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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중교회 태동에 관한 역사적 연구

        정정근 한신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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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Ⅵ.1. 민중교회에 대한 평가 민중신학에 기초한 민중교회 운동은 민중신학이 그렇듯이 도그마 신학에 매이지 않는다. 민중교회는 하나님의 계속되는 역사와 신앙고백의 구체성에 관심한다. 그래서 민중교회는 헐벗고 굶주리고 소외되고 억압받고 후미진 곳들을 찾아든다. 민중들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한민연 규약 제1장 총칙 제2조(목적)에 복음의 본질성회복과 한국민중해방전통을 계승하고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민족, 민주적 변혁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이 땅의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민중이 주인 되는 하나님 나라 건설에 헌신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이런 목적 실현을 위한 운동과 사업을 전개함에 있어서 복음의 진리성, 민중성 그리고 지역성에 기초한 올바른 대중노선에 입각하여 민족자주의 원칙, 민중주체의 원칙, 자력갱생의 원칙, 기층 민중운동역량의 강화 우선의 원칙을 지켜나갈 것이다. 이런 목적의식으로 나타난 민중교회는 민주의 구체적 현장에 관심하여 실천하였고, 교회갱신과 사회개혁의 문제의식을 확산하고 실천하는데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민중교회운동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역사적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 평등지향적인 해방공동체의 실현이라는 성서의 초대공동체 전통을 계승하고, 교회 본질을 회복하려는 시도라는 점이 교회사적 의의로 인정되어야 한다. 둘째, 그동안 한국교회에서 소외당한 기층민중들의 신앙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제도화되고 형식화된 한국교회의 사명을 일깨웠다는 점과 한국교회가 지니는 신학적, 실천적 보수성과 수동성을 극복하고 예수의 나눔과 섬김의 말씀을 육화하고자 했다는 의미에서 그 의의가 인정되어야 한다. 셋째, 성서의 해방전통과 한국역사 속에서 나타난 민중해방 전통을 합류시켜 하나님의 해방을 실현하고, 또한 한국교회의 신앙의 조상들이 흘린 해방적 순교의 전통위에 서 있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긍지로 인정되어야 한다. 이제 민중교회에 대한 평가에 귀기울여보자. 김해성은 민중교회운동이 성서적인 또는 신앙적인 바탕보다는 사회과학적이며 사회운동적인 방향으로 편향되었기에 많은 우여곡절과 시행착오를 반복했다고 술회하며, 이웃사랑 편향으로 부족해진 하나님사랑에 대한 신앙적 열심을 강조하면서, 하나님나라의 주인으로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운동적인 관점에서의 의식화만을 통해서는 새로운 사람으로 서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 많이 보았다. 당장은 어깨를 걸고 함께 투쟁하지만 입장차이나 큰 이익 앞에서는 관계를 끊고 돌변하는 모습은 상처로 남아있게 되는데, 무언가 새로운 변화가 요청되는 갈급함이 있다고 그는 안타까움을 나타낸다. 실은 공동체의식의 결여인데 공동체가 성공할 수 있는 두 가지 비결을 사회운동가 장일순은 이렇게 말한다. ......여럿이 모였다면 깃발이 있을 것 아냐, 어떻게 가겠다는? 그 깃발 아래 모였으니 깃발을 중심으로 해야 할 테지만 깃발을 너무 앞세울 때는 함께 가는 사람 가운데 늦게 일어난다거나 일을 게으르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무라기 쉽지. 미워하는 마음이 일기 쉽다는 거야, 그럴 때는 말이지 따듯한 마음을 갖고 어깨동무를 해서 일으켜 세워 같이 가는 마음이 중요해.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하다보면 일이 이루어 질 것 아냐? 크든 작든 공이 생긴단 말야, 그때 그건 내가 잘해서 그렇게 됐다 하지 말고, 같이 가는 사람들 공이다, 이렇게 공을 남에게 넘기라는 거지. 이 두 가지를 지키면 되지 않을까 싶네. 민중교회의 문제는 운동성과 교회성이라는 두 면을 충족 시켜야하는 난제 속에 갈등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계속 강조되고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신앙공동체로서의 자기 정체성이다. 이에 보완되어져야할 요건은 예배, 성서읽기, 기도, 영성적인 훈련, 기독교교육의 정립으로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조화로움이다. 이는 한 가지씩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채워나감의 성숙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믿음이 행함을, 역으로 행함이 믿음을 비난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제 우리 반성하면서 조심스럽게 민중교회의 실상에 접근해 보아야 한다. 민중교회의 문턱은 낮고 열려있는데, 또 다른 보이지 않는 벽이나 담은 없는지, 차별이나 따돌림은 없는지, 게토(ghetto)화된 상태로 나름의 잔치에 흥겨워하지나 않은지? 담을 허무는 것도 중요하지만 민중교회운동의 처음의 그 발걸음을 물어야 할 것이다. 민중개념에 있어서 그 지평이 확대 또는 정립되어야 한다. 앞서 얘기한대로 안병무의 성서적 개념이 민중교회운동의 편협함을 막아줄 것이다. 안병무의 성서적 민중개념은 공관서에 나타난 대로 예수와 더불어 있는 무리들로 예수가 관심한 무리들이 곧 민중이다. 이는 너무나 포괄적인 개념으로 비판 받을 만 하지만 오늘의 민중개념이나 성격은 재 규명 되어져야 함이 마땅하다. 이로서 민중교회는 이전의 빈민, 노동자, 소외계층 등의 아웃캐스트(outcast)에 대한 헌신적 관심에서 환경, 인권, 생명, 통일, 지역공동체, 여성, 평화, 문화, 이주노동자문제의 영역으로 확대된다. 따라서 민중개념의 확대에 따른 전환점을 민중교회운동에서 '생명 선교 연대'에로의 탈바꿈으로 시도 한다. 민중교회운동은 한국교회에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간 것만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고, 빛나는 업적으로 작용한다. 여전히 미진함은 있다. 그래도 희망은 우리에게 있다. 여전히 민중 해방사건은 계속 이어지고, 민중해방운동에서 우리의 신을 만나게 될 테니까. 그러나 민중이 주체인 시대는 지나갔고, 시민의 시대가 도래 했다고 말하는 시민운동가의 주장에 따라 이제 민중신학은 활자에 묻힌 지나간 과거의 묵은 신학인가! 아니다. 민중개념의 성서적 개념을 보라! 예수의 관심이 어디 있나. 민중의 큰 이야기와 시민의 작은 이야기는 긴장되고, 결국 우리에게 새 질서를 가져다 줄 것이다. 예수의 삶을 보여 주려는 소박함이 우리에게 미래를 제시한다. 그냥 아름답게 사는 모습을 보여 주고자 애쓰는 임의진은 '삶이 곧 경전이다.' 라고 까지 말한다. Ⅵ.2. 21세기 민중신학의 전망과 교회운동 방향 민중신학은 1970 년대 한국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선교' 활동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증언이며, 한국의 역사적, 정치적 현실에서 증언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과제와 방향을 모색한 한국의 신학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신학이 한국이라는 장(場)에서 꽃피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온 한국 민중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종교적 구조에서의 경험을 신학화한 것이다. 한편 민중신학은 민중의 역사와 문화를 주체로 인식함으로써 한국의 민중만이 아니라 3/4세계 민중들이 자주적인 역사, 문화, 정치적 각성을 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서구신학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나 각기 자기 나라의 전통문화와 삶의 자리에서 신학 하는 새로운 신학 방법론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이런 점에서 민중신학은 해방신학과 달라 서구 신학계로부터도 새로운 신학의 패러다임과 방법론으로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가난한 기독 청년의 죽음이 부른 민중신학은 이론보다 실천을 우위에 두는, 실천-이론의 변증법적 과정으로서의 프락시스(Praxis)로 제1세대를 거쳐 제3세대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제1세대 신학자들이 민중사 건을 주시 내지는 직시하고 그것의 의미를 증언했다면,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과 더불어 제2세대 민중신학이 전개 되는데 그 2세대는 자본주의의 제도적 모순을 성서적 입장에서 재해석함으로서 교회의 나아갈 길을 명시하는 일이었다. 다음으로 사회주의의 몰락과 지구화시대로 특징 지워진 1990년대 이후에 역사적인 지평은 제3세대 민중산학을 태동시킨 배경이 된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민중신학은 민중해방운동의 추동을 힘입어서 예수의 길을 가고자 하는 자들에 의해 그 걸음을 함께 할 것이다. 다양한 문화와 다변화된 욕구와 가치의 다양성 다원화된 이 시대에 시대적인 성실한 응답으로 반신학의 계보에 있는 민중여성신학, 민중종교신학들과 궤를 같이하여, 부분과 전체가, 전체와 부분이, 거대담론과 미시담론이 당면한 시대의 문제에 주목할 것이다. 그 시대 시대마다, 그 시대에 개입된 언어로 분명한 하나님의 답을 제시할 것이다. 예수시대의 그 예수민중언어는 그 시대 민중언어이었듯이 우리시대의 우리민중언어로 기필코 답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이다. 민중신학은 단순히 신학에 머물지 않고 신학 그 자체까지도 뛰어 넘는다. 그 말은 반신학이나 탈신학도 서슴치 않는다는 말이다. 제1세대 민중신학자 서남동은 탈성서까지도 주장하고 나설 정도이다. 민중신학은 머리(관념)의 길을 걷지 않고 몸(행동)의 길을 걷는다 그러기에 민중신학은 신학을 연구하지 않고 '신학한다'는 것을 그 본래의 과제로 삼는다. 이 '신학한다'는 것은 오늘의 역사적 사회적 인간해방의 투쟁 사건에 연대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인간 해방의 역사를 발견하는 것이다. 한편 민중신학은 한국적이라기보다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땅 구석구석의 인간화의 실현을 종말까지 지향한다. 한 마디로 살맛나는 세상을 만드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경험하는 것이다. 민중신학은 끝이 아니다. 다만 '열린 끝'(open end)일 뿐이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해방에 관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로 끝없이 이어질 '새로운 시작'이다. 이 끝없이 이어지게 되는 민중신학이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해 문동환은 『신학사상』을 통해 전달한다. 1. 앞으로 민중신학은 '생명'을 관심의 초점으로 삼아야 한다. 산업문화란 우리들의 생명을 해치는 죽음의 문화라는 것이 날로 더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2. 산업 문화에 항거하는 모든 집단들을 가능한 민중으로 보고 긴밀한 연계를 가지도록 해야 한다........ 3. 민중신학은 ... 민중을 해방시키는 일을 최종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치되는 새로운 생명문화를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4. 이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신학 하는 자들은 서재에만 묻혀 있어서는 아니 된다. 해방 운동의 구체적인 일선에 참여해서 몸으로 악과 싸우면서 새 내일을 창출해야 한다........ 5.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진 공동체 운동을 실험하면서 그 결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일도 중요하다. 6. 이와 같은 실험과 검토는 국제적인 차원으로도 전개되어야한다. 7. 이와 같은 일에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매우 중요하다........ 8. 민족 통일이라고 하는 화급한 문제에 있어서 두 다른 이념 아래 살아온 동족이 더불어 창조적으로 작업을 하도록 해야 한다........ 더불어 사는 것을 경시한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하면서 더불어 새롭게 사는 길,...... 우리 남과 북이 한 전통을 가진 동족으로 이런 대화를 진지하게 해서 한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을 만든다면 인류 사회에 큰 공헌을 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종말이 가까웠다는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하면서 저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주린 창자를 채워 주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면서 저들이야말로 하나님나라에 더 가깝다는 것을 밝히면서 하나님나라 운동에 가담하도록 도와야 한다. 21세기는 정보 가상시대, 유전자 생명공학의 시대라고 칭한다. 이러한 민중의 시대적 현실은 다차원적이고, 고차원적이고, 다지평적인 복합 구도 속에 있다. 이런 지구화 과정에서의 교회운동은 본래적 지평으로는 다층적이고도 다양한 욕구에 부응할 수 없다. 여기 지금까지 민중신학이 다루어온 주제들과 새롭게 요구되고 대두된 것에 첨가하여 민중교회운동의 방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가) 민중은 생명이다.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생명망으로 인식되어져야한다. 단순히 사회경제적 차원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민중이 생명이라는 명제는 하나님의 피조물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동역자이다. 민중신학은 민중은 생명이라는 명제를 총합적으로 인식한다. 나) 민중의 생명과 삶은 지구화의 상황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전쟁에 의하여 희생되고 잇고 위협 받고 있다. 정보사회의 사아버네틱의 전쟁은 소위 전멸전쟁이라 부른다. 동시에 유전자 공학적 조작에 의한 위협은 생명파괴의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생명의 파괴, 생명의 수난, 생명의 주체성을 무시하고 짓밟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민중 생명학'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성서에서 말한 메시야 왕국으로 보장되는 '생명의 정원'이라 할 것이다. 다) 민중신학의 사회 경제적 차원의 이해를 넘어서 지구가 하나의 통합된 시장이라는 지구 경제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시장이 절대적인 우주로 군림하고 있다. 강요된 지구적 자본 세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 지구 사회자 시장화 되어가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민중의 정치적 주체는 무력화 되고 있다. 지구 시장의 권세들은 초국적인 실체로서 모든 국경을 넘나들며 민중의 정치 경제적 보호막을 무너뜨리고 있다. 소수 약소민족이나 국가들은 정치적 주체성을 유린당하고 있다. 이 지구시장에 적극 개입하고 지구시장의 횡포를 막으며 민중이 지구시장의 주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마) 지구 시장은 신자유주의의 사회철학에 의하여 지배되어 신사회 다윈주의 철학을 구사하고 있다. 이 무제한적인 경쟁이 모든 사회, 경제 정치관계와 생태학적 관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갈등 관계를 격화하고 폭력화 한다. 민중신학은 지구화 맥락에서 샬롬의 실현과정을 성찰해야 할 것이다. 한국적인 입장에서 한국 민족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위한 사회정의 사회복지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바) 지구 시장은 전자 통신을 통한 정보유통과 고급기술에 기반한 다중커뮤니케이션 매체를 통하여 문화적 지배 또는 문화적 헤게모니를 가지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민중과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의 붕괴, 생명적이고 인도적인 문화가치의 해체, 생명력 있는 심미적 감성의 혼란과 피폐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민중신학은 민중 문화 운동 속에서, 시장 문화 변혁 운동 속에서 민중이 문화적 주체임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또한 민중신학은 보다 넓은 차원에서 다중 종교와의 접속이라는 과제도 안고 있다. 마지막으로 민중교회운동에 관심하고 1985년 3월에 쓴 김재준의 자랑스런 교회상을 소개한다 1) 교회는 어떤 세상 정권을 믿는 것이 아니고 삼위일체 사랑의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식회사가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의 기관입니다. 2) 교회는 그 있는 고장인 역사가 그리스도의 역사로 변질하게 하는 책임을 집니다. 세상 권력에 동질화(conform)할 것이 아니고 그것을 변질(transform)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교인수는 한국 전 인구의 3분의1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만하면 한국 역사를 그리스도 정신으로 변질시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3) 교회는 전쟁 도발에 항거하여 평화운동을 강력하게 추진 시켜야 하겠습니다. 4) 교회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어떤 특권층의 소수 인간들로 된 기관에 충성하는 것보다도 대다수의 민중의 친구가 되고 그 대변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정치적 독재나 경제적 독과점, 재벌의 불의, 무법 또는 횡포를 견제하여야 합니다. 침묵의 다수만으로는 예언이 안 됩니다. 5) 교회는 정의에 불타는 학생들, 탐욕자에 희생되는 절대다수의 밑바닥 노무자, 실직자들의 친구가 되고 적어도 그들의 울타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웃 사랑이고, 그것이 주리고 목마른 그리스도 자신을 대접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6) 교회는 좌절 없는 희망의 등대여야 합니다. 하느님 안에는 실망이 없습니다. "세상 나라들이 떠들고 임금들이 모반하여 그리스도 왕국에 도전하더라도 하늘의 하느님은 빙그레 웃으신다"고 시편2편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누가 능히 우리를 그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고 바울은 승전가를 외쳤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7) 우리는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의 지체입니다. 그리스도와 우리 교회와 역사와 자연이 하나 되는 사랑의 대조화에서 우리 인류의 역사는 그 완성의 종말에 삼켜집니다. 묵시록22장에 씌여진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의 불멸의 소망입니다. 이제 좀 더 큰 틀로 새로 맞은 21세기의 민중신학과 그 프락시스인 민중교회운동은 '생명학'이라는 총합적인 틀 속에서 전통적인 신학의 틀을 벗어나서 '민중의 생명'의 틀을 재발견 하는 것이 중요하다. 21세기에 처한 민중현실을 생명이라는 총합적 실재로 파악하고 종합적으로 성찰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제는 지구촌 여러 곳에 일고 있는 민중체험에 관심하고 그에 대한 신학적 성찰의 접속과 교류로 예수가 사랑한 민중의 요구를 안고 변화하는 이 시대의 민중해방운동에 큰 몫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민중신학과 (민중)교회운동은 여전히 열린 모습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제시한다. 민중신학이 예수사건의 삶을 그 표본으로 다루어 그 삶이 하나님나라를 말하고, 교회가 예수의 삶을 사는 모임으로 그의 삶을 구현한다고 할 때 거기 영원한 우리의 모델이 있고 그 삶에 미치지 못하는 간절한 기도는 계속된다.

      • 만수(晩穗) 김정준의 신학에 대한 실천신학적 연구

        조규남 한신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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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살펴본 김정준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은 여러 가지이다. 신학자 김정준, 목회자 김정준, 설교자 김정준, 신학교육자 김정준, 또한 에큐메니칼 운동가 김정준, 이 모두 그를 소개하는 말들이다. 김정준은 이 모든 역할 중에 어느 하나 소홀하지 않았다. 그는 신학자로서 철저하게 구약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노력을 했으며, 온 힘을 다해 교인들을 위로하고 안내하는 목회자였다. 또한 교인들에게 끊임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을 전했던 설교자였으며, 이 땅에 진정한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한 신학 교육자였고, 이 땅위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되게 하기 위해 노력한 에큐메니칼 운동가였다. 특히 그는 목회와 신학과의 깊은 연관성을 강조하였으며, '신학자는 설교가가 되어야 하고, 설교가는 곧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설교에 대한 언급에서 김정준의 목회적 관점은 신학자와 목회자를 함께 돌보며, 그 둘 사이 즉 신학적인 학문과 목회 현장 사이의 괴리감을 치유하고 한국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또한 김정준은 이러한 괴리감의 일차적인 책임을 신학자들에게서 찾고 신학자들은 자기의 학문을 교회의 목회자들과 연계시키도록 충고하고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신학자는 새로운 학문의 경향을 소개함에 있어서 목회자들의 입장을 이해하며 친절하게 소개하도록 하고, 그와 같은 것이 목회자의 설교에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해설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김정준의 목회적 관심은 신학교와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그 당대의 사회, 정치적 현실에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설교자들은 그의 설교에 있어서 예언자 정신을 계승할 것을 주장했던 그의 외침에 잘 반영되어 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나아가 나봇이란 순진한 농부의 억울한 죽음을 책망하여 권력을 고발한 것이야말로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설교자가 아닌가? 예레미야가 그 나라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고 그들의 통치자들, 지배계급, 부자들의 죄상을 규탄한 것이 참으로 설교자의 할 일이 아닌가? 맘모스 집회로 수십만, 수백만이 모인 자리에 왜 이 나라의 정치의 부조리와 권력의 횡포를 말 못하는가? 현재 한국의 기독교는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성장의 정지 시대'에 다다랐다. 한 교회의 성장마저도 수직 이동이 아닌 수평 이동에 불과하다. 또한 교회는 더 이상 신뢰를 받는 곳이 되어가지 못하고 있고, 목회자마저 일반 사람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나라의 대규모의 비리사건이 터지면 그 핵심에 항상 기독교인이 연루되어 있고, 교회는 자기의 몸집 키우기에만 바쁜 채 사회를 돌아보는 여유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이제 기독교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고 "예수의 복음"을 전할 자격조차 상실해가고 있다. 기독교의 반성을 촉구하는 목소리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든 것을 무력으로 하려고 하는 교회,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의 개혁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독교의 변질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목회자의 변질"이다. 현대 교회의 목회자는 더 이상 '섬기는 자'가 아니다 '섬김을 받는 자'가 되어 버렸다. 카톨릭과 달리 설교가 중심인 개신교에서 설교를 하는 목회자에게는 엄청난 권위가 부여되어 버렸고, 교인들은 그 권위에 무조건 복종해야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또한 이러한 목회자들이 행하는 설교는 더 큰 문제를 낳고 있다. 현대의 목회자들은 과연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는가? 설교가 하나의 코미디가 되어 버리고, 강단에 서면 교인들을 웃기는 한 명의 코미디언이 되어 버리는 목사,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에 빠져 성서의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하는 목사, 이러한 목사들이 인기 있는 목사가 되어버린 현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기독교의 개혁의 핵심은 바로 목회자이다. 목회자가 변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결코 변할 수 없다. 목회자가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 "예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을 때 교회는 건강해 진다. 목회자가 먼저 권위를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무일푼의 복음의 전도자였던 예수님처럼 이 땅위에 하나님의 복음 전파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김정준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났다.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 교회와 신학교육에 힘썼던 그의 모습은 지금의 개혁의 대상이 되어버린 목회자들에게 많은 교훈을 전해준다. 진정으로 고난을 당하는 교인들과 함께 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나누어주었던 희망의 목회자 김정준, 교인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에 빠지지 않도록 이른 새벽 교인들을 깨우러 다니던 김정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생각으로 기도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성서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설교를 준비하고 선포했던 김정준, 크리스천이란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에까지도 봉사해야 한다고 선포하던 김정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세계가 하나임을 인식하고 우리의 하나됨을 위해 헌신하던 김정준, 교회란 진리의 말씀, 구원의 말씀, 능력의 말씀을 가진 생명체임을 강조했던 김정준, 목회자란 이런 교회를 섬기는 자임을 잊지 않았던 김정준, 설교자는 신학자가 되고, 신학자는 설교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던 김정준, 이러한 김정준의 모습들이 지금 현대의 목회자들에게 필요함은 자명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김정준이 설교준비를 할 때 읽는 성경 첫 페이지 공백에 기록해 놓았던 글을 통해 다시 한번 그의 모습을 기억해보고자 한다. 1. 목사가 타락해 가는 증거는 그가 설교를 준비하고 또 쓸 때 기도없이 시작하는 것이다. 2. 영감도 없이 설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만심이 목사의 타락의 증거이다. 3. 기도를 등한히 하는 목사는 타락 초기가 아니라 타락 말기에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못 가지고서는 설교할 수 없다. 이처럼 김정준에게 있어서 목사란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그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는 과정속에서 항상 성령의 인도로, 그리고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정준의 설교는 그의 신학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이었으며, 그의 신학은 설교와 더불어 그의 삶과 목회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 그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쓴 위의 글은 올바른 설교자, 목회자가 되기 위한 그의 피나는 노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엘리사벳 A. 존슨의 삼위일체론 연구

        구윤정 한신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10 국내석사

        RANK : 250671

        본 연구는 우선적으로 존슨의 소피아삼위일체론 연구를 통하여 여성과 모든 사회적 구조적 약자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해방적 예배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에서 시작되었으며 일차신학과 이차신학의 영역에서 실천성과 이론을 상호 반추하며 다양하고 세부적인 주제들을 지닌 논의들을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또한 소피아삼위일체론의 의의를 재조명하고자 하였다. 그리스도교신학의 삼위일체론의 전환의 개막을 이끈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의 영향 이래로 20세기 후반동안 입증되어 온 신학 속에 있는 최고의 비밀들 중의 하나인 삼위일체론은 이후 “삼위일체신학의 르네상스(Renaissance)”라 일컬어지며 여성신학에까지 이어진다. 여성신학에서 삼위일체론의 르네상스는 엘리사벳 A. 존슨(Elizabeth A. Johnson)과 캐서린 모리 라쿠나(Catherine Mowry LaCugna)에 의한 저서들을 통해 논의되며 삼위일체의 이론과 실천의 영역이 확보된다. 존슨과 논의에 참여한 여성신학자들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의 하나님 언어의 고찰을 통하여 예배 언어의 범위를 확장하며 여성 그리고 모든 교회공동체의 구성원을 포용할 수 있는 하나님 언어를 구하고 실천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 핵심적이라고 한다. 필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론의 논의를 통하여 모든 신앙의 중심에는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체험이 있다는 것과 여성체험의 시각에서도 스스로 역사 안에 개입해 들어오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신비와 관련한다는 것을 먼저 존슨의 소피아 삼위일체론을 중심으로, 다음으로 라쿠나와 더크의 삼위일체론 논의를 중심으로 대화하고 고찰하여 여성신학에서 삼위일체론의 르네상스의 물결이 이루는 삼위일체론 논의와 이러한 하나님언어의 실천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예배에서 중요하며 핵심적이라는 인식의 과정을 거쳤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인들은 존슨의 소피아삼위일체론 연구를 통하여 얻은 바로부터 실천하고자 할 때 그리고 하나님 언어의 여성성과 남성성을 논함에 있어 근본적으로 이분법의 논리를 넘어서 모든 약자들을 해방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여성신학에서의 삼위일체론 논의는 이러한 여남 이분법적인 논의를 넘어서 가부장적, 세계자본주의적 사회구조 안에서 신앙적, 성적, 인종적, 정치적, 경제적, 생태 환경적 이유로 억눌림을 당하는 모든 약자의 해방의 문제로 나아간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여성신학에서의 삼위일체론 논의에 관련한 신학의 기준점을 마련하려는데 이 글의 목적이 있다. 주제어: 소피아삼위일체론, 여성신학에서의 삼위일체론의 르네상스, 여성신학, 관계성, 하나님 언어, 여성해방적 예배

      • 구스타보 구띠에레즈의 해방신학과 '신은사 운동'에 관한 연구

        오세열 한신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9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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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민중의 한(恨)이 서려 있는 학문이다. 해방신학은 라틴 아메리카의 ‘가난’을 마르크스의 사회분석 방법인 ‘종속이론’을 통해서 선진자본주의 국가를 통렬히 비판한다. 선진국의 제3세계 국가에 대한 종속은 경제 영역뿐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아울러 국가안보를 내세우는 군부독재정부에 의해서 종속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가톨릭교회-라틴아메리카주교협의회-는 1968년 라틴 아메리카의 ‘가난’문제를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이로써 해방신학의 토대가 마련되었고, 라틴 아메리카 가톨릭교회는 ‘가난’과 ‘종속’으로부터 해방을 천명하게 되었다. 이것은 민중의 고난과 한계상황에 거하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 가톨릭교회의 민중지향적인 신학이었다. 구스타보 구띠에레즈(Gustavo Gutierrez)는 해방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가난한 이들이 사는 현장인 페루의 수도인 리마(Lima)의 외곽인 리막(Limac)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지금도 이곳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구띠에레즈의 가난과 동행하는 삶은 그의 저서 ‘해방신학’의 내용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그는 해방신학에서 예수는 민중과 삶을 같이 하였을 뿐 아니라, 예수를 만난 민중은 삶이 변혁된다. 그리고 예수의 복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연대와 사회변혁을 일구어낸다. 그러나 해방신학은 분석방법, 현실인식, 구원 등에 관하여 다수의 비판을 받았다. 그렇지만 전(全)세계적으로 흑인신학, 여성신학, 민중신학 등의 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라틴 아메리카 가톨릭교회는 해방신학을 통해 라틴 아메리카의 민주화와 민중의 권익을 위해서 애써 왔다. 가톨릭교회의 활발한 사회참여에도 불구하고 교세는 점차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라틴 아메리카 사회가 점차 개인화, 다원화, 도시화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로써 새로운 교회 운동으로서 신은사(오순절)운동이 급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정치세력화 함으로써 해방신학과는 다른 관점에서 사회참여를 해나가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 가톨릭교회가 감소하는 것과 달리 신은사(오순절) 운동은 ‘성장’에 초점을 두고, 성장해가고 있다. 이분법적 생각들 - 선과 악, 영혼과 육체, 부와 가난, 하나님나라와 세상, 천국과 지옥 - 등과 같이 성서를 단순한 대립의 구조로서 이해한다. 주목할 부분은 신은사(오순절)운동이 물질적인 축복을 매우 긍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민중에게 감성적으로 큰 설득력을 지닌다. 또 교육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이들은 사회 제도권 진출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 이들은 교회를 통해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고, 책임자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그리고 성서 속의 치유와 기적은 국가 의료 서비스로부터 제외된 가난한 민중에게는 복된 소식이 된다. 이처럼 가난한 자들이 신은사(오순절)운동에 많은 참여를 하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사회 계층이 공존하고 있다. 성장에 대한 강조는 물질적·현세적 축복과 교세확장으로 드러난다. 한편으로 라틴 아메리카 신은사(오순절)운동은 개인의 변화를 통한 사회의 변화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신은사(오순절)운동은 성도 개인 윤리적 기준을 보다 엄격하게 하고 있다.

      • 통전적 성령사역을 통한 교회부흥

        홍일남 한신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12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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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통전적 성령사역을 통한 교회부흥’이라는 주제로 전개되어 진다.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의 뜻이다. 숫자놀음에 의한 부흥주의가 아닌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초대교회적인 부흥은 얼마든지 이 땅위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그 부흥이 오늘날 어떤 형식과 목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지가 논문이 다룰 내용이다. 한국 기독교는 그간 양적 성장에 중대한 성취를 이루어왔으나, 그에 걸 맞는 사회적 책임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역사적 실천의 영역에 있어서는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는 한국 기독교가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신학과, 교권주의적 교회 팽창 그리고 기득권 질서와의 일종의 동맹을 통해 그 스스로가 기득권 질서가 되어버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의 괄목할만한 성장에 가장 중요한 역할의 하나를 감당했던 현대 오순절 성령운동 역시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에 처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비판의 대상인 오순절 성령운동에 사회적 변화를 가져올 윤리적 가능성, 그리고 그를 기반으로 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차원의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한다는 것은 출발부터 모순이자 선택의 여지가 없게 보인다. 그러나 이 논문은 바로 그러한 점에서, 오순절 성령운동이 현실에서 스스로 결과한 책임을 규명하는 동시에, 오순절 성령운동의 본래적 의미를 회복함으로써 오순절 성령 운동이 한국 기독교에서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변화에도 중대한 윤리적 도전과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입증해내는 차원에서 ’통전적 성령사역을 통한 교회부흥‘이라는 제목으로 내용을 전개하였다. 논문에서는 비단 오순절 성령운동만이 아니라 민중신학의 무기력과 민중을 위한다지만 도리어 민중들에게 외면당하는 현실적인 문제제기를 하면서 그 숭고한 민중신학의 내용이 제대로 민중들의 삶에 정착되기 위해서 무엇이 부족했고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지를 오순절 성령운동과의 연관성에서 제시하였다. 그래서 결국 지금의 한국교회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부흥을 가져올 수 있는 대안은 오순절 성령운동과 민중신학의 성령운동의 접목, 보완인 통전적 성령운동에 있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또한 이러한 통전적 성령운동이 실효를 거두기위해서는 무엇보다 목회자가 중요하며 목회자가 위로부터 임하는 오순절 마가다락방적인 성령으로 무장하고 삶에서 본이 되는 거룩함으로 새로워지고, 목회자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변화에 성공적인 통전적 성령운동의 운명이 달려있다고 제시하였다. 이 논문은 따라서, 1906년 아주사(Azusa) 거리의 오순절 성령운동이 인종차별적 현실에서 이를 딛고 성령의 임재를 통한 그 개인의 주체성 회복, 이러한 주체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적 운동의 전개, 그리고 각 지역의 사회적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실천적 요소들을 지니고 있음을 주목한다. 그로써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양극화의 부당한 현실을 선교의 과제로 삼아 오순절 성령운동과 민중신학의 장점으로 준비된 통전적 성령사역이 새로운 사회를 선포하는 예언자적인 운동과 교회부흥의 물고를 틀 것으로 기대한다.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통전적 성령운동은 그간의 보수적 기득권의 타파를 이루어 내고,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가지 모순을 외면하지 않고, 이를 자신의 선교적 사명의 대상으로 삼아, 어렵고 힘겨운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해방의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그로 인해 이루어질 현실에 대한 기쁨을 경험해 낼 수 있는 하나님의 선교 운동으로 자리매김해 가리라 확신한다. 이러한 노력이 이루어져 나갈 때, 한국 기독교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사회 변혁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며, 한국 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가능하게 할 윤리적 실천의 의미 있는 모델이 되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진정한 한국교회의 부흥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세상을 제대로 섬길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 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과 현재적 의의

        이인 한신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9 국내석사

        RANK : 250671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그리고 심지어 신학자들과 목회자들도 삼위일체론을 시대착오적인 사변 혹은 쓸데없는 교리로, 골치 아픈 진부한 주제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시작에서 부터 예배의 핵심을 차지하는 것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증언하는 성서를 읽고 듣는 것,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사하는 것은 결코 우연적인 것이나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의 중심이요. 예배의 핵심이다. 기독교의 정통적 신론은 삼위일체론이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신 삼위의 하나님이며, 그 삼위에서 보여준 하나님은 각각 구별되면서도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내용의 이 독특한 기독교의 신론은 초대 기독교인들의 구원의 경험에서부터 나온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서 교회가 만들어낸 임의적이고 사변적인 교리가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의 체험에 근거한 실제적인 교리이다. 또한 희랍의 범신론과 로마의 다신론 그리고 유대교의 유일신론 등의 다른 종교에 대한 침투에 대하여 기독교의 정체성과 기독교가 가진 고유한 진리를 지켜내 온 핵심적 교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1970년 중반 이전까지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동안 삼위일체론에 관한 구원경험에 대한 연구보다는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묻게 되었고 점차 추상적인 탐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의 방향으로 인한 결과로 삼위일체론은 실천적인 측면과 실용적인 면에서 비판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합리주의와 과학주의등 세속주의의 강력한 도전과 비신화론에 따른 성서권위의 추락, 인권운동과 여성운동과 흑인운동에 의한 기독교에 대한 반감, 그리고 종교간 대화를 통한 기독교의 상대성이 강요되면서 삼위일체론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신학적 풍토는 더욱더 무르익어갔다. 결국 삼위일체론은 하나님 안의 신비를 다루는 사변이거나 신앙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부수적인 신론으로 이해되기까지 이르렀다. 그 대표적인 예로 쉴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삼위일체론을 기독교의 부산물 혹은 부록으로 간주하여 삼위일체론의 위치를 격하시켰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여러 가지 신앙의 진술들을 요약하는 구성에 불과하다고 간주했고 세 가지 신적 인격에 대한 교회의 이론은 부차적이기에 기독교를 하나의 “일신론적인 신앙의 방법”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1799년에 출판된 유명한 『종교강화』(Űber die Religion, 영역 On Religion)에서 새로운 종교개념을 제시하였다. 그에 의하면 종교의 본질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직접적인 느낌으로 무한자와 유한자의 교류가 원초적으로 체험되는 인간성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그의 『교의학』(Der Christliche Glaube, 영역 The Christian Faith)에서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신학의 유신론 혹은 신 존재 증명을 폐기하고 인간성 안에 주어진 신체험 혹은 신 의식으로 하나님론의 거점을 삼았다. 즉 종교나 교의학은 사변에서 출발하지 않고 신 의식이라는 실증주의적 사실(positive fact)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쉴라이에르마허는 삼위일체론이란 기독교인의 자의식(自意識)에 관한 직접적인 진술로 간주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이후에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것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위치를 재발견 하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히 과거의 사유방법(삼위일체론을 하나님의 내적으로 혹은 심미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로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해를 통하여 삼위일체론은 사변적인 영역을 벗어나 좀 더 실천적이고 역동적인 사유의 영역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해방적인 교리로서, 자유와 평등의 공동체 건립의 신학적 근거로서, 여성해방의 신학적 근거로서, 생태계 회복의 신학적 근거로서, 종교 간의 만남을 위한 기독교 적인 원리로서, 유신론과 무신론의 극복으로서, 사회적 관계 회복의 근거로서, 또한 성령의 자리를 재발견하는데 있어서 삼위일체론은 유래 없이 새로운 관심과 각광을 받게 되었다. 위와 같이 삼위일체론은 과거와는 다르게 보다 실천적이고 다양한 모습으로 재탄생 되어졌고 그 위치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른바 “삼위일체 신학의 르네상스” 혹은 “삼위일체론의 부흥“이 전개 된 것이다. 독일의 신학자 쉐델(E. Schaedel)은 오늘날의 삼위일체에 대한 관심을 삼위일체 신학의 르네상스라는 말로 정리하고 있으며, 이러한 삼위일체 신학의 르네상스를 대대적으로 다룬 스텐리 그렌츠의 책에는 1970년대 이래의 경향들에 대하여 “신학에 있어서의 삼위일체론의 부활,” “삼위일체 신학의 부흥,” “20세기에 있어서의 삼위일체 신학의 르네상스,” “삼위일체론의 재발견”과 같은 표현들이 쏟아져 나온다. 스텐리 그렌츠에 의하면, 칼 바르트 (Karl Barth) 이래로 20세기 신학에서 삼위일체론이 다시 등장하게 되었는데

      • 주5일 근무제에 대한 목회 신학적 이해

        문동일 한신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4 국내석사

        RANK : 250671

        지금까지 안식일에 대한 성서적 이해와 주5일 근무제에 대하여 가장 민감한 기독교계의 시각을 목회 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지금의 주5일 근무제가 가져올 다양한 생활 패턴의 변화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교회와 사회에 몰고 올 파장이 적지 않을 것이고, 이에 적극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기에 우리는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주5일 근무제'라는 시대적 변화에 교회가 목회 신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헌법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다종교국가인 우리나라의 기독교계는 적지 않은 파장과 혼란이 예상되기에 더욱 치밀한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기독교인이 거룩한 주일이 아니라 교회의 일이 되어 봉사가 힘들고 피곤한 날이라는 것이다. 주5일 근무제 시행과 관련하여 발생 가능한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목회 신학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목회 신학적 정책 사안들을 실천하려는 의지일 것이다. 실천적 신앙의 첫 걸음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말씀의 계약에도 분명히 기록되었듯이 거룩한 '주일예배'를 회복(성별)해야 한다는 사실과 여가와 안식일에 대한 성서적, 목회 신학적 입장을 정리하여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더 나아가 미흡하나마 목회자를 위한 실제적 제안을 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현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독교계가 예배의 목표를 바로 세우고 오늘의 변화된 문화를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주5일 근무제의 시행이 먼저, 십계명의 제 4 계명에 비추어 볼 때 성서적이냐 비성서적이냐의 논란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주5일제 근무는 '주일성수'문제에는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는 삶의 질적 수준이 상승되었고, 이른바 여가를 즐기는 문화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지만, 교회는 시대적 변화와 문화적 변화가 왔다 해도 진리는(성서) 변화되지 않는다는 목회 신학적 토대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주일은 하나님을 섬기는 날이요, 말씀을 듣는 날이요, 성별의 날이요, 기도의 날이요, 생명을 살리는 날이라는 인식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믿는 신앙 고백적 행위(예배)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기쁨으로 쉼을 누려야 하는 날이다. 주일은 생명의 내어줌을 통해 생명을 살리는 희생과 섬김이 따르는 날이요, 성령이 역사하시고 주관하시는 축제의 예배가 베풀어지는 날이다. 그 예배 안에 행동이 변화되고 가치체계가 형성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구원활동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그 구원 활동에 목회 신학적으로 적극 참여하게 해야 한다.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되고 있으나 그것으로 인하여 교회가 변화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제도화된 교회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교파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여 본래의 사명을 상실한 채 이분법적 사고에 의해서 세상과 교회를 성과 속으로 구분하였다. 결국 기독교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여러 교단으로 분열을 거듭하였으며 교세확장을 위한 신학교가 난립하고 그로인해 목회자의 인격과 자질 또한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결국 기독교계가 사회에 정신적, 영적 리더쉽을 발휘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된 것도 사실이다. 주5일 근무제의 대안으로 예시되었던 '전원교회'와 '주말교회'는 주일예배를 드리지 않은 채 여가를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여가생활 현지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예배처소로 제공한다는 논리에서는 타당해 보이지는 한다. 그러나 이는 시대의 흐름과 여가문화를 빙자하여 성경의 진리를 왜곡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즉 세상이 아무리 변화되어도 진리는 변화되지 않는 것이라고 확신 한다면 '주5일 근무제'와 '주일성수' 문제는 별개의 사안이라고 생각해야할 것이다. 따라서 주일예배의 대안으로써의 '전원교회' 또는 '주말교회'는 목회 신학적 관점으로 볼 때 잘못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목회자들은 좀 더 목회 신학적 차원에서 고민하고 기도하며 모든 기독교인들이 다양한 환경 속에서도 주일예배를 반드시 지킬 수 있도록 목회를 기획해야 할 것이다. 점점 더 거세지는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부중심, 가족중심, 주말 프로그램 개발이나 지역사회 복지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공동체 교육에 대한 목회 신학적 접근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찾고 한국적인 전통과 관습을 재발견하고 해석하는 목회 신학적 노력이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한국교회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분석하여 교회가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 주5일 근무제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하여 이 땅의 모든 신학자들(목회자 포함)이 먼저 오늘날 급속도로 변화하는 문화에 대응할 수 있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제 4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는 일에 함께 참여하여 변화되어 가는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기독교가 정직하고, 진실하며, 인격적이고, 교육적이며 사회 전반에 걸쳐 친밀한 관계형성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주 5일제는 인간의 여가선용 욕구와 문화의 변혁을 배경으로 한 사회적 합의의 결과물이지만 제4계명의 주일성수 문제는 인간의 합의의 산물이 아니라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계명임을 먼저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 만수 김정준의 경건신학에 관한 연구

        이형원 한신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4 국내석사

        RANK : 250671

        김정준의 신학은 "나(교회)", "공의", "하나님"에 중심을 두고 있다. 이 셋은 아모스 예언자가 가르치는 구약신학의 기본 테마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이라는 전체의 "나"는 공의가 허물어진 정치와 사회 때문에 고민했고, 예언자 아모스는 공의를 잃어버린 암흑한 사회에 정의를 외침으로써 새 아침을 가져오고자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그러나 이 나와 공의와 하나님 셋의 조화를 영 이루지 못하고 북 왕국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말았다. 김정준은 자신의 신학으로써, 지금의 한국와 민족의 상황이 주전 8세기의 북 이스라엘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준은 한 개인도 나와 정의와 하나님 이 셋을 연결짓지 못할 때, 그 인격은 파산 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내가 정의를 짓밟아버리고 시기와 질투와 탐심과 욕심으로 이루어진 육의 인간 아래 정의가 짓밟힐 때, 그것은 정의만의 유린이 아니라, 그 정의의 본체되시는 하나님까지 유린하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러한 "나"와 "공의"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김정준의 경건신학은 지금 한국교회가 처한 위기와 많은 문제점에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물질주의와 세속주의, 성장 지상주의에 물든 한국교회에 대해 어떠한 영성, 경건이 필요한지를 역설한다 세상적인 가치와 기준이 아니라, 거기에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경건이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결단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통해서만이 교회를 향한 사회의 비판으로부터 벗어나, 교회의 본질적 임무인 선교에 제대로 임할 수 있다. 김정준은 또한 한국교회의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모습에 대해, 공동체의 경건을 강조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신앙을 갖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적 테두리 안에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국가와 민족, 사회와 역사도 신앙과 무관하지 않다. 세상은 구원의 방주를 침몰시키는 바다가 아니라, 교회라는 물고기가 호흡해야 할 곳이다. 따라서 우리가 함께 숨쉬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불의에 저항하고, 정의를 세워야 한다. 바로 김정준의 경건신학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경건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신학은 "고난"을 통해 "경건"에 이르는 신학이다. 김정준에게 투병생활은 제2의 인생을 가져다주었고, 신앙과 사상과 신학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했다. 그는 투병 중에 만난 시편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시인들과 함께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비결을 배웠다. 그래서 시편의 절대 다수가 경건한 자들이 고난을 노래하고 고난이 그들의 경건을 더욱 빛나게 했던 것처럼, 김정준의 경건신학도 빛을 발할 수 있었던'것이다. 그에게 기독교 신앙은 고난을 통하여 그 신앙을 더욱 빛나게 하고 그 신앙을 통하여 자신의 고난을 극복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김정준의 경건신학의 알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에 내가 생각하기를 은혜가 시련보다 좋은 것이라고, 은혜를 기구하여 이것을 내가 가지기를 원하였고, 내게 있는 시련은 이것이 없어지기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은혜만이 은혜가 아니라 시련도 은혜입니다. 은혜만 기구할 것이 아니라 시련도 기구할 것입니다. 은혜만 욕심낼 것이 아니라 시련도 원할 것입니다. 시련에서 받는 은혜는 이보다 고귀한 것이 없고, 은혜로 받은 시련처럼 보배로운 것이 없습니다. 주여! 주의 주시는 은혜이고 주의 주시는 시련이 오매 어는 것을 더 사랑하고 원하리오. 모두가 축복이오니 은혜와 시련에서 주님만을 찬송케 하옵소서.

      • 민중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

        조수정 한신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9 국내석사

        RANK : 250671

        기독교는 처음 한국에 들어온 이래 가히 놀라만한 속도로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러한 성장 뒷면에 감추어졌던 수많은 폐단들이 속속 들어나면서 오늘날 기독교는 크나큰 위기에 직면했다. 게다가 작년의 아프가니스탄 선교단 피랍사건 이후 더욱 심화된 기독교를 향한 불편한 시각들로 인하여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마치 애물단지와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종교가 비종교인 혹은 타종교인에게 그렇게 비추어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처음 신학을 하겠다고 신학교에 들어갈 때에는 그저 ‘행복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뿐 이었다. 입학하기 전 경험한 짧은 직장 생활은 나에게 자본의 논리에 좌지우지되는 내 자신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사회의 구조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게 해주었으며, 이러한 느낌은 물질에 의한 것이 아닌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누리고 싶다는 더욱 강렬한 욕구를 만들어냈다. 당시에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한다면 단순하게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봉사하고 활동하는 것이 전부인 줄로만 알았다. 신학교에 들어와서 처음 만나게 된 민중신학도 생소하고 낯설 뿐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첫 느낌에 ‘민중신학? 저기엔 뭔가 있는 것 같다’ 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한 확신이 지금까지 인연이 되어 민중신학을 계속 공부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덕분에 내가 해야 할, 그리고 하고 싶어 하는 행복한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논문은 그러한 관심을 바탕에 두고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교회의 새로운 형태에 대해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미 한국 사회 속에 ‘교회’는 무수히 많다. 어두운 밤이 되면 붉은 십자가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인 제도권 교회 안에서 진정 민중이 마음 편히 쉬었다 갈 곳은 찾기 어렵다. 안병무도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제도권 교회의 모습을 지적하였다. "오히려 제도교회의 존속을 위해서, 저들을 경원하고 점점 저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종교라는 담을 높여만 갔고, 더 피안적인 종교로 변모해 갔어요. 그런 결과로 현재까지도 민중이 들어올 수 없는 장애물이 무수히 많아졌어요. 제사지내도 안 되고, 술을 마셔도 안 되고, 담배 피워도 안 된다! 하지 말라는 게 자꾸 많아지니까 점점 못 들어오게 되는 거죠. 민중들이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습, 이를테면 막걸리 정도 먹는 것 까지 못하게 하니까요. 그건 교회에 들어오지 말라는 얘기죠." 민중들은 기존 제도권 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변화와 선교의 대상이며,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되기 일쑤이다. 그러한 실례들을 직간접적으로 접하고 듣게 되면서 진정 교회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넘지 못하는 교회의 문턱이 얼마나 높은지를 깨닫게 되었고 그러한 교회의 모습에 대한 의문과 회의가 들었다. 그 뿐만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는 본래의 예수 정신을 망각한 채 양적 성장주의와 개인주의에 빠져있으며, 선교의 참 목적을 왜곡하여 교세 확장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필자는 급속한 성장의 이면에 많은 문제점을 떠안고 점점 교회의 본래 모습과 멀어져가는 한국 교회의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는 교회가 ‘민중교회’라고 본다. 또한 민중교회는 서구신학의 흐름을 그대로 답습하는 한국 기독교에 대하여 한국적인 바탕을 가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70-80년대에는 위와 같은 이해를 바탕에 두고 새로운 교회의 흐름으로써 민중교회가 등장하였고 다양하게 성장해왔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정체성의 위기를 겪으면서 대안이라고 생각했던 민중교회에서 조차 내부적으로는 기존 교회를 형식을 답습하며, 계층과 분열의 문제가 발생하고 민중이 없는 민중교회가 되거나 혹은 민중교회의 본래의 기능성을 상실하기도 하면서 민중교회 내부적으로 많은 고민과 변화를 추구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자 민중신학과 민중교회는 한국 사회 속에서 더 이상 설자리는 없는 현 시대 상황과 동떨어진 신학인 것처럼 평가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민중교회는 시대가 변화되고 달라진 만큼 그 흐름에 걸맞게 정체성과 사명을 회복하고, 새롭게 변화․갱신될 필요성이 있다. 논문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은 이들이 논문의 주제가 무엇인지 물어오곤 하였다. 민중교회에 대해 논문을 준비한다고 말하자, 어떤 목사님은 ‘민중교회 다 망한 것 아닌가? 요즘도 민중교회가 있나?’ 라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민중신학을 붙들고 있는 학자들과 민중교회를 지켜나가는 현장의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듯, 민중신학과 민중교회는 지나간 과거의 것이 아닌 앞으로도 변화와 발전이 가능한 미래지향적인 것이다. 그 자리를 지켜나가고 있는 많은 이들이 여전히 민중신학과 민중교회에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논문은 이러한 인식 바탕으로 민중교회의 흐름을 정리하고, 21세기에

      • 여성-교회론 연구 : 로즈마리 R. 류터와 엘리자베스 S. 피오렌자를 중심으로

        서옥희 한신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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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여성해방론자가 되면 될수록 교회에 나가는 일은 더욱 어렵게만 된다고 한다. 위계질서적이고 남성중심적 교회 구조와 성직의 특성이 성 평등 사회를 지향하는 현대의 성도들에게는 갈등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2003년 월 한 목사의 설교는 이러한 교회의 성차별 문제의 심각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현재 교회의 수많은 성차별 문제와 구조의 남성우월적 위계질서는 교회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필요로 한다. 교회를 인간 구원(해방)을 위해 헌신하는 공동체로 이해할 때, 여성신학의 교회론은 미래의 교회에 대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여성신학의 교회론의 실천인 여성-교회 운동과 이에 대한 신학 이론화 작업이 중요한 것은 현재 교회의 상황에 대한 비판적 평가에 있다. 종교개혁, 계몽주의,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 1968년 WCC의 하나님의 선교신학, 해방신학은 모두 그리스도교의 개혁적인 해방 지향의 성격을 지향하는 노력들에 일환이었지만 21세기인 현재까지 계속되는 교회의 문제들은 온전한 평등과 해방의 실천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선교 도구로 사용되는 교회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위해 그리스도교 교회의 새로운 전망은 교회와 신학에서 여성-교회가 필수적이고 완성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여성신학의 교회론으로 제시된다. 피터 C. 핫즈슨은 대표적인 여성신학자들인 피오렌자, 류터의 연구에 의존하여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평등주의와 포괄적 특성의 발견, 여성 교회 운동의 출현을 포함한 교회 지도자 직분에서의 여성의 역할 변화, 언어 혁명이라는 세 요소가 새로운 유형의 교회 신학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로즈마리 R. 류터와 엘리자베스 S. 피오렌자는 모두 여성해방을 위한 에클레시아의 실천에 근본적으로 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피오렌자의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재구성은 역시 교회 지도자 직분을 여성과의 관련성을 탐구해 낸 것이고, 류터의 교회사 연구 또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발견된 평등주의와 포괄주의의 발견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교회를 위한 전망은 세 가지 요소 모두 성서에서 그 해방적 요소를 찾아내어 새로운 전망으로 삼는데 여성-교회 운동이 이 세가지 요소를 모두 포함하는 중요한 교회론의 주제가 된다. 이것이 본 논문의 논지인 새로운 교회를 위한 교회론으로써 여성-교회론 논의를 시작하게 된 주요 동기이다. 이러한 여성해방론의 교회론의 중요성을 바탕으로, 본 논문은 대표적인 두 여성신학자 로즈마리 R. 류터와 엘리자베스 S. 피오렌자의 교회론을 통해 여성신학의 교회론이 갖는 핵심 주제를 이끌어 낼 것이다. 이를 통하여 이들의 여성-교회론의 입장이 왜 중요하며, 어떻게 다르며, 또한 두 학자의 여성-교회론이 서로 어떤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가 등등을 제시할 것이다. 본 논문은 여성-교회론에 관한 전체적 전망을 위한 논문으로써 가치를 갖는다. 가톨릭 전통에 서 있는 본 논문의 연구 대상인 두 여성신학자를 선택한 동기는 여성신학의 에큐메니칼적 특성에 있다. 즉, 여성-교회 운동의 시발점이 가톨릭의 안수 문제로부터 나왔지만 여성신학이 갖는 독특성은 교파를 초월하여 갖는 공통된 문제를 갖고 있다. 한스 큉은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교』 에서 역사상 교회 제도들을 조망하고 있는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칼빈의 장로제적, 협의제적 교회 제도가 비교적 민주주의에 공헌했음을 설명하는 중에 교회 제도들을 그림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1천년 기의 교회들의 공동체와 11세기 로마 가톨릭 교황 교회, 16세기부터의 루터파 공권력 교회, 그리고 16세기부터의 개혁파 공동체 교회 제도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요약하고 있는 네 가지 교회 제도들은 모두 피라밋 형태의 질서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또한 로즈마리 류터에 의하면 조합 교회적인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에는 비록 교회에 대한 여성해방적 이해를 전개시키려는 성직자와 혹은 그 일이 수반하게 될 교회 갱신으로부터 오는 위험성을 떠맡을 수 있는 성직자가 거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개신교회의 여성 목회자들이 있지만 그들 자신이 전통적인 제도 교회의 현상 유지나 교인들의 저항으로 적극적으로 변혁을 시도하지도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피오렌자도 자유주의 개신교 기관에서 활동하면서 그곳에도 가부장적 차별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며, 오히려 여자들을 노골적으로 혐오하는 태도가 자유주의 형태를 띠는 그것보다 차라리 맞서 싸우기 쉽다는 사실을 동감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신학의 교회론의 문제는 교파를 초월하는 모든 그리스도교의 문제이며 나가서는 성서 종교 전체의 문제이다. 교황 교회 제도가 이단적이라면 개신교의 목회자 중심주의 또한 복음과 반대되는 개인 우상에 떨어질 위험에 직면한다. 최근에 개신교 측에서도 WCC에서 실행하는 Being Church 프로그램을 통해 교회에 대한 새로운 시도들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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