried for the first time. This place was said to be a good site from a perspective of Fengshui when it was selected as the grave site. But it changed into the inauspicious site in terms of Fengshui after Jeong-jo was enthroned. So the grave site for Prince Sado was relocated to Yungneung(隆陵) located in Hwaseong(華城), Suwon(水原) City.
    Result of on-spot survey show that Youngwoowon(永祐園) was made in accordance with the Fengshui theory. But King Jeong-jo concluded that it was the site that ran counter to Fengshui from a perspective of the compass school.
    Yungneung(隆陵) is the site that King Jeong-jo and many Fengshui specialists judged to be a good one in terms of Fengshui. Field study show that some part of it runs counter to the classical theory but it generally is a good site from a perspective of Fengshui.
    King Jeong-jo studied Fengshui for the purpose of relocating the grave site for Prince Sado to another. It could be proved through several literatures in the process of relocating the grave site for his father to Yungneung(隆陵). In particular, Youngwoowon(永祐園) is the site judged to have few problems from a perspective of the form school. But it is judged that he proceeded to make the grounds for grave relocation while proving it to be the bad site in accordance with the compass school.
    Results of this study showed the following geomantic background related to the relocation of the grave site for Prince Sado:
    The first background for the grave relocation was to exalt his father, Princess Sado, to the actual kingship. That is, he relocated the grave site for his father not actually enthroned to Yungneung(隆陵) that was auspicious in terms of Fengshui and made to an extent equal to the royal mausoleum. For this purpose, King Jeong-jo exalted his father, Prince Sado, to the position tantamount to the kingship.
    The second background for the grave relocation was to secure the reinforcement and legitimacy of his kingship. That is, King Jeong-jo became the king when Noron(老論) driving his father into death had a great political influence. So he behaved irrespectively of his father's death in the days of his princeship and assumed a careful attitude for a given period even after he was enthroned as the king. But he made clandestine preparation for the relocation of the grave site for his father for that period. His kingship was reinforced as he relocated the grave site for his father to Yungneung(隆陵) 13 years after his enthronement of the king.
    The third background for the grave relocation was to maintain the Joseon Dynasty. There is a logic of Fengshui that the posterity prospers if the grave site for the father is good. Accordingly, his attempt to relocate the grave site for his father to the good one was for both King Jeong-jo and his son to receive a good influence.
    On the one hand, there was the following geomantic backgrounds: First, it was contended that Youngwoowon(永祐園) was the bad site in terms of Fengshui. Actually, Youngwoowon(永祐園) belonged to the good site from a perspective of the form school. But King Jeong-jo could secure the justification for relocating this grave site to a good one by adopting the compass school.
    Second, Yungneung(隆陵) is the site that is good in terms of Fengshui. This site belonged to the good one in terms of Fengshui as it was the one which had been mentioned as the grave site for previous kings. Accordingly, he justified the relocation of the grave site for his father from the bad one to the good one for the cause of filial piety towards parents.
    Third, King Jeong-jo's attempt to relocate the grave site for his father was to eliminate his own bad fortune. That is, he had no son who succeeded to his kingship as his son died in childhood. Accordingly, he had a geomantic wish to get the son who could succeed to his kingship by getting the geomantic fortune through the relocation of the grave site for his father.
    In conclusion, he made clandestine preparation for the relocation of the grave site for his father in advance. The background for it included filial piety towards his father, an attempt to exalt his unenthroned father to the position tantamount to the kingship, a wish to maintain the Joseon Dynasty for a long time by relocating the grave site for his father to the good one and thereby exerting a good influence on both himself and his son, and so on. Accordingly, the relocation of the grave site for Prince Sado was that which considered even the political factor as well as the geomantic factor.

    더보기

    목차 (Table of Contents)

    • 1. 서론 1
    • 1. 연구의 배경과 목적 1
    • 2. 연구의 범위와 방법 4
    • 3. 선행연구의 검토 5
    • 2. 왕릉 선정 절차와 천장의 사례 9
    • 1. 서론 1
    • 1. 연구의 배경과 목적 1
    • 2. 연구의 범위와 방법 4
    • 3. 선행연구의 검토 5
    • 2. 왕릉 선정 절차와 천장의 사례 9
    • 1. 왕릉 선정 절차와 규범 9
    • 2. 천장 사례와 풍수 18
    • 3. 영우원의 풍수적 해석 35
    • 1, 사도세자와 영우원 35
    • 2. 영우원 초장시 풍수사의 주장 41
    • 3. 영우원에 대한 정조의 주장 51
    • 4. 현장 분석을 통한 풍수적 해석 63
    • 4. 융릉의 풍수적 해석 및 담론구성 77
    • 1. 지리적 조건 77
    • 2. 융릉에 대한 기존 풍수논의 78
    • 2.1. 선조 능침지역으로서의 논의 79
    • 2.2. 효종 능침지역으로서의 논의 82
    • 3. 융릉 천장과 풍수논의 86
    • 4. 융릉의 현장분석 146
    • 5. 융릉 천장의 배경과 정조의 풍수인식 175
    • 1. 천장을 통해본 정조의 풍수인식과 변화 175
    • 1.1. 문헌을 통해 본 정조의 풍수인식 176
    • 1.2. 영우원과 융릉에 대한 정조의 풍수인식의 변화 181
    • 1.3. 정조의 천장계획과 천장에 대한 인식 192
    • 2. 정조의 풍수인식 196
    • 2.1. 정조의 풍수공부 196
    • 2.2. 형세와 이기에 대한 인식 198
    • 2.3. 좌향론 203
    • 2.4. 천광 및 혈의 깊이 207
    • 2.5. 분금론 212
    • 2.6. 택일 213
    • 3. 천장의 정치적·풍수적 배경 215
    • 3.1. 천장의 정치적 배경 215
    • 3.2. 천장의 풍수적 배경 223
    • 6. 결론 232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1. http://jsg, 장서각, aks.ac.kr/,

    2. 『고산유고』, 이상현, 3, 한국고전번역원, , 2015

    3. 『오행대의』, 김수길, 윤상철, 상, 대유학당, , 2012

    4. 『왕의행차』, 정해득, 이현진, 화성시, , 2014

    5. 『주역통해』, 신성수, (도)대학서림, , 2006

    6. 『천문류초』, 김수철, 윤상철, 대유학당, 대유학당, , 2013

    7. 완역 풍수경전, 장성규, 문예원, 문예원, , 2010

    8. 역, 『明山論』, 김두규, 비봉출판사, , 2010

    9. 역, 『雪心賦』, 신평, 관음출판사, , 1997

    10. 『地理啖蔗錄』, 원수정, 무릉출판유한공사, , 1991

    1. http://jsg, 장서각, aks.ac.kr/,

    2. 『고산유고』, 이상현, 3, 한국고전번역원, , 2015

    3. 『오행대의』, 김수길, 윤상철, 상, 대유학당, , 2012

    4. 『왕의행차』, 정해득, 이현진, 화성시, , 2014

    5. 『주역통해』, 신성수, (도)대학서림, , 2006

    6. 『천문류초』, 김수철, 윤상철, 대유학당, 대유학당, , 2013

    7. 완역 풍수경전, 장성규, 문예원, 문예원, , 2010

    8. 역, 『明山論』, 김두규, 비봉출판사, , 2010

    9. 역, 『雪心賦』, 신평, 관음출판사, , 1997

    10. 『地理啖蔗錄』, 원수정, 무릉출판유한공사, , 1991

    11. 『풍수학사전』, 김두규, 비봉출판사, 비봉출판사, , 2005

    12. 『율려와 주역』, 정해임, 소강, , 2011

    13. 역, 『地理五訣』, 신평, 동학사, , 2009

    14. 역, 『地理新法』, 김두규, 비봉출판사, , 2005

    15. 역, 『葬書譯註』, 허찬구, 비봉출판사, , 2015

    16. 『대산주역강의』, 김석진, 3, (주)도서출판한길사, , 2012

    17. 『정통풍수지리』, 정경연, 평단문화사, , 2008

    18. 역, 『신나경연구』, 신평, 동학사, , 2013

    19. 역, 『한국의 풍수』, 정현우, 명문당, , 2009

    20. 『풍수지리학 연구』, 천인호, 한국학술정보(주), , 2012

    21. 역, 『풍수지리요강』, 장백기, 황정원, 자유문고, , 2014

    22. 『地理八十八向眞訣』, 김명제, 명문당, , 2006

    23. 『기문풍수지리연구』, 강두열, 원광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 2017

    24. 역, 『撼龍經,擬龍經』, 김두규, 비봉출판사, , 2009

    25. 역, 『청오경,금낭경』, 최창조, 민음사, , 2012

    26. 『조선왕실의 상장례』, 이현진, 신구문화사, , 2017

    27. 역, 『人子須知』 전,후, 김동규, 명문당, , 2008

    28. 역, 『捉脈賦,洞林照膽』, 김두규, 비봉출판사, , 2015

    29. 『왕의 죽음, 정조의 국장』, 이현진, 글항아리, 글항아리, , 2015

    30. 「왕릉은 왕권의 상징이다」, 정종수, 『밤나무골이야기』 14, (사)율곡연구 원, pp.51-60, , 2004

    31. 「정조와 정조대 제반정책」, 정옥자,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서울학연구』 51, 서울시립대학교 서 울학연구소, , pp.1-24, , 2013

    32. 「조선시대 국상의례 연구」, 안희재, 국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 2010

    33. 『왕릉풍수와 조선의 역사』, 장영훈, 대원사, , 2015

    34. 편저, 『중국역대인명사전』, 임종욱, 이화문화사, , 2010

    35. 『조선후기노소당쟁사연구』, 이은순, 중앙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 1985

    36. 역, 『착맥부,동림조담 역해』, 홍성서, 양형석, 한국학술정보(주), , 2013

    37. 「영조조 무신난에 관한 고찰」, 오갑균, 『역사교육』 21, 역사교육연구회, , pp.65-99, , 1977

    38. 「효종대왕 영릉의 택산 논쟁」, 김병헌, 조선시대사학회, 『조선시대사학보』 69, 조선시대사 학회, , pp.137-166, , 2014

    39. 『鐫重 地理天機會元』, 寶蓮閣, 李福東, 불기2528,

    40.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김두규, 궁리출판, 궁리출판사, , 2000

    41. 『조선시대 음양과에 관한 연구』, 이수동, 원광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 문, , 2012

    42. 역, 『風水地理 明堂全書』, 명문당, 한송계, (확인), , 1975

    43. 역, 『상역신증참찬비전천기대요』, 권성덕, 남산당, , 1983

    44. 『조선시대 국왕의 죽음과 상장례』, 이 욱, 민속원, , 2017

    45. 「『국조오례통편』의 자료적 특징」, 김문식, 『한국문화연구』 12, 이화여자 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pp.65-106, , 2007

    46. 「정조대 정치체계 운영과 개혁정책」, 김준혁,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7(2),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 pp.59-84, , 2008

    47. 「조선시대 국가전례서의 편찬 양상」, 김문식,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1, 한국학중앙연 구원, , pp.79-104, , 2009

    48. 『풍수형국론과 지명의 상관성 연구』, 이 욱, 동방대학원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 2010

    49. 「영조대 무신난 연구의 현황과 과제」, 고수연, 『역사와 담론』 39, 호서사 학회, , pp.177-211, , 2004

    50. 순조대 정국의 동향과 시전정책의 추이, 김정자(Kim, Jeong-ja), 한국역사연구회, 『역사와 현실』 94, 한 국역사연구회, , pp.285-319, , 2014

    51. "정조의 영우원,현륭원 원행에 대한 고찰", 정해득 ( Hai Deok Chung ), 조선시대사학회, 『조선시대사학보』 75, 조선시대사학회, , pp. 369-404, , 2015

    52. 明宗代乙巳士禍와『續武定寶鑑』의 편찬, 김영두(Kim Youngdoo),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116, 한 국사학회, , pp.41-69, , 2014

    53. 「조선 전기 천릉의 과정과 정치적 성격」, 신제훈, 조선시대사학회, 『조선시대사학보』 58, 조선시대사학회, , pp.35-89, , 2011

    54. 「용주사의 입지환경과 정조의 풍수활용」, 박정해, 동북아시아문화학회, 『동북아문화여구』 44, 동북아시아문화학회, , pp.91-108, , 2015

    55. 「세종대~단종대의 정치 변동과 풍수지리」, 이정주, 한국역사민속학회, 『역사민속학』 36, 한 국역사민속학회, , pp.125-160, , 2011

    56. “풍수지리설의 본질과 기원 및 그 자연관”, 윤홍기, 일조각, 『한국사시민강좌』 14, 일조각, pp.187-204, , 1994

    57. 「18세기 후반 국가전례의 정비와 춘관통고」, 김지영, 일지사(한국학보), 『한국학보』 30(1), 일지사, , pp.95-113, , 2004

    58. 「수원부로의 장헌세자 원침천봉 배경연구」, 이달호, 『상명사학』 7, , pp.69-93, , 1999

    59. 「조선시대 정조대의 수원육성과 천원시도」, 김성윤, 『역사와세계』 20, 효 원사학회, , pp.123-150, , 1996

    60. 「명종 친정기의 권력관계 변화와 정국동향」, 한춘순, 『조선시대사학보』 12, 조선시대사학회, , pp.1-42, , 2003

    61. 「풍수향법의 논리체계와 의미에 관한 연구」, 조인철, 성균관대학교 대학 원 박사학위논문, , 2006

    62. 「정조대 사도세자 추숭 예전 논쟁의 재검토」, 김지영, 『한국사연구』 63, 한국사연구회, , pp.337-377, , 2013

    63. 「임진왜란 중 독산성 전투와 그 역사적 의의」, 심승구,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37, 한국학연구소, , pp.121-154, , 2012

    64. 「여성 한시문에 나타난 “딸”의 형상화 고찰」, 김경숙, 한국고전여성문학회, 『한국고전여성문학 연구』 24, 한국고전여성문학학회, , pp.125-158, , 2012

    65. (유)한중교육문화연구원 편역, 『사주와 한의학』, 종의명, 여강출판사, , 1995

    66. 「영조 6년(경오년) 모반 사건의 내용과 그 성격」, 조윤선, 『조선시대사학 보』 42, 조선시대사학회, , pp.191-236, , 2007

    67. “사도세자 추모 공간의 위상 변화와 영우원 천장”, 최성환, 조선시대사학회, 『조선시대사학 보』 60, 조선시대사학회, , pp.139-181, , 2012

    68. 「조선왕릉 석실 및 능상구조의 변천에 관한 연구」, 김상협,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 2007

    69. 「영조대 왕실 상장례의 연구와 『국조상례보편』」, 이현진, 『한국사상사학』 37, 한국사상사학회, , pp.113-155, , 2011

    70. 『조선왕릉의 풍수지리적 해석과 계량적 분석연구』, 이재영, 동방대학원대학교, 동방대학원 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 2009

    71. 「17,8세기 서울 주변의 왕릉 축조 관리 및 천릉논의」, 이희중, 『서울학연 구』 17,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 pp.1-52, , 2001

    72. 「현륭원 입지 선정과 원침계획에서의 정조의 역할」, 김동욱, 우희중, 『건 축역사연구』 17(5), 한국건축역사학회, , pp.23-37, , 2008

    73. 『세계유산 조선왕릉의 입지와 활용방안에 관한 연구』, 박경정, 건국대학 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 2015

    74. 「영조후궁 영빈이씨의 생애와 위상」, 『역사와담론』 76, 이미선, 호서사학 회, , pp.121-159, , 2015

    75. 「현륭원 천원과 화성건설을 통해 본 정조의 풍수지리관」, 성동환, 『한국 사상사학』 17(4), 한국사상사학회, , pp.121-167, , 2001

    76. 「1789(정조 13) 영우원에서 현륭원으로의 천원 절차와 의미」, 이현진, 『 서울학연구』 51, 서울학연구소, , pp.85-110, , 2013

    77. 「철종대 정국과 권력집중 양상(임술민란 배경과 관련하여」, 임혜련, 『한국 사학보』 49, 고려사학회, , pp.121-158, , 2012

    78. 「『도로고』,『여지고』의 도로체계와 『동역고』의 비교연구」, 류명한, 부산대 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 2012

    더보기

    분석정보

    View

    상세정보조회

    0

    Usage

    원문다운로드

    0

    대출신청

    0

    복사신청

    0

    EDDS신청

    0

    동일 주제 내 활용도 TOP

    더보기

    주제

    연도별 연구동향

    연도별 활용동향

    연관논문

    연구자 네트워크맵

    공동연구자 (7)

    유사연구자 (20) 활용도상위20명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