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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부의 상피세포 종양에서 p53과 MDM2 발현에 대한 면역조직화학적 연구

        조한석 ( Han Suk Cho ),박은주 ( Eun Joo Park ),김철우 ( Chul Woo Kim ),조희진 ( Hee Jin Cho ),김광호 ( Kwang Ho Kim ),김광중 ( Kwang Joong Kim ),박혜림 ( Hye Rim Park ) 대한피부과학회 2007 대한피부과학회지 Vol.45 No.6

        Background: MDM2 (mouse double minute 2), the product of an oncogene is a key regulator of p53. It can repress transcription of p53 and eliminate it through proteolytic degradation. On the other hand, p53 binds specifically to the MDM2 and stimulates its transcription. Thus the two molecules are linked to each other through an autoregulatory feedback loop. Objective: To evaluate the expression patterns of p53 and MDM2 in several epithelial tumors and assess their correlations. Methods: We investigated the expression of p53 and MDM2 protein by an immunohistochemical method on formalin-fixed, paraffin-embedded tissue specimens of basal cell carcinoma (BCC), squamous cell carcinoma (SCC), Bowen`s disease, and actinic keratosis (AK). Results: The expression of p53 was increased in 83.3% (15/18) of BCC, 87.5% (14/16) of SCC, 75.0% (12/16) of Bowen`s disease, and 57% (8/14) of AK. The expression of MDM2 was increased in 50.0% (9/18) of BCC, 25.0%(4/16) of SCC, 68.8% (11/16) of Bowen`s disease, and 14.3% (2/14) of AK. The expression level of p53 had a significant positive correlation with the expression level of MDM2 in actinic keratosis (p=0.022). There was no correlation between the expression level of these two markers in others (p>0.05). Conclusion: This data suggests that p53 and MDM2 may be associated with pathogenesis of skin epithelial tumors with complex pathways. p53 (+)/MDM2 (+) phenotype expression may have an important pathogenetic role in Bowen`s disease. p53 (+)/MDM2 (-) type expression may have an important pathogenetic role in BCC, SCC, and AK. In particular, in AK p53 (+)/MDM2 (-) phenotype expression may have a major pathogenetic role. The mechanism of how they interact to promote tumorigenesis and the prognostic values in skin epithelial tumors remains to be elucidated though. (Korean J Dermatol 2007;45(6):534∼540)

      • KCI등재후보

        17세기 한,중,일 삼국 『노자』 이해와 그 특징

        조한석 ( Han Suk Cho ) 영산대학교 동양문화연구원 2016 동양문화연구 Vol.23 No.-

        이 글은 17세기 한중일 3국 『노자』 이해의 특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논의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우선 17세기 명말 청초의 왕부지는 「노자연」 「자서」에서 위진 시대부터 명대까지의 역대 『노자』 해석이 『노자』의 원형적 의미를 훼손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노자』의 ‘측기(測幾)’가 일부 정치적 술수로 응용가능하다는 점도 지적하긴 했지만, 『노자』의 정치적 방법론적 응용 가능성이 『노자』를 유가의 범위로 수용할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여, 그의 사상적 기저인 ‘벽이단’ 강조에 있었다면, 박세당은 성리학을 중심 이념으로 성립했던 조선 개국 이래 지속되었던 ‘『노자』는 이단이다’ 의식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노자』의 특징을 ‘수신치인’·‘패도’·‘사’·‘부쟁’ 등의 다양한 측면에서 규정하였다. 특히 박세당은 「신주도덕경」 서문에서 『노자』가 위진 시대의 해석에 의해 원형이 훼손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노자』의 본의는 ‘청정한 정치와 무언의 교화’에 있고 이런 『노자』의 원형은 ‘수신치인’을 통해서 그 특징이 압축된다고 강조 했다. 한편 일본 근체 초기 곧 에도 막부 초기 유관으로 활약했던 하야시 라잔의 경우 임희일의 「노자권재구의」를 일본 사회에 소개·유포시켰다는 공로는 분명하지만 그의 『노자』 이해는 왕부지나 박세당의 경우처럼 독자적 주석서 편찬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유도합일의 특징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는 「노자권재구의」 수용의 이면에는 에도시대 초기사회적 통합을 지향했던 하야시 라잔의 이념적 고민이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후 그의 「노자권재구의」 수용을 기반으로 오규 소라이 문하의 켄엔(훤園)학파에 의해 왕필의 「노자주」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18세기에 이르러 오규 소라이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일본 사회에 『노자』에 대한 독자적 주석이 출간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This paper is discussed about Characteristic of Laozi Commentary in the 17th century Far East. Wang Fu Zi(王夫之) has a prototype of the history of the book of First of all, this book destroying the meaning that intellectual about. He thought that this book can be used as a political science textbook. But he thought it was a completely different text and scriptures of Laozi and Confucius. Eventually he studied to uncover the fact that Laozi is Cult Text Book. On the other hand, Park Sae Dang(朴世堂) argued that Laozi could be interpreted as a Confucian. He thought characteristics of Laozi are Su Shin Chi Yin(修身治人), Ruling by force(覇道), Personal Benefit(私), No Disputing(不爭). Among these, he considered Su Shin Chi Yin(修身治人) closer to the archetypal meaning of Laozi. Unlike Wang Fu Zi, Park Sae Dang thought it could be interpreted as a devastating blow to Confucianism. Eventually he was reinterpreted by the Lao Confucianism, Laozi was re-evaluated as not Cult Text book. Finally, Hayashi Razan(林羅山) introduced Lin Xi Yi(林希逸)``s Laozi Commentary to early modern society in Japan. But he could not finish Laozi commentary of his own interpretation. But his acceptance of Lin Xi Yi(林希逸)``s Laozi Commentary has provided the basis for Japan``s early modern society(江戶幕府初期) ideological integration. And there was a devastating blow on its own interpretation of Laozi in 18th-century Japanese society by ケンゲンガクハ(훤園學派) on the basis of his acceptance of Lin Xi Yi``s Laozi Commentary can be established.

      • KCI등재

        전반기 학술대회 논문 : 박세당의 유가적 노장 해석 -노장 수용과 왜곡의 경계 그리고 그 동기에 관하여-

        조한석 ( Han Suk Cho ) 한국공자학회 2010 공자학 Vol.19 No.-

        박세당은 조선 사상사에서 『노자』와 『장자』를 주석한 사상가이자 정치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유가의 인성론적 입장에서 『노자』와 『장자』를 수용하고, 반유가적 노장을 친유가적 『노자』·『장자』로 변용하여 해석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반성해야 할 과제가 있다. 첫째는 『노자』 18장 해석에서 보이는 문맥의 변형의 문제이고 둘째는 ``『장자』를 『맹자』의 性善論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문제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소요와 양생 등 개인적 안위 연장을 주장하는 『장자』를 公으로 규정하여 사회성 강한 고전을 재해석하는 것이 타당한가``하는 문제이다. 이와 같이 도가 텍스트에 대한 유가적 재해석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박세당은 유가와 도가의 정면충돌 가능성을 삭감시키기 위해 필연적으로 무리한 해석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박세당의 문맥의 변형과 노장 사상의 원의 훼손 등의 위험 부담을 감수하면서 노장 연구를 감행하게 된 동기에 관하여 필자는 두 가지 가설을 설정하였다. 첫 번째 가설은 ``박세당의 노장 연구는 서인 노론의 주자 절대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응의 일환이며 노장 연구를 통해서 문화적 다양성을 지향했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가설은 ``박세당의 노장 연구는 벽이단의 일환이었다``라는 부분이다. 朴世堂は朝鮮思想史において『老子』と『莊子』の解釋家で有名な思想家であり政治家である。朴世堂は儒家の人性論を中心で『老子』と『莊子』を受容するのであった。そして反儒家的な老莊を親儒家的な老莊へ變容して解釋するのであった。こんな解釋には反省しなければならない問題たちが三つある。一番、彼の『新註道德經』の18章で見られている文章の變形である。二番、『莊子』の成心について『孟子』の性善で解釋するのが正當性かの問題である。三番、個人てきな性向が强い『莊子』を社會哲學で再解釋するのができるかのである。勿論、朴世堂は道家のテキストの儒家的な解釋を進行しながら無理な解釋するしかないのである。だから筆者はこのように無理な解釋しなければならない動機について次のような二つの假說を立てるのである。一番の?說は朴世堂の『老子』と『莊子』の解釋の朱子絶對主義に對する批判的な對應の一環であり、その老莊硏究を通じて文化的な多樣性を追求しよったのである。二番の假說は朴世堂の親儒家的な『老子』と『莊子』の解釋の本氣は闢異端であった可能性があるものである。

      • SCOPUSKCI등재
      • KCI등재후보

        道家思想의 儒家的 變容을 위한 朴世堂의 『莊子』 읽기

        조한석(Cho Han Suk) 한국도교문화학회 2005 道敎文化硏究 Vol.23 No.-

        아이러니컬하게도 비교적 사상적으로 자유롭던 삼국 통일 신라 고려시대에는 전무하던 노장 사상에 대한 연구가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집중적으로 배출된다. 이러한 사상사적 역설의 이면에는 정치적으로 비실용적이고 국가권력유지에 역기능을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노장사상의 위상에 대한 사상적인 재평가가 16세기 이후부터 일부 학자군에서 수행되었기 때문이다. 본 논문의 주요 Text인 박세당의 『장자』 주석 역시 노장사상의 실용성에 대한 재평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박세당은 『노자』와 『장자』를 통해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유가의 정치적 덕목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장자』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박세당의 『장자』 해석은 전통적인 이해로부터 이탈한다. 그의 『장자』 해석은 탈속적이었던 장자를 세속의 논리 곧 정치이론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것이다. 박세당은 우선 제도권 밖에서 소요(逍遙)하는 이상적 인격인 지인(至人)의 위상을 최소화시키고, 「제물론」을 중심내용으로 설정한다. 곧 당시 박세당이 처한 정치 현실의 해결에 「제물론」의 ‘대립하는 현상에 대한 조율의 논리’가 사상적인 모티브를 제공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박세당은 「제물론」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대립하는 현상의 해소’를 넘어서, ‘대립하는 현상의 해결’로 내용을 전개한다. 박세당은 이를 ‘시비에 대한 결정’[定是非]으로 논점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또한 장자 특유의 유약(柔弱)의 처세술에 대해서도 박세당은 기회주의적 처세로 폄하하고 유가의 도덕율을 중심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물론 『장자』에 대한 유가적 해석은 ‘장자 사상의 실용성에 대한 재평가이다’라고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장자 특유의 자연주의에 대한 훼손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고전 해석에서 보이는 해석상 한계는 때로는 그 해석의 특징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미 지적한 『장자』의 자연주의와 탈속적 경향에 대한 훼손이라는 해석상의 한계는, 17세기 조선의 주자학 중심의 사상적 풍토를 극복하고, 전후(戰後) 조선 사회의 재건을 위해 다양한 학문적 가능성을 타진했던 박세당의 학문적 특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 KCI등재

        17세기 동북아시아 "장자" 주석의 현실 대응론 왕부지와 박세당의 제물론 "명(明)" 해석과 현실 대응론을 중심으로

        조한석 ( Han Suk Cho ) 한국철학사연구회 2016 한국 철학논집 Vol.0 No.49

        『장자』 『제물론』 해석 과정에서 왕부지와 박세당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명(明)’ 해석을 진행하고 있다. 왕부지는 『제물론』에 세 번 등장하는‘명’ 가운데 앞의 첫째와 둘째 ‘명’을 ‘일곡지명’으로 규정하여 시비대립의 주체들의 편견으로 지적하여였다. 그리고 세 번째 ‘명’을 ‘편조지명’·‘진지지명’으로 규정하고 그 작용적 특징을 ‘활의지요’로 설정하였다. 반면 박세당은 세 차례 등장하는 ‘명’을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그 특징을 ‘천리지명’·‘천리지공’으로 규정하는 한편 왕부지가 강조했던 ‘활의지요’는 ‘명에 의한 교화 대상’으로 그 의미를 제한하였다. 또한 『제물론』 본문 ‘이시기소비이비기소시(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 부분에서 보이는 왕부지의 해석은 『장자』 『제물론』 원문의 의미 변형을 동반하고 있다. 비록 단편적 사례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부분들을 통해서 『제물론』 해석의 다양한 측면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왕부지와 박세당의 ‘명’ 해석은 그들의 현실 대응론으로 연결되어 양자 간 사상적 차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금석 역할을 한다. 곧 ‘『제물론』 명 해석이 왕부지와 박세당의 현실 대응론에 응용되고 있다’는 것이 이 글의 중심 가설이다. 왕부지와 박세당은 17세기 동북아시아의 격변기를 삶의 무대로 활동한 사상가로서, ‘이 두 사람의 『제물론』 독특한 명(明) 해석이 각자의 현실 대응론에 응용되고 있다’는 것이 이 글의 중심 가설이다. 명의 유신을 자처하며 평생 반청의식을 고수하면서 ‘명 멸망의 원인’에 대한 역사적회고에 전념했던 왕부지는 국내 정치에 대해서 강경한 원칙적 대응을 자제하고 현실의 유동성과 상황의 가변성에 입각한 대응, 곧 상황에 따라고안되는 임시 원칙의 활용’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현실 대응론은 『장자』 『제물론』 해석 과정에서 ‘편조지명’과 ‘활의지요’로 그 특징이 압축된다. 한편 17세기 조선 정계에서 서인 소론으로 활동했고, 정계 은퇴 이후에도 줄곧 서인 노론과의 정쟁을 이어갔던 박세당의 경우는 ‘활의지요’를 강조했던 왕부지와는 판이한 양상을 보인다. 우선 『장자』 『제물론』 해석 과정에서 박세당은 ‘활의지요’에 제1의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명에 의한교화의 대상’으로 그 의미를 강등하여 해석했다. 또한 박세당은 ‘명’을 ‘천리지명’·‘천리지공’으로 해석하여 ‘공명성에 의거한 원칙적 현실 대응론’을 주장하였으며, 이는 그의 ‘대청외교론’에도 적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있을 것이다. 결국 『제물론』 ‘명’ 해석과 ‘시비 대응론’을 기준으로 왕부지와 박세당의 현실 대응론을 정리하면, 왕부지는 ‘현실의 유동성에 입각한 탄력적 대응’을 강조하였고, 박세당은 ‘공익에 우선적 가치를 두는 원칙적대응’을 중시하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The theme of this disquisition is the analysis of Zhuang Zi Qi Wu Lun``s Ming of Wang Fu Zhi who China in the late Ming Dynasty and Park Sae Dang who Korea in the late Chosun Dynasty. Wang Fu Zhi and Park Sae Dang of the interpretation has each feature. There are three Ming in Zhuang Zi Qi Wu Lun. At first Wang Fu Zhi was only truly recognized third of three Mings. Ironically, he was truly one interpret Ming is Ming, not Ming(滑疑之耀). This means that he is flexible in response to the political events of reality. In order to establish this interpretation, he modified the original sentence(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 of Zhuang Zi Qi Wu Lun. This interpretation is a very special case in the History of Zhuang Zi commentary. In contrast, Park Sae Dang was interpreted to mean all of the three Mings in Zhuang Zi Qi Wu Lun. Unlike Wang Fu Zhi, Park Sae Dang interpreted Ming based on objective truth and that Ming is possible to determine the affair. Park Sae Dang claimed that as a rule do not respond flexibly respond to the political events of reality. Based claims Park Sae Dang can do this is because he interpreted MIng by the public principle. And Wang Fu Zhi highlighted Ming, not Ming(滑疑之耀) was interpreted by her as the object of edification. He eventually Ming in Zhuang Zi Qi Wu Lun was interpreted as Principles of the political incident response(天理之公). Wang Fu Zhi(王夫之) and Park Sae Dang lived a different life in 17 Century Far East. Wang Fu Zhi devoted his life to academic research without political experience. However, Park Sae Dang was involved in the academic and political sides. Different lives of Wang Fu Zhi(王夫之) and Park Sae Dang is evident in the interpretation of Ming in Zhuang Zi Qi Wu Lun.

      • KCI등재

        이능화의 전통사상 연구와 그 의미

        조한석 ( Cho Han Suk ) 한국철학사연구회 2017 한국 철학논집 Vol.0 No.52

        이능화는 일제강점기 한국학 연구의 선구자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의 한국학 연구 분야는 유·불·도는 물론 기독교 등 종교 분야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민속학분야에까지 걸쳐있으며, 그 영향력은 현재도 유효하다. 이 논문에서 이능화의 종교 연구 가운데 전통사상으로서 유교와 불교에 대한 그간의 연구를 정리하고 그 의미에 대하여 재평가했고, 그가 주장했던 `조선민족 고유의 종교`인 `단군신교`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마련해보았다. 다른 구한말의 개화 지식인의 경우처럼 이능화도 근대화 실패에 대한 역사적 반성에 고뇌하였고, 그 원인을 조선후기 정권과 주자학에 돌리면서 `주자만능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조선후기 주자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역사적 반성을 시도하였다. 또한 이능화는 일제 강점기 거사불교 운동에 영향력을 미쳤던 불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불교계에서도 정치계의 경우처럼 친일행보를 보이며 현실적 이득과 세력을 넘보는 승려들이 더러 있었지만, 이능화는 이런 문제에 중립적 태도를 보이면서 학문적 성과를 세간에 선보이게 된다. 특히 그의 『조선불교통사』는 그의 대표적 업적으로 꼽힌다. 이능화는 조선불교를 거론하는 과정에서 조선불교의 일본불교에 대한 독립성과 장점을 지적하면서 `민족주의적 성향`의 단초를 표출하였다. 한편 그의 조선민족의 정체성과 독립성에 대한 민족주의적 성향은 단군신교 연구를 통해서 여과 없이 표출된다. 이능화에게 있어서 건국신화와 문화적 정체성은 단순히 역사적 실증과 학문적 고증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국가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성립에 대한 이념적 문제였다. 이능화의 단군신교는, 건국신화와 조선민족의 문화적 독립성과 정체성을 확보하여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대응하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구축의 측면에서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Lee Neung Hwa is a scholar of the late Joseon Dynasty, renowned for his studies of Korean studies. In this thesis, the study of Confucianism and Buddhism removed the research and teachings of Confucianism as a traditional study of Confucianism. Lee Neung Hwa criticized the social functioning of Confucian texts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His criticisms reflect the historical consciousness of the late Joseon Dynasty. Lee Neung Hwa is also known as the Buddhist religion. The History of Chosun Buddhism is his masterpiece. He pointed out the differences between the Buddhist scriptures of the Joseon Dynasty and the Japanese Buddhist scriptures. Moreover, the Joseon Dynasty felt more integrated into the Japanese Buddhist kingdom than in Japan. And ineunghwa also studied the mythology of Korea. He established a universal cultural phenomenon as a universal cultural phenomenon, which belongs to any ethnic Koreans. He insisted that the Sin Gyo of Dan Gun is the identity of Korean culture. His Founding Myth was not a matter of historical fact. His Founding Myth was a tool of ideological struggle to fight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 『莊子』 「齊物論」 理解에 있어서 是非의 對立과 葛藤의 解消에 대한 試論

        조한석(Cho Han Suk) 한국도교문화학회 2002 道敎文化硏究 Vol.16 No.-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discuss the opinions about the confrontation between shi-fei and its settlement shown in the interpretations on the "Qiwulun" chapter of the Zhuang Zi by Guo Xiang, who has been esteemed a master of Xuan-xue in the rapidly-changing social conditions in Wei and Jin Dynasty on the one hand and active in the front line of the political authority on the other and Park Sae Dang, who lived in the bickering political community of the 17th-century Chosun Dynasty. Guo Xiang's pointing out Zhiren's personality, that is, Wushi-wufei and Liang-shun can be deemed the indication of a kind of mental composure questing after freedom from all trouble and anguish triggered by shi-fei in pursuit of freedom from the scene of the dispute and opposition between shi-fei in the mundane world and freedom from the choice between shi-fei. Park Sae Dang, by considering human selfishness and prejudices as the cause of shi-fei conflict and concluding that the universal foundation on which the conflict can be settled is Chen-li, which he stipulates is Gong-shim(impartiality) inherent in all human beings, develops the logic of th conflict settlement. The philosophy of Guo Xiang, who does not recognize substance as the basis on which the confrontation can be settled and claims both affirmation and denial of shi-fei, shows freedom from something, as it were, an individual's internal freedom which has a more or less passive meaning. In contrast, the interpretation of Park Sae Dang, an important figure of Seo-in So-ron in the whirlpool of party disputes of the 17th-century Chosun Dynasty, who acknowledges substance and argues for the settlement of shi-fei conflict through the conquest of selfishness by Gong-shim based on the contrast of Gong-shim and Sa-shim(selfishness), shows his awareness of the need for more active participation in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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