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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률의 민족운동과 정치사상 = Lee Jong-Ryul`s nation movement and political 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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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T11470862

    • 저자
    • 발행사항

      부산: 부산대학교, 2008

    •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박사) -- 부산대학교 대학원 , 사학과 , 2008. 8

    • 발행연도

      2008

    • 작성언어

      한국어

    • KDC

      911.06 판사항(4)

    • DDC

      951.06 판사항(21)

    • 발행국(도시)

      부산

    • 형태사항

      ii, 196 p.; 26 cm.

    • 일반주기명

      이승만
      서지적 각주 수록
      참고문헌 : p.182-192

    • DOI식별코드
    • 소장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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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기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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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한국 근현대는 외세의 침략과 봉건적 잔재를 극복하고 자주적인 변혁을 추구하는, 이 땅 대중의 헌신과 노력으로 점철된 역사이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의 反제국주의투쟁에서 비롯하여 해방 이후에는 민주정부의 수립과 자주적 통일을 위한 실천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진보적 실천은 항상 민족문제와 결부되었으며, 이를 위한 변혁 논리로 사회주의가 수용되었다. 또한 이 과정은 노동자, 농민, 진보적 지식인, 여성, 청년 대중 등 한국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한, 다양한 성격의 항쟁으로 이루어졌다. 李鍾律의 민족운동도 이러한 한국 근현대사의 일부로 진행되었다.
    이종률은 韓末에 경북 포항의 몰락 양반家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부친 李圭煥을 통해 한말의 애국주의를 교육받고, 義城에서 보낸 공립보통학교 시절에 소년운동과 계몽적 성격의 초기 衡平運動에 참여하였다. 이어서 안동 동명학교에 진학하여 민족주의자인 李衡國, 柳東棚과 공산주의자인 李墀鎬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의성과 안동의 교육을 통해 그는 근대적 민족의식과 인권의식에 눈뜨고 사회주의사상에 접촉하게 되었으며, 강렬한 反제국주의적 의식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1924년 이종률은 培材中學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가는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종률의 활동은 한국과 일본에 걸쳐, 청년운동과 正論社運動, 학생운동, 民族協同戰線運動, 언론·출판·학술운동 및 형평운동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이를 성격으로 보면 초기의 활동은 北風派 사회주의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1924년 12월 이종률은 북풍파의 청년단체인 경성청년회의 창립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듬해인 1925년 5월에는 최초의 사회주의 학생단체인 共學會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金鍾範과 함께 正論社運動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공학회가 해산되고 정론사운동이 막을 내리면서 이종률의 활동은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1926년 이후 이종률의 활동은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성격을 띠고 전개되었다. 1926년 그는 6·10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일본으로 가서 이듬해에 早稻田大學(와세다대학) 專門學部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은 국내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한국인운동의 통일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는 조선인유학생동우회 소속으로, 1927년 2월 재일본 조선인단체협의회의 결성과 5월 新幹會 東京支會의 결성에 참여함으로써 재일 한국인의 민족협동전선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1928년 결성한 재일 조선청년동맹 역시 이종률이 참여한 초기에는 이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 해 봄에 그는 국내로 돌아와 京城苦學堂의 교사로 활동하는 한편 학생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11월 학생스트라이크옹호전국동맹사건으로 구속되어 투옥 당하였다.
    1930년 4월 이종률은 社會實定調査所를 설립하고, 이듬해 7월부터 기관지 『이러타』를 발간하였다. 이로써 한국 사회의 분석과 세계정세의 인식을 확대 심화시켜 나가는 한편 미야께[三宅鹿之助] 교수와 교유하였다. 이 무렵 그는 형평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이로 인해 1933년 衡平靑年前衛同盟事件에 연루되어 참혹한 옥고를 치렀다. 1938년 이후 그는 보호감찰 대상으로 일제의 일상적 감시를 받게 되자, 경기도 가평에서 木炭구이사업을 하면서, 건국동맹과 연계하여 동지를 규합하는 활동으로 일제 말기를 보냈다.
    해방 후에 이종률은 소련에도 미국에도 의지하지 않고 외세를 주체적으로 선용해야 한다는 정세관으로 활동하였다. 白南雲의 朝鮮學術院에 참여하고 전위당(前衛黨)을 위한 준비모임으로 民族建揚會를 발기하는 한편 분단을 막기 위하여 결성된 民主主義獨立戰線에 참여하였다. 이 무렵 그는 그 동안의 실천적 경험을 토대로 마르크스주의를 한국 현실에 변용한 ‘서민성자본민주주의민족혁명론(약칭 민족혁명론)을 정립하였다. 이는 民族無産者階級의 영도와 民族建揚路線에 따라 ’인민적 부르주아민주주의‘를 건설하고, 그 지양을 통해 사회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혁명이다.
    한국전쟁 기간에 그는 최익환, 박진목이 벌였던 종전운동(終戰運動)에 논객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대에 이종률은 부산대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民族文化協會를 거점으로 자주의식의 대중화와 진보적 민족세력의 규합을 도모하였다. 또한 『국제신보』, 『부산일보』와 대구의 『영남일보』에서 언론활동을 펴기도 했다. 이 무렵 이종률은 민족혁명론의 논리적 기반으로 後進性地域論을 정립함으로써 민족혁명론을 완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부산대와 동아대 정치학과를 중심으로 민족혁명론 학맥을 형성하였다.
    1960년 4·19 민주항쟁을 맞아 그는 1960년 6월 12일 부산에서 民主民族靑年同盟을 결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1961년 2월 25일 民族自主統一中央協議會(약칭 民自統) 결성을 추진하였다. 민자통은 4·19 민주항쟁기 최대의 통일운동 조직으로, 대학의 民族統一聯盟과 연대하여 남북협상통일론으로 통일운동을 주도하였다. 민자통을 중심으로 한 자주적 통일운동은 이듬해 박정희의 5·16쿠데타로 파괴되었지만, 이후의 통일운동에 이정표를 세운 것으로 평가된다.
    이상과 같이 이종률은 일생을 통해 반외세 자주화투쟁을 실천하는 한편 이를 토대로 혁명 논리를 구상한 진보적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논문은 이러한 이종률의 실천적 모색 과정이 가진 의의와 한계를 분석하여, 한국 근현대사의 진보와 자주를 향한 궤적의 일부를 복원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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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근현대는 외세의 침략과 봉건적 잔재를 극복하고 자주적인 변혁을 추구하는, 이 땅 대중의 헌신과 노력으로 점철된 역사이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의 反제국주의투쟁에서 비롯하여 해...

    한국 근현대는 외세의 침략과 봉건적 잔재를 극복하고 자주적인 변혁을 추구하는, 이 땅 대중의 헌신과 노력으로 점철된 역사이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의 反제국주의투쟁에서 비롯하여 해방 이후에는 민주정부의 수립과 자주적 통일을 위한 실천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진보적 실천은 항상 민족문제와 결부되었으며, 이를 위한 변혁 논리로 사회주의가 수용되었다. 또한 이 과정은 노동자, 농민, 진보적 지식인, 여성, 청년 대중 등 한국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한, 다양한 성격의 항쟁으로 이루어졌다. 李鍾律의 민족운동도 이러한 한국 근현대사의 일부로 진행되었다.
    이종률은 韓末에 경북 포항의 몰락 양반家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부친 李圭煥을 통해 한말의 애국주의를 교육받고, 義城에서 보낸 공립보통학교 시절에 소년운동과 계몽적 성격의 초기 衡平運動에 참여하였다. 이어서 안동 동명학교에 진학하여 민족주의자인 李衡國, 柳東棚과 공산주의자인 李墀鎬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의성과 안동의 교육을 통해 그는 근대적 민족의식과 인권의식에 눈뜨고 사회주의사상에 접촉하게 되었으며, 강렬한 反제국주의적 의식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1924년 이종률은 培材中學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가는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종률의 활동은 한국과 일본에 걸쳐, 청년운동과 正論社運動, 학생운동, 民族協同戰線運動, 언론·출판·학술운동 및 형평운동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이를 성격으로 보면 초기의 활동은 北風派 사회주의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1924년 12월 이종률은 북풍파의 청년단체인 경성청년회의 창립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듬해인 1925년 5월에는 최초의 사회주의 학생단체인 共學會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金鍾範과 함께 正論社運動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공학회가 해산되고 정론사운동이 막을 내리면서 이종률의 활동은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1926년 이후 이종률의 활동은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성격을 띠고 전개되었다. 1926년 그는 6·10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일본으로 가서 이듬해에 早稻田大學(와세다대학) 專門學部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은 국내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한국인운동의 통일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는 조선인유학생동우회 소속으로, 1927년 2월 재일본 조선인단체협의회의 결성과 5월 新幹會 東京支會의 결성에 참여함으로써 재일 한국인의 민족협동전선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1928년 결성한 재일 조선청년동맹 역시 이종률이 참여한 초기에는 이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 해 봄에 그는 국내로 돌아와 京城苦學堂의 교사로 활동하는 한편 학생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11월 학생스트라이크옹호전국동맹사건으로 구속되어 투옥 당하였다.
    1930년 4월 이종률은 社會實定調査所를 설립하고, 이듬해 7월부터 기관지 『이러타』를 발간하였다. 이로써 한국 사회의 분석과 세계정세의 인식을 확대 심화시켜 나가는 한편 미야께[三宅鹿之助] 교수와 교유하였다. 이 무렵 그는 형평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이로 인해 1933년 衡平靑年前衛同盟事件에 연루되어 참혹한 옥고를 치렀다. 1938년 이후 그는 보호감찰 대상으로 일제의 일상적 감시를 받게 되자, 경기도 가평에서 木炭구이사업을 하면서, 건국동맹과 연계하여 동지를 규합하는 활동으로 일제 말기를 보냈다.
    해방 후에 이종률은 소련에도 미국에도 의지하지 않고 외세를 주체적으로 선용해야 한다는 정세관으로 활동하였다. 白南雲의 朝鮮學術院에 참여하고 전위당(前衛黨)을 위한 준비모임으로 民族建揚會를 발기하는 한편 분단을 막기 위하여 결성된 民主主義獨立戰線에 참여하였다. 이 무렵 그는 그 동안의 실천적 경험을 토대로 마르크스주의를 한국 현실에 변용한 ‘서민성자본민주주의민족혁명론(약칭 민족혁명론)을 정립하였다. 이는 民族無産者階級의 영도와 民族建揚路線에 따라 ’인민적 부르주아민주주의‘를 건설하고, 그 지양을 통해 사회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혁명이다.
    한국전쟁 기간에 그는 최익환, 박진목이 벌였던 종전운동(終戰運動)에 논객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대에 이종률은 부산대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民族文化協會를 거점으로 자주의식의 대중화와 진보적 민족세력의 규합을 도모하였다. 또한 『국제신보』, 『부산일보』와 대구의 『영남일보』에서 언론활동을 펴기도 했다. 이 무렵 이종률은 민족혁명론의 논리적 기반으로 後進性地域論을 정립함으로써 민족혁명론을 완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부산대와 동아대 정치학과를 중심으로 민족혁명론 학맥을 형성하였다.
    1960년 4·19 민주항쟁을 맞아 그는 1960년 6월 12일 부산에서 民主民族靑年同盟을 결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1961년 2월 25일 民族自主統一中央協議會(약칭 民自統) 결성을 추진하였다. 민자통은 4·19 민주항쟁기 최대의 통일운동 조직으로, 대학의 民族統一聯盟과 연대하여 남북협상통일론으로 통일운동을 주도하였다. 민자통을 중심으로 한 자주적 통일운동은 이듬해 박정희의 5·16쿠데타로 파괴되었지만, 이후의 통일운동에 이정표를 세운 것으로 평가된다.
    이상과 같이 이종률은 일생을 통해 반외세 자주화투쟁을 실천하는 한편 이를 토대로 혁명 논리를 구상한 진보적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논문은 이러한 이종률의 실천적 모색 과정이 가진 의의와 한계를 분석하여, 한국 근현대사의 진보와 자주를 향한 궤적의 일부를 복원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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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서 론 1
    • 1장 일제시기 정치사상의 형성과 민족운동 12
    • 1. 성장과정과 정치사상의 형성 배경 12
    • 1) 청소년기의 유교적 환경 12
    • 2) 근대 사조의 수용과 사회운동 18
    • 서 론 1
    • 1장 일제시기 정치사상의 형성과 민족운동 12
    • 1. 성장과정과 정치사상의 형성 배경 12
    • 1) 청소년기의 유교적 환경 12
    • 2) 근대 사조의 수용과 사회운동 18
    • 3) 안동 東明學校와 민족교육 23
    • 2.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운동 30
    • 1) 京城靑年會와 사회주의운동 30
    • 2) 新幹會와 민족협동전선운동 41
    • 3) 한국사회 조사 분석과 사회운동 57
    • 2장 해방 후 국가건설운동과 민족혁명론의 전개 73
    • 1. 학술운동과 단독정부반대투쟁 73
    • 1) 조선학술원과 진보적 학술운동 73
    • 2) 民族建揚會와 민주주의독립전선 83
    • 2. 한국사회 인식과 민족혁명론의 형성 93
    • 1) 한국사회와 민족문제 인식 93
    • 2) 민족혁명론의 형성과 구조 101
    • 3장 4·19 민주항쟁기의 통일운동과 민족혁명론의 심화 119
    • 1. 학맥과 정치조직의 형성 119
    • 1) 한국전쟁과 反戰運動의 전개 119
    • 2) 民族文化協會의 결성과 자주의식의 대중화 121
    • 3) 언론활동 123
    • 2. 4·19 민주항쟁과 자주적 통일운동 127
    • 1) 民族建揚會와 民主民族靑年同盟의 결성 127
    • 2) 통일운동의 전개와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137
    • 3) 남북협상통일론과 통일운동 153
    • 3. 민족혁명론의 심화와 통일론 165
    • 1) 민족혁명과 인간혁명 165
    • 2) 남북협상통일론과 사회변혁론 169
    • 맺 음 말 178
    • 참고 문헌 182
    • Abstract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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