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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락사에 관한 기독교적 고찰 : 영남지역 신학도들이 이해한 안락사에 대한 윤리적 고찰

        안효욱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RANK : 249647

        본 논문에서는 안락사에 대한 기독교적 고찰을 함으로서 신학적 의미의 생명을 생각해 볼 때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자기의 형상으로 만드신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죽음의 문제도 우리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 당연히 이 세상에서 고통 받고 사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인간이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생명의 연장이 이루어졌고 더 나은 삶의 질의 문제에 직면함으로 죽을 때도 편안한 죽음을 선택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안락사라는 것을 생각한 것이다. 즉 안락사는 죽음이 임박한 환자가 견딜 수 없을 만큼의 극심한 고통으로 인한 경우, 의학적으로도 소생의 가능성이 전혀 없을 때 인위적인 방법으로 생을 마감하게 하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며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죽음을 인위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명백한 하나님이 주신 생명에 대한 살인행위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으며 어떤 방법으로도 죽일 수 없다는 것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존엄한 가치로 유지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안락사는 죽음의 문제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하나님이 주신생명은 안락사라는 의료적 문제나 사회 법적 문제보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신앙양심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각 국에서는 안락사법안 마련되어 시행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우리 영남지역 신학도들이 이해한 안락사에 대한 윤리적 고찰에서 신학도들은 안락사 문제와 그에 따른 윤리적 문제를 설문을 통해서 알아보았다. 여기에서 안락사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인간의 생명과 관련해서 신학도들은 환자의 극심한 고통 경감에 대해서 안락사를 찬성한다는 응답자들이 많았지만 가족의 고통경감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와 가족들의 경제적 부담 때문에 안락사를 동의한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많은 응답자들이 그것에 동의하지 않은 사실을 발견한다. 이것은 아직도 우리 한국사회가 정서적으로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힘들지만 어려움을 같이 하겠다는 뜻으로 생각 될 수 있다. 또한 안락사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을 살펴볼 때 생명의 존엄성 때문에 반대한다는 응답자가 매우 많다는 사실을 보면 신학도들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에 대해서 귀중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며, 종교적인 이유와 윤리적인 이유에서도 많은 응답자들이 반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신학도들은 생명을 사랑하고 윤리적으로도 바른 신학관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소생가능성 없는 환자에 대한 의사의 치료 중단에 대한 윤리적 이해를 봤을 때 치료를 중단에 대해서도 안 된다는 입장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치료를 해줌이 윤리적으로 찬성함을 볼 수 있다. 이 설문에 대해서 연령을 보면 다수의 응답자가 젊은 층임을 볼 수 있고 청. 장년기에 많은 사람들이 응답해 주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아직까지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안락사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경향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죄로 인해 이 사랑의 관계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며, 죽음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 기능주의적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받아서 안락사를 행한다거나 또한 죽음을 필요이상으로 미화하여 안락사를 자행하는 것은 기독교 윤리적인 면에서 철저히 배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인간에게 살인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고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설문을 하면서 요즘 젊은 세대들이 효에 대한 관심이 없고 점점 서구화되어 가는 이 때에 안락사를 찬성하지 않겠느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의외로 신학도 들이라서 인지 이러한 예상을 뒤엎은 사실을 볼 때 내심 반가운 마음도 앞선다. 요즈음에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하는 시대에 스스로 생명을 끓는 현실에서 우리는 생명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 것인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이런 사회의 저변에 놓여 있는 자살이나 안락사에 대해서 한국 교회에서는 좀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서 하나님이 생명의 주권자 되심을 주지시키고, 아직도 불치의 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에 대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부활의 소망으로 위로하며 생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심어주어 자연스런 죽음을 맞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기독교인의 생명과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는 안락사를 거부하며 인간의 생명이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받아 안락사를 행한다거나 또 죽음을 필요이상으로 미화시켜 안락사를 자행하는 것은 기독교 윤리적인 면에서 배격되어야 한다.

      • 家族에 의한 주부 우울증 치료에 대하여 牧會相談學의 제안

        남기세 영남신학대학교 대학원 2007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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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의 목회는 ‘치유의 목회’라는 명제아래 대도시의 일부 큰 교회들과 신학교들에서는 목회상담의 프로그램들을 현장과 교육에 있어서 실행에 옮기고 있다. 그러나 가부장제에 의한 가족문화와 씨족사회의 전통과 단일부락 특유의 폐쇄성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농촌의 교회들과 교인들 간의 특수한 갈등들을 안고 있는 농촌교회들은 목회상담학적인 제안들이 목회의 현장에서 절실히 필요하다. 왜냐하면 집안의 문제가 교회의 문제가 되고, 동네의 문제가 교회 안의 문제로 비화가 되기 때문이다. 본 연구논문은 사례에 나타난 대로 지역사회에 살고 있는 내담자의 경우를 대상으로 하여 내담자의 우울증원인과 및 분석을 하면서 목회상담학의 제안을 하고자 하였다. 내담자는 가족체계 구성원들과의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데도 가족간의 경제적인 문제를 내담자 측이 시부모와 주변가족들을 열성적으로 대해 주는 편이다. 여기에다가 분화되지 못한 가족체계에서 볼 수 있는 시부모의 가부장적 권위와 남편의 가부장적 태도 속에서 일상의 삶을 이어 가야 되는 내담자는 상담자와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태도들을 많이 보였다. 이에 대한 내담자의 우울증 원인 및 분석결과는 다음과 같다. 가족의 기능으로서 정서적 지지기능이 있는데 정서적 지지기능의 역기능적인 면이 개인 및 가족문제의 발단이 되는바, 내담자는 가족 체계 구성원들로부터 그다지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형편인데도 가족간의 경제적인 협조 문제나 시부모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내담자가 거의 일방적으로 헌신을 하는 편이다. 이런 가운데 내담자가 신경증(Neurosis)의 일종인 우울증에 상당히 노출되어 있다고 판단되는 이유는 방어기재의 일종인 투사(projectio) 부정(否定,denial), 반사 감정에 의한 짜증이나 신경질적인 대화자세가 자주 보이는 점, 그리고 대화를 한번 시작하면 대화의 중심점과 간결성이 없이 장황하게 긴 시간을 이어가는 것 등이 자주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어기재의 일종인 투사(projection) , 부정(否定,denial), 반사 감정에 의한 짜증이나 신경질적인 대화자세가 자주 보이는 점, 그리고 대화를 한번 시작하면 대화의 중심점과 간결성이 없이 장황하게 긴 시간을 이어가는 것 등을 발견한 점이다. 내담자의 우울증세 대하여 목회상담학의 상담가로서 갖추어야 할 상담자의 자세들은 다음과 같다. 내담자의 어려움을 진정으로 들어주면서 공감하려고 노력하는 것, 내담자가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것, 내담자에게 우울증을 유발시킨 요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 내담자가 획득하지 못한 자기 애적(自己 愛的) 욕구의 파악, 내담자에게 공격성이나 분노와 관련된 죄책감의 유무를 판단하는 것, 내담자가 신앙적으로 힘들어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 내담자의 신앙적인 지지구조를 파악하는 것, 내담자가 실현되기 힘든 너무 이상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보다 현실적인 기대를 갖도록 하는 것 등이다. 목회상담자로서 내린 목회상담학적인 결론들은 첫째: 내담자가 진정한 자기정체성 회복과 궁극적이고 역동성이 있는 자기 삶의 목표를 추구하도록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들에게 있어서 모든 관계성에 기초가 되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성의 不 確立(불 확립)은 인간으로 하여금 진정한 자기의 正體性(정체성)을 갖추지 못하게 하며 삶의 궁극적인 목적도 없이 자기만족과 자기성취라는 人本主義(인본주의)적인 목표들을 따르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 내담자들이 사람들과의 관계성, 더 나아가 환경과도 관계성을 회복하도록 하게 하는 것이다. 이유는 모든 인간들에게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성과 함께 사람들과의 수평적인 관계성이 있는데 사람들과의 관계성이 불안하거나 깨져도 인간의 인격은 심리적 불안이나 장애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셋째: 牧會常談(목회상담)의 本質的(본질적)인 부분은 내담자(혹은 교인)들의 영적이고 심리적인 결함, 왜곡된 자기 방어기재, 해를 끼치는 지배적 신념, 스트레스를 증폭시키는 불안한 성격, 현재의 스트레스 요인들을 정확하게 분석을 함과 동시에 혹시 내담자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내리막길로 치닫는 것 같은 파괴적인 방법 같은 것들을 선택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넷째: 목회상담사역의 궁극적 목표로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들이 있는데 이는 목회상담자들이 내담자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구원의 신비를 체험하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사랑 하심이 체험이 되어 지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 째: 목회상담가는 내담자 스스로가 변화가 되도록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 목회상담은 상담자가 일방적으로 내담자를 돕는 다고하기 보다는 상담자가 내담자와 더불어 經驗(경험)과 처지를 이해하면서 관계를 맺고 함께 동반 성장해가는 과정 신학이다. 여섯 째: 상담자는 상담현장이 아닌 다른 곳이나 상담현장에서나 하나님의 성육신의 현존을 깨닫는 신앙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이런 신앙의 바탕과 목회상담학의 방법들을 가지고 내담자로 하여금 예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10:10절)고 말씀을 하신 것을 체험하도록 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하고 건강한 삶을 누리게 하려는 데에 있는 것이 목회상담학의 목적이요, 기능인 것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은 천 길 물 속과 같아 슬기로운 사람이라야 그것을 길어 올린다”. 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목회상담자는 내담자들이 놓여진 상황을 이해하고 내담자들에게 방향제시를 함에 있어서 자신의 신학적인 견해 때문에 내담자들의 문제에 대해서 신앙이나 신학적인 기준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본 연구 논문에서 연구자는 사례에 나타난 내담자가 우울증의 극복 및 치유의 과정을 위해 상담자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였다. 내담자의 남편과 내담자 주변의 가족들과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노출되지 않는 방법을 가지고 그들 서로 간에 적절한 칭찬과 격려를 주고받을 것, 가족들 서로 간에 이해와 공감대를 구축하도록 하게 하면서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만남이 가족들끼리의 화해나 주변 모든 사람들과도 화해를 이루는데 절대적인 도움이 된다는 것과 심어주는데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내담자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꼭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과 찬송의 힘을 상담자도 의지하였고 내담자에게도 이를 알려주었음을 물론이다. 추가적인 제언으로서, 농촌지역의 열악한 목회상담학의 체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총회차원의 목회상담 인프라 망을 구축하거나 최소한 노회 차원에서라도 상담지원체계를 구축해서 활용을 한다면 질적·경제적·시간적·인적자원 면에서 효과의 극대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제도의 도입 시기는 지금이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이런 제도는 앞으로 한국교회가 생명력 있는 교인들을 양육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고 본다.

      • 교회의 선교 교육론의 이해와 통전적 교육방법 연구

        곽미나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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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본 논문에서는 현대 상황에 맞는 교육신학을 형성하고자하는 한 시도로서 양분된 복음주의 선교론과 에큐메니칼 선교론의 중심 내용들을 고찰, 비판함으로서 통전적 선교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했으며, 그러한 통전적 선교론의 정립을 통한 실천의 형태 속에서 선교 교육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먼저, 선교 교육의 의미와 필요성에서는 선교는 하나님의 사업이며, 교회의 사명이고 또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세계선교를 이해하고 동참하도록 하는 즉, 세계 복음화를 위한 복음전도훈련, 제자 훈련, 선교 훈련 등의 선교 교육의 의미 필요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양대 선교 유형을 비교했을 때, 공통점으로 첫째로는, 둘 다 전통적인 학교식 교육 범례를 뛰오 넘어 보다 나은 교육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전통적 학교 방식의 교회 교육은 바람직한 선교 교육이 될 수 없다고 하는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셋째로는, 제도화된 교회관을 넘어서 성서에 기초한 교회인식을 보다 바람직하면서도 새롭게 하여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견해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강조하는 방법론적 대안들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 리챠즈는 교육 신학적 근거를 "교회론"에 두고 있는 반면에, 러셀은 교육 신학적 근거를 "하나님의 선교"에 두고 있다. 둘째, 리챠즈는 교육 목적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형성과 "제자화"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반하여, 러셀은 교육 목적을 "증인 공동에"로서의 선교 교육과 "인간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 셋째, 리챠즈는 교육의 구조를 "몸"의 사역 - "몸"의 형성으로 보고 있는 반면에 러셀은 교육구조를 교회 안팎을 포함해서 폭넓은 개념 구조로서 "대화"라고 하였다. 넷째, 교육 방법에 있어서 리챠즈는 사회화 이론으로 상호 작용하는 "모범의 방법"을 주장하고 있으며 러셀은 의식화 이론으로 "참여"를 통한 훈련을 주장한다. 이들의 문제점으로는 먼저 리챠즈 제자화 교육론의 경우는 소외된 종교 집단이 될 우려가 된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또한 교육의 범위를 교회와 기독교 가정에만 국한시키기 때문에 역사적 현실, 곧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창조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주도할 수 있는 선교의 역군을 훈련하는 근거를 찾기에는 많은 제한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러셀의 선교 교육론이 지닌 문제점은 1975년에 있은 WCC 나이로비회의 이전의 "하나님의 선교"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죄와 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사회적, 정치적 차원으로 축소하므로 영혼구원의 절대적인 필요성이 악화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리챠즈의 선교 교육론에 비하여, 개인의 차원에서 강조해야 할 죄의 심각성이 약화될 가능성이 있고 생명력과 역동성이 약화될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보다 바람직한 선교 교육을 위해 양자의 문제점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며, 보다 성서적이고 온전함을 향한 통합과 통전적 접근을 모색하여야 할 과제를 가졌음을 보았다. 그리하여 현대 교회의 통전적 선교 이해를 통하여, 성서에서 일관되게 증언되는 주제는 하나님의 선교임을 알 수 있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곧 세상 속에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로 나타났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 혼자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동역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선교에 부름 받았던 하나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 백성, 예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공동체,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 개개인에서부터 교회 공동체 전체에 이르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선교는 곧 오늘날 하나님께서 선택받은 백성들, 그리스도인 개개인과 교회공동체로 하여금 감당토록 하시는 절대적인 사명인 것이다. 또한 우리는 선교의 신학적 이해를 통하여, 오늘날 우리가 가장 추구해야 하는 올바른 선교 신학적 이해는 통전적인 선교이해임을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의 선교는 곧 인류의 구원의 차원에서 시작하여 사회의 구원, 즉 사회봉사의 차원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통전적인 선교가 이루어질 때, 선교의 목적인 열방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실현은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통전적 선교 교육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교육의 장을 에클레시아 양육구조의 교회와 디아스포라 훈련 구조의 교회로 하면서 교육목적을 토마스 그룸이 제안한 기독교 교육의 목적을 채택하였다. 즉, 교육의 목적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 내는 것'으로 시도하였다. 또한 새로운 통전적 교육의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참여'이며, 신·구약 전반을 통하여 나타났던 것처럼, 다른 민족 혹은 비그리스도인과의 일련의 관계측면에서 예배와 봉사의 선교적 존재로서 살아감의 방법이 중요하다. 또, 새로운 통전적 선교 교육방법의 실천적 의지하기 위해서는 선교지의 문화와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선교가 아닌 선교의 대상과 상황에 맞추어 영·육간에 적당한 필요들을 채워줌으로 선교교육이 가능할 것이다.

      • 토마스 뮌처의 사회·종교 변혁의 신학

        인태현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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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뮌처는 단지 광신자 혹은 이단으로 평가되거나 급진적 종교개혁가 또는 농민전쟁을 이끈 혁명 투사라는 단편적 시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사회 전반의 절박한 상황하에 놓여진 힘없는 이들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공감하였던 사람이었으며, 산발적으로 번지던 항거의 불길을 하나로 결속시켜 자신의 사상과 신념가운데 농민들을 통하여 개혁의 큰 불길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의로운 나라를 세워 나가려고 했던 사회변혁의 신학자였다. 또한 정치, 경제, 사회 권력과 결탁하여 절대적 빈곤자들을 외면해 버렸던 교회를 각성시키고 변혁하려던 종교개혁자였다. 즉 뮌처의 개혁은 교회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민중을 선동하여 교회를 개혁하고 이것이 개혁되어짐으로써 사회가 개혁되어 진다고 보았다. 때문에 교회의 권력자들과 세상의 권력자들을 적으로 보았다. 뮌처의 이 시기는 자신의 개혁의지를 분명히 밝히면서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인 범주에까지 개혁의 범위를 확대시킨것이다. 뮌처의 삶은 구조적인 죄성의 현실을 인식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참여하는 삶이었으며, 그 무엇보다 종교적 개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공허한 이념의 신앙, 신학을 만들기보다 실천적 신학, 사회 변혁의 신학을 설정한 인물이었다. 또한 뮌처는 새롭게 성서를 해석하여 그 권위를 성령에 두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역동성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고자 한 인물이었다. 뮌처의 개혁이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현실에 대한 인식, 역사적 변혁에 대한 희망은 신학을 통해 "신학 삶"을 살아가야하고 살아가려는 이 땅의 많은 신학도들에게 크나큰 도전을 준다하겠다. 그리고 불확실성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권위아래 이 땅에 공의가 세워지고 생명살림이 이루어지며, 절대 빈곤의 사람들이 인간답게 대우받고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이 이루어지도록 끝없이 추구해야 할 것이다. 여전히 이 땅에는 분단의 고통과 경제적 착취, 절대 빈곤의 문제가 상존하고 있는 바, 오늘의 우리들을 향하여 형식적 신앙과 신앙실천이 결여되고 석화된 신앙양심을 일깨워 내어버리고, 현실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나라를 지금 여기에 세워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생명 평화의 신학을 위한 기독교윤리적 연구

        김명환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7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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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살펴본 생명의 신학과 평화의 신학에 바탕을 둔 기독교윤리적 연구를 통해 오늘날 한국사회를 비롯한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기독교윤리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 인간은 하나님이 더 이상 자신의 삶에 절대적 기준이 되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라고 할 수 있는 교회도 현대인들에게 삶의 문제와 사회적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못하는 세속화의 과정을 격었다. 하지만 여전히 오늘날에도 교회와 신학은 이러한 사회적 과제들과 인간적 고민들에 대한 대답할 책임이 있으며 그 대답은 성서에 바탕을 둔 신학적, 윤리적 대답이 되어야 한다. 본 글을 통해 생명의 신학, 평화의 신학이 어떻게 기독교윤리와 관련을 맺는지를 살펴보았다. 또한 생명의 신학과 관련하여 제기되고 있는 질문들 중 생명의 먹거리의 문제는 인간에게 가장 밀접한 문제인 동시에 항상 고민하게 되는 문제이다. 결국 하나님 없는 기술이나 발전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깨뜨리고 파멸하게 만드는 악한 도구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니어링 부부의 예에서처럼 현대사회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과 성찰의 과정을 통해 먹거리에서부터 출발한 생명에 대한 관심이 생태환경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연결됨을 알게 된다. 인간은 환경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 피조물이다. 환경은 정복과 파괴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동반자로서 우리는 청지기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생태적 위기에 대해 기독교윤리가 어떻게 대답해야 되는지가 이러한 관점에서부터 시작되게 된다. 지금까지의 서구 기독교는 자연에 대해 정복자로 인류문명에 있어 침략자의 위치를 차지해 왔으며, 아울러 서구 신학 또한 이러한 전철을 답습해 왔다. 하지만 이제 서구를 제외한 제3세계 남반구의 신학은 이러한 요구에 대해 자연친화적 전통으로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신학적 사고의 틀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과 인간을 둘이 아니라 하나로 보는 시각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교회에서의 여성의 문제는 시급히 21세기에 해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시대의 변화와 아울러 남녀평등의 문제는 많은 개선을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아직도 여성은 교회 내에서 적절한 위치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에 대한 책임이 신학자와 목회자에게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기독교윤리학적으로 여성과 남성은 더 이상 성적 차이에 의한 차별의 구조가 아니라 인간 내에 존재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문제로 접근해 가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여성의 문제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 가장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실천적인 면에서 여성의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다. 또한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아울러 위치와 권력구조를 증대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평화의 신학과 기독교윤리적 주제들을 다루는데 있어, 보수적인 한국교회의 풍토상 이러한 문제들이 소홀히 취급되거나 언급하지 않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여겨져 왔다. 특히 경제적인 문제, 특별히 분배의 경제에 있어 소홀히 해 왔던 것을 솔직히 시인하고 회개하여 정의로운 국가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특히, 정치, 경제영역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교회가 정의로워져야 한다. 교회는 나눔 을 실천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 교회는 그동안 세상의 필요를 외면한 채 가난한 자와의 나눔에도 신경을 쓰지 못하고 더 갖고, 더 부하게 하려고 신경을 썼고, 성장하고 기적을 일으키는데 모든 힘을 쏟아 왔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 교회는 병든 세상을 고치기 위해 헌신을 다짐하고 실천해야 한다. 작은 것부터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 또한 자유는 생명체에게 있어서 기본 조건이다. 자연환경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서의 자유가 있다. 우리는 그 근거를 마태복음 6:25-29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공중의 나는 새도 푸른 창공을 날며 생명을 영위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주어졌고 들의 백합화 역시 생명을 지니고서 아름다움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하겠다. 평화는 자유를 가진 자가 생명을 정의롭게 보전하는 가운데 나타내는 존재양태이다. 평화 역시 쟁취되는 것이 아니고 주어지는 것이다. 평화는 근원적인 평화로서 통일이 필요없으며 통일된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평화의 본이요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평화의 본이신 하나님을 본받아 평화를 누리도록 하여 생명이 평화를 얻도록 해야 한다. 생존을 위한 윤리에서 평화는 동참이라는 존재양태를 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지며 인간과 인간의 평화를 되찾게 되고 자연과 역시 과거의 지배와 착취로부터 돌이켜 평화로운 동참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윤리는 생명을 사랑한다. 생명은 육체적 생명인 목숨과 영원한 생명으로 나누어 생각하지만 두 생명이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음을 보았다. 두 가지 생명은 다같이 하나님이 은사로 주신 것이다.(직설법) 그리고 이 두 생명은 보존되어야 한다.(명령법)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생명의 보존은 직설법과 명령법의 통합적 의미를 갖는다. 맹용길, 『생존을 위한 윤리』(서울: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91), p. 69.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와 그 가운데 만물을 선하게, 완전하게 창조하셨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이 만물을 지배하라 하셨으나,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함으로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낙원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는 전 인류의 타락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창조 세계와 생태계에 고통을 초래하였다. 이제는 윤리적으로 책임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할 피조물인 우리가 깨닫고, 결단하고, 회개하여 돌아서야 할 순간이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지난날의 모습을 버리고 하나님의 피조물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지하며 창조 세계를 사랑의 섬김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인간성으로 변화되어야 할 때이다. 끝으로 한반도는 이제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가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분단국가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고 지금까지 성장시켜 오셨다. 이제 교회는 분단의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이 땅에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해야 할 사명을 짊어져 나가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은 남북 간의 대화도, 6자회담도, 주변의 강대국도 아니다. 한반도의 평화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바로 예수그리스도만이 평화의 주인이요 바로 평화이심을 선포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화평의 기초를 찾을 수 없다. 개인의 이기적 욕망과 동기에서 화해와 일치를 찾기 어렵다. 국가적 이해관계를 기초로 해서 통일을 모색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가를 우리를 경험으로 알고 있다. 남북의 전쟁을 겪어 불신과 증오심과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들에게서 통일의 기초를 민족에게서 찾는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무력에 기초해서 통일과 평화를 찾고자 하는 노력도 허사이다. 오직 평화와 통일의 희망이 있다면 예수그리스도가 그 기초가 될 수 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에베소서 2:14-18에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가 평화통일의 기초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자기 몸을 화해의 희생물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주인이 되실 때 비로소 원수들이 서로의 적대감을 해소하고 새사람이 될 수 있다. 예수께서 원수 된 것을 폐기하시고 하나로 하실 때 비로소 성령안에서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아버지께 나아가게 된다. 우리 시대에 평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사항이다. 전쟁은 이제 몇 몇의 희생이 아닌 온 민족의 희생을 강요한다. 이 시대 이 역사 위에서 남북의 교회위에 주신 하나님의 위임은 자명하다. 평화의 씨를 뿌리고 평화의 열매를 거두면서 평화의 소망을 이루어 가는 일이다. 이제 교회는 평화의 사도로 분단의 상황에서 고통 받는 이 민족의 희망으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분단된 조국의 하나됨을 위해 한국교회는 먼저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된 모습으로 남북 통일에 주체로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 이해 : 칼빈과 판넨베르크를 중심으로

        박재홍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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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2장에서 초대 교회의 교부시대로부터 현대 신학의 논쟁이었던 "자연신학"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 문제를 다루었다. 중세 신학까지 대부분의 초점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구분이었다면, 현대 신학은 새로운 관점 즉 부르심과 응답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로 신학 논쟁이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3장에 우리는 종교개혁자 중 칼빈의 하나님의 형상 이해에 대하여 다루었다. 칼빈의 신학적 방법론을 시작으로 칼빈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였고, 이것을 어떻게 역사 책임적 과제를 안고, 신자들의 실제적 삶에 적용하여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였는지 살펴보았다.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분명한 개념 이해와 동시에 역사성 안에서 모호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라는 개념을 하나님의 형상 자체인 그리스도를 통해, 나아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형상 회복으로 이해함으로써, 이것이 일회적인 구원의 사건이 아닌 매 순간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영광을 드러내는 삶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되고, 취급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4장에서 우리는 판넨베르크의 인간이해를 다루었다. 그의 저서에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세계 개방성을 통해 유추해보았다. 세계 개방성, 이것은 신을 향한 개방성으로, 나아가 인간을 향한 개방성으로 연결되며 동시에 인간의 대상세계 너머로의 관심을 표명하는 신 존재로의 관심으로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이런 하나님의 형상이해는 인간의 현 실존적인 문제에 대하여 죄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허한 인간의 삶의 자리에서, 신에 대한 개방성의 자리에 인간의 탐욕과 교만이 죄로 규정되며, 뒤바꿈의 현실, 자기애와 그리고 자의식의 소외가 현대 인간학에서 죄로 규정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나아가 이 죄의 해방, 형상의 회복으로서 자아의 정체성 회복을 다루었고, 이것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대하여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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