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인기 검색어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한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한국인식과 선교활동

    한글로보기

    https://www.riss.kr/link?id=T13599205

    • 0

      상세조회
    • 0

      다운로드
    서지정보 열기
    • 내보내기
    • 내책장담기
    • 공유하기
    • 오류접수
    인용문이 복사되었습니다.

    부가정보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는 한말 기간에 북미 개신교단들 가운데 선두에서 세계선교 활동을 펼쳤다. 선교부 총무들의 식민주의, 서구문명 우월주의, 정복주의 선교관은 선교정책을 세우는 일에 혼란을 일으켰다. 동아시아 삼국을 예로 들면, 가장 많은 투자로 최대의 심혈을 기울인 중국에서는 교회의 자급률이 극히 낮아 가장 비효율적으로 선교한 사실이 드러났다. 국력이 강하고 사람들이 오만하여 좋아한 일본에서는 선교사들이 무시를 당하고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결과를 얻었다. 가장 기대하지 않았고 비율상 가장 적게 투자한 한국에서는 최고의 실적을 얻었다.
    이런 판단과 정책은 또한 극히 비관적인 한국인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한국에게 독립을 유지할 역량이 없다고 보고 일본정부의 힘을 의지하여 선교기반을 확보하려 했다. 그리하여 일본의 동양맹주론에 부합되게 한국선교 전략을 일본선교 전략에 연결시켰다. 그 일을 위해 한국교회를 식민지 상황에 맞는 종교생활로 이끌려 했다. 그것은 한국교회에서 문명화의 측면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 비정치화를 강조하여 교인들이 타협적, 권력친화적 삶을 살게 하는 것이었다. 재한 선교사들도 비관적인 한국인식을 지녔지만 한국인들과 오래 접촉하고 한국에 대해 조사ㆍ연구하는 동안 다소 수정된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선교부보다 더 낙관하며 적극적, 공세적으로 선교에 임하고 일본에 대해 얼마간 거리를 두는 정신적 바탕을 마련했다.
    선교사들은 1885년부터 선교활동을 펼치면서 선교현장의 여건과 이해관계에 따라 경쟁했다. 그 결과 서울지회와 평양지회가 서로 다른 정책을 지향했고, 한국선교회 전체는 중국ㆍ일본선교와 차별화된 정책을 지향했다. 자급정책을 실패한 중국선교에 대항해서는 자급정책을 철저히 추구하고, 일본의 사회풍조로 난항을 겪는 일본선교에 대항해서는 비기독교적, 반선교사적, 세속적인 영향력에 물들지 않게 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이 두 가지 동기는 한국선교에서 기관사역을 축소하는 경향을 낳았다.
    이 동기들은 영적 노선에게 유리했으나, 그것이 일반화되는 데는 많은 요인들이 작용했다. 첫째로 선교가 서울에서 시작되어 외교가와 정가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 것은 서울의 환경과 정치문제를 피하려는 동기를 발생시켜 영적 노선이 시작되게 했다. 둘째로 한국정부의 약화와 정국 혼란은 친정부적, 현실참여적인 행보를 취한 서울 측의 발언권을 약화시켰다. 셋째로 중국교회와 일본교회가 보여준 부정적인 선례들은 기관사역을 최소화하게 했다. 넷째로 중국, 일본에서와 달리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단체들의 수가 훨씬 적은 것은 영적 노선의 일반화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장로교와 감리교의 6개 선교회들은 러일전쟁 발발 후에 대일 경쟁력의 강화를 위해 쉽게 협력 체제를 형성했다. 그 후 장로교 연합교회인 독노회가 수립되면서 영적 노선은 한국교회의 노선이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점점 커진 것은 그들이 영적 노선의 수호를 위해 노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한국의 식민지화 과정 속에서 영적 노선이 비정치화ㆍ친일노선과 결합하고 마침내 보수주의 노선이 천명되는 뒤틀린 행보를 보였다. 첫째로 러일전쟁 발발 후에 선교사들은 일본에 대항하여 사역을 강화하고 일본 당국자들과 친분을 쌓는 양면 작전을 구사했다. 이렇게 하여 영적 노선이 비정치화ㆍ친일노선과 손잡았다. 둘째로 1905년에 장감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선교 사업의 대일 경쟁력을 강화하려 했을 때 일본통인 북감리교 해리스 감독이 그 구심점이 되었다. 셋째로 을사조약 후에 그들은 부흥운동을 사역강화와 친일, 양면 작전의 바탕 위에서 전개했다. 넷째로 1909-10년에 그들은 백만명구령운동을 전개해 한국이 일제에게 강점된 후에도 교회가 영적 노선을 유지하게 하려 했고, ‘합방’ 체제에 편승해 한국교회를 동양 각국에서 선교하는 교회로 만들려 했다. 일본 조합교회의 한국선교 시작과 일본정부의 교회 탄압에 대응하여 비정치화를 더 강조하면서 한국교회가 일본교회와 다른 길을 가고 한국사회의 혁신도 지지하지 않으며 보수주의의 길을 갈 것을 천명했다. 한국교회의 보수성 형성은 이처럼 대일 차별화 노력과 관련되어 있었다. 더 근본적으로는 일본의 한국 지배 하에서 영적 노선을 수호하려고 노력했던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 같이 하여 미일 공조의 식민활동에 편승해 미국 개신교 세계선교 운동이 동아시아에서도 전개되는 동안 한말 한국사회에 강력한 운동력을 가진 개신교인 집단이 생겨났고, 그 집단 안에 일본의 사상풍조와 지배력을 내심으로 배격하면서도 이런 것을 숨기는 타협적 친일과 권력친화적ㆍ개혁유보적인 비정치화를 지향하고 새 문물ㆍ사조를 선택적 폐쇄성으로 걸러내는 생존노선이 배태되었다. 이 노선은 물론 친미적이었지만, 한말의 한국정황에 특화되어 미국에 대해서도 일정부분 차별화되었다. 한국사회의 일반적인 새 동향에도 잘 부합하지 못하여 보수주의의 기치를 더 선명히 하는 것으로써 사회적 요구에 대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정한 진보성, 개방성, 민족성도 내재하고 있었다.
    번역하기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는 한말 기간에 북미 개신교단들 가운데 선두에서 세계선교 활동을 펼쳤다. 선교부 총무들의 식민주의, 서구문명 우월주의, 정복주의 선교관은 선교정책을 세우는 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는 한말 기간에 북미 개신교단들 가운데 선두에서 세계선교 활동을 펼쳤다. 선교부 총무들의 식민주의, 서구문명 우월주의, 정복주의 선교관은 선교정책을 세우는 일에 혼란을 일으켰다. 동아시아 삼국을 예로 들면, 가장 많은 투자로 최대의 심혈을 기울인 중국에서는 교회의 자급률이 극히 낮아 가장 비효율적으로 선교한 사실이 드러났다. 국력이 강하고 사람들이 오만하여 좋아한 일본에서는 선교사들이 무시를 당하고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결과를 얻었다. 가장 기대하지 않았고 비율상 가장 적게 투자한 한국에서는 최고의 실적을 얻었다.
    이런 판단과 정책은 또한 극히 비관적인 한국인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한국에게 독립을 유지할 역량이 없다고 보고 일본정부의 힘을 의지하여 선교기반을 확보하려 했다. 그리하여 일본의 동양맹주론에 부합되게 한국선교 전략을 일본선교 전략에 연결시켰다. 그 일을 위해 한국교회를 식민지 상황에 맞는 종교생활로 이끌려 했다. 그것은 한국교회에서 문명화의 측면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 비정치화를 강조하여 교인들이 타협적, 권력친화적 삶을 살게 하는 것이었다. 재한 선교사들도 비관적인 한국인식을 지녔지만 한국인들과 오래 접촉하고 한국에 대해 조사ㆍ연구하는 동안 다소 수정된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선교부보다 더 낙관하며 적극적, 공세적으로 선교에 임하고 일본에 대해 얼마간 거리를 두는 정신적 바탕을 마련했다.
    선교사들은 1885년부터 선교활동을 펼치면서 선교현장의 여건과 이해관계에 따라 경쟁했다. 그 결과 서울지회와 평양지회가 서로 다른 정책을 지향했고, 한국선교회 전체는 중국ㆍ일본선교와 차별화된 정책을 지향했다. 자급정책을 실패한 중국선교에 대항해서는 자급정책을 철저히 추구하고, 일본의 사회풍조로 난항을 겪는 일본선교에 대항해서는 비기독교적, 반선교사적, 세속적인 영향력에 물들지 않게 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이 두 가지 동기는 한국선교에서 기관사역을 축소하는 경향을 낳았다.
    이 동기들은 영적 노선에게 유리했으나, 그것이 일반화되는 데는 많은 요인들이 작용했다. 첫째로 선교가 서울에서 시작되어 외교가와 정가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 것은 서울의 환경과 정치문제를 피하려는 동기를 발생시켜 영적 노선이 시작되게 했다. 둘째로 한국정부의 약화와 정국 혼란은 친정부적, 현실참여적인 행보를 취한 서울 측의 발언권을 약화시켰다. 셋째로 중국교회와 일본교회가 보여준 부정적인 선례들은 기관사역을 최소화하게 했다. 넷째로 중국, 일본에서와 달리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단체들의 수가 훨씬 적은 것은 영적 노선의 일반화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장로교와 감리교의 6개 선교회들은 러일전쟁 발발 후에 대일 경쟁력의 강화를 위해 쉽게 협력 체제를 형성했다. 그 후 장로교 연합교회인 독노회가 수립되면서 영적 노선은 한국교회의 노선이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점점 커진 것은 그들이 영적 노선의 수호를 위해 노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한국의 식민지화 과정 속에서 영적 노선이 비정치화ㆍ친일노선과 결합하고 마침내 보수주의 노선이 천명되는 뒤틀린 행보를 보였다. 첫째로 러일전쟁 발발 후에 선교사들은 일본에 대항하여 사역을 강화하고 일본 당국자들과 친분을 쌓는 양면 작전을 구사했다. 이렇게 하여 영적 노선이 비정치화ㆍ친일노선과 손잡았다. 둘째로 1905년에 장감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선교 사업의 대일 경쟁력을 강화하려 했을 때 일본통인 북감리교 해리스 감독이 그 구심점이 되었다. 셋째로 을사조약 후에 그들은 부흥운동을 사역강화와 친일, 양면 작전의 바탕 위에서 전개했다. 넷째로 1909-10년에 그들은 백만명구령운동을 전개해 한국이 일제에게 강점된 후에도 교회가 영적 노선을 유지하게 하려 했고, ‘합방’ 체제에 편승해 한국교회를 동양 각국에서 선교하는 교회로 만들려 했다. 일본 조합교회의 한국선교 시작과 일본정부의 교회 탄압에 대응하여 비정치화를 더 강조하면서 한국교회가 일본교회와 다른 길을 가고 한국사회의 혁신도 지지하지 않으며 보수주의의 길을 갈 것을 천명했다. 한국교회의 보수성 형성은 이처럼 대일 차별화 노력과 관련되어 있었다. 더 근본적으로는 일본의 한국 지배 하에서 영적 노선을 수호하려고 노력했던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 같이 하여 미일 공조의 식민활동에 편승해 미국 개신교 세계선교 운동이 동아시아에서도 전개되는 동안 한말 한국사회에 강력한 운동력을 가진 개신교인 집단이 생겨났고, 그 집단 안에 일본의 사상풍조와 지배력을 내심으로 배격하면서도 이런 것을 숨기는 타협적 친일과 권력친화적ㆍ개혁유보적인 비정치화를 지향하고 새 문물ㆍ사조를 선택적 폐쇄성으로 걸러내는 생존노선이 배태되었다. 이 노선은 물론 친미적이었지만, 한말의 한국정황에 특화되어 미국에 대해서도 일정부분 차별화되었다. 한국사회의 일반적인 새 동향에도 잘 부합하지 못하여 보수주의의 기치를 더 선명히 하는 것으로써 사회적 요구에 대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정한 진보성, 개방성, 민족성도 내재하고 있었다.

    더보기

    분석정보

    View

    상세정보조회

    0

    Usage

    원문다운로드

    0

    대출신청

    0

    복사신청

    0

    EDDS신청

    0

    동일 주제 내 활용도 TOP

    더보기

    주제

    연도별 연구동향

    연도별 활용동향

    연관논문

    연구자 네트워크맵

    공동연구자 (7)

    유사연구자 (20) 활용도상위20명

    이 자료와 함께 이용한 RISS 자료

    나만을 위한 추천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