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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산 안창호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관한 연구성과와 과제

        한시준 도산학회 2015 도산학연구 Vol.14 No.-

        한국근현대사에서 도산 안창호(1878 – 1938)만큼 주요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는 인물은 드물 것이다. 그 동안 도산 안창호에 대 해서는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도산과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 하여 『島山安昌浩全集』을 발간하였고, 역사학을 비롯하여 정치학·경제학·교육학·체육학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저서와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이제 그동안 이루어진 연구 성과를 점검하고, 앞으로 수행할 연구 과제를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한다. 도산에 대해서는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연구 성과에 대한 점검은 별달리 없었다. 저서나 논문에서 연구사를 정리하는 것 외에는, 이명화의 「도산 안창호 연구의 성과 와 과제」가 유일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를 통해 1980년대 이전에는 도산의 교육·사상·철학 등에 대한 연구가 많았고, 도산을 위대한 사상가·교육자·민족의 지도자로 평가하는 것이 주요 연구경향이었음이 드러났다. 이에 비해 독립운동과 관련한 연구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도산은 일평생을 민족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운동 최전선에 서 활약한 독립운동가였다. 1897년 독립협회에 참가한 이래 신민회· 대한인국민회· 흥사단을 조직하고, 이를 이끌었다. 그리고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으로 선출된 이래, 1932년 4월 일제경찰에 피체될 때까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수립 초기에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를 겸직하면서, 임시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갖추고, 임시정부가 정부로서 기능하고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도산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도산의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도산과 임시정부에 대해 서도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이 글은 도산의 독립운동,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관련한 연구 성과를 점검하고, 향후의 연구 과제를 전망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방법은 간행되거나 발표 된 자료 및 논문을 조사 정리하여 연구의 성과를 점검하고, 이를 기초로 향후 추진할 연구과제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 도산 안창호 연구의 현황과 과제 -사회교육 연구를 중심으로-

        박인주,배현순 도산학회 2017 도산학연구 Vol.16 No.-

        이 글의 목적은 2016년 현재 시점에서 도산에 대한 연구의 현황과 과제를 사회교육 중심으로 살펴보는데 있다. 1876년 병자 수호조약을 계기로 개항한 이후 1945년 해방되기까지의 시기, 즉 개화기 및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인물들인 유길준, 서재필, 김구, 이승만, 신채호, 박은식, 이상재, 이승훈, 안창호 등에 대한 연구는 대체적으로 많이 이루어진 편인데, 이들 중에서도 특히 도산 안창호에 관한 학문적 연구는 우위를 점한다. 도산 안창호에 관한 연구는 1969년에 이일천에 의해 시작되어 2016년 현재 박만규에 이르기까지 짧지 않은 기간인 47년 동안 이루어져 학위 논문이나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 수가 많은 편이다. 최근 연구자는 도산 안창호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가지면서 스스로에게 가지게 된 물음(自問) 셋이 있다. 하나는 나는 도산과 흥사단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혹은 얼마나 알고 있는가? 둘은 나는 누구로부터 어떤 자료를 통해 도산과 흥사단에 대해 배우고 학습하였는가? 셋은 내가 배우고 학습한 도산과 흥사단의 참 모습 혹은 원형은 어떠한가? 연구자의 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하나로 지금까지 이루어진 도산 연구에 대한 현황과 과제를 사회교육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첫째, 2016년 현재까지 이루어진 도산 연구가 주로 어느 분야에서 이루어졌는가? 둘째. 현재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분야는 있는가? 있으면 어느 분야 인가? 셋째,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분야에 대한 사례 소개의 하나로 사회 교육 분야의 연구를 살펴보고, 새로운 연구 방법의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도산 연구의 역사를 살펴 시대 구분을 하고, 시대 구분에 따른 시대별 연구 동향, 연구 주제어를 워드 클라우드 기법으로 분석하였다. 더불어 도산 연구 사례로 사회교육 관점에서의 선행연구를 살펴보고, 도산 연구의 과제를 탐색하였다.

      • 재미한인사회 조직의 리더와 오피니언 리더 : 안창호와 홍언

        김도훈 도산학회 2006 도산학연구 Vol.11,12 No.-

        도산은 ‘조직의 명수’였다. 대한제국시기 명연설로 근대국가의 꿈을 설파하던 도산은 조국이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자주적 국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늘 노력하였다. 때문에 도산은 국내를 비롯하여 미주․하와이․멕시코․중국․러시아 등 국외 각지에 한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면 지체없이 달려가 민족운동 실천단체를 조직하고 그를 바탕으로 ‘도산의 꽃동산’을 가꾸어 나갔다. 청년학우회․신민회․공립협회․대한인 국민회․흥사단․한국독립당․(수양)동우회 등이 그것이었다. 도산이 전지구적 활동반경을 바탕으로 한평생 민족운동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도산의 꿈을 믿고 따라준 분들이 있기에 가능하였다. 도산을 도와 재미한인사회의 민족운동을 이끌던 인물 중 한 분이 바로 洪焉(1880~1951)이었다. 홍언은 재미한인 민족운동의 구심점이었던 國民會의 지킴이로 평생을 보낸 ‘미스터 國民會’였다. 그러나 한국사학 계에서조차 “40여년간 미주 언론계에 몸담아 독립 고취에 힘쓴” 그의 이름을 아는 이는 흔치 않다. 도산과 홍언의 관계를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1915년 7월 5일 도산의 아내(안혜련)가 딸을 출산하자, 도산은 홍언에게 딸아이의 이름을 생각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도산과 홍언은 각자 새벽 산에 올라 솟아오르는 해를 보고 작명한 뒤, 하산하여 서로 지은 이름을 펴 보였다. 놀랍게도 둘 다 ‘繡山’이란 두 글자를 내밀었고, 두 분은 함께 웃고 말았다 한다. 바로 그가 도산의 첫째 딸 안수산 여사이다. 미주한인사회를 이끌던 국민회를 사실상 조직한 리더가 안창호였다면, 국민회의 여론을 이끌며 도산의 理想을 지지한 오피니언 리더는 홍언이었다. 따라서 미주한인사회의 구심체를 마련한 안창호와 문필가 이자 역사가로서 재미한인사회의 여론과 민족정신 고취에 선봉에 섰던 홍언의 생애와 활동을 살펴보는 것은 도산의 민족운동과 활동을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익히 알려진 도산보다는 비교적 덜 알려진 홍언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 도산 안창호와 유상규

        김용달 도산학회 2017 도산학연구 Vol.16 No.-

        도산 안창호와 관련된 인물들 가운데 유상규처럼 가깝게 묘사된 사람도 드물다. 유상규는 이광수에 따르면, “도산의 우정을 그대로 배운 사람”이라고 했고, 장리욱에 따르면, “도산을 스승으로만이 아니라 분명 어버이로 모셨다. 도산 앞에서의 행동거지는 물론이지만 또 도산의 신상 모든 일에 대해서 갖는 유군의 그 세심한 정성은 훌륭한 ‘효자’ 바로 그것이었다”고 회고하 였다. 나아가 도산 스스로도 유언으로, “내가 죽은 후에 내 몸은 내가 평소에 아들같이 역이든 유상규 군 곁에 묻어주오”라고 했다. 이처럼 도산과 가깝다고 알려진 유상규는 어떤 인물일까? 이것이 이 연구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유상규의 생애와 활동보다는 도산과의 관계, 특히 독립운동과의 관련성을 추적해 본 것이다. 아시다시피 도산은 1878년생으로 1897년생인 유상규와는 나이 차이가 19세로 부자지간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컸다. 유상규 또한 도산을 선생처럼 모시고 그의 ‘우정’을 배우고 따랐기 때문에 사제지간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중국 상해와 국내에서 도산을 측근에서 보좌하고, 그의 활동을 보필했기에 민족운동의 동지이기도 했다. 두 사람을 이어준 여러 인연들이 보인다. 우선 지연(地緣)이다. 도산은 평남 강서출신이고 유상규는 평북 강계출신으로 서북출신 이라는 지연성을 가진다. 두번째는 신교(信敎)의 동질성이다. 도산과 유상규 모두 장로교도로 종교적 인연이 있다. 나아가 경신 학교 선후배 관계로 학연(學緣)도 있다. 무엇보다도 유상규는 도산이 창설한 흥사단 단원이자 도산이 이끈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기 요원으로, 귀국 후에는 흥사단 국내지부와 같던 수양 동맹회와 수양동우회 그리고 동우회에서 활동한 도산사상의 공감 자요 실천자로 여겨진다. 이 같은 두 사람의 관계를 추적하는 데는 유상규의 유족들이 편찬한 두 권의 책 『애국지사 태허 유상규』(흥사단출판부, 2007)와 『태허 유상규』(더북스, 2011)가 큰 도움이 되었다.

      •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과 혁명관

        李明花 도산학회 2006 도산학연구 Vol.11,12 No.-

        도산 안창호는 한민족의 근대화를 지도하며 구국운동을 전개한 선구자이며, 제국주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한민족의 자유를 쟁취하고자 투쟁방략을 세워 조직적으로 지도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리고 근대 민족 국가 수립의 그 날을 목표로 대립과 갈등을 통합의 논리로 풀고 조직을 활성화한 정치가였으며 민주주의 국민의식을 고취시켜 독립국가의 발전에 기여할 구성분자로서의 중견의 인물 배양에 힘쓴 교육자였다. 이처럼 다양한 삶 중에는 경제적 실력을 키워 독립운동을 지원하고자 했으며 외교활동을 통해 한국의 존재를 알려 독립할 자격이 있는 민족 임을 전세계에 알리고자 했으며 신문, 잡지 발간과 언론 홍보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의 소식을 공유하고자 했다. 도산 안창호 그는 한마디로 한국 근대 민족운동의 대계를 한 몸에 짊어진 인물이다. 수난의 시대에 고단한 삶을 살았던 그 무게만큼 오늘날 도산은 한국사의 큰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도산의 활동을 시대 구분해 보면 제1기는 1896년 독립협회 활동, 제2기 1903~1906년까지 의 미주에서의 민족운동기, 제3기는 1907년 신민회 결성과 구국운동기, 제4기 망명한 이후 재러한인사회에서의 활동기, 제5기 미주 대한인국 민회, 흥사단활동, 제6기 1919~1932년 중국에서의독립운동기, 제7기 일제에 피체된 후 국내에서의 활동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도산의 활동은 지역 및 시기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어 전체적인 흐름을 조망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도산을 평가할 수 없다. 도산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서 구국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도산활동의 주요점은 독립운동으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궁극적으로 근대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준비운동이 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추진하였던 도산의 활동과 운동을 혁명운동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도산을 개조론자로 명칭하고 특히나 일부 도산을 잘못 이해하는 이들에게 ‘개량주의자’로까지 폄하되어 있 는 실정에서 도산과 혁명운동을 연관 짓는다는 것은 다소 낯선 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도산은 자신을 혁명가로 자처하였고 끊임없이 변혁을 추구했던 자신의 활동을 혁명운동으로 규정한 바 있다. 본 연구는 도산의 독립운동을 그의 혁명관과 연관하여 1910년대, 1920년대, 1930년대 초반으로나누어 살펴보고자 있다. 이 시기는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면서 미주에서의 문화운동에서 전환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상해에서의 도산의 활동은 이제까지 독립운동사상에서 볼 수 없었던 혁명적 활동이었으며 이러한 도산의 혁명운동이 우리 독립운동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나 살펴보고자 한다.

      • 도산의 교육사상에 관한 연구 성과와 과제

        박의수 도산학회 2015 도산학연구 Vol.14 No.-

        해방 후 도산 안창호에 관한 연구는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 왔다. 그 결과는 전기나 평전, 전집, 자료집, 논문집 등 다양한 형식으로 출판되었다. 전기는 1947년에 출판된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가 판을 거듭하면서 오랫동안 가장 널리 읽혀지고 활용되었다. 그 후 1963년 주요한에 의하여 편찬된 안도산전서는 비교적 과학적이고 객관적 입장에서 생애와 사상, 그리고 일기와 연설문, 서간문, 회고록, 논문 등 그때까지 수집된 자료들을 망라한 저술로 초기의 도산 연구에 많은 기여를 했다. 2000년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에서 독립기념관에 보관된 새로운 자료들을 추가하여 그때까지 수집된 거의 모든 자료를 총망라하여 전질 14권으로 된 島山安昌浩全集을 편찬하였고, 이어서 2005년에는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의 지원으로 도산학회에서 전질 22권의 미주국민회자료집을 편찬하여 도산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본 연구는 그동안 이루어진 연구 성과 중에서 도산의 교육사상 및 교육활동과 관련된 연구 성과를 분석하고 앞으로의 연구 과제를 생각해보는데 목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연구 성과라고 하면 1차 자료의 발굴과 해석 및 창조적 재구성 결과를 의미한다. 교육과 관련된 도산 연구는 1차 자료와 기존의 연구물을 토대로 한 2차적 작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는 대학원의 학위논문과 학술지 혹은 학회에서 발표된 연구논문을 대상으로 분석하기로 했다. 따라서 잡지나 단행본의 일부로 실린 수필형식의 짧은 글은 제외하고 주(註)를 포함한 논문의 형식을 갖춘 것만을 대상으로 하기로 했다. 물론 기러기를 비롯한 잡지류에 게재된 수필 형식의 짧은 글이라도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될 수는 있지만, 많은 경우 이런 글은 다른 연구 논문과 중복될 가능성이 많아 여기서는 제외하기로 했다. 또한 ‘교육사상에 관한’ 연구를 어떻게 한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도산에 관한 다양한 연구를 학문 영역별로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논문의 주제에 ‘교육’이라는 용어가 포함되어 있는 연구물을 원칙으로 하고, 주제에 명시되어 있지 않더라도 연구자가 교육학 전공자이며 그 내용이 교육에 관한 연구라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포함시키기로 했다. 또한 ‘교육사상’은 좁은 의미의 사상(철학)에 국한하지 않고 도산의 교육에 관한 생각과 주장 및 교육적 활동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했다. 그리고 연구물은 그동안 필자가 보유하고 있는 문헌 목록과 최근 이명화 박사가 종합 정리한 자료목록, 국립 중앙도서관 및 국회 도서관의 자료 검색을 종합하여 작성하였으나 여전히 누락된 것들이 있을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 도산 독립사상의 특성과 애국창가 활용

        이정은 도산학회 2017 도산학연구 Vol.16 No.-

        이 발표의 대주제는 “애국창가운동과 도산 안창호”이다. 도산은 애국창가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지도자였다. 도산이 애국창가를 작사했고, 각종 모임에서 애국창가 부르기를 권장했으며, 애국창가를 통해 “정의돈수(情誼敦修)” 즉 ‘서로 사랑하기’를 통한 단합을 이끌어냈다. 도산의 애국창가운동에는 인간에 대한 신뢰,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중요성, 단합을 통한 힘의 중요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도산의 리더십, 도산 리더십 하의 공동체 문화를 특징짓는 애국창가는 도산의 이상과 도산의 리더십의 특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도산의 비전과 목표, 도산 리더십의 특징과 연관하여 도산의 애국창가운동이 가지는 의미와 성격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 도산 안창호의 미주활동

        존 차학성 도산학회 2017 도산학연구 Vol.16 No.-

        오늘 도산선생탄신 138주년 기념을 위해 모인 도산의 사람들에게 감사드린다. 도산선생의 미주 활동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고 한동안 망설였다. 여기 계신 도산학자들과 더불어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도산선 생의 미주활동에 대해서 집필한 많은 논문과 서적이 발간 되어있어 역사학자가 아닌 내가 더 보탤 내용이 무엇인지 고민을 많이 했다. 결국 나는 작가로서 제일 궁금한 점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즉, 그 당시 도산선생과 동료들의 삶과 경험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 원고를 준비했다. 나는 항상 매크로적인 시점에서 매사를 보기 시작하는 버릇이 있어서 우선 도산선생의 활동 범위를 파악하기 위해 도산선생의 자취를 구글지도에 입력하기 시작했다.

      • 도산 안창호의 생애와 활동

        李萬烈 도산학회 2006 도산학연구 Vol.11,12 No.-

        島山安昌浩(1878~1938) 선생은 교육자로 애국계몽운동에 앞장 섰으며,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하면서 독립의 방략을 다양화한 독립운동가다. 그는 민족운동가로서, 그 운동의 기반으로서 도덕적 가치를 우선했으며, 운동의 방략도 급진적이거나 과격한 것을 피하고 점진적인 것을 중요시했다. 그는 각종 운동을 주도하면서 개인적인 인격의 성숙을 전제로 조직력을 중시했으며 따라서 그의 운동은 개인의 인격 연마와 함께 동맹수련을 강조하여 탁월한 조직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민족을 중시한 민족주의자이면서 민족주의를 세계 평화 에 기여토록 해야 한다는, 말하자면 세계화를 지향한 지도자이기도 하 다. 2005년 8월, 국가보훈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도산 선생을 지목 했다. 광복 60주년을 맞는 이 달에 도산 안창호 선생을 이달의 독립 운동가로 지목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광복 60주년을 맞아 지금까지 지내온 한국 민족의 진로를 되돌아보면서 앞으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데는 도산 선생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미래의 진로와 관련, 앞으로 한국 민족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도덕적인 수준을 높이고, 민족적으로는 통일을 이룩해야 하며, 세계사적으로는 세계평화를 지향하면서 한국 민족이 바로 그 세계사적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민족의 진로를 이런 관점에서 풀이할 수 있다면, 거기에 부합되는 지도자를 독립운동사에서 찾는다면, 바로 도산 선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를 선정했을 것으로 본다. 도산 안창호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선학들의 연구와 저술이 있다. 이 시기에 ‘도산 선생의 생애와 활동’이라는 다소 진부한 제목으로 그를 되돌아보는 것은 광복 60주년이라는 환경에서 그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시대에 따라 변화될 수 있겠지만,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지 않는 한 그 인물에 대한 평가는 기존의 연구를 크게 뛰어넘을 수 없을 것으로 본다. 그런 점에서 이 글도 새로 정리한다는 것 외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기는 힘들 것으로 본다. 선생의 생애는 그 활동 지역이 넓고 그 활동 영역 또한 매우 다양하 다. 때문에 그의 생애와 활동을 단순화시켜서 언급한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이 글은 도산 선생의 생애를 그 시기를 따라 평면적으로 언급 할 것이기 때문에 다소 연보적인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좋은 충고를 기대한다.

      • 도산 안창호와 해석 손정도 -변함없는 신뢰와 협력, 그것을 가능케 했던 공유가치-

        이덕주 도산학회 2010 도산학연구 Vol.13 No.-

        이 글은 ‘호형호제’(呼兄呼弟) 관계를 유지하며 일제하 민족 독립운동 현장에서 생각과 행동을 함께 하였던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9)와 해석(海石) 손정도(孫貞道, 1882-1931) 사이에 이루어진 구체적인 만남과 협력, 동역의 역사를 살펴보고 두 사람의 우정과 동역 관계를 가능케 하였던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공유가치(common value)가 무엇인지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두 사람의 관계사를 살펴봄에, 해석의 생애를 중심으로 도산과의 관계를 조명하는 방법을 취할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이루어진 연구에서 도산에 대한 것은 자료 발굴이나 연구에서 상당한 수준을 이루었으나 상대적으로 해석에 관한 연구는 초보적인 단계임으로 어느 정도 일반적인 상식처럼 이해되고 있는 도산의 생애와 활동을 염두에 두고 해석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이 두 사람의 관계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도산과 해석 두 사람은 나이에서 4년 차이가 나지만 출신 배경과 살았던 시대 환경이 같았고 또한 비슷한 과정을 거쳐 기독교 신앙을 습득한 후 항일 민족운동에 헌신하였던 관계로 공통되는 부분이 많다. 우리나라 근대 민족운동사와 교회사, 세계사 맥락에서 두 사람의 생애를 비교하여 살펴보면(<부록> 참조) 도산과 해석은 평남 강서지역의 선비 집안출신으로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기독교를 통해 신학문을 접하고 근대화 흐름에 동참하였다는 점, 일제의 침략과 지배 현실에서 현실에 순응하기보다는 저항의 논리로 항일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는 점, 삼일운동 이후 상해 임시정부 활동에 동참하여 독립운동 진영내의 갈등과 분열 요인을 치유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다가 한계를 느끼고 임시정부활동을 포기한 후 생애 후반을 흥사단 활동과 독립운동 기반으로서 이상촌 건설을 위해 노력한 점 등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결국 도산과 해석은 종교적으로는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후 기독교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변절하지 않은 ‘동지’(同志)였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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