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新羅지배체제의 붕괴 현상이 현저히 나타나는 880년(憲康王6)초반부터918년(太祖원년)高麗가 건국하는 대략 40여 년간을 시대적 배경으로,한반도 중북부지역을 석권하면서 전쟁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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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연세대학교, 2006
2006
한국어
후삼국 시대[後三國時代] ; 궁예정권 ; 군사정책 ; 후삼국전쟁
911.03 판사항(4)
951.901 판사항(21)
서울
v, 192 p.; 26 cm
참고문헌: p. 174-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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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新羅지배체제의 붕괴 현상이 현저히 나타나는 880년(憲康王6)초반부터918년(太祖원년)高麗가 건국하는 대략 40여 년간을 시대적 배경으로,한반도 중북부지역을 석권하면서 전쟁주도권을 장악하였던 弓裔政權이 추진하였던 軍事政策과 후삼국전쟁의 전개 양상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작성하였다.궁예정권과 後百濟가 성립하던 880년대는 한국 역사상 전례가 없던 분열기인 동시에 새로운 통합의 시대로 이행하던 사회변동기였다.이 시기 새롭게 성립한 정권이 당면한 과제는 사회 모순으로 격화된 신라를 해체시키고 새로운 통치 질서를 수립하는것이었다.신라 스스로 사회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던 상황이었으므로 새로이 대두한궁예정권과 후백제는 정권 성립기부터 이를 전쟁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다.894년 溟州점령을 시발로 자립한 궁예정권은 歸附해온 명주와 인근 지방세력,지역민들을 14隊를 근간으로 하는 육군 조직으로 편성하고,896년에는 송악과 패서 지역으로 진출,해상력을 확보하면서 수륙 양면의 군사 활동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이와 함께 궁예정권은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고구려를 자국의 정통성으로 삼고,신라 倂合을 지향하는 反新羅政策을 표방하였다.이 점은 비슷한 시기에 후백제가 百濟계승을 표방하였던 점에서,신라 선점을 둘러싼 양국간의 군사적 경쟁 양상을 심화시켰다.901년 후백제의 신라 대야성 공략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발생하였다.903년 궁예정권은 신라를 공략하던 후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수군을 이용한 羅州진출을 단행하였다.그런 다음 후삼국 정세를 고려하여 전쟁주도권을 장악하면서 후삼국통일을 지향해 나가는 軍事政策을 논의하였다.논의된 정책은 크게 두가지였다.나주진출을 실행하고 귀환한 왕건은 수군을 이용한 후백제 배후 공략으로 충분한 견제력을확보한 다음 신라를 공략해 들어가는 後百濟背後攻略策을 중시하였다.이에 비해 육군의 가치를 중시한 명주세력은 신라를 우선적으로 점령한 다음 후백제를 확보하면서통일을 도모해 가는 新羅先占攻略策을 제안하였다.양측이 중시한 정책은 전쟁 수행방식에서는 뚜렷한 차이가 있었지만,신라를 병합하여 정통성을 확립하고 통일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최종 목표는 동일한 것이었다.국가 정통성 확립이 중대한 과제였고,후백제와 신라를 놓고 경쟁 양상이 심화되어 가던 상황이었으므로 궁예정권은 신라선점공략책을 우선적인 정책으로 채택하였다.그리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목적에서 鐵圓을 王都로 삼고 淸州人들을 사민하여 정책을 지지하는 기반으로 삼았다.신라선점공략책에 의거하여 궁예정권은 905~907년간에 걸쳐 신라로 통하는 竹嶺,尙州沙火鎭일대,一善郡(선산)지역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지상전을 벌였다.하지만신라의 방위력과 후백제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육로를 통한 신라 선점 공략은 더 이상실천하기 불가능한 지경에 봉착하게 되었다.이에 따라 궁예정권은 군사정책 논의 과정에서 주목한 바 있던 후백제배후공략책으로 정책을 변경하였고,909년부터 海上統制戰을 전개하였다.궁예정권은 후백제의 해외 교섭 활동을 통제하고,海上權을 확대하면서 서해안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시켜 나갔다.이는 후백제의 배후 위협을 크게가중시켰고,결국 912년 德津浦海戰이 발발하였다.덕진포해전에서 후백제 수군을 궤멸시킨 궁예정권은 후삼국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후백제배후공략책을 지속적으로실천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하지만 정국은 철원 천도를 계기로 新羅先占攻略策을 지지해 왔던 청주세력 내부에정치적 갈등이 발생하면서 신라선점공략책을 옹호하는 阿志泰일파와 後百濟背後攻略策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선회한 笠全일파로 분열하였다.궁예는 이러한 정국의 분열상을 시중에 임명한 왕건을 이용하여 아지태 일파를 척결하면서 해결하였다.이는 신라선점공략책의 소멸과 함께 후백제배후공략책의 지속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정국 분열을 수습한 궁예정권은 914년부터 전쟁의 방식을 기존과 같은 주요 거점 및 영역 확보로부터 확장하여 長期戰에 요구되는 전쟁 물자를 확보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나주를 중심으로 서해안 도서 지방에서 생산되던 소금과 말은 궁예정권이 확보하기 시작한대표적인 전쟁 물자였다.이러한 노력은 궁예정권 당대는 물론 고려 왕조의 통일의 경제,군사적 기반으로 이어진 점에서 주목되는 대목이다.914년 이후 궁예정권은 소금과 말로 대표되는 전쟁 물자를 확보하면서 전쟁지속력을 강화하고 국가 재원 또한 한층 확충시켜 나갔다.그러나 비슷한 시기 거란이 성장하면서 북방을 위협하고,916년 후백제가 신라 大耶城을 재침하면서 궁예정권은 북방과 남방을 공히 포괄하는 새로운 군사정책을 수립해야만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이 과정에서 거란에 대한 대응책을 둘러싸고 북방개척과 친선 관계 수립 방안이 충돌하면서 정치 세력간 심각한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였다.그렇지만 궁예정권이 남방 중심의 後百濟背後攻略策을 추진해 가던 상황이었으므로 거란과 친선 관계를 수립하는정책을 선택하면서 갈등을 해결할 수 있었다.문제는 후백제의 신라 공격에 따른 남방에 대한 방책이었다.이 문제에 직면하면서부터 궁예와 왕건 사이에는 확연한 정책적차이점이 발생하였다.궁예가 인식적으로나 정책적으로 신라를 멸망시켜야 할 적국으로설정하는 정책을 지속하고자 하였음에 비해 왕건은 신라를 적국으로 인식하면서도 현실의 정책에서는 연대를 모색하면서 통일을 실천해 가는 ‘連新羅統一策’을 중시하였다.연신라통일책의 대두는 궁예정권의 몰락과 함께 새로운 군사정책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궁예정권이 신라 병합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던 것과 달리 고려 왕조는신라를 연대할 대상으로 설정하였다.신라가 연대할 대상으로 인정되면서 군사정책의중심 대상은 후백제로 이동,재설정되었다.이러한 변화는 궁예 집권 이후 정치적 목표로 삼아 왔던 신라 병합이 완전히 소멸하고,후백제를 상대로 한 군사정책이 주도할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따라서 고려 건국과 동시에 추진될 군사정책은 신라와 연대하여 후백제를 상대하면서 통일을 지향해 가는 연신라통일책을 주축으로,궁예정권이래 경제,군사적인 측면에서 유효한 정책으로 인정받아 왔던 후백제배후공략책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형태로 나타났다.이와 함께 지상전은 후백제를 주 대상으로 전투와 화친을 적절히 배합하면서 전쟁을 주도해 가는 和戰兩面攻略策이 채택되었다.궁예정권 당대부터 고려 왕조 성립기까지 군사정책의 변화와 전쟁의 전개 양상은 대략이상과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