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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인애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22 社會科學硏究 Vol.30 No.1
논문은 최근 북한에서 천리마 시대 여성을 호명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논문에서는 천리마운동에 관한 북한 문헌에 기초하여 여성의 천리마운동 참여와 오늘의 재호명을 젠더 관점에서 연구하였다. 연구에 의하면 천리마 시대 여성들의 역할은 집단의 어머니, 제한된 노력 혁신자였다. 천리마 운동을 통해 북한에서는 생산단위로서 직장이 생활공동체로 기능하는 독특한 사회문화구조가 형성되었고 가부장적 구조는 사회로 확장되었다. 천리마운동 시기 여성 정책은 발전도상국의 근대화 시기 여성 정책 패러다임인 WID 단계와 유사했다. 북한 여성은 천리마운동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리더로 역할 했으나 근대화의 추진으로 주변부로 밀려난 발전도상국 나라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산업화의 추진과 함께 지위가 하락했다. 특히 북한의 1인 독재체제는 이를 더욱 촉진시켰다. 현재 북한 지도부는 현재 사회주의 국영경제 체제를 복구하는 데서 주되는 장애를 시장화로 확산한 개인주의로 보고 있으며 집단주의 정신과 생활방식을 복구하는 데서 여성들이 집단의 어머니 역할을 해줄 것을 바라면서 천리마 시대 여성 영웅을 호명하고 있다. 김정은 정권은 여성을 국가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동원하는 기존 정책을 답습하고 있으며 북한의 여성 정책은 여전히 MID 단계에 있다.
현인애 북한연구소 2019 北韓 Vol.- No.567
한국의 카이스트(KAIST, 한국과학기술원)는 국가 발전에 필요한 고급 과학기술 인력을 양성하고 이공계 연구중심대학의 본보기를 제시하기 위해 1971년 설립됐다. 북한의 ‘이과대학’은 카이스트와 비슷한 사명을 가진 대학이다. 이 대학은 카이스트에 앞서 1967년에 설립됐다. 수재론을 부인하던 김일성이 수재중심대학 설립을 허락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이과대학 설립에는 과학원 원장이던 강영창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강영창은 일제강점기 중국 뤼순공대를 졸업하고 기사로 일하다가 광복 직후 월북해 6·25전쟁 전 성진제강소 기사장, 조선노동당 중공업부장, 내각 금속공업상을 거쳐 과학원 원장으로 일했다. 김일성은 강영창이 사망한 후에도 공식 석상에서 여러 차례 회고하는 등 그에 대한 신뢰가 매우 컸다. 강영창이 과학원 원장으로 있던 시기에 평성과학원 설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됐던 만큼 그의 주장이 힘을 얻어 국가과학원 부속대학으로 이과대학을 세웠다는 설이 유력하다.
노동신문 사·논설을 통해서 본 북한 여성담론과 여성정책의 변화
현인애 통일연구원 2015 統一 政策 硏究 Vol.24 No.1
노동신문 사·논설은 해당 시기 북한 당국의 공식적인 여성담론과 여성정책을 살펴볼 수 있는 효율적인 자료이다. 1950년부터 현재까지 여성명절 관련 노동신문 사·논설을 분석한 데 의하면 북한 당국의 여성담론은 초기에는 가정의 구속에서 벗어나 사회에서 활동하는 여성을 지향했지만, 점차 전통적인 여성상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북한 당국의 여성을 위한 정책은 남녀평등권 발포, 여성의 사회 진출과 그를 위한 국가적 조건 보장, 여성을 가정일의 부담에서 해방하기 위한 가전제품 생산과 서비스업 확대로 발전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부터는 외면상으로는 이전 정책을 유지했지만 실제로는 퇴보했으며 특히 1990년대 후반기부터는 체제 수호를 위한 여성 역할 제고에 주력하고 있다. 북한의 여성정책을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정치적 요인으로,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전반까지는 소련의 정치적 영향이었으며 그 이후는 수령체제에 기반을 둔 수령의 여성관과 그에 기초한 정치적 역할이었다. The Rodong Sinmun’s editorial is an effective material to explore the North Korean leadership’s official female discourse and women policy at any given moment. According to analyses of the ‘Rodong Sinmun’s editorial on International Women’s Day from 1950 until present day, the North Korean government’s discourse on women was initially one orientated towards women stepping out of the confinement of the home and working in the social sphere society. But the direction has gradually changed to one emphasizing the traditional model woman. The authorities’ policies for women originally ensured national conditions enabling the entry of women in public affairs and the promulgation of gender equality; they developed the expansion of the service sector and even the production of home appliances to liberate women from the burden of household work. But since the mid-1970s, while some of these policies were maintained, others were drawn back. The primary cause for a retreat in North Korea’s women policy was a political one; since the 1950s to the first half of the 1960s, North Korea was under the political influence of the Soviet Union, but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North Korean leadership system, the leader’s standpoint towards women was subsequently translated into state poli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