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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후보

        문화와 해석, 그리고 교육

        정은해 한국하이데거학회 2004 현대유럽철학연구 Vol.0 No.10

        이 논문에서는 우선 ‘문화’의 의미가 어원적ㆍ역사적으로 탐구된다. 이어서 문화와 교육의 개념적 연관과 교육에서의 해석의 중요성이 설명된다. 이를 통해 필자는 다음을 보이고자 한다.원래 ‘문화’가 의미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유의미화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미해진 것이다. 유의미화의 행동과 관련해서 볼 때, 인간 본성을 유의미하게 계발하는 교육은 문화에 유비적 인 개념이다. 유의미해진 것, 곧 문화재와 관련해서 볼 때, 교육은 문화의 해석과 동일하다. 이 경우에 있어서 교육자는 학생을 위한 문화 해석자이다. 교육의 사안이 문화재의 해석이라고 할지라도, 교육은 그러나 교사에 의한 문화해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육은 학생에 의한 문화이해에서 비로소 끝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이해는 실존적으로 교사에 의해 해석된 문화의미를 우리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것인데, 이런 적용은 오직 학생 자신에 의해서만 수행되는 것이다. 그러한 적용과 더불어 문화의 의미가 실존적으로 완성되고 구체화된다. 이점을 교육이 문화재의 해석으로서 주의해야 할 점이다. In dieser Arbeit wird zuerst die Bedeutung der 'Kultur' etimologisch und historisch gesucht. Demnaehst werden der begriffliche Bezug der Kultur auf die Erzieung und die Wichtigkeit der Auslegung bei der Erziehung aufgeklaert. Damit versuche ich folgendes zu zeigen: Eigentlich bedeutet 'Kultur' einerseits das etwas-bedeutsam-machen, andererseits etwas bedeutsames. Hinsichtlich des Tuns, das etwas bedeutsam macht, ist die Erziehung, welche die Menschennatur bedeutsam kultiviert, ein der Kultur analogischer Begriff, welche die Kultivierung der aeusserlichen Natur bedeutet. In Bezug auf das Kulturgut, d.h. etwas bedeutsames, ist die Erziehung identisch mit dessen Auslegung. In diesem Fall wird der Erzieher gerade ein Kulturinterpret fuer die Schueler. Wenngleich die Sache der Erziehung eine Auslegung des Kulturgutes ist, endet aber die Erziehung nicht sofort mit der Kulturauslegung durch die Lehrer. Denn die Erzieung endet erst mit dem Kulturverstehen durch die Schueler. Dieses Kulturverstehen heisst existenzial diejenige Anwendung der durch die Lehrer ausgelegten Kulturbedeutung auf unser eigenes Leben, die allein durch die Schueler selbst vollzogen wird. Mit der solchen Anwendung wird die Bedeutung der Kultur existenzial vollendet und verkoerpert, was die Erziehung als Auslegung des Kulturgutes in acht nehmen muss.

      • KCI등재후보

        문학과 독서에 대한 예술이론적 해석-가다머를 중심으로-

        정은해 한국하이데거학회 2005 현대유럽철학연구 Vol.0 No.11

        In dieser Arbeit wird von dem Gadamers Blickpunkt aus eine kunsttheoretische Auslegung von Literatur und Lesen versucht. Für ihn sind alle Kunste nur in der Weise des Spiels da. Demnach sind sowohl die Literaur als Werk wie auch das Lesen als Genuβ ein Spiel. In der Auslegung des Lesens und des Schreibens finden sich viele Versuche des kognitiven-psychologischen Zugangs, jedoch wenige Versuche des kusttheoretischen Zugangs. Also hat diese Arbeit ihren Sinn darin, daβ sie eine neue Verstehensweise der Literatur, des Lesens und des Schreibens darstellt. Von dem kusttheoretischen Blickpunkt aus gesehen, ist das Urbild der Literatur die wirkliche Welt. Dabei ist die Literatur keine wirkliche Welt und nicht deren Abbild, sondern deren Bild. Das Lesen ist die Bewegung des Hin und Her zwischen Leser und Literatur und transzendiert in der solchen Weise den Subjekt-Objekt Dualismus. Das Lesen ist ein Spiel der Selbstdarstellung entweder für sich selbst oder für die andere. Anders als jenes ist dieses eine Lesensart, die das Schreiben dessen, was einer beim Lesen genuβen hat, vorbereitet. Das Lesen vollendet sich zu einem Sinngeformten, das die Wahrheit der Welt erschlieβt. Das Lesen reproduziert irgendwelche kommune Wahrheit von der Menschheit, die in der Literatur liegt, und daher gibt es kein beliebig freies Lesen. Beim Lesen kommt der Leser zu seinem eigentlichen Selbst zurück und holt sich selbst wieder. Dabei entsteht die absolute Gegenwart als Zeitlichkeit der Präsenz der Literatur, und dementsprechend vollzieht sich auch der absolute Augenblick als Zeitlichkeit des Seins des Lesers. 이 글은 문학과 독서에 대해 가다머의 시각으로 예술이론적 해석을 시도한다. 그에 의하면 모든 예술은 놀이의 방식으로 존재하고, 따라서 작품과 감상으로서의 문학과 독서도 예술로서 놀이이다. 독서와 작문에 대한 인지심리학적 접근의 이론들은 많지만, 예술이론적 접근의 시도가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 글은 문학과 독서, 작문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식을 제시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예술이론적 시각에서 보자면 문학에서의 원형은 현실세계이다. 하지만 문학은 현실세계에 대한 그림 같은 것이지 현실세계 자체도 아니고 모사상도 아니다. 독서는 독자와 문학작품 사이의 이리 저리의 운동으로서 주객이원론을 넘어선다. 독서는 혼자서 하는 자기표현의 놀이일 수도 있고, 누군가를 위한 자기표현의 놀이일 수도 있다. 누군가를 위한 자기표현의 독서는 독후감상문을 염두에 두는 독서가 된다. 독서는 완성되면서 의미형성체로 되고, 이것이 세계의 진리를 출현하게 한다. 독서는 문학 속에 놓인 우리모두의 공동의 진리를 재생하는 것인 까닭에, 독자 마음대로의 완전히 자유로운 독서는 있을 수 없다. 독서 속에서 독자는 작품이 표현하는 진리의 세계 속으로 되돌려지면서 본래적 자기를 되찾게 되고, 바로 이 경우에 문학의 현존의 시간성인 절대적 현재가 성립하고, 이에 상응하는 독자의 존재의 시간성인 절대적 순간이 성립한다.

      • KCI등재후보

        언어의 근원 : 헤르더와 하이데거의 차이

        정은해 한국하이데거학회 2004 현대유럽철학연구 Vol.0 No.9

        In dieser Dissertation werde ich dadurch die Eigentuemlichkeit von Heideggers Sprache-denken herausheben, dasss ich hinsichtlich des Ursprungs der Sprache den Unterschied zwischen Herders Philosophie, die zur rationalistischen Tradition gehoert, und Heideggers Philosophie, die einen neuen Anfang der Philosophie eroeffnen will, versuche. Nach Herders Klaerung hat die menschliche Sprache ihren Ursprung in der menschlichen Vernunft (der Faehigkeit des Bedenkens und der Reflexion, der Kraft der Seele) und braucht zugleich das Hoerorgan als ihren Lehrmeister. Fuer ihm gruendet die menschliche Sprache als Taetigkeit der Selbstentwicklung der Seele in dem Menschen selbst, der dabei als animal rationale einerseits die Vernunft, andererseits das Sinnesorgan behalt. Dagegen behauptet Heidegger, dass der Ursprung der menschlichen Sprache ausserhalb des Menschen liegt. Somit ist die Sprache bei ihm mehr als Taetigkeit der Selbstentwicklung der Seele. Er beginnt mit der menschlichen Sprache als Aussprechen, erklaert ihres Wesen als Sage(Zeige) und zeigt uns, dass diese dem Unter-schied zwischen Welt und Ding gehoert, der selber als Gelaeut der Stille spricht und in der solchen Weise die Welt weltet und das Ding dingt. Nur dank dem Gelaeut der Stille kann der Mensch hoerend sein Welt- und Sein-verstaendnis aussprechen, und daher ist die menschliche Sprache nur eine sekundaere. Fuer Heidegger ist der Ursprung der menschlichen Sprache das Gelaeut der Stille, das selber das Geheiss des Unter-schieds und zugleich die Be-wegung der Gegend ist. Waerend die Sprache bei Herder als Eigentum des Menschen zu diesem gehoert, ist der Ursprung der menschlichen Sprache, d.h. der urspruengliche Sprache, fuer Heidegger nicht ein Eigentum des Menschen; vielmehr ist der Mensch das Eigentum der urspruenglichen Sprache. 이 글은 이성주의적 전통에 속하는 헤르더와 철학의 새로운 시원을 열고자 하는 하이데거가 언어의 근원에 대해 서로 어떻게 달리 생각하고 있는 지를 추적함에 의해, 하이데거의 새로운 언어사유의 독특한 점을 부각하게 될 것이다. 헤르더에 따르면, 인간의 언어는 인간의 이성(영혼의 힘, 숙고와 반성의 능력)을 근원으로 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청각을 그 스승으로 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언어는 영혼의 자기전개활동으로 인간 자신에 그 근원을 두며, 이 때의 인간은 이성과 감각기관들을 갖춘 인간, 곧 이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이다. 반면에 하이데거는 언어가 인간 밖에 그 근원을 둔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언어는 영혼의 자기전개활동 이상의 것이다. 그는 발언으로서의 인간의 언어에서 출발하면서, 언어의 본질을 말해주기(보여주기)로 밝힌 후, 이 말해주기 자체는 스스로 정적의 울림으로 발언하면서 세계를 세계화하고 사물을 사물화는 사이-나눔에 속한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정적의 울림 덕분에 인간은 들으면서 자신의 세계이해와 존재이해를 발언할 수가 있는 것이고, 따라서 인간의 언어는 다만 이차적인 언어다. 하이데거에게 인간의 언어의 근원은 정적의 울림이고, 이것은 그 자체로 사이-나눔의 분부이자 방역의 길-내주기다.헤르더에게 있어서 언어가 인간의 소유물로 인간에게 속한 것임에 반해,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인간의 언어의 근원, 곧 근원적 언어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이 근원적인 언어의 소유물이다.

      • KCI등재
      • KCI등재

        플라톤과 하이데거에서의 진ㆍ선ㆍ미의 관계

        정은해 한국현상학회 2000 철학과 현상학 연구 Vol.16 No.-

        이 논문에서는 진리와 미의 관계가 탐구된다. 우리가 플라톤에서의 선과 미의 개념을 상기한다면, 이미 선과 미가 동일한 것인가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개념들을 더욱 전개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는 하이데거의 존재의 진리에 상응하는데, 하이데거에게서는 존재의 진리가 근거로 이해된다. 하이데거는 또한 미를 존재의 진리의 현상 방식으로 해설한다. 이로써 진리와 미는 하이데거에게서 비록 동등한 것은 아니나, 동-근원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 동일한 것이다. 예술의 사유라는 틀속에서 플라톤과 하이데거 사이에는 일정한 역사적 연속성이 놓여 있다.

      • KCI등재

        하이데거와 선불교의 비교연구 현황과 향후과제

        정은해 한국하이데거학회 2010 현대유럽철학연구 Vol.0 No.24

        이 논문의 목적은 하이데거 철학과 선불교에 관한 여러 비교철학적 연구들을 검토하면서, 그 같은 연구와 관련한 바람직한 연구방향을 제시해보려는 것이다. 필자의 검토에 의하면, 선불교의 주요개념을 현상학적 시간성에 의해 이해하려는 연구는 드물게만 이뤄졌다. 이런 점에서 진여나 윤회와 같은 불교의 주요 개념을 시간성에 의해 해설함에 의해 그것들이 종교적으로만이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이해되도록 하는 것이 긴급한 듯하다. 하이데거 철학과 불교의 비교연구는 대체로, 불교의 특정한 한 개념과 이와비슷한 하이데거의 한 개념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런 방식은 그들의 유사성과 차이에 대한 단편적 이해만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불교의여러 주요개념들과 하이데거의 여러 주요개념들을 체계적으로 비교하여, 하이데거 철학과 불교의 관계에 대한 체계적 이해가 가능해지도록 하는 것이필요하다. 몇몇의 비교연구들은 비교되는 사상들을 단순히 동일시하거나 그들의 우월성관계를 확정하려는 경향을 보였고, 그 결과 그들은 비교되는 사상들 각자의고유성을 드러내는 일에는 실패한 듯하다. 그런데 비교연구가 비교되는 사상들 각자의 고유성을 드러내야 마땅하다면, 그것은 그것들의 유사점들은 물론차이점들도 드러내고, 그것들의 우월성 논쟁에 대해서는 중립적 태도를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 This essay aims to investigate some comparative studies on Heidegger’s philosophy and Zen Buddhism and to suggest a desirable approach with regard to such an comparative study. According to my investigation, the study to understand Zen Buddhism’s major concepts by the phenomenological temporality has been rarely performed. Hence it seems to be urgent to expose Buddhism’s major concepts like Tathata and Samsara by the temporality so that they are to be understood religiously and philosophically as well. The comparative study on Heidegger’s philosophy and Zen Buddhism has been performed largely in the way to compare one particular concept of Buddhism with one similar concept of Heidegger. This way can enable only a fragmentary understanding about their similarity and discrepancy. Hence it is needed to systematically compare many major concepts of Buddhism with many major concepts of Heidegger so that a systematic understanding about their relationship becomes possible. Some comparative studies tend to simply identify the compared partners or to confirm their relation of superiority, so that they seem to fail to expose the respective peculiarities of the compared partners. If the comparative study is to be a trial to expose respective peculiarities of the compared partners, it is needed that the comparative study exposes not only their similarities but also discrepancies, and take a neutral attitude to superiority-debates between them.

      • KCI등재

        하이네의 도겐 시간론 해설에 대한 현상학적 검토

        정은해 한국하이데거학회 2012 현대유럽철학연구 Vol.0 No.30

        스티븐 하이네는 도겐의 시간론과 하이데거의 시간론을 비교하면서, 깨달음과 관련해서 전자가 후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도겐이 해명하는 시간은 좌선에 의해 실현되는 시간으로서 후설이 해설하는 선반성적 의식의 시간에 상응하고, 하이데거가 해명하는 시간은 회상에 의해 실현되는 시간으로서 후설이 해설하는 반성적 의식에 상응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하이네는 적절한 비교를 가능하게 하는 시간론들을 선정하지는 못한 셈이다. 하이네는 도겐이 말하는 좌선의 시간의 두 특징, 곧 이금(而今)과 경력(經歷)을 후설의 선반성적 의식의 시간이 지닌 두 특징, 곧 현재장과 파지-지금-예지과 비교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좌선의 시간을 적절히 설명하지 못하는듯하다. 오히려 그는 이금을 후설의 선반성적 의식이 실현하는 현재장에 가깝게 해설하고, 경력을 이와 달리 반성적 의식이 실현하거나 재구성하는 시간에 가깝게 해설하면서도, 그 둘이 동등한 것이라고 말함에 의해 자가당착의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경력에 대한 도겐의 해설, 곧 경력이다-방향적(불가역적이면서도 가역적)이라는 해설을 전유하는데 실패하였기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도겐의 경력은 두 측면에서, 곧 한편으로 파지-지금-예지의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파지-지금-예지의 연기론적 의의(파지-지금-예지가 초래하는 과거, 현재, 미래 사이의 상호영향성)의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전자는 여전히 선반성적 의식의 시간이지만, 후자는 바로 이 선반성적 의식의 시간에 대한 연기론적인 해석 및 규정이 된다. 이리 보면, 하이네는 파지-지금-예지에 대한 연기론적 해석 및 규정(경력2)을 파지-지금-예지(경력1) 자체로 간주한 셈이다. 하이네의 주장에 따르면, 도겐의 좌선의 사유는 그 안에서 현재가 과거 및 미래와 통합되어 있는 시간을 충분히 실현하는 반면에, 하이데거의 회상적사유는 그 안에서 현재가 미래 및 과거로부터 분리된 그런 시간만을 실현할수 있기 때문에, 전자가 후자보다 우월하다. 그런데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것은, 시간에 대한 도겐 자신의 해명들, 곧 이금, 경력, 경력의 다방향성, 3차원적 수행, 연기를 가능하게 하는 진력 등에 대한 해명들은 좌선의 사유자체나 좌선의 시간 자체가 아니라, 단지 이것들에 대한 회상적이거나 반성적인 해명들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하이네가 좌선의 사유를 높이 평가하는 것에 비례하여 반성적 사유나 회상적 사유를 낮게 평가하는 일은 좌선의 시간이나 좌선의 의의에 대한 해명들조차도 낮게 평가하는 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하이데거는 좌선의 시간을 해명하지 않고, 다만 회상의 시간을해명한다. 그 두 시간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고 당연히 차이를 지닌다. 이러한 당연한 차이를 우열평가의 증거로 간주하는 일은 공정한 비교철학을 위한균형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사실상 도겐에 의한 좌선의 시간의 해명이나 하이네에 의한 도겐의 시간론의 해설은 모두 하이데거가 해명한 시간화 과정을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하이네가 하이데거의 회상의 시간이 예상,기억, 현재화로 이뤄지는 시간화 과정에 의해 실현된다는 점을 이유로 하이데거의 시간을 비판하는 것은 자가당착에 해당한다. Steven Heine compares Dogen’s theory of time with that of Heidegger and asserts that the former is superior to the latter with respect to the concept of awakening. However, time as elucidated by Dogen is the time realized by Zen,corresponding to Husserl’s concept of the time of pre-reflective consciousness. In contrast, time as elucidated by Heidegger is the time realized by recollection,corresponding to Husserl’s time of reflective consciousness. In this respect, Heine does not select two theories of time which enable a proper comparison. Heine does not properly explain the time of Zen because he does not compare its two characteristics (‘now’ and ‘passage’) to those of time as realized by pre-reflective consciousness, that is, ‘present field’ and ‘retention-now-protention’. In contrast, Heine provides a self-contradictory assertion when he says on one hand that ‘now’ is identical to ‘passage’ and explains on the other hand that ‘now’ is similar to ‘present field’ as realized by pre-reflective consciousness, explaining also that ‘passage’ is similar to reflective time as realized or restructured by reflective consciousness. He may do this because he fails to appropriate Dogen’s elucidation of ‘passage’ as multi-directional, that is, irreversible and reversible time. Dogen’s ‘passage’ can be understood in two ways, first with respect to ‘retention-now-protention’ and second with regard to its ‘causal meaning’ (mutual influences among the past, present, and future by ‘retention-now-protention’). The former corresponds to the time of pre-reflective consciousness, while the latter is precisely an interpretive determination of the former from the viewpoint of the theory of causal genesis. Nevertheless, Heine seems to regard the causal-interpretive determination of passage as passage itself. According to Heine’s assertion, Dogen’s Zen thinking is superior to Heidegger’s recollective thinking, as the former fully realizes the time in which the present is integrated with the past and future, while the latter can realize only the time in which the present is separated from the past and future. However, I emphasize the fact that Dogen’s elucidations of the concepts of the time of Zen, that is, those of ‘now’, ‘passage’, ‘multi-direction of passage’, ‘three dimensional practice’, and ‘effort that enables causal genesis’ are neither Zen thinking itself nor the time of Zen itself, but are instead recollective or reflective elucidations of Zen thinking. Accordingly, Heine’s devaluation of reflective or recollective thinking in direct proportion to a revaluation of Zen thinking is none other than the devaluation of Dogen’s elucidations of the time of Zen and its causal meaning. Lastly, Heidegger does not elucidate the time of Zen but instead refers to the time of recollection. The former cannot but be different from the latter and they therefore have differences. If one tries to conceive such differences as evidence of revaluation or devaluation, he starts to lose the balanced sense required for a fair comparative philosophy. Indeed, both Dogen’s elucidation of the time of Zen and Heine’s explanation of Dogen’s theory of time are possible only through a process that consists of expectation, remembrance, and presencing. Therefore, Heine’s criticism of Heidegger’s time of recollection on the basis of its realization by a temporal process is said to be a self-contrad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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