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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육발전 연구 : 대학원교육 개편안

        유근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994 造形 FORM Vol.- No.17

        이 연구는 서울 대학교 미술대학 부설 조형연구소가 연구비를 지원하여 추진한 “서울대학교 미술 대학 교육 발전 연구” 과제의 하나이 “대학원교육개편”시안을 마련하는데 목적이 있다. 1994년 현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대학원교육은 5개 학과(동양화과,서양화과,조소과,공예과,산업디자인과) 9개 전공(동양화,서양화,판화,미술이론,조소,도자공예,금속공예,시각디자인,공업디자인)에 걸친 석사과정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이 밖에 미술교육 전공 석사과정을 사범대학 교육학과 개설 협동과정으로 운영하고 있다.

      • 미술대학 예술사 교육의 학술성과 중국미술 발전에 미친 작용

        洪再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998 造形 FORM Vol.- No.21

        현대중국미술의역사를 돌아보면, 중대한 역사전 사건은 모두 미술학원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순수예슬 측면에서의 신사조 운동이나 전통의 부흥이던지, 대중화된 측면에서의미술혁명이나 민간의 창작이든간에, 미술학원의 교수와 학생들의 참여와 무관한 것은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중국의 미술학원이 미술계의 새로운 사조의 흥쇠를 좌우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 세계예술계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매우 중요한 현대미술교육 시스템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는데, 곧 미술학원 내에 설치된 예술사 전공이 그것이다. 예술사 전공을 통해 미술의 창작과 학술적 연구가 동일한 교육환경에 놓임으로써 객관적으로는 미술학원의 교수와 학생들이 탐구에 매진하고 부단히 새로운 것을 개척하는 학술분위기를 조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학풍으로 인해 사람들이 예술의 창작과 교육문제를 학술적인 문제로 간주하게 됨으로써 진리를 탐구하는 태도로서의 예술연구에 대한 인식의 수준 역시 높아졌다. 이러한 학술성 및 그것이 중국 현대미술 발전에 미친 작용에 대해 본문은 우리나라의 미술학원 체제 하 예술사 교육과정 및 연구상황을 주로 본 학원의 상황을 예로 들어 구체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순수 예술사가의 입장에서 우리는 본 전공이 어떠한 성질의 학과인지에 대해 매우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곧 그것의 학술적 범주는 역사학과 같은 인문학 학과들과같은 부류라는 것이다. 현대적인 의미의 예술사학은 독일어를 그 모국어로 삼는데, 그것은 처음부터 대학교육과 함께 연계되어왔다. 1813년 독일의 괴팅겐 대학에서 최초의 예술사 수업을 개설하였고, 그 뒤를 이어 유럽의 여러 유명대학에서도 잇따라 강의를 개설하기 시작하면서 예술사 부문의 걸출한 인문들을 배출하였다. 부르크하르트, 뷜플린, 바르부르크, 파노프스키, 곰브리치 와 같은 대가들이 공동으로 노력한 결과, 미술사는 학술영역에서 새로운 인문계 학과가 되었으며, 철학, 역사학, 언어학, 문학과 동등하게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서방학자들의 관심영역에는 중국의 예술사도 포함된다. 금세기중반 이래로 구미의 여러 대학들이 모두 중국예술사 전공을 개설하였으며, 이 방면 연구에 있어 주요한 진용이 되어왔다. 서방의 대학교육제도에서 예술사학은 인류문명사 전체의 연구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이토록 장관을 이루는 모습은 중국의 인문학 영역에서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우리는 아직 예술사학과를 갖춘 종합대학조차 찾아볼 수 없다. 중국의 특구한 원인으로 말미암아 예술사가들은 여전히 창작실천을 중시하는 미술 환경 속에서 연구와교육에 종사할 수 밖에 없고, 그로 인해 미술사는 미술학원 내에만 한정된 채, 주로 예술창작의 보조수단으로만 기능하고 있는 실정이다. 1928년 국립예술원이 설립된 이래로 70년동안 예술사는 줄곧 예술교육 제도 내에서 발전하면서 점차 고유한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예술사가 인문과학 내에서 응당 차지해야 할 지위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인해 예술사는 미술계와 미술학원 내에서 모두 보조적인 역학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로 인해 예술사 교육과 연구 체제 역시 더디게 발달하였으니, 일개 필수과목에서 하나의 학과로 발전하는데만도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여러 곳의 미술학원 중에서 문화부 직속인 두 학원, 곧 중앙미술학원과 중국미술학원, 두 곳에서만 각각 1960년과 1985년에 미술사학과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이러한 체제의 형성만으로도 예술사학과가 우리나라에서발전하게 된 데는 큰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 한국현대회화의 추상성, 1950-1970: 전위의 미명아래

        정영목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995 造形 FORM Vol.18 No.1

        1967년과 68년이라는 연도에 한국 현대미술은 두가지의 큰 의미를 부여한 해이다. 전자는 한국 현대 추상미술의 본격적인 발현을 유렵의 앵포르맨이나 미국의추상표현주의와의 접목이 나타나기 시작한 1957년으로 잡아 그 후로부터의 10년간의 성과를 돌아보는 후자는 한국신미술의 원년을 고희동이 서양화를 배우러 일본으로 건너간 1908년으로 잡고 그 후로부터의 60년간의 발자취를 회고한다는 뜻의 해였다.과거에의 검증과 평가, 그에 따른 미래에의 예견이라는 취지와 함께 기념행사로서 예를 들면 '공간'잡지사 는 1967년 12월호에 '한국 추상회화 10년' 이라는 특집을 내보냈고, 한국미술협회는 1968년 10월 26일 '신문화 60년 기념 미술세미나'의 주제로 '신미술 60년과 오늘의 문제점'이라는 토론과 발표의 장을 마련하였다. 위의 예가 아니더라도 60년대의 추상회화를 점검하거나, 아니면 60년 동안의 한국 근현대미술을 돌아보거나, 그 성과에 대한 비평의 태도는 대개 다음의 두 상반된 관점으로 요약된다. 그 하나는 '현대'나 '신'분기점의 원년이 하나같이 서양것과의 밀집한 관련 속에서 설정되어 그래서 지나치게 외래의 사조에 의존하여 '주체성이 빈약하다는 결정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고 '뿌리깊은 모방의 연속과 전통의 수립이 불가했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지적의마지막 합류점은 항상 일본미술과의 연관성을 실타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데, 가령 '서구의 미술을 받아들임에 있어 이념은 도외시하고 다만 방법론만을 받아들인데 그쳐 토착화하지 못했던 일본의 미술을 일본 유학생들이 자기비판의 안목도 없이 무분별하게 받아들였을 때부터 한국미술은 위험성을 내포' 하고 있었다고 지적한 1972년 당시의 변종하는 '그러나 일본문화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일부 신진화가들의 일본에 대한 맹종은 새로운 문제점으로 등장했다면서 그의 속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급하다'는 비평의 예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결론과는 달리 한국미술의 '현대적인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세계사조와 호흡을 같이 하는 일이 시급'하다며 '세계미술의 가장 첨단적인 사조의 전위적 대열에 서도록 꾸준한 노력과 전진'을 부르짖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서의서구미술의 도입과 수용을 예찬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평가한 1960년대의 추상미술운동은 소위 '후진국가에서 근대화하고 사회가 근대화하는 동시에 미술이 현대화하는 단계에 있어서 우리 나라 추상작가들이 전위적인 일을 위해서 10년동안 꾸준히 노력'한 성과하고 자화자찬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반된 평가는 결국 '세계사조와 호흡을 같이 하는 일'의 정도에 관한 문제로 집약된다. 이 '정도에 관한 문제'는 더욱 구체적으로 여기서 논의될 것이나, 앞에서 제시한 인용구문들이 예시하는 다음과 같은 몇몇 현상과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보수세력에 도전하는 전위의 전진자세'로서 '57년이래 이 나라에 이식한 현대미술의 씨가 60년대 초기부터 싹이 트기 시작하여 미술계의 새로운 분포를 형성'하였다는, 즉 앵포르멜 혹은 추상표현주의식의 '추상성' 의 발현 혹은 이식을 전반적인 미술의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기준으로 또는 '전근대에서 근대로' 전환하는 시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관점의 해석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그 이전의 '추상적 경향'의 작품들이 과소평가되어 온 것은 아닌가? 한편 이러한 문제점과 결부된 흥미있는 사회심리로서 당시의 조형심리와 연관된 현상은 너나할 것 없이 조금의 젊은 식자층이라면 '전위'라는 단어를 즐겨 쓴다는 사실이다. 가령, 1957년 11월 제1회 '현대작가 초대미술전' 의 전시평문인 김영주의','미술 한국의 전위','전위정신','전위작품','전위의 광장'등 전위라는 글자가 빠지면 큰일날 현대미술인 양 너도나도 전위이더니 급기야 1969년에는 더욱 세련되어 보이는 외래어의 표기로 'AG'라는 무크지 성격의 잡지를 발행하고 협회를 결성하기도 한다. 추상성과 관련된 당시의 전위의 성격은 무엇이길래 이렇듯 전위에 매료되었을까? 전위의 분위기는 혁명의 계절에 싹터 혁명과 함께 무르익는다. 설혹, 그것이 당대의 정치적 감각과 무관했더라도 혁명의 느낌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4.19 혁명이건 5.16 쿠데타적 혁명이건 전위의 감각과 뉘앙스는 혁명의 사회심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 불란서 아카데미 미술교육과 한국의 미술교육

        알버트 보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998 造形 FORM Vol.- No.21

        21세기를 준비하면서 교육의다방면에서는 세계적인 개혁이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은 자연과학에서 만큼이나 미술분야에서도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아직까지도 미술 안에서는 하나의 일관된 스타일을 표현하려는 전통적인 욕구와 동시대의 특징인 다양성과 점차 사라져 가는 영토의 국경간에 발생하는 충돌이 잔여적으로 남아있다. 그와 동시에 이원적인 대안을 반대하고 넘어서는 숨낳은 선택권들의 매력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전통의 기억들로 이루어져있고 다양한 표명들이 발산 할 수 있도록 시발점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미술교육이 대학의 학부에서 시행되고 있다는 것을 미루어 볼 때, 미술 제작은 전반적인 지적 활동이나 현재를 살아가는 예술가가 지니는 의미와분리될 수 없다. 대학의 미술 학부는 날이 갈수록 중요한 문화업종을 양성시키는 장소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것은 미술대학이 지니는 전세계적이고 국가적인 역할에 대해 벌어졌던 활발한 토의에 힘입은 것이다. 일본이 한국인의 생활과역사를 억누르고 한국적인 정체성을 지우기 위해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걸펴 사용한 막강한 압력은 자연스럽게 해방 후로는 같은 강도의 국가주의적인 반동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한국적 정체성을 둘러싼 논쟁은 38선을 따라 전개되어 자신들의 세력권을 각각 양륙 시키려는 미국과 소련의 두 지배 점령 세력들에 의해 다시 한번 방해받았다. 1950년데 전쟁이 발발하면서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인 안정은 계속 뒤로 미루어졌고 스스로 착수한 방법에 의해 국가적인 통일을 이루려는 필요성이 강화되었다. 비록 이러한 사건들이 문화적 국가주의와 진정한 국가적 스타일을 표현하려는 의지를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만, 세계 역사를 통틀어 오늘날의 시점에서 본다면 국가주의 자체가 구식의 개념이며, 다국적 경제와 세계화된 미디어와 인공위성 시대의 통신의발당에 의해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한국의 특이한 지리적 그리고 정치적 상황들은 독특한 문화적 전개를 위한 배경을 마련해 놓았다. 중국과 일본이라는 강력한 실재 속에 갇혀 지내면서 한국은 과거의 어떤 시대에도 이 두 주도권이 내리는 주문의 지배를 받았다. 사회적인 대 변동과 서구화가 일어난 근대시기동안 일본은 동아시아의 유력한 세력으로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1910년대에 중국과 소년의 접근을 막으면서 일본은 결국에는 1910년에 한국을 합병하여 제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지배하였다. 35년동안 지속된 지배 기간동안 한국의 문화는 그전의 고립된 대국으로서의 역사적 발전을 탈선하여 두 번씩이나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일본의 식민지 통치 자체가 가속화된 혁신의 왜곡된 결과 였기 때문에 한국의 문화도 왜곡 당하게 되었다. 일본의 중앙집권적인 통치는 한국 사회에서 전면화된 변화를 가져 왔고, 한국은 식민주의를 위한 실험 장소가 되었으며 일본 자신의 근절된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격렬한 변화에 대한 하나의 리허설이었다. 현대 미국 우주 과학자들이 화성에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일본은 상업을 위한 시장으로서, 그리고 새로운 사상들을 전개시킬 만한 모범사회로서 한국을 이용했다. 현재 한국에서의 미술교육의 위기는 갑작스러운 일본의 서구화 해석의 후유증과 한국자체의 뒤늦은 역사적 진화에서 부분적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학교교육의 대중적인 시스템은 한국인의 일상 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젊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실질적인 직업 기술을 배우게 하는 동시에 식민지배를 받아들일 준비를 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생활의다른 방면에서 보자면, 한국의 문화적 기관들은 옛날부터 한결같이 적대적이었지만 그래도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 일본이 갑자기 낯선 방식으로 행동하자 몹시 충격을 받았다. 과거에는 한국이 일본에게 불교를 전파했었고, 한국의 조각가와화가 그리고 도예가들이 일본의 불교문화를 형성하는데에 도움을 주고 심지어 일본화가들과 도예가들을 직접 양성하기도 했었다. 이제 일본은 자신의 제국에 서양화된 문물은 널리 퍼뜨리려는 신성한 사명에 착수했다. 일본이 도쿠가와 통치의 마지막 세기에 판을 쳤던 행정적인 무질서를 통일된 시스템으로 디체시킨 것도 다 유럽의 다른 집권화된 통치 체계를 본떠서 이룩한 것이었다. 일본은, 프랑스 정부가 자국의 미술체제를 관료주의화 하기 위해서 투자를 차끼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공식적인 아카데미 스타일을 도입하고 그 다음에는 인상주의의 밝은 빛과 색채를 조화시켰다. 이것은 그 당시 서구 엘리트들이 대개 선호한 국제적인 스타일이었고, 이런 스타일을 동경예술학교로 하여금 수용하게 하면서 일본 당국은 분명히 자신들이 최신의 서구양식을 따르면서 자신들의 미술을 근대화시키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당시 서구에서는 점점 세력을 더해 가는 아방가르드가 프랑스 아카데미와 그것을 모델로 한 다른 학교들의 고전주의 풍의 시스템을 공격하고 있었을 때 일본에서는 '서구적 스타일의 회하' 라고 알려진 것이 때늦은 번성을 누리고 있었다. 다른 제도적인 개혁 범위에서는, 일본은 외국에서 교육자와 조언자들을 수입하여 젊은 세대들에게 최신의 서구 타입의 관념들을 가르치려고 했다. 또 젊은 미술가들 중 다수는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외국으로 나갔으며 다음 세대를 가르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파리에서 양성된 일본인들은 동경과 교토- 오사카 지역에 개인 스튜디오를 열었다. 그동안 정부으이 지원을 받아 1887년에 설립된 동경 예술학교는 1896년에 프랑스 아카데미 시스템을 본따서 커리큘럼을 개편하였다 4년제 교육 프로그램을 개설하고 첫해는 석고상을 그리는 데에 둘째 해는 실제 모델을 그리는 데에, 셋째 해는 서구의 명작들의 모사와 유화에, 네 번째 해이자 마지막 해에는 독립적인 작품들을 제작하는 데에 충당되었다. 회화를 전공하는 학생들은 드로잉시험과 일반 지식시험을 기초로 하여 입학이 허용되었고 이러한 관례는 일본인들에 의해 한국의 공공학교와, 유럽에서 양성된 일본인 원장이 운영하는 개인 미술원으로 확장되었다.

      • Hua(畵)에서 Guohua(國畵)까지: 중국 현대 회화용어의 전개상의 쟁점

        高美慶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998 造形 FORM Vol.- No.21

        20세기의 중국은 모든 면에서 혁명과 변화를 일으켰던 사상 전례 없는 격동사를 목격하고 있다. 중국 문화의 총체적인 부분인 회화는 이러한 변화를 작품을 통해 표현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속에서 회화 자체의 변형을 성취하기도 했다. 중국의회화적 유산에 대한 재고와 서양 미술의 확산이라는 두 가지 똑같은 힘에 자극받아, 수 세대에 걸쳐 중국의 화가들은 현대적이면서 동시에 중국적인 새로운 회화 양식을 얻으려고 애쓰고 있다. 세기말인 현대, 현대의 대 화가들과 걸작들, 새로운 의미의 회화의 전개, 그리고 현대 중국 회화의 다양하고 복잡한 경향을 해석하고자 하는 역사적 고찰 등에 관하여 많은 견해들이 전개되고 있다. 중국 현대 회화는 학문적 연구의 영역에서도 잠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학자들과 비평가들이 그들의 재능과 에너지를 이런 연구에 쏟아 붓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이념과 유럽, 또는 일본을 경유한 회화 양식의 융합으로 역시 급진적인 변화를 겪었던 회화의 용어에는 관심이 훨씬 낮았으며, 중국과 서양 세계의 예술적 전통의 접촉과 충돌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이것은 중국 역사의 격변기 중, 모든 의식 있는 중국의 화가들이 직면했던 정체성 추구의흔적이라고할 수 있었던 창작품들을 탄생시켰다. 따라서 서울대의 미술대학이 주최한 금번 심포지움은 시기 적절하고도 필연적인 것이다. 또한 본인의 논문, 중국 현대 회화 용어의 전개 상의 쟁점이 한국과 일본의 유사 연구와 비교 연구를 위한 초석을 마련하는데 일조하기를 바란다. 중국은 미술, 특히 회화와 서예에 있어서 장구하고도 연속된 학문의 전통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11년-1912년에 편찬된 Meishu congshu는 Dengshi와 Hung Binhong이 편지한 전시대 미술에 관한 백과사전적인 글 모음집으로써, 40집에 250가지 제목의글들을 모아 놓았지만, 이것도 아직은 총망라한 편찬이라고 할 수는 없다. Yu Shaosong은 고대부터 20세기초까지의 서예와 회화에 관한 저서들에 관한 주석달린, 저서목록, Shuhua shulu jieti을 편집했다. 10개 부문에 860가지가 넘는 글 말하자면 역사와 전기, 기술과방식, 강연, 비평, 제시와 간기, 목록, 잡문, 선집, 위조된 글과 없어진 글 등등을 담고 있는 이 저서목록집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서예와 회화, 두 예술 분야의 전통 학문의 넓이와 깊이를 1920년대까지 명확하게 명시하고 있다. 더우기, 고전적 학문, 특히 사료 편집과 문학 평론에 밀접하게 연결된 접근방식과 표현수단을 볼 수 있는 이러한 문서들은 자급자족적인 중국의 미술평론 방식을 예증하는 것들이다. 문인화 전통의 유서깊은 그림, 서예 그리고 시의 연합이 자연스럽게 많은 양의 산문과 시를 만들어낸 반면, 화가의 전기적 자료가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독자적인 미술평론방식은, 다른 영역의 전통적 학문에서와 마찬가지로ㅡ 서양 미술이 중국에 퍼진 이후, 미술계의 새로운 사상과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거부, 수정, 변화의 과정을 거쳤으며, 과거와는 크게 다른 현대적 모습의 작품들과 용어들을 만들어냈다. 중국의 권위있는 백과사전 5에서 2권의 미술 관련 책의 색인이나 최근 수 심년 이내에 출판된 어떤 미술 사전들을 잠깐만 보아도, 금 세기에 생겨난 새로운 용어들이 얼마나 많은 지 알 수 있다. 또한 이 목록은 중국에 유입된 새로운 지식과 접근방식에 발맞추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외래어 사전에서처럼 각각의 단어들을 분류하고자 하는 것은 빛이 나지 않는 작업일 것이다. 대신에 본 논문에서는 중국 현대 회화 용어의 형성에 기여하는 주요 쟁점들을 확인하는 것에 대한 예비적 시도를 하고 있다.

      • 국사화(國史畵)의 전개-소화기(昭和期)의 역사화

        탄오 야스노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997 造形 FORM Vol.- No.20

        일본에서 모던 이어러 즉 근대 라고 하는 시대의 시작은 1868년부터이다. 이때부터 덕천막부의통치시대가 끝나고 명치천황을 최고 권력자로 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이 1868년부터 명치천황이 사망하는 1912년까지를 우리들은 명치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다음에 즉위한 대정천황의 시대, 즉 '대정시대' 는 1912년부터 1926년까지이다. 그러나 그 다음 소화천황의 시대, 즉 '소화시대'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1926년부터 1989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는 평성이라고 불려지는 시대로 지금의 시대이다. 가장 긴 소화시대는 1945년 일본패전이라는 분기점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 전전.전후라는 두 시기로 크게 나뉘워진다. 나의발표는 주로 소화 전 시기, 즉 1926년에서 1946년까지의 "역사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반적으로 일본 근대 미술사에 있어서 역사화는 명치시대의 미술 문제로서 논의되고 있으며 소화시대의 미술 문제로서는 거의 취급되지 않고 있다. 1993년에 병고현미술관과 신내천현미술관에서 역사화에 관한 전람회가 열렸다. 그 전람회의 명칭은 '그려진 역사'였다. 일본에서는 소화 전기의 미술이나 그 전의 대정시대 미술 모두 통상 근대 일본 미술의 범주 속에 있는 것이지만, 이 전람회에 출품된 작품 90%이상은 1912년 이전의 명치시대 작품이었다. 또 중촌의일의 저서 '속일본근대미술논쟁사'에는 일본에 있어서 역사화를 둘러 싼 논쟁이 간명하게 그리고 풍부한 자료에 의거하여 소개되고 있지만, 거기에서도 역사화의 융성은 '명치 30년 경에 절정에 달한 느낌'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런 사실들에거 일본에서는 역사화가 명치시대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간주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화 전람회에 있어서 전시 구성이나 미술사적인 위상은 명치 이후미술계에 있어서는 역사화가 사회적으로나 미술사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인상을 받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 있어서 '역사화'는 내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소화전기 시대에 있어서아마도 가장 많이 제작되고있어서 그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출판된 미술에 대한 전문적인 한국의 연구자들도 의아해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감히 여기에서 '소화시대의 역사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나의발표 제목에 쓰인 국사화라는 말은, 일본에서도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용어이다. 아마도 2,000명이 넘는 일본미술사학회 회원들조차도, 역사화라는 말을 들은 학자는 열 명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일본에서도 거의 잊고 있는 이 장르에 관해서 여러분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오늘 나의첫째 목적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국사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전쟁화에 관해서 간단히 말씀드리고, 마지막으로 천황을 중심으로 한 역사관이 패전에 의해 마지막이 된 1945년 이후의 미술에 관해서도 약간 언급하고 싶다. 금년 여름, 동경도 사진미술관에서 '전쟁은 어떻게 전달되었던가'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그때의 강연회에서 나는 근대 일본에 대하여 한마디로 상징적으로 나타낸다면 그것은 '천황 폐하 만세' 라고 말하였다. 카미요 시대부터 계속되어 온 천황을 중심으로 하여 축적되어 온 역사.문화.국토를 찬양하고, 이천황의 나라의 위신을 세계에 찬연히 빛나게 하는것. 이것이 근대 일본이 취한 가장 기본적인 방침이었다. 당연히 천황 및 천황제를 찬미하는 이미지 형성은 명치.대정.소화시대를 통하여 수없이 만들어져 왔다. 천황이 되려고 한 승녀의 야심을 방해하여 천황가를 지켜 온 8세기의 귀족 화기청마려를 그린 좌구간문어의작품, 천황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14세기의 무사 남정행을 그린 고교유일의 ㅈ가품, 혹은 매일 천황이 사는 황거를 향하여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있었던 18세기의 인물인 고산언구랑의 동상 등이 그 예이다. 고산언구랑의 동상의 경우는 도변장남에 의하여 소화 3년에 만들어졌지만은, 전쟁시에 탄환등에 사용하는 금속이 부족했기 때문에 1944년 주물로 녹여지게 되었다. 동상으로 만들어져도 이 인물은 천황이 이끄는 군디에 충절을 바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후가 되어도 그의 천황에 대한 충성심은 일본인의 의식에서 완전히 사라졌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동상은 다시 만들어져 세워지게 되었고 지금도 교토 삼수대교에 가면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이 인물과 만날 수 있다.

      • 미국의 현대 역사화

        도널드 커스핏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997 造形 FORM Vol.- No.20

        1997년 여름 베를린에서 '모더니즘의 시대: 20세기 미술이라는 전시회가 있었다.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은 '현실-왜곡', '추상-신성', '언어- 물질','꿈-신화'라는 네 가지 범주로 나뉘었다. 필자가 이런 구분을 20세기 모더니즘의 기본적인 카테고리로 인정하느냐 않느냐는 별문제로 하고 그 전시회에서 놀라웠던 것은 피터 셀즈가 그의 저서 '우리 시대의 미술: 회화의 역사'에서 사용했던 범주를 언급하기 위해 '미술과 사회:저항과 선전'이라는 형태로라도 있어야 했던 역사화 범주가 없었다는 점이다. 19세기 상황은 아주달랐다. 샤를 보들레르는 그의 비평 '1859년의 살롱'의 두 단원을 '종교. 역사, 환상'에 할애했다. 그가 '인간 정신의 최고의 허구'라고 불렀던 종교에 필적하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는 종교와의 결함, 난해함에 대해 언급하면서 역사 회화, 특히 '군사적인 내용을 주제로 한 회화'의 활력에 대해 말했다. 보들레르는 군사화를 '예상 가능한 장면'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군사화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고 한 작품에 대해서는 '전쟁을 통해 본 목가적인 풍경' 이라고 묘사하면서 찬양하기까지 했다. 이와 비슷하게 테오필 고티에도 '1861년 살롱A.B.C'을 한 장을 현대의 전쟁 회화에 할애하고 이를 '예술가들이 역사적인, 군사적인 정확성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이전 시대의 회화와 구별했다'그는 그렇듯 상세한 묘사는 '적지 않은' 업적이라고 말하고 더 나아가서는 '대규모 전쟁 작전은 미술에 대단히 적합하고 매력적인 주제'라 하면서, 이런 주제와 함께 회화는 특이한 '조화와 대조를 성취할 기회는 얻는다' 라고 말했다. 1861년에도, 플로렌스에서 전국전람회가 있었는데, 이 때 이탈리아의 비평가 피에트로 셀바티코는 그곳에 전시된 그림을 역사화와 성화, 두 가지로 구분했다. 보들레르와 고티에처럼, 셀바티코도 '전투에 관한 작품'이 역사 회화 중 가장 중요하다고 보고 이런 작품을 쟝르 회화로 분류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인간에 대한 합법적인 대량학살에 개성을 각인해 넣는' 전쟁화와 선전을 목적으로 한 작품을 구별해서 생각했으며, 호레이스 베르네가 전쟁을 묘사한 작품이 전쟁화의 시작이라고 보았고 그가 '대중 선동'화가라고부르는 다비드의 작품을 전쟁화의 중요한 예로 들었다. 에드몬드와 공쿠르 역시 '베르네보다 군사 장비를 잘 이해한 사람은 없다'고 평했고 그를 '곡마단 감독과 화가' 의 중간 어디쯤 있는 인물로 여겼다. 미술역사에 관한 이 간단한 강연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 회화가 20세기에 와서 공식적인 범주에서 사라졌다는 사실과 20세기 역사 회화의 기근이다. 모더니즘은 역사 자체에 대한 평가를 절하하는 업적을 이룩했다. 미국의 모더니스트 비평가 그린버그가 미술은 정치. 종교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했을 때 그는 사실은 19세기 미술을 역사화와 종교화 두 기본 범주로 나누는 것이 부당함을 선언한 것이다. 공쿠르는 1852년에 이미 '종교화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역사화파는 죽어 가고 있다'고 하면서 역사화파는 풍경화파에 의해 교체되고 있다 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풍경화는 현대 회화의 위대한 영광',즉 '선에 생각을 얹는' 또는 '미술이라는 살아있는 영역에 상징을 싣는'그림이 아니라 '그 자체가 스스로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는' 미술의 도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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