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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의 주변부, 불어권 스위스 문학 -두 문학 장에 "걸친" C. F. 라뮈즈의 경우

        레날프뢰디거 ( Reynald Freudiger ) 서울대학교 불어문화권연구소 2009 불어문화권연구 Vol.19 No.-

        파리 중심의 불문학과 비교했을 때 불어권 스위스 문학은 주변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파리를 경유해야 더 넓은 불어권으로 작품이 유포될 수 있으며, 많은 불어권 스위스 작가들이 파리의 문학계에 접근하려 한다는 사실은 이를 보여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자적인 출판업계와 시장, 작가와 비평가 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불어권 스위스 문학계는 자율적인 장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불어권 스위스의 대표적인 작가인 샤를 페르디낭 라뮈즈의 생애는 이러한 불어권 스위스 문학계의 주변적이면서도 자율적인 현실을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불어권 내 프랑스어의 다양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재고하게 해준다. 1878년 스위스 로잔에서 태어나 프랑스어 시집과 단편소설을 출간한 바 있는 라뮈즈는 파리로 건너가 1905년에 첫 장편소설인 『알린느』를 펴낸다. 스위스계 작가로 먼저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던 에두아르 로드의 도움으로 출간한 이 소설에서 라뮈즈는 스위스 농촌지역의 삶을 그리고 있다. 이후 약 10년에 걸쳐 그는 파리에서 5편의 소설을 출간한다. 비록 작품의 판매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파리에서 작품을 출간했다는 사실로 인해 그는 불어권 스위스 문학계에서 크게 환영을 받는다. 1913년에 스위스로 돌아온 이후 라뮈즈는 로잔을 대안적인 문학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다. 많은 작품을 출간하며 불어권 스위스에서 루소에 비견되는 작가로 인정받았던 그는 자신이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출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점차 파리에서라면 펴내기 어려웠을 아방가르드적인 글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그가 스위스에서 발표한 혁신적인 작품들은 특히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언어와는 다른 스위스의 지방어로 채워져 있었고, 이러한 그의 문체를 두고 불어권 스위스의 비평가들은 프랑스어가 아닌 애매한 언어를 사용한다며 비판을 가한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불어권 스위스에서만 유포되었지만, 일부 프랑스의 아방가르드적 작가들이 그의 글쓰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1919년에 그는 필립 수포로부터 『문학』 지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는다. 그리고 1924년에는 갈리마르 출판사와 더불어 파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그라세 출판사와 장기 계약을 맺고 1947년 사망하기까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라뮈즈는 이처럼 불어권 스위스와 파리라는 두 문학 장을 이용할 줄 알았다. 주목할만한 스위스계 작가로 파리에 소개된 그는 그곳에서의 작품 출간으로 인해 불어권 스위스 문학계에서 중요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불어권 스위스 문학계를 일종의 문학적 혁신의 실험실로 활용함으로써 파리의 문학계에 재입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자율적인 불어권 스위스 문학 장의 존재를 이용할 줄 알았는데, 스위스 문학계에서 경제적 후원을 받아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할 수 있었기에 그라세 출판사의 지원을 얻고 파리 문학계에 다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파리에서도 역시 그의 문체를 놓고 비판이 일기 시작했고, 이에폴 클로델을 비롯한 주요 문인들이 그를 옹호함으로써 라뮈즈는 파리 문학계에서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결국 그는 1929년 자신의 작품집 서문에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논쟁에 대한자신의 입장을 직접 표명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죽은" 언어가 아닌 "살아 있는" 언어로 표현하고자 했음을 분명히 하면서, 이러한 시도가 자신뿐 아니라 주변부 불어권 문학전체와 관련된다는 점을 밝혔다. 프랑스어의 다양성에 대한 그의 변론은 주변부 불어권 문학의 시학에 대한 최초의 정식화이자 일종의 역사적 선언이었던 셈이다. 2차 대전의 발발로 라뮈즈와 파리의 연계는 느슨해졌으며, 1947년 그의 죽음은 파리 문학계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불어권 스위스에서 그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져 교과서에 그의 작품이 수록되고,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불어권 스위스에서의 라뮈즈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이후 다시금 파리 문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그가 파리에서 첫 작품을 출간한 지 100주년이 되는 2005년에 그의 전집이 플레이야드 판으로 출간된다. 이처럼 그가 프랑스 문학의 판테온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작품이 이룬 문학적 성취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율적인 장으로서의 불어권 스위스 문학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라뮈즈의 생애를 통해 우리는 불어권 스위스 문학계가 보이는 주변적이면서도 자율적인 장으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라뮈즈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많은 불어권 스위스 작가들이 파리로부터 문학적 승인을 받고 자신의 입지를 다진다. 그러나 동시에 상당수의 작가들이 파리를 경유하지 않고 불어권 스위스 내부에서 자신의 문학세계를 열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파리중심주의에 반대하며 자율적인 문학 장을 보존하고 다양성을 구현하기 위해 투쟁하는 작가들이 있다. 오늘날 스위스를 비롯한 불어권 내에서 파리를 벗어나는 대안적인 문학 장을 구성하는 것이 많은 문학인들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마르세유, 제네바, 다카르에서 파리와 대등한 자리에 서기 위한 시도들이 현재 진행 중이다.

      • KCI등재후보

        최초의 불어로 된 알제리 텍스트 -부재하는 텍스트의 유령 텍스트-

        지네브알리베날리 ( Zineb Ali Benali ) 서울대학교 불어문화권연구소 2011 불어문화권연구 Vol.21 No.-

        16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프랑코포니의 역사에서, 유럽 바깥에서 불어의 전파는 언제나 식민화의 과정과 연결되어 있었고 특히 19세기 이래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에서는 정복 전쟁을 통한 점령과 함께였다. 알제리에서 불어의 역사는 1830년 6월 14일 프랑스 원정군의 상륙과 함께, 아랍어와불어로 작성된 알제의 항복문서로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 지중해 남쪽 지역에서 불어가 전혀 낯선 언어는 아니어서, 상업에 사용되는 언어, 또 이 지방에 머무르던 유럽 여행자들의언어로는 알려져 있었다. 1830년 7월 5일 이후 불어는 차츰 이 국가의 언어가 되어갔다. 폭력과 지배의 언어에서 차츰 토착민들이 사용하고 그들을 말하는 언어가 되어가면서, 지중해 남쪽에서 불어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텍스트가 나타났다. 아랍과 터키두 문화를 물려받았고 영어와 불어를 말했던 함단 호자 Hamdan Khodja라는 무역업자의 글이다. 그는 불어로 글을 썼는가? 그의 텍스트를 편집한 압델카데르 제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텍스트가 파리에서 돌아다니던 이야기의 여러 요소들을 수입한 작업실이리라고 말한다. 1836년까지 함단 호자는 프랑스인들에게 알제리 점령이 오랜기간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설득하려 했다. 자유의 이름으로, 보편적 원칙의 이름으로, 곧 지배자인 타자의 담론을 취하면서 그 자체의 모순을 드러내려는 식으로, 압델카데르 제룰이 "저항?대화"라 부른 것을 시도했다. 알제리 태수의 항복뒤 4년간 그는 파리에서, 알제리에서 외교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알제리에서 가장 잘 조직된 두 저항세력, 동부의 아흐메드 콩스탄틴과 서부의 에미르 압델카데르의 세력을 연결하려고 애썼다. 모순되는 요소들을 화해시키려 한 조정자였던 그는 애매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사람으로 보였다. 민족주의적 영웅은 아니었지만, 역사적 변화가 그의 펜과 외교활동에서 민족주의 투쟁의 형태를 태어나게 했다. 그는 그의 글로 알제를 점령한 정치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했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스스로도 금방 알게 되었을 것이지만, 그래도 끝까지 계속했다. 자신이 패했고 자기 나라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는 망명을 선택했다. 오늘날 그의 시도는 비이성적이거나 우매한 제스처로 보일수 있다. 많은 알제리인은 그를 프랑스에 우호적인 사람으로 여기고, 프랑스측의 생각도 다르지 않다. 함단 호자의 텍스트는 패배한 자의, 실망한 협력자의 불어로 된 "목소리"로 받아 들여진다. 그의 글은 알제리 상황의 정확한 묘사라기보다는 당시 알제리의 정신 상태의 증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글이 아랍어로 쓰여서 불어로 번역되었는지, 누구에 의해 번역되었는지, 아니면 아랍어 텍스트의 번역인 것처럼 불어로 쓰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자발적이든 아니든 텍스트의 기원은 모호하다. 그의 글은 기원?이미지를 밝힐 수 없는 수많은 이미지들이 복제되는 거울들의 갤러리 속에 있는 듯하고, 거울놀이는 두 텍스트, 두 언어 사이에서 일어난다. 이 무대기술은 오늘날까지도 작동하고 있는 언어들의 연극, 알제리 글쓰기의 두 가지 언어를 불명확한 기호 아래 위치시키는 언어학적 픽션의 시작을 알린다. 1833년 출간된 첫 번째 텍스트는 프랑스어로 되어 있다. 알제가 프랑스 원정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3년이 갓 지났을 때 함단 호자는 파리에서 프랑스어로 된 첫 번째 알제리 텍스트를 출간했다. 이 최초의 시도가 그를 역사에 남게 했다. 서구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근대성의 매개자라는 것을 알아 차리고 서구로 열린 지식인의 모습이 형성된 것을 알리는 최초의 제스추어였다. 알제리 땅에 프랑스가 침투한 것이 그의 동향인들 전체가 겪는 파국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들, 여러 세계의 교차로에 있는 사람들, 그들의 나라와 프랑스에 대한 똑같은 열광을 증거한 인물들, 협상과 중도의, 혼종성의 인물들, 그들 방식으로 혼합성을 부르짖는 사람들. 함단 호자는 이후 글쓰기에 대한 민족주의적 탈환이 일어나는 1930년까지 거의 백년간 지속된 이들의 말하기 방식의 선구자였다. 다른 언어, 시초 언어의 번역에 지나지 않을 언어로 픽션속에 들어간 텍스트는 정체성의 문제, 진정성의 문제와 만난다. 그의 텍스트와 태도의 독창성은 당시, 1830년 7월 5일이 라는 시대의 콘텍스트 안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많은 글들이`알제 점령`이라는 단절이자 새로운 시작인 순간을 이야기하지만, 역사가 패배자들에 의해서 쓰여지는 일은 드물다. 프랑스 군대와 군속들에 의해 묘사된 대부분의 기록 아래 패배자들의 목소리와 말하는 방식은 빠르게 침묵과 망각 속에 삼켜진다. 한 세기 이상 `알제 점령`은 프랑스측에서만 이야기되고, 쓰여지고 분석되었다. 알제리 입장에서 씌어진 몇 안 되는 글 속에, 앗시아 제바르가 발굴한 아랍어 시 한편이 있다.수도의 대학생이었던 압델카데르라는 이름의 젊은이에게 프랑스군의 침입은 시대의 종말처럼, 파국으로 경험되었다. 수도의 함락을 목격하거나 전해들은 모든 알제리인들의 상실과 괴로움을 간직한 이 시는 오랫동안 생생한 슬픔을 남겼다. 알제 함락에 대한 이 노래 속의 시인의 힘은 민족 문학적 요소의 중요성을 증거한다. 패배자에 의해 말해지고 씌어진 첫 번째 텍스트로서 이 시는 묘사하거나 이야기하지 않는다. 압델 카데르는 자기 사회를 위해 썼다. 타자인 정복자도 자신에게 향해진 것이 아닌 이 목소리를 읽거나 들을 수 있겠지만, 압 델카데르는 내부에서, 내부를 위해 썼다. 타자의 언어로 쓴 글쓰기의 시작이라는 측면에서, 앞으로 올 문학을 예감하게 한 함단 호자의 역할은 더욱 중요할 것이다. 이 최초의 순간부터, 두 언어는 이미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로, 달과 해의 이미지로 한몸이었다.

      • KCI등재

        Le premier texte algérien en langue française : Texte fantôme d’un texte absent

        지네브 알리-베날리 서울대학교 불어문화권연구소 2011 불어문화권연구 Vol.21 No.-

        16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프랑코포니의 역사에서, 유럽 바깥에서 불어의 전파는 언제나 식민화의 과정과 연결되어 있었고 특히 19세기 이래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에서는 정복 전쟁을 통한 점령과 함께였다. 알제리에서 불어의 역사는 1830년 6월 14일 프랑스 원정군의 상륙과 함께, 아랍어와 불어로 작성된 알제의 항복문서로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 지중해 남쪽 지역에서 불어가 전혀 낯선 언어는 아니어서, 상업에 사용되는 언어, 또 이 지방에 머무르던 유럽 여행자들의 언어로는 알려져 있었다. 1830년 7월 5일 이후 불어는 차츰 이 국가의 언어가 되어갔다. 폭력과 지배의 언어에서 차츰 토착민들이 사용하고 그들을 말하는 언어가 되어가면서, 지중해 남쪽에서 불어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텍스트가 나타났다. 아랍과 터키 두 문화를 물려받았고 영어와 불어를 말했던 함단 호자Hamdan Khodja라는 무역업자의 글이다. 그는 불어로 글을 썼는가? 그의 텍스트를 편집한 압델카데르 제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텍스트가 파리에서 돌아다니던 이야기의 여러 요소들을 수입한 작업실이리라고 말한다. 1836년까지 함단 호자는 프랑스인들에게 알제리 점령이 오랜기간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설득하려 했다. 자유의 이름으로, 보편적 원칙의 이름으로, 곧 지배자인 타자의 담론을 취하면서 그 자체의 모순을 드러내려는 식으로, 압델카데르 제룰이 “저항‐대화”라 부른 것을 시도했다. 알제리 태수의 항복 뒤 4년간 그는 파리에서, 알제리에서 외교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알제리에서 가장 잘 조직된 두 저항세력, 동부의 아흐메드 콩스탄틴과 서부의 에미르 압델카데르의 세력을 연결하려고 애썼다. 모순되는 요소들을 화해시키려 한 조정자였던 그는 애매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사람으로 보였다. 민족주의적 영웅은 아니었지만, 역사적 변화가 그의 펜과 외교활동에서 민족주의 투쟁의 형태를 태어나게 했다. 그는 그의 글로 알제를 점령한 정치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했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스스로도 금방 알게 되었을 것이지만, 그래도 끝까지 계속했다. 자신이 패했고 자기 나라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는 망명을 선택했다. 오늘날 그의 시도는 비이성적이거나 우매한 제스처로 보일 수 있다. 많은 알제리인은 그를 프랑스에 우호적인 사람으로 여기고, 프랑스측의 생각도 다르지 않다. 함단 호자의 텍스트는 패배한 자의, 실망한 협력자의 불어로 된 “목소리”로 받아들여진다. 그의 글은 알제리 상황의 정확한 묘사라기보다는 당시 알제리의 정신 상태의 증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글이 아랍어로 쓰여서 불어로 번역되었는지, 누구에 의해 번역되었는지, 아니면 아랍어 텍스트의 번역인 것처럼 불어로 쓰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자발적이든 아니든 텍스트의 기원은 모호하다. 그의 글은 기원‐이미지를 밝힐 수 없는 수많은 이미지들이 복제되는 거울들의 갤러리 속에 있는 듯하고, 거울놀이는 두 텍스트, 두 언어 사이에서 일어난다. 이 무대기술은 오늘날까지도 작동하고 있는 언어들의 연극, 알제리 글쓰기의 두 가지 언어를 불명확한 기호 아래 위치시키는 언어학적 픽션의 시작을 알린다. 1833년 출간된 첫 번째 텍스트는 프랑스어로 되어 있다. 알제가 프랑스 원정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3년이 갓 지났을 때 함단 호자는 파리에서 프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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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u manuscrit au lecteur, une course d`obstacles

        Juttet, Jean-Noe¨l 서울대학교 불어문화권연구소 2002 불어문화권연구 Vol.12 No.-

        프랑스어로 번역된 한국문학작품이 프랑스에 보급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번역을 완성한 후에 번역자는 다양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그 어려움은 오늘날 문화들 사이에 나타나는 힘겨루기 현상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문화간의 힘겨루기가 독자와 출판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알력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몇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프랑스의 언어학자 루이-장 칼베는 언어들 사이의 갈등관계를 도식화하기 위해 생태학적 모델을 적용했다. 이 모델에 따르면 일종의 중력의 체계에 언어들이 속해 있는데, 중앙언어(영어) 주변에 중급의 중요성을 가진 10여개의 언어(불어, 스페인어, 중국어 등)가 배치되고 그 언어의 주변에는 보다 덜 중요하게 취급되는 100여개의 언어들이 위치하여, 또이 100여개의 언어들의 주위에 아주 주변적인 4-5천개의 언어들이 자리한다. 각 언어 사이의 갈등은 이중언어 사용자에 의해 표상된다. 이 모델은 약간의 수정을 거치면 문학에도 적용할 수있다.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에는 해당 문화의 가치와는 무관하지만, 경제 등의 요인으로 인한 힘겨루기의 결과에 따라 서열이 생기고 지배문화와 피지배 상태의 문화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소설이 모방되고, 번역되는 것은 미국소설이 한국소설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문학번역자들은 문학을 서로 연결하는 작업을 수행한다.그러나 그것은 지배문화의 서적을 피지배문화권으로 전달하는 힘겨루기의 맥락에서 진행된다. 그래서 프랑스 사회학자인 파스칼 카사노바는 "번역은 불평등 교역" 이라고 지적한 바있다. 한국어로 번역된 프랑스어 서적의 수와 프랑스에 번역된 한국어 서적의 수는 비교할 수조차 염을 정도로 프랑스와 한국의 문학 교류는 불평등 관계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등 관계가 한국문학자원의 풍요로움이나 작가의 다산성, 문학잡지의 중요한 역할, 작가의 존재 의미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한국문단의 재능 있는 작품이 생산국의 언어에 갇혀있고 다양한 공용어로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류의 보편적인 자산에 포함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 현상을 지적하는 것은 힘겨루기 상황으로 인해 독자들은 자국보다 지배적이거나 동등한 위치의 문화에서 오는 서적에 대해 무조건적인 수용의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 하기 위 해서이다. 프랑스에서 한국문학을 읽는 독자를 3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1. 첫번째 유형 : 호기심으로 독서하는 이국적인 정서 애호가들. 이들은 관광하듯, 이국적인 책을 읽고 이국의 이미지를 향한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킨다. 이 유형의 독자는 문화간의 험겨루기와 같은 상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2. 두번째 유형 : 텍스트안에서 한 사회에 대한 자료를 찾는 전문가들. "열녀춘향수절가" 에서 유교의 영향을 읽으며, 김유정의 단편집에서 사회현실, 황순원 이나 황석영의 소설을 읽으면서 해방직후의 사회 계급 갈등을 읽는다. 3. 세번째 유형 : 소설을 한국의 소설치 아니라, 인류의 보편물촤재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저는 문학애호가. 한국 문학의 경우 아직 이런 독자는 거의 없다. 이 세 부류의 독자군을 합해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출판사의 관심을 끌만한 독자수가 확보되지 않는 것이 한국 문학의 현실이다 한국 문학을 출판하는 출판사를 3가지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1. 소수의 대형출판사 : 자기 출판사의 외국문학 작품선에 어울릴만한 현대작가에 관심을 가지고 출판을 수락하는데 이들은 지원금을 받게 되면, 출판비용의 상각효과가 있기 때문에 홍보없이 카탈로그에 포함하는 조건으로 출판을 수락할수 있다. 2, 자비 출판을 주로 하는 명성 없는 출판사 : 지원금만 있다면 번역의 질이 어떠하던 관계없이 출판한다. 물론 홍보는 없다. 질 나쁜 책이 진열된 경우, 독자의 인상을 나쁘게해서 전체 한국문학의 명성에 금이 가게 된다. 번역 출판지원금이 엄격한 심사를 거치지 않고 지급되었을 경우 발생할 수있는 지원사업의 함정이 바로 이 점이다. 3. 양서만을 출판하는 전문 출판사 : 번역자들에게 원고를 개선해 즐 것을 요구하거나 번역자들과 같이 텍스트를 교정하는 등, 원고의 질에 주의를 한다. 출판 직후 가시성이 높은 기간에 작가 초청행사, 언론, 문단과의 만남 주선 둥, 자사출판물에 대해서 활발한 홍보활동을 펼친다. 한국문학을 해외에 소개하기 위해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지원금을 지급하는 한국 문학번역원의 노력도 역량있는 번역가, 의욕적인 외국 출판사와 연계될 때 일정한 성과를 거둘수 있다. 한국문학의 해외홍보를 위해서 몇 가지를 제안하고자한다. 1. 한국문학번역 원과 같은 번역의뢰기판에 제안하고 싶은 것은 프랑스의 경우, 현재단계에서 독자층을 찾기가 용이한 소설이나 단편을 집중지원하면 좋아다. 인문사회과학이나 현대사상의 조류를 소개하는 에세이나 역사책 둥도 번역지원이 필요하다. 2. 일관성있는 번역프로그램이 필요하며 뉴스레터를 제작하여 이런 프로그램의 진척상태에 대해 정기적으로 알려주는 것이 좋다. 3. 번역자들에게는 다음의 3가지 사항에 대해 제안을 하고 싶다. a, 로마자 표기방식의 경우 : 번역작업이 한국의 작품을 해당외국어로 편히 읽도록 하는 작업이라면 표기방식의 일관성이 필요하다. 맥퀸 라이쇼어 방식은 시각적으로 편안한 느낌이 들지 않으며 교육부의 개편된 방식은 불어발음상 원래 발음과 더 멀어 지는 표기 방식이다. 각 언어의 전문가들이 해당어에 적절한 고유한 표기방식을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b. 배경선명 첨부 : 독자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서문을 준비 차여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도울 필요가 있다. c. 상호협조의 필요성 : 번역자들이 서로 비판을 하거나 아예 작품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한국을 소개하는 행사가 있을 때 번역문의 존재를 알려주는 것이 한국문학을 소개할 좋은 기회가 된다. 가능하다면 동료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신진번역가들의 시도를 격려하여 많은 번역작품이 비평계에 소개되고, 그리하여 다양한 불역 한국문학선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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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교문학연구의 발전과 개방을 위한 선결과제 차원의 `비교가능성` 개념정의라는 도전과제에 관하여 - 일련의 이론적 문제점 되돌아보기

        콩스탕탱마크리스 ( Constantin Makris ) 서울대학교 불어문화권연구소 2016 불어문화권연구 Vol.26 No.-

        본 연구는 개념 자체의 난점 때문에 지금까지 거의 다뤄지지 못했지만, 비교문학연구시 맞닥뜨리게 되는 `비교가능성`의 개념정의라는 도전과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비교문학연구는 이 개념에 대한 정의와 함께 시작하며, 중요성 역시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문학연구 중에서도 비교문학연구는 외적인 압력이 아닌 연구 자체의 실행 및 발전의 부족이라는 도전과제에 직면한 상태다. 이는 비교문학연구자 스스로가 잘못된 관점에서 연구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최초의 가설 역시 역사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근거가 부족해지게 되며, 결국은 연구결과 역시 단순 우연의 일치 수준에 머무르는 상황에 기인한다. 이러한 문제는 비교문학 해석의 실질적인 방식들이 정확한 방향을 잡지 못하면서, 비교문학비평 자체라는 것이 우연적이고 부분적이며 일관성도 부족한 일치현상, 즉 정확한 의미관계가 부실한 텍스트상 관련성 위에서 형성되어버리는 결과와도 연결된다. 본 연구는 `비교가능성의 발생지점과 종점`에 관한 문제제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물론이론적인 차원에서만 얼핏 생각해보면 비교가능성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쉽게 나올 수 있는 것 같아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대학 내 학문연구라는 것이 엄밀성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연구자가 비교의 대상으로 만들려고 하는 두 개의 축 사이에 비교가능성의 특성이 확실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야 말로 비교문학의 필수과제라는 점이다. 이는 비교문학의 중심이 연구의 결과물에 있지, 연구과정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연구자가 무조건적으로 이러한 점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과도한 조심성은 자칫 혁신 자체를 거부하고 연구의 흐름 자체를 막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비교문학입문의 성향을 가진 본 연구에서는, 비교문학에 대한 중추적인 조합을 이뤄낼 열 가지 단위에 해당하는 주제들에 관해 알아볼 것이다. 이 주제들은 비교문학이 문학연구 및 교육에 동시에 연관성을 가지면서 부딪히는 도전과제들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 열 가지단위를 통해, 비교문학연구시 직면하게 되는 도전과제들을 파악할 때 꼭 필요할 (프랑스 및 중부유럽에서 사용되는) 이론들에 관해서도 알아볼 것이다. 토도로프, 메쇼닉, 라스티에 같은 프랑스 내 문학이론의 대표적인 연구자들에 기반한 이론적 배경을 바탕으로, 프랑스와 함께 유럽을 통틀어 비교가능성의 범위와 틀을 제안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제기들에 관해서도 같이 언급할 것이다. 이 중 특히 소르본대학의 비교문학연구가인 브뤼넬과 셰브렐, 그리고 비교문학연구 내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로잔대학의 우테 하이드만의 연구가 본 연구의 논지전개에 영향을 주었던 불어권 이론가들이었음을 밝히는 바이다. 본 연구에서는 우선 비교문학이론의 중심개념인 `영향`과 `수용`에 대해 특히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전통적인 `영향`에 대한 연구와, 이전통이후에 이뤄진 `수용`에 관한 연구의 간격에서 나오는 도전과제들이 대체로 무시되어온 편이지만, 이 문제점들은 계속해서 잔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본 연구는 (과거 비교문학연구에서 이미 그 가치를 입증한 바 있는) 영향에 관한 이론보다 주로 수용에 관한 이론을 다뤘는데, 이는 수용개념이 영향작과 수용작간의 관계에 좀더 이론차원에서 발전된 설명을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본 연구는 또한 현재까지 비교문학비평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보이는 문학작품간의 `접촉`에 관한 이론적 논의에 관해서도 소개할 것이다. 여기서 수용의 이론시도에 관한 야우스의 연구와 나란히 브뤼넬의 비교문학 연구방식의 이론시도에 관한 일련의 연구에 관해서도 참조하였다. 특히 브뤼넬의 `출현`, `가변`, `발산` 이 세 용어로 요약되는 3단계 접근방식이 본 연구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었음을 밝힌다. 다음으로, 예전부터 비교문학연구시 여러 도전과제들을 만들어낸다고 여겨지는 한 가지 현실, 즉 번역상의 실수 혹은 변형으로 인해 생기는 도전과제들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비교문학연구시의 다언어주의에 관한 언급이 이어질 것이다. 본 연구에서 제시되는 단위들은 비교문학연구시 여러 도전과제들을 만들어낸다고 여겨지는 요소에 관한 언급으로 이뤄져 있다. 먼저 다룰 것은 `학제적 차원의 개방성 숙고와 비교문학연구의 필요성`이다. 비교문학이 다양한 문학이론에 대한 개방 및 비교문학과 관련해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도전과제의 해결차원에서 연구대상이 되는 주제들을 다루기 위한 요소 혹은 방법의 차용을 역설하고 있다. 이는 비교문학 자체가 아직은 인식론적 차원에서 많은 경험이 필요하며, 동시에 독자적인 대학교육과정의 위치를 차지한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문제제기와 함께 본 연구는 `학제적 차원의 개방성`에 관해서도 언급할 것이다. 의외의 문학적 일치현상들을 발견하게 만들어주고, 가능성이 없는 문학접촉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가늠케 하는 `문학현상의 국제적 순환`이 대표적인 예 중에 하나이다. 이 중 가능성 없는 문학접촉에 대한 연구에서 갖가지 도전과제들이 나타난다. 또, 본 연구에서는 불어권 지역과 비교문학간의 관계를 통해 나타나는 도전과제들에 관해 다룰 예정인데, 그중에서 이민소재 불문학이 중점적으로 다뤄질 것이다. 비교문학에 관한 입문적 성격의 본 연구의 마지막 주제는 `문학간 비교와 문화간 비교`인데, 이는 비교문학연구시의 도전과제들 해결을 위한 중요한 도구를 통해 비교문학연구를 가능하게 할 기본원칙에 대한 비판적 이해 및 종합의 시도와 연결됨을 밝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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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논문 :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발전을 위한 약속: 한국 정부의 <아프리카 개발 이니셔티브> 사례에 대해

        이민주 ( Min Joo Lee ) 서울대학교 불어문화권연구소 2007 불어문화권연구 Vol.17 No.-

        2006년 3월 아프리카 3개국 순방 중에 노무현 대통령이 발표한 <아프리카 개발 이니셔티브>와 같은 해 10월 반기문 전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취임으로 인해 아프리카에 대한 한국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새롭게 확산되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 선출을 위한 유세 활동 당시 한국은 개발 도상국에 대한 지원 부족 및 국제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 부재를 논거로 하는 비판을 받은 바 있었기에, 한국 정부의 <아프리카 개발 이니셔티브>는 의미 있는 변화의 기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렇게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주로 중국과의 비교 하에 경제 이득의 관점으로, 혹은 거꾸로 착취 논리로만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제고할 필요가 있다. 야심찬 한국 정부의 아프리카 지원 정책은 이제 겨우 시작 단계에 있기 때문에 그 효과나 반향을 논하기는 이른 것이 사실이나, 한국 정부의 <아프리카 개발 이니셔티브>는 냉전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친선 관계 혹은 상공 분야의 단편적인 협력으로만 지속되어 온한국과 아프리카 국가들의 관계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지원을 통해 균형적인 국제 발전을 도모하는 것 이외에도 한국이 국제 사회에서 책임 있는 국가로 자리매김하는 데에 무엇보다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다. 아프리카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원 규모는, <아프리카 개발 이니셔티브> 하의 계획에 따라 2008년에 국제협력 주관 기관인 국제협력단 (KOICA) 예산의 20퍼센트를 차지하게 된다. 또 한국이 비교 우위를 지니고 있는 5개 중점 지원 분야 (교육, 보건, 농업개발, 행정 시스템, 정보통신 부문)를 지정함으로써, 지원의 효율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개발 협력을 다각화·강화하는 현재 시점에서, 이제까지 각별하다고 생각되어 왔던 프랑스와 불어권 아프리카국가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한국의 접근에 시사하는 점이 많다. 프랑스와 불어권 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에는 스스로 ‘특별하다’고 불러온 경제·정치·군사·사회적인 협력 관계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공적 지원의 규모만으로 보아도, 1990년과 1999년 사이에 그 액수는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며, 그중에도 60퍼센트 정도가 지원금을 이용한 프랑스 상품 구입이라는 방식으로 프랑스의 경제 이익을 강화하는 데에 쓰여지고 있다고 한다.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경제논리에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어서, 프랑스의 대형 기업들은 전통적으로 유대 관계가 강하다고 하는 불어권 아프리카보다 발전 속도가 더 빠른 남아공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거꾸로 불어권 아프리카 국가들도 전통적 우방국인 프랑스를 의지하기 보다는 중국, 일본, 미국과 같은 보다 역동적인 경제 파트너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세네갈을 위시한 불어권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은 아프리카가 프랑스를 필요로 하기보다는, 프랑스가 아프리카를 필요로 하는 시대가 왔다고까지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아프리카 프랑스 관계 약화는, 단순히 기업의 투자나 공적 지원과 같은 경제적 이유뿐 아니라 정치 사회적으로 현대 아프리카에 대한 프랑스 지도층의 몰이해에서도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작년 7월 국가 원수로서의 첫 방문으로 세네갈을 찾아 세네갈 젊은이들은 대상으로 ‘아프리카인은 인류의 역사 속에 충분히 진입하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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