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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孝宗大王 寧陵의 擇山 논쟁 = The controversy on site selection of Hyojong-Yungne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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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As Hyojong, 17th king of Joseon dynasty, died on May 4th, 1659, Sanreungdogam began to look for an appropriate mountain for a royal tomb. After looking for more than 30 places at first search, they concentrated on Suwon and Hongjedong. During a discussion on these two options, Gang Yoon, the Minister of Culture and Education, insisted on Suwon, while geomancers headed by Sundo Yoon and vassals including Siyeol Song and joongil Song insisted on Hongjedong. On Gang Yoon's contention for Suwon, Hyeonjong's will, which avoided Hongjedong because of long distance, was reflected. Though both Hongjedong and Suwon are lucky places, Sundo Yoon kept his argument on Hongjedong in terms of the theory of divination based on topography. On the other hand, vassals didn't want to concede their point about Suwon's incongruity. As Hyeonjong picked Suwon, vassals desperately opposed and suggested Gunwonreung for an alternative. During this, Sundo Yoon expressed his thought that Suwon is a better choice rather than Gunwonreung though he rarely participated in due to health issues. The extreme argument between Hyeonjong who maintained his opinion on Suwon and vassals who wanted Suwon for the last and suggested Hongjedong finally ended as Gunwonreung was selected which was led by Joongil Song's presentation about Suwon's secret rec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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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s Hyojong, 17th king of Joseon dynasty, died on May 4th, 1659, Sanreungdogam began to look for an appropriate mountain for a royal tomb. After looking for more than 30 places at first search, they concentrated on Suwon and Hongjedong. During a discus...

    As Hyojong, 17th king of Joseon dynasty, died on May 4th, 1659, Sanreungdogam began to look for an appropriate mountain for a royal tomb. After looking for more than 30 places at first search, they concentrated on Suwon and Hongjedong. During a discussion on these two options, Gang Yoon, the Minister of Culture and Education, insisted on Suwon, while geomancers headed by Sundo Yoon and vassals including Siyeol Song and joongil Song insisted on Hongjedong. On Gang Yoon's contention for Suwon, Hyeonjong's will, which avoided Hongjedong because of long distance, was reflected. Though both Hongjedong and Suwon are lucky places, Sundo Yoon kept his argument on Hongjedong in terms of the theory of divination based on topography. On the other hand, vassals didn't want to concede their point about Suwon's incongruity. As Hyeonjong picked Suwon, vassals desperately opposed and suggested Gunwonreung for an alternative. During this, Sundo Yoon expressed his thought that Suwon is a better choice rather than Gunwonreung though he rarely participated in due to health issues. The extreme argument between Hyeonjong who maintained his opinion on Suwon and vassals who wanted Suwon for the last and suggested Hongjedong finally ended as Gunwonreung was selected which was led by Joongil Song's presentation about Suwon's secret rec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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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1659년 5월 4일 조선의 17대 孝宗이 승하하자 산릉도감에서는 경기 일원의 吉地를 대상으로 山陵을 쓰기에 적합한 산을 찾아 나섰다. 1차 看審에서 30여 곳 이상을 살펴본 결과 수원부와 弘濟洞으로 압축되었다. 이 두 곳을 두고 논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예조판서 尹絳은 수원부를 주장하였으나, 현장에서 간심을 진행한 尹善道를 비롯한 지관들, 宋時烈․宋浚吉을 비롯한 대신들은 홍제동을 주장하였다. 윤강이 수원부를 주장한 데는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홍제동을 기피한 顯宗의 뜻이 반영되어 있었다. 윤선도는 홍제동과 수원부 모두 千載一遇의 吉地이나 풍수적 여건만을 고려할 때는 홍제동이 상위라는 주장을 견지했다. 그런가 하면 대신들은 서울의 關防이자 군사적 요충지인 수원부는 결코 國陵에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수원부로 결정이 나자 대신들은 이를 극력 반대하며 수원부 대신 건원릉 內岡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윤선도는 병으로 거의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수원부와 건원릉 내강의 풍수적 우열에서 수원부가 상위임을 주장하였다. 시종일관 수원부를 주장한 현종과 수원부만을 피하고자 홍제동을 주장했다가 다시 건원릉 내강을 주장한 대신들과의 극한 대립은 宋浚吉이 제시한 수원 秘記로 현종이 뜻을 꺾으며 건원릉 내강으로 결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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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59년 5월 4일 조선의 17대 孝宗이 승하하자 산릉도감에서는 경기 일원의 吉地를 대상으로 山陵을 쓰기에 적합한 산을 찾아 나섰다. 1차 看審에서 30여 곳 이상을 살펴본 결과 수원부와 弘濟洞...

    1659년 5월 4일 조선의 17대 孝宗이 승하하자 산릉도감에서는 경기 일원의 吉地를 대상으로 山陵을 쓰기에 적합한 산을 찾아 나섰다. 1차 看審에서 30여 곳 이상을 살펴본 결과 수원부와 弘濟洞으로 압축되었다. 이 두 곳을 두고 논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예조판서 尹絳은 수원부를 주장하였으나, 현장에서 간심을 진행한 尹善道를 비롯한 지관들, 宋時烈․宋浚吉을 비롯한 대신들은 홍제동을 주장하였다. 윤강이 수원부를 주장한 데는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홍제동을 기피한 顯宗의 뜻이 반영되어 있었다. 윤선도는 홍제동과 수원부 모두 千載一遇의 吉地이나 풍수적 여건만을 고려할 때는 홍제동이 상위라는 주장을 견지했다. 그런가 하면 대신들은 서울의 關防이자 군사적 요충지인 수원부는 결코 國陵에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수원부로 결정이 나자 대신들은 이를 극력 반대하며 수원부 대신 건원릉 內岡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윤선도는 병으로 거의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수원부와 건원릉 내강의 풍수적 우열에서 수원부가 상위임을 주장하였다. 시종일관 수원부를 주장한 현종과 수원부만을 피하고자 홍제동을 주장했다가 다시 건원릉 내강을 주장한 대신들과의 극한 대립은 宋浚吉이 제시한 수원 秘記로 현종이 뜻을 꺾으며 건원릉 내강으로 결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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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김충현, "효종 영릉의 조성과 능제의 변화" 7 : 2012

    2 정해득, "정조시대 현륭원 조성과 수원" 신구문화사 2009

    3 "顯宗實錄"

    4 "近思錄"

    5 "眉叟記言"

    6 "燃藜室記述"

    7 이달호, "水原府로의 莊獻世子 園寢 遷奉 背景 硏究" 7 : 1999

    8 "桐巢漫錄"

    9 "宋子大全"

    10 "孤山遺稿"

    1 김충현, "효종 영릉의 조성과 능제의 변화" 7 : 2012

    2 정해득, "정조시대 현륭원 조성과 수원" 신구문화사 2009

    3 "顯宗實錄"

    4 "近思錄"

    5 "眉叟記言"

    6 "燃藜室記述"

    7 이달호, "水原府로의 莊獻世子 園寢 遷奉 背景 硏究" 7 : 1999

    8 "桐巢漫錄"

    9 "宋子大全"

    10 "孤山遺稿"

    11 "孝宗寧陵山陵都監儀軌"

    12 "國朝寶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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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7-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4-01-01 등재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3-01-01 등재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2-01-01 등재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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