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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國佛敎 太古宗 成立史 硏究 : 大輪․黙潭․寶城․德菴을 중심으로

        조남형(현진) 동국대학교 대학원 2020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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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불교 태고종은 1970년에 정식 승인된 종단이다. 태고 보우(太古 普愚, 1301~1382)를 종조로 하며 조선불교 8, 9세 종정이자 한국불교 태고종 1, 2세 종정인 대륜 세영(大輪 世榮, 1884~1979)과 조선불교 5, 6, 7세 종정이자 한국불교 태고종 3, 4세 종정인 묵담 성우(黙潭 聲祐, 1896~1981)가 조사들의 유지를 호지하여 창종을 주도했으며 조선불교 12, 15세 종정이자 한국불교 태고종 5, 8세 종정인 보성 두석(寶城 斗石, 1906~1998)에 이은 조선불교 13, 16세 종정이자 한국불교 태고종 6, 9세 종정인 덕암 전득(德菴 典得, 1913~2004)의 중흥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본 논문은 한국불교 태고종에 대한 관점을 환기하여 객관적인 평가를 조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종단 창종 주역들의 전등의식에서 나타난 보살승단의 방향성을 확고히 다지기 위한 시도이다. 보살승단의 방향성은 한국불교 태고종이 새롭게 주창한 것이 아닌 대승불교의 본래면목이며 현대 사회의 문제인 이분법적 갈등과 반목을 원융과 화합의 온전한 시민사회로 회복해 나가는데 있어 핵심가치로 작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보살승단 외형은 축소되어 오다 1876년 문호개방 이후 개선되기 시작한다. 당시 불평등한 구시대적 신분사회를 탈피하여 만민평등의 시민사회로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는데 이러한 주장을 펼친 선각적 지성인은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등이 있었으며 후일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시민사회의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부응한 것은 서구의 종교였다. 개항에 발맞춰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내재된 서학 등 서구문물이 조선에 적극적으로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서구의 프로테스탄트혁명 이전부터 만인평등의 가치를 호지하고 있던 불교는 퇴락하고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석존의 가르침을 체현하기 위해 격변의 시민사회 혁명에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중심에는 불교 내 선각적 지성인들의 역할이 있었다. 국권 상실과 정치의 종교개입 외압 속에서도 조선불교 내에서 그 회복과 발전에 있어 자주적인 방향성을 설정하려는 움직임이 종단으로까지 확대 된 것이 임제종이다. 임제종에 적극 참여한 것은 동학농민혁명과 마찬가지로 주로 남부지방이었으며 그 핵심인사는 영호 정호(映湖 鼎鎬, 石顚 朴漢永, 1870~1948), 만암 종헌(曼庵 宗憲, 1876~1957), 만해 용운(卍海 龍雲, 1879~1944)이다. 하지만 정권의 외압으로 임제종이 해산 당하자 이들은 중앙교단 내 교육기관인 중앙학림에 참여하거나 독립된 교육시설을 설립하여 후학양성에 전력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불교 내 신지식인이 양성된다. 이러한 시기에 도성해금이후 도회지 포교에 실질적으로 투신한 실천적 지성이 대륜 세영이다. 금강산 유점사로 출가한 그는 임제종 인사들이 중앙교단으로 합류할 즈음에 각황사의 감원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유점사의 도심포교당인 불이성 법륜사를 창건하고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과 청소년 포교에 힘썼으며 화엄산림을 열어 퇴경 권상로(退耕 權相老, 1879~1965), 포광 김영수(包光 金映遂, 1884~1967), 뇌허 김동화(雷虛 金東華, 1902~1980) 세 강백을 위촉하여 신편불교성전을 간행하는 한편 당대 유수의 고승을 포교사로 영입하여 각종 법회를 봉행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사회에서 소외받던 계층들과 음지에서 불교를 탐구하던 불제자들이 양지화 되었다. 불교 내 신지식인들의 양성은 가시적인 성과를 나타내는데 이는 정치권의 종교개입에도 불구하고 중앙교단명과 종조 추대, 종헌 제정과 총본산명 설정 등에서 자주성을 표출한 것이다. 조선불교 조계종이 출범하고 총본산은 태고사로, 종조에는 태고 보우가 추대되었다. 태고 보우의 행적이 석옥 청공(石屋 淸珙, 1272~1352)으로부터 인가받은 임제선의 정통 계승자이기에 이와 같은 결과는 임제종 운동의 결과라 볼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자주적인 헌법을 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교분리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기독교인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이 불교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이다. ‘왜색승은 물러가라’라는 이분법적 논리를 발생시킴으로써 화합을 도모하던 종정인 만암 종헌은 종정에서 해임되기에 이른다. 그는 종조로 호지하던 태고 보우가 구산(九山)의 제종(諸宗)을 원만하게 통합하려던 시도와 유사하게 당시 불교계를 원융과 화합으로 이끌어 나가고자 백양사에서 고불총림을 열었다. 이러한 고불총림을 적극적으로 호지하고자 한 것은 묵담 성우이다. 백양사에 출가한 그는 대은 낭오(大隱 朗旿, 1780~1841)와 금담 보명(金潭 普明, 1765~1848)이 서상수계를 통해 전수 되어 금해 관영(錦海 瓘英, 1856~1937)에 까지 이어진 율맥을 전수한 율사이다. 수좌인 동시에 백양사 산하에 광성의숙(廣成義塾)에서 신문물까지 수학한 신지식인이었다. 또한 만암 종헌으로부터 대선법계를 수지하기까지 한다. 정치의 종교개입은 군사정변 이후에도 이어졌으며 국망의 시기부터 이어져 온 불교 내 신지식인들의 성과가 일괄 ‘왜색불교’로 매도되어 색출되는 지경에 이른다. 이러한 암울한 상황을 대변하는 것은 보성 두석이다. 건봉사에서 출가한 그는 도심포교사와 교육자의 길을 걷는다. 1940년 10월 동경 일본대학 종교과 전문부를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국화 여자전문학관 교수, 동국대학교 교수 겸 교무처장을 맡았으며 전시(戰時)에는 진해 육군사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이후 숙명여자대학교의 교수 겸 교무처장으로 선임된 후 동 대학 문리과 대학장에 취임하였으며 1961년 10월에 동국대학교 총장으로 선임 된다. 1962년 동경 일본대학으로부터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기도 하지만 1962년 5월 31일 불교재산관리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대처승’으로 규정되어 축출된다. 불교 내 신지식인들이 축출되면서 조선시대에 유학자들이 주도하던 사회 지식인 계층은 개항 이후 다양한 종교가 점유했지만 이념대립으로 인한 좌익 축출과 ‘왜색불교’ 논란으로 인한 신지식인 축출로 인해 불교계가 차지하는 위치는 크게 실추 된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 타개하기 위해 대륜 세영과 묵담 성우가 총무원으로 부임하여 개선의 노력을 하지만 대법원의 승소판결조차 군사정변으로 인해 집행할 수 없는 초유의 상황을 맞게 된다. 국망의 시대 이후 지속적으로 정치의 종교개입을 받는 상황 속에서 고불총림에서 나타난 원융과 화합에 대한 유지를 잇고 보살승단의 방향성을 확고히 천명하기 위해 대륜 세영은 1970년 한국불교 태고종을 창종하게 된다. 이러한 창종조의 사상을 호지하여 중흥한 것은 덕암 전득이다. 그는 대륜 세영과 마찬가지로 유점사에서 출가했기에 그 인연이 깊다고 볼 수 있다. 덕암 전득의 부종수교 첫째는 교육사업과 포교사업이다. 현대적 보살상의 인재양성을 위해 동방불교대학과 동방불교 대학원 대학교를 건립하였다. 만해 용운의 조선불교 자주성을 수호 정신이 깃들어 있는 『불교』지를 지속 간행하기 위하여 월간불교사를 중흥하였다. 둘째는 계율확립과 문화사업이다. 1991년 태고총림으로 지정된 선암사에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수계산림 의식을 종단 차원의 대법회로 확장하였다. 또한 옥천범음회를 중흥하였는데 불교의식은 한때 ‘허례허식’이나 ‘매불행위’로 주목받아 퇴출될 위기에 있었다. 하지만 발전된 형태의 불교의식인 ‘영상재’를 장엄하게 엄수하고 있으며 이는 2009년 유네스코의 세계무형문화재에 등재된 바 있다. 영산재는 현재 봉원사, 청련사 등에서 이를 보전, 전수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불교 태고종의 종명은 태고 보우가 이은 석옥 청공의 임제선에 대한 적통성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근 100여년의 불교사의 개혁과 근대 시민사회 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불제자들의 자리이타의 보살상이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근대 불교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방치와 매도되어 있는 선지식들의 발굴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가치중립적이고 온전한 서사적 관점이 불교적 미래지향으로 이어질 때 현대사회의 이분법적 갈등과 반목을 주도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현대적 보살상이 제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불교 태고종 성립사의 연구가 이에 관한 초석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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