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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9년 六部 기사의 역사적 배경 -지명 語素의 맥락을 중심으로-

        이부오 신라사학회 2022 新羅史學報 Vol.- No.55

        본고는 신라 6부명의 어소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삼국사기』 유리이사금 9년 6부 기사에 반영된 역사적 실상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 작성되었다. 본피부에서 ‘본피’는 중심역할이나 주된 공간을 의미했을 것이다. 습비부 즉 사피부에서 ‘사’는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피’는 공간을 나타냈다. 한기부에서 한기는 넓은 벌판을 의미했다. 이상은 고유한 읍락의 특징을 표현한 지명들이다. 탁부에서 ‘탁’은 최고 내지 중심지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탁부에서 ‘사’는 새롭다는 의미 외에 ‘높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사탁은 서벌 즉 소벌이 탄생했던 공간의 탁을 의미했다. 모량부에서 모량은 ‘모단벌의 탁’을 줄인 말이다. 모단벌은 길목에 위치한 골짜기의 벌판을 의미했다. 6부의 공간에는 원래 읍락 단계부터 고유한 지명이 존재했다. 그 지명어미가 모단벌의 伐, 한지의 岐(只), 본파의 波 등에 흔적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본파’는 사로국의 탄생 이전에 유력한 세력이었음을 반영한다. 사탁부 일대는 사로국 최초의 국읍으로 부상하면서 기존 고유지명이 ‘서벌’로 바뀌었다. 사탁부는 6부가 편성될 당시 기존 지명 및 탁부와의 관계를 반영한 명칭이다. 월성 일대는 서벌을 대신해 국읍으로 부상하면서 기존 고유지명이 탁으로 변해 이것이 부명으로 정착되었다. 모단벌부는 마립간기에 탁부・사탁부의 지배세력과 연합한 결과, 중성리비에서 모단벌탁을 칭했다. 6부를 ‘탁평’으로 칭한 것은 탁으로 상징되는 신라 지배세력의 우월성을 527년 이후 557년 이전에 6부로 확산시킨 결과로 보인다. 6부의 편성은 지역에 대한 왕경의 우월성과 부 사이의 차별성을 동시에 인정하는 조치였다. 그 시기는 이사금대 후기로 추정된다. 사로국은 국읍인 탁과 주요 읍락을 6부로 편성함으로써 지역세력에 대한 지배세력의 우월성을 드러내려 했다. 이사금은 탁부와 사탁부의 지배세력을 대표하여 6부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했다. 각 부의 干支는 기존 자치권을 유지하는 대신 이사금이 주도하는 6부의 업무에 협조했다. 마립간기를 거치면서 부의 자치단위적 성격은 점차 약화되고 행정단위적 성격은 강화되어 갔다. 유리이사금 9년 6부 기사는 이러한 변화의 출발점과 중고기 이후의 변화를 첫 번째 이사금대로 집약 정리한 것이다.

      • KCI등재후보

        일제강점기 신라사 사료비판론의 전개-≪三國史記≫ 新羅本紀 초기기사를 중심으로-

        이부오 신라사학회 2009 新羅史學報 Vol.0 No.17

        新羅本紀 초기기사에 대한 근대적 연구는 1890년대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일본의 고대 사서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신라본기 초기기사의 신빙성을 낮게 평가하고, 신빙 가능한 시점을 탈해왕대~법흥왕대 이후로 다양하게 설정했다. 러・일전쟁 이후 滿鮮史가 강조되면서 신라본기 초기기사의 비교대상으로서 중국 사료가 강조되었다. ≪三國志≫ 韓傳을 기준으로 신라의 건국시기는 2・3세기 이후로 설명되었다. 특히 前秦에 대한 사신 파견을 근거로 신라의 왕통이 4세기에 시작되었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다. 초기 왕대에 대해서는 혁거세대~흘해대의 16왕에 대한 조작설이 제기되었고, 실제 시기를 수정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대외교섭 기사는 거의 무시된 반면, 任那日本府가 가야지역을 장악해 신라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日本書紀≫의 기록은 중시되었다. 이러한 사료비판론은 신라본기 초기기사의 문제점을 드러냄으로써 합리적 해석의 단서를 제공했다. 그러나 신라본기 초기기사에 대해서는 엄격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중국・일본 사료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편향적 태도를 보였다. 이는 근대적 사료비판론의 외형을 갖추면서도 이를 위한 구성요건을 결여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태도는 최근까지 한국인 학자들의 연구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쳐 왔다. 신라상고사의 복원을 위해서는 이를 극복하는 한편, 신라본기 초기기사에서 드러나는 모순점에 대해 체계적 분석이 요청된다.

      • [三國史記] 地理志에 기재된 삼국 지명 분포의 역사적 배경 - 漢山州, 熊川州, 尙州를 중심으로 -

        이부오 한국지명학회 2008 지명학 Vol.14 No.-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재된 삼국의 地名格은 경덕왕대를 기준으로 정리되어 삼국시대에 실제로 사용된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城’으로 표기된 지명격이나 地名格이 없는 지명은 삼국 당시의 그것에 근접한다. 한산주의 고구려 지명은 백제 지명을 계승․수정한 경우, 백제→고구려→신라로 계승된 경우, 고구려→신라로 계승된 경우, 통일신라 것을 소급한 경우가 있다. 이는 한강 유역을 지배한 주인공의 교체 순서와도 부합한다. 웅천주의 백제 지명과 상주의 ‘본래’ 지명도 대부분 원래 삼국시대 지명이다. 전체적으로는 삼국의 최초 지명이 유지되거나 이를 기반으로 조금씩 수정되었다. 한산주․웅천주․상주의 삼국 지명은 대체로 삼국 당시의 지명을 바탕으로 했다. 그러나 신라의 입장에서 중요도가 큰 지명들은 이 계통과 무관한 지명이나 후대 지명이 선정되었다. 이는 지리지의 저본이 삼국통일 이후 신라인들에 의해 정리된 결과이다. 지리지에서 3주의 경계선은 통일 직전 삼국의 대치선이라 했으나, 이는 한산주․웅천주 경계의 서쪽 부분과 웅천주․상주 경계의 남쪽 부분에서만 타당하다. 나머지 경계는 실제로는 5~6세기 혹은 8세기에 형성되었다. 지리지는 이상의 대치선을 모두 7세기 중엽의 그것으로 정리한 것이다.

      • KCI등재

        底本 수용의 맥락을 통해 본 ≪三國史記≫ 新羅本紀 초기 기사의 이해 방향

        이부오(李富五) 신라사학회 2011 新羅史學報 Vol.0 No.21

        본고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기사에 나타난 정합성과 상충성을 분석함으로써 모순의 현상이 보여주는 규칙성을 밝히고 이에 대한 이해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초기기사를 서술한 첫 번째 기준은 왕위의 명분이었고, 두 번째 기준은 왕호, 세 번째 기준은 왕위계보였다. 기년문제는 이보다 우선순위가 낮았다. 이상을 정리하기 위해 초기기사의 찬자는 主 자료와 보조자료를 적절히 활용했다. 그 중에서도 기년에 대한 판단은 치밀하지 못했다. 따라서 기년 문제는 조작의 결과가 아니라 복수의 저본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초래된 것이다. 사로국의 건국기년은 저본들에서 B.C. 2세기 말(古本 B-①형), B.C. 57년(고본 A형 및 古記), A.D. 1세기 중반(고본 B-②형) 등으로 전해지다가 (고본 A) 내지 古記의 B.C. 57년설이 초기기사에 수용되었다. 이러한 기년관의 출현은 김대문이 활동한 7세기 말~8세기 초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 초기 기사에 대한 왕대인식의 적어도 일부는 《국사》에도 연원을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기년을 달리하는 원전은 별도로 전해지다가 신라본기나 그 저본에 선별적으로 반영되었다. 이 원전들에서 신라의 건국기년은 B.C. 2세기 말~A.D. 1세기 중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사로국의 건국 시기를 파악할 때 유효한 범위로 존중되어야 한다. 김씨ㆍ박씨ㆍ석씨 집단의 일부 계보에서 세대간 시기차가 불합리한 것은 타 집단 계보나 후대의 세대별 평균 시기차와 비교할 때 수용이 불가능하다. 이는 왕위를 차지한 쪽의 계보를 기준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왕위로부터 멀어진 계보의 일부 세대가 누락되거나 착오를 일으킨 결과이다. 실제로는 구도-미추 사이에 2세대 이상, 말구ㆍ미추-내물 사이에는 1세대 이상이 누락되었다. 석씨집단의 `탈해-구추-벌휴` 사이에도 1세대 가량이 누락되었다. 구도 이전의 계보도 실제보다 짧게 정리되었다. 알지의 탄생 기사는 생물학적 출생이 아니라 김씨집단의 유력화 과정을 반영한다. 왕위계보에 대한 저본별 異記, 그리고 누락과 착오는 적어도 7세기 후반부터 발생했다.

      • 悉直國 관련 기사의 자료환경과 新羅의 지배형태 변화

        이부오 한국이사부학회 2015 이사부와 동해 Vol.9 No.-

        본고는 사료의 重層性을 전제로 실직국의 복속 과정과 이에 대한 신라의 지배 형태 변화를 파악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실직국의 복속을 전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3년조는 삼국유사 왕력 지마이질금조와 저본을 달리해 작성되었다. 그 저본의 찬자는 실직국과 음즙 벌국 사이의 분쟁, 그리고 사로국의 중재에 대한 자료를 소재로 실직국의 항복 과정까지 하나의 사건으로 합쳐 정리했다. 파사대의 정복기사는 탈해대·지마대의 대외확장을 강조한 기사와 저본을 달리해 重層的으로 봉합되었다. 파사 23년조는 대외확장에서 파사이사금의 업적을 중시한 저본에 토대를 두었다. 왕력 지마이질금조는 신라본기 파사23년조보다 상대적 신뢰도가 높지만, 절대적 신뢰도를 담보하지 않는다. 실직국은 옥계, 하장, 원덕 일대를 지배했다고 전하는데, 실제 지배 범위는 변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동해시 송정동 일대에도 大邑落이 존재했을 것이다. 실직국은 동해안 교통로와 영서 방향 교통로의 결절지라는 입지조건, 동예와 진한의 중간적 위치 등을 기반으로 주변 邑落을 통제했고, 음즙벌국과 동해안의 교역로를 두고서 경쟁했다. 3세기 후반∼말경 동해안의 교역 에서 사로국이 금관국에 대해 우위를 보이면서 실직국은 사로국이 주도하는 교역에 협조하기 시작했다. 4세기 초중엽부터 사로국과 고구려의 교섭이 본격화하면서 실직국은 사로국에 복속했다. 실직국 干層은 공납을 바치고 기항지 이용권을 제공하는 대신, 읍락 간층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다. 실직국의 반란이 진압된 뒤에도 일부 간층은 자치권의 일부를 유지했다. 실직 지역은 何瑟羅城에 비해 방어기능이 약한 편이었다. 그런데 5세기 중엽부터 고구려가 남한강 상류 방면으로부터 압박해 오면서 悉直城의 據點城 기능은 강화되었고, 간층의 자치권은 약화되었다. 실직성 주변의 읍락들은 5 세기 후반경 村으로 편성되었다. 5세기 말 이후 신라는 거점성별로 전략적 기능과 옛 소국에 대한 지배기능을 조정했다. 이 과정에서 실직성이 다수 거점성에 대한 관리 기능을 부여받아 505년에 悉直州가 설치되었다. 6세기 초까지 유력 간층을 대상으로 복수의 干群 外位와 非干 외위가 편성되었다. 간군 외위자는 비간 외위 자의 보위와 非외위자의 협조로 道使의 통치에 협조했다. 그런데 512년 何瑟羅州 설치, 524년 이전 실직주 재설치 등에 따라 외위의 운영은 변화했을 것이다. This article attempts to understand the subjection process of Siljikguk and the change of ruling system by Silla. The 23th year article of ..Samguksagi(三國史記).. Sillabongi(新羅本紀) Pasa-isageum(婆娑尼師今) illustrating the subjection of Siljikguk were written based on the other text than the Jima-ijilgeum(祗磨尼叱今) article of ..Samgukyusa(三國遺事).. Wangryeok(王曆). The editor of that text even described the submission process of Siljikguk as one event based on the materials on the conflict between Siljikguk and Eumjeupbeolguk (音汁伐國) and the mediation of Saroguk(斯盧國). The 23th year article of Pasa(婆娑) is based on the text which emphasized the achievement of Pasa-isageum in foreign expansion. The Jima article of Wangryeok is relatively more reliable compared to the 23th year one of Pasa, but it does not guarantee the absolute reliability. It is said that Siljikguk governed the area of Okgye, Hajang and Wondeok. However, it is possible that the actual area had been changed. Siljikguk controlled the surrounding Eupnak(邑落) based on not only its position as nodal region of East Coast traffic route and the route toward Yeongseo(嶺西) but also its location in the middle of Dongyae(東濊) and Jinhan(辰韓). It also competed with Emjeupbeolguk for trade route of East Coast. As Saroguk became superior compared to Geumgwanguk(金官國) in terms of trade in East Coast in the late period of 3rd century, Siljikguk started to cooperate in the trade that was led by Saroguk. Since the beginning of the 4th century, Siljilguk was subjected to Saroguk as the negotiation between Saroguk and Goguryeo(高句麗) started to hit off. Gan(干) class of Siljikguk offered tribute and provided the right to use the port of call in order to preserve the right to control Gan class of Eupnak. Even after suppression of rebellion against Saroguk, some Gan class preserved the autonomy. However, as Goguryeo started to pressure from the upper part of Namhan River since the mid-5th century, the role of base of Siljik-Fortress became fortified and the autonomy of Gan class weakened. Eupnak around Siljik areas were reorganized into Chon(村) in the late 5th century. After the late 5th century, Silla adjusted function of ruling over small countries and strategic functions by each base fortress. In this process, Siljik-Fortress got managerial functions for several base fortresses and Siljik-Ju(州) was installed. Until the early 6th century, several Gan-series Woewui(外位) and None-Gan Woewui were organized for Gan-class. Gan-series woewui cooperated to the reign of Dosa(道使) with the cooperation of None-Gan Woewui and the aid of None-Woewui. However, the function of Woewui in Siljik seemed to have changed according to moving of the base of Ju(州).

      • 제1차~제7차 교육과정기 국사교과서에 나타난 고대 영토사 인식의 변화

        李富五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0 한국고대사탐구 Vol.4 No.-

        본고는 교육과정 시행 이후 고대 영토사 인식에 대한 국사교과서 서술의 변화를 파악하고 이에 대한 교과서 서술의 개선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1956년부터 검정제로 발행된 제1차 교육과정 국사교과서에서는 민족적 과업을 강조하는 교육정책으로 인해 민족주의적 영토사 인식이 강조되었다. 이와 함께 실증주의가 국가별로 차별적으로 적용되었고, 식민사학적 흔적도 남아 있었다. 1968년부터 발행된 제2차 교육과정 국사교과서는 이러한 문제를 안은 채 민족주의적 영토사 인식을 좀 더 강화한 반면, 실증주의적 인식을 상대적으로 약화시켰다. 여기에는 교육정책에 대한 군사정부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이에 따라 교과서들의 영토사 인식은 순치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1974년 국정제가 실시되면서 국민적 일체감을 조성하려는 정책적 의도에 따라 국사교과서는 민족적 긍지를 유난히 강조했다. 이에 따라 민족주의적 영토사 인식을 더욱 크게 강조하여 일부 내용에서 다소 비약을 가하기도 했다 제 . 5차 제7차 교육과정 교과서에서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는 정책적 의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국가정체성의 확보를 위해 민족주의적 영토사 인식을 여전히 유지할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 더욱 심화시켜 왔다. 실증주의적 인식은 여전히 차별적으로 적용되었다. 교육과정기 국사교과서의 영토사 인식 변화는 주로 정치적 의도에 따라 교육정책이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고대 영토사에 대한 연구성과는 세부내용을 수정하는 데 머물렀다. 이는 교육적 정당성과 학문적 타당성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적절하지 않은 방향이었다. 앞으로 교과서에서는 학문적 근거를 담보하지 않은 민족주의적 영토사 인식을 지양하는 한편, 실증주의적 요소를 국가별로 고르게 적용해야한다.

      • KCI등재

        1세기초 廉斯國의 대외교섭

        李富五 한국고대사학회 2001 韓國古代史硏究 Vol.22 No.-

        This thesis is aimed at figuring out how the foreign relations of Yeomsa state have changed by taking a look at the activities of Chi (齒) and Somasi(蘇馬詩) in the early 1st century. Around the Christian era, Yeomsa state developed herself to a predominant one in Chinhan (辰韓) area, and such development stood on the basis of the trade hegemony with La - rang(樂浪) merchants and the right of control over the steel material trade against neighboring small states. Under such conditions, Chi, the Jusu(主師) of Yeomsa state, was regarded as predominant - Kosu(渠師) of Chinhan area. It was done together with the consolidation of his control power over Kukup(國邑) and Upnak(邑落). However, that brought about the repulsion of other groups in Kukup and he lost the status as Jusu in the end. In order to establish a new base and regain the past trade hegemony, he surrendered himself to and settled in Lorang - Kun. At that time he took issues with the matter of Han (漢 )people under detention in Chinhan area and arbitrated in the process of solving that matter. As a result, Lorang-Kun was provided Pyonhan - cloth(弁韓布) from Sara state (斯盧國) and also launched the relations with some part of Chinhan states. In the other hand. Saro state got the approval as the representative of other part of Chinhan states in the matter of foreign negotiation from Lorang - Kun. In recognition of arbitration for those advances. Chi was awarded tillage. a residence and an officiary coronet from Lorang Kun. He also arbitrated in the process of negotiations between Lorang - Kun and the others - the small states in the vicinity of Yeomsa state and a part of Chinhan states. Some part of these roles were fulfilled by the Chi group which remained in Yeomsa state. And that played as a momentum magnifying Yeomsa state's own position. In A.D. 44, so was the result that Somasi paid a tribute to Lorang-Kun and was appointed as Han - Yeomsa - Upkun(漢廉斯邑君). This implies that Yeomsa state got the official approval as the representative of those small states for the foreign negotiation matters. Such competence applied to the negotiation with Saro state or the leadership of forces in time of emergency. Hereupon, Yeomsa state led a type of the small states of league. The influence of Yeomsa state to other small states was somewhat weak compared with that of Sara state. In spite of such conditions, those two states maintained the proper equilibrium of power in the Chinhan area. Lorang - Kun admitted such reality and schemed to hold each other in check. Such equilibrium lasted till around the 2nd century when Sara state and Kumkwan state (金官國) brought themselves into relief as the representatives of Chinhan and Pyon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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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國史記≫ 新羅本紀에 대하여(津田左右吉)

        이부오,장익수 신라사학회 2009 新羅史學報 Vol.0 No.15

        신라사학회에서는 신라사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외국 논문을 번역해 게재함으로써 연구의 편의를 제공하는 것을 방침으로 삼아 왔다. 그 일환으로 먼저 근대적 방법론으로 신라사 연구를 전문적인 영역으로 개척한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新羅史硏究≫를 선정하고 여기에 실린 논문들을 한 편씩 번역해 ≪신라사학보≫ 제2집[2004.12]부터 제12집[2008.4]까지 게재했다. 2008년 5월에는 그 완역본이 출간됨으로써 하나의 완결을 보게 되었다[≪이마니시 류의 신라사 연구≫, 서경문화사]. 그런데 신라사 연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료인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본격적으로 분석한 사람은 츠다 소오키치[津田左右吉]였다. 일찍이 근대적 역사학이 개척되던 19세기 말부터 일본인 학자들이 신라사를 다뤘으나, 이는 사료 정리나 언어학적 접근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마니시는 ≪삼국사기≫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에서 신라사를 체계화했으나 신라본기를 전문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처음으로 이를 전문적으로 분석해 가치를 평가한 사람은 바로 츠다였다. 동경제국대학 사학과에서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의 지도를 받은 그는 滿鐵 동경지사에 1908년 설립된 滿鮮地理歷史調査室에 들어가 한국사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한국 상고~고려 부분을 담당해 1913년 ≪滿鮮歷史地理≫1․2[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펴냈다. 제1권의 <新羅征討地理考>에서 그는 신공황후의 신라 정벌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해 신라본기에 실린 倭의 신라 침공 기사를 다루면서 신라본기 초기기사가 허구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작업을 신라본기 전체로 확장한 결과물이 이번에 소개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이다. 이 글은 1919년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연구≫[洛陽堂 : ≪津田左右吉全集≫ 별권제1, 1966, 岩波書店]에 실렸다가 1924년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연구≫[岩波書店]에도 실린 것이다. 역자는 1963년에 간행된 ≪津田左右吉全集≫ 제2권의 부록으로 실린 것을 모본으로 삼았다. 본고에서 그는 엄밀한 실증주의를 기준으로 접근하여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신라 上代 기사를 거의 허구라고 평가했다. 이 기사들은 대부분 중국의 사서 등을 참조해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지는 신라본기 기사들 간의 비교 분석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중국 사료에서의 확인 여부가 신빙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단계에서 본고의 견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연구자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신라본기 초기기사에 대한 수용을 둘러싸고 격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논쟁이 수면 아래로 들어간 듯하지만, 이것이 신라본기 초기기사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津田左右吉이 들춰낸 문제의식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신라사 연구자들이 안고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고는, 긍정적인 측면에서든 부정적인 측면에서든, 신라사 연구의 일차적인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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