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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온조왕본기 영역 획정 기사의 성립 시기

        임기환(Lim, Ki-hwan)(林起煥)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3 역사문화연구 Vol.47 No.-

        본 연구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서기전 6)조에 보이는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이라는 강역획정 기사가 반영하는 시기에 대해 검토하였다. 이 기사에 대한 기왕의 견해는 온조왕대설, 고이왕대설, 근초고왕대설 등이 있으며, 고이왕대설이 통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론에 입각한 주장은 현재의 연구 성과에 「백제본기」의 사료를 꿰맞춘 결과로 생각한다. 오히려 「백제본기」의 자료가 보여주는 당시 백제인의 지리 인식을 추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浿河라는 지명은 고조선 혹은 낙랑 대방계 주민의 지리 인식으로서 그 위치가 역사상 변화되어 왔으며, 최종적으로는 대동강을 가르키는 지명이었다. 이러한 지명 인식의 관점에서 보면, 온조왕 13년 강역획정 기사의 패하는 대동강으로서 근초고왕대의 인식이 투영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물론 패하가 대동강전 유역으로 상정한 것은 아니고, 대동강 하류 즉 재령강과 대동강이 만나는 지점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춘천으로 비정되는 走壤을 백제가 차지하는 시점 역시 307년(汾西王 7)에 樂浪西縣을 습격하는 기사 이후가 될 것이며, 그렇다면 역시 근초고왕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기로 추정된다. 따라서 앞의 패수 기사와 연관시켜 본다면, 走壤을 영역으로 확정하는 시기 역시 근초고왕대가 가장 타당할 것이다. 이와 같이 浿河와 走壤이 근초고왕대의 영역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熊川도 금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안성천이 웅천으로 불리던 시점이 있으나, 백제의 영역 확장과정에서 금강도 역시 웅천으로 불리웠기 때문에 웅천의 지명이동을 상정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백제본기」 온조왕대의 마한 관련 기사 역시 근초고왕대의 상황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근초고왕대에는 고구려와의 전쟁, 신라와 외교교섭, 가야, 왜와의 교섭, 晉에 사신 파견과 책봉 등 주변국과 다양하고 뚜렷한 국제관계를 맺고 있다. 그 이전 시기와는 전혀 달라지는 이러한 국제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당시 백제인의 영역관이 새롭게 형성되었으며, 그것이 온조왕 13년조의 강역획정 기사로 표현되었다. The purpose of the present study was not only to examine the period when the article on territorial demarcation was established as recorded in Baekje-Bongi(百濟本紀) of Samguksaki((三國史記) in the 13th year of the King Onjo’s reign (B.C. 6), but also to understand the Baekje’s territorial perception as reflected in its geographical names. The location of the Fae-ha River(浿河) was investigated through the article on the war with Koguryo. For the location of the Woong-cheon River(熊川) and the time of its conquest, the article on the diplomatic relations with Mahan(馬韓) was examined. For the location of Ju-yang(走壤) and the time of its securement, the articles on the wars with Malgal(靺鞨) and Lelang(樂浪) were investigated. It was concluded that the Fae-ha River is the Dae-dong River(大同江) of today; the Woong-cheon River is the Keum River(錦江); and Ju-yang is Chun-cheon(春川). In addition, the period during which all these territories were finalized by Baekje was presumed to fall under the King Keunchogo’s sovereignty, so it seems that the article on territorial demarcation in the King Onjo Bongi of Samguksaki reflects the historical conditions during the reign of the King Keunchogo(近肖古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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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춘추, 당 태종의 협약과 ‘일통삼한’

        임기환(Lim Ki Hwan) 역사비평사 2020 역사비평 Vol.- No.131

        In 648, Chunchu Kim and the Emperor Taizong of Tang dynasty discussed military cooperation to attack Goguryeo and Baekje. They made an agreement how to divide the territory of Goguryeo and Baekje. Recently, there is controversy over the interpretation on document of this agreement. I agree with interpretation that Silla would occupy the Goguryeo territory in the south of Pyeongyang and the Baekje territory. Because at that time, Emperor Taizong of Tang dynasty set the expedition of Goguryeo as the most important goal and wanted the support of the military force of Silla, willing to transfer Goguryeo territory in the south of Pyeongyang to Silla. The result was diplomatic achievement by Chunchu Kim. After that, Silla applied the concept of to all territory in the south of Pyeongyang territories belonging to Silla, the Perception of ‘Iltong-Samhan(Unification Three Hans)’ was formed. ‘Samhan(Three Hans)’ included the concept of the Three Kingdoms, but was spatially limited to the territory in the south of Pyeongyang. the Perception of ‘Iltong-Samhan (Unification Three Hans)’ was composed by Chunchu Kim and Yushi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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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동반도 고구려성 현황과 지방지배의 구성

        임기환(Lim, Ki-Hwan) 한국고대사학회 2015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77

        본고에서는 고구려성의 현황이 조밀하게 파악되고 있는 요동반도에 한정하여 고구려성의 현황과 그 분포 양상을 기초로, 고구려 지방관의 구조 즉 褥薩-處閭近支-婁肖의 3단계를 적용하여 각 산성의 위계와 성격을 파악하였다. 요동반도 고구려성의 분포는 천산산맥을 기준으로 그 서북부지역과 동남부 지역으로 나누어 살펴보았으며, 각 지역을 하천 유역권으로 나누어 보았다. 그 결과 전체적으로 각 주요 하천과 그 지류의 유역권에는 각각 지방지배의 治所城으로 추정할 수 있는 성들이 분산 분포하고 있다. 다만 전략적 거점성이 위치하는 주요 하천에는 대형산성이 축성되거나 그 주위에 군사적 목적의 소형 산성이나 보루성이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욕살과 처려근지, 루초라는 지방관의 위계는 각 성이 갖는 전략적 위상이나 성곽 규모와 연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고구려성의 분포 현황에서 可邏達의 성격을 추정해 보면, 욕살과 처려근지 치소성 주변의 행정적 보조성을 관할하거나, 치소성 주변의 군사적 성격의 성곽을 관장한다고 볼 수 있다. 요동반도 일대 욕살급 성으로는 建安城으로 비정되는 蓋州市 高麗城山城과 多伐嶽州 치소성으로 비정되는 수암 娘娘山城이 있다. 처려근지급으로는 卑沙城과 와방점 南馬圈子山城, 벽류하 유역 상류의 赤山山城, 하류에는 巍覇山城과 城山山城 등을 상정하였다. 그 외 각 하천이나 지류 유역에 독립적으로 분포하는 중형산성 혹은 소형산성은 婁肖급 지방성으로 파악하였다. More than sixty Goguryeo Fortresses located at Liaodong Peninsula. These Goguryeo Fortresses has been distributed in the river basin, Daechung River(大淸河), Bokju River(腹州河), Beokleu River(碧流河), Daeyang River(大洋河) is the largest river. Goguryeo Fortresses there is a differential, depending on the length of the wall. Differences in the size of the Fortresses are associated with the class of local governor, Yeoksal(褥薩), Cheoryeogeunji(處閭近支), Rucho(婁肖), Garadal(可邏達). Yeoksal(褥薩) governor was in two Fortresses, Geoan Fortress(建安城), Dabeorak Fortress(多伐嶽), these is a political and military hub. Cheoryeogeunji(處閭近支) governor was responsible for governing the banks of the largest river. There are Bisa Fortress(卑沙城), South-maggeunja Fortressa(南馬圈子山城), Junksan Fortress(赤山山城), Seongsan Fortress(城山山城), Wifae Fortress(巍覇山城). Rucho(婁肖) governor was responsible for governing the banks of minor river and tributaries. Garadal(可邏達) governor was responsible for governing a minor military Fortresses around the major Fortres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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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桂婁部의 성립과 國內 遷都 시론

        임기환(Lim Ki-Hwan)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21 역사문화연구 Vol.77 No.-

        본 연구에서는 먼저 계루부 성립의 전제로서 부여계 집단의 고구려 영역 내로 이주의 현상을 일부 고고자료 및 고구려본기 기사를 통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 부여계 이주민은 고구려 영역 내 오늘날의 환인, 통화, 집안 등 여러 지역에 분산적으로 이주하였으며, 각 지역에서 선주세력과 결합하면서 하나의 정치체를 형성하고 나부를 구성하는 단위집단이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구려 초기 도성이며 초기 왕실을 구성하는 소노부의 졸본지역과 연나부 지역이었다. 그런데 계루부는 那, 奴라는 나부명이 아니라는 점에서 소노부와 연나부에서 보이는 선주세력과 부여계 이주세력의 결합 양상과는 차이가 있다고 파악된다. 그래서 계루부가 형성되는 배경과 과정을 검토하였다. 그런데 졸본지역에서는 아직 계루부가 성립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부여계 이주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계루부의 형성은 국내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졸본 지역에서 부여계 왕실세력과 소노부[비류나부] 사이의 갈등과 충돌이 이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부여계 이주세력들의 결집이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태조대왕의 등장으로 보았다. 필자는 초기 고구려왕계를 주몽을 시조로 하는 왕계와 유리왕을 시조로 하는 왕계로 나누어 보고 주몽-대무신왕-모본왕으로 이어지는 왕계를 졸본지역의 왕계, 유리-재사-태조대왕으로 이어지는 왕계를 국내지역의 왕계로 추정하고, 국내지역의 왕계의 시조인 유리왕을 주몽왕의 아들로 의제적으로 구성하여 졸본왕계와 국내왕계를 결합한 결과가 고구려본기의 왕계로 보았다. 이러한 왕계의 결합은 곧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실교대이며, 졸본에서 국내로의 천도와 맞물려 있다고 파악하였다. 마지막으로 왕실 교대와 국내 천도의 시점을 검토하였는데, 태조대왕에서 신대왕 사이가 유력하지만 그 시점을 특정할 수 있는 논거는 확보하지 못하였다. 다만 신대왕본기에 보이는 졸본이란 명칭, 시조묘 친사, 국내지역 장지명, 신대왕 이후 왕계의 단일화 및 신대왕 이전 의제적인 왕계 등이 신대왕 대에 국내 천도와 왕실 교대가 완성되었음을 보여주거나 또는 신대왕대가 전환기적 성격을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판단하였다. I reviewed an article about the Buyeo(夫餘) immigrant People who be the main force that forms Gyerubu(桂婁部) on Koguryo-Bongi(高句麗本紀) of 「Samguk Sagi(三國史記)」. Buyeo immigrant People migrated to various places, Huanren(桓仁), Zian(集安), Tungha(通化) area within the territory of Goguryeo. Buyeo immigrant People formed Napu(那部) by combining with the indigenous inhabitants. A representative example is the Sonobu(消奴部) including the Jumong group and Younnapu(椽那部) that King Buyeo s cousins migrated. I reviewed an article about the The articles on the royal tombs and the royal palaces in Jolbon(卒本) capital period. As a result Gyerubu (桂婁部) would not have been formed in Jolbon(卒本) Region. In the Jolbon region, a conflict between the Buyeo immigrant Royal family Sonobu continued. As a result the Buyeo immigrants politically united. A representative example is the emergence of King Taejo-wang(太祖王). I argued in this study that Gyerubu(桂婁部) was formed by Buyeo immigrant people gathering Guknae(國內) regions. I divided Goguryeo s early royal family into the royal lineage of King Jumong(朱蒙王) as a progenitor and the royal lineage of King Yuri(琉璃王) as a progenitor. the royal lineage of King Jumong(朱蒙王) was Royal family of Sonobu(消奴部), the royal lineage of King Yuri(琉璃王) was Royal family of Gyerubu(桂婁部). The royal lineage recorded in the Goguryeo Bongi was the result of combining the two royal lines. In this process, King Yuri was incorporated as the son of King Jumong. The Change of Royal family from Sonobu(消奴部) to Gyerubu(桂婁部) and Capital Transfer from Jolbon(卒本) Region to Guknae(國內) region mean the same history. With current data, Capital Transfer period can be estimated to be the period between King Taejo-wang(太祖王) and King Sindae-wang(新大王). From the article that King Sindae-wang(新大王) served as a ritual at the Firt King Shrine, and the article that King Sindae-wang(新大王) was the first king maded a royal tomb in Guknae(國內) region on Koguryo-Bongi, I think that King Sindae-wang king was on the changeover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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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초기 消奴部, 桂婁部의 형성과 卒本

        임기환(Lim Ki Hwan) 한국사학회 2019 史學硏究 Vol.0 No.136

        본 연구는 고구려 초기 왕실 교대 시기 및 졸본에서 국내로의 천도 시기를 해명하기 위한 연구의 하나이다. 본 연구에서는 왕실교대 시기를 탐색하기 위하여 초기 도성인 졸본지역에서 소노부(비류나부)와 계루부의 형성 및 존재 방식에 초점을 맞추었다. 『삼국지』고구려전의 왕실교대 관련 기사를 통해 왕실 교대 시기 및 소노부의 위치와 졸본 지역과의 관계를 파악하였다. 消奴加와 拔奇의 “還住沸流水” 및 伊夷模의 “更作新國” 기사를 분석하여 消奴加의 정치적 기반이 비류수 즉 지금의 혼강 일대이며, 발기가 거느린 하호 3만여 구는 실제성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이이모의 “更作新國”이 왕실의 기반인 계루부를 가르키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비류수로 비정되는 혼강과 그 지천 유역 일대의 고구려 초기 고분군의 분포와 성격에 대한 연구 성과를 기초로 지금의 환인 일대가 소노부의 세력 기반임을 파악하였다. 특히 육도하 유역이 가장 이른 시기 선주세력의 기반이며, 부여계 이주민과 연결되는 망강루고분군 조영세력과 결합하면서 상고성자고분군과 하고성자 일대가 초기 정치적 중심지였고, 그 뒤 고력묘자 고분군 일대가 정치적 중심지가 되는 변화 양상을 파악하였다. 이는 양 고분군이 하나의 정치적 기반을 갖고 있음을 뜻하며 그것은 바로 소노부임을 추론하였다. 졸본에서는 계루부라는 또다른 나부가 형성될 수 있는 별도의 고고자료를 찾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고고자료에서 추정한 내용을 문헌자료로 검토하기 위해 고구려본기에 등장하는 계루부를 구성하는 주요세력으로 추정되는 부여계 이주민 관련 기사를 검토하고, 초기 왕실을 구성하는 세력과 비류나부(소노부)의 정치적 결합 관계를 파악하였다. 특히 졸본지역에서 왕실의 기반으로서 계루부의 존재 가능성을 탐색하는 연구 방법으로서 정치적 구심점으로서 졸본도성의 위상을 검토한 결과 유리왕대 離宮의 존재나 유리왕에서 모본왕까지 왕릉의 장지가 졸본 도성에서 벗어나 있는 양상을 통해, 졸본 도성의 정치적 구심력에 한계가 있으며, 이는 아직 왕실의 기반인 계루부가 형성되지 않았던 결과로 파악하였다. 즉 졸본계 왕계시기에 고구려 왕실은 소노부(비류나부)를 구성하는 세력의 하나였으며, 이러한 모습이 『삼국지』 고구려전에 기술된 “本消奴部爲王”이란 역사상으로 이해하였다. This study focused on understanding the formation and existence of Sonobu(消奴部) and Gyerubu(桂婁部) in the early Jolbon(卒本) capital as a research topic to study the problem of the royal replacement. Through a review of articles on the royal replacement of Goguryeo in the Koguryo-jun of『Samguk-gi(三國志)』, it was able to find out the the time point of the royal replacement and the location of Sonobu(消奴部) in Jolbon. It was assumed that Sonobu"s political base is in the Hongang River(渾江) region, and the political base of Iimo(伊夷模) in the the Guknae(國內) region is Gyerubu(桂婁部). Based on the research results of archaeological studies on the distribution of the ancient tombs of the early Goguryeo Kingdom along the Hongang River(渾江) region, the Hwanin(桓仁) region proved to be the power base of Sonobu(消奴部). A combination of Buyeo(夫餘) people who created Mangkangru(望江樓) Ancient Tombs and the indigenous forces who created Sanggosungja(上古城子) Ancient Tombs formed a political center in the lower reaches of the Yukdo(六道河) River and the Hagosungja(下古城子) Fortress Wall. Afterwards, GoryoMoeja(高力墓子) Ancient Tombs region was transformed into a political center. I reviewed an article about theBuyeo(夫餘) immigrant People who be the main force that forms Gyerubu(桂婁部) on Koguryo-Bongi(高句麗本紀) of 『Samguk Sagi(三國史記)』. reviewed an article about the The articles on the royal tombs and the royal palaces in Jolbon(卒本) capital period. As a result Gyerubu(桂婁部) would not have been formed in Jolbon(卒本) R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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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國內都城의 형성과 공간구성

        임기환(Lim Ki-Hwan) 고려사학회 2015 한국사학보 Vol.- No.59

        본 연구는 문헌자료를 주된 검토 대상으로 하여 國內都城의 형성시기 및 방위명 지역구분의 용례를 통해 도성의 공간구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도성의 형성 시기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京都와 王都등 도성이란 개념을 갖는 용례, 도성의 주요 구성요소인 王宮이나, 종묘 등 제사 시설 등의 구성요소에 대한 용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유리왕대까지만해도 도읍지 이외의 지역에 離宮이 마련된다는 점에서 都城의 위상이 확보되지 못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전체적으로 국내도성과 관련된 고구려본기 기사의 맥락을 고려하면, 국내지역이 도성으로서의 위상을 구축한 시점은 고국천왕대를 전후한 시기 즉 신대왕-고국천왕-산상왕대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고국천왕대에는 王都와 畿內의 구분, 그리고 王都내에 4部혹은 5부의 행정구역이 실시되고 있음에서 국내도성에 도성제라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신대왕 장지인 ‘故國谷’과 고국천왕 장지인 ‘故國川原’에서 국내도성이 이 시기에 비로소 ‘國’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구려본기에 나타나는 축성과 遷都, 移都기사를 검토한 결과 도성의 구성요소로서 성곽 축조가 필수라는 도성에 대한 고구려 당시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현 중국 집안시 일대 성곽 유적에 대한 고고 발굴 조사에 따르면, 위 고구려본기 기사에 보이는 축성의 양상을 그대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국내도성 전체에 분포하고 있는 왕릉의 입지인 國壤, 東壤, 中壤, 西壤, 美壤이라는 지명이 곧 국내 도성 초기에는 도성의 공간을 구분하는 기능을 하고 있었다. 이에 美壤은 마선구 지역으로, 西壤은 통구하 서쪽 칠성산 남쪽 권역으로, 통구하 동쪽 지역은 지금의 동대자 유적과 오회분 사이를 흐르는 하천을 경계로 東壤과 中壤으로 비정하였다. 이와같이 일정하게 규칙적인 지리적 분포를 갖는 점은 왕릉의 조영을 통해 국내도성 내에서 왕권의 위상을 표상하려는 기획과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東壤, 中壤, 西壤, 美壤등의 지역구분과 방위명 5部와의 관련성을 살펴보았는데, 방위명 5부가 처음 등장하는 고국천왕대에 아직 국내성의 축조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이 때의 방위명 5부는 東壤=東部, 中壤=中部, 西壤=西部, 美壤=南部등으로 대응될 수 있으며, 3세기 중엽 이후 국내성이 축성된 이후에는 국내성 내부에 방위명 5부가 편제되고, 국내성 외부 지역은 東壤, 中壤, 西壤, 美壤등으로 편제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This study is studied on the established period and segment region of Guknae Capital-city(國內都城). I looked at the applications of 京都 and 王都 such as Capital city. looked at the applications of city of the major components royal palace or Jongmyo Shrine, royal ancestral ritual, etc. looked around the usage of the components of such sacrifices facilities. Period that Guknaeis is to build Capital-city(國內都城) was Sintaewang(新大王), Gogukcheonwang(故國川王), Sansangwang(山上王). It is separated in Capital-city and Gyeonggi Province in period of Gogukcheonwang(故國川王). The five Bu(部) that division of the Capital-city was established in period of Gogukcheonwang(故國川王). Koguryo people has been thought that the city must haves urely built this castle that based on transfer of the capital article. 國壤, 東壤, 中壤, 西壤, 美壤 that Royal Tombs are located was the ability to separate the space of the city. In this way it has a regular geographical distribution reveals the intention of the planning and presentation phases of the Capital-city(國內都城) in the country through the enhancement of the Royal Tom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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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태조대왕과 신대왕 王系에 대한 재검토 : 초기 王系의 복원을 통한 왕실교대와 국내천도 시기의 탐색

        임기환(Lim Ki Hwan)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22 역사문화연구 Vol.81 No.-

        본 연구는 필자의 기 발표 연구를 최종적으로 완성하려는 목적으로 작성하였다. 필자는 기왕의 연구에서 고구려본기의 초기 왕계를 주몽왕-□-대무신왕-민중왕-모본왕이란 졸본계 왕계, 유리왕-재사-태조대왕/차대왕/신대왕이라는 국내계 왕계로 나누어보는 가설을 제시하였으며, 이 가설의 틀에서 고구려본기에 나타나는 왕계상의 의문점들이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연구방법을 취하였다. 그 과정에서 졸본 지역은 소노부의 세력 기반이고, 계루부는 국내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논증하였다. 즉 졸본계 왕계는 소노부 왕실이며, 국내계 왕계는 계루부 왕실으로 추정하였다. 따라서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실 교대와 졸본에서 국내로의 천도가 동일한 역사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국내 천도 및 왕실 교대는 국내계 왕계로 설정한 태조대왕대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다만 이는 태조대왕과 차대왕, 신대왕의 3왕이 같은 계루부 왕실을 구성한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전제가 타당한지를 검토하였다. 그동안의 여러 연구에서 지적한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과 관련된 고구려본기의 불합리한 점들을 면밀하게 검토한 결과 3왕 사이에는 의제적인 형제 관계로 구성된 것이고, 동시에 3왕의 부모로 설정된 再思와 모태후 부여인 사이도 의제적인 부부 관계임을 추정하였다, 따라서 이들 5인의 계보를 재구성하여 모태후 부여인-태조대왕/차대왕의 계보 및 再思-신대왕의 계보를 분리하였다. 이 두 계보에서 부여인-태조대왕의 계보는 주몽왕 이래의 건국전승에 나타나는 부여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졸본계 왕계로 파악하고, 유리왕-재사-신대왕 계보를 국내계 왕계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신대왕의 왕위 계승 명분을 합리화하는 기사의 맥락을 통해, 차대왕에서 신대왕의 이어지는 왕위 계승이 정변에 의해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실 교대를 가져온 과정임을 추론하였다. 그 후 졸본계 왕계[소노부 왕실]와 국내계 왕계[계루부 왕실]을 하나의 단일 왕계로 만드는 과정에서 유리왕을 주몽왕의 아들로 편입하고, 또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을 형제 관계로 만들면서 再思와 부여인이 부부 관계가 되는, 즉 현 고구려본기의 왕계가 최종 구성되었다고 추정하였다. I divided Goguryeo s early royal family into the royal lineage of King Jumong(朱蒙王)as a progenitor and the royal lineage of King Yuri(琉璃王) as a progenitor. the royal lineage of King Jumong(朱蒙王) was Royal family of Sonobu(消奴部), the royal lineage of King Yuri(琉璃王) was Royal family of Gyerubu(桂婁部). The royal lineage recorded in the Goguryeo Bongi was the result of combining the two royal lines. In this process, King Yuri was incorporated as the son of King Jumong. The irrationalities of Koguryo-Bongi(高句麗本紀) articles related to King Taejo and King Sindae were carefully reviewed. The brotherhood of the three kings was created for political purposes. The genealogy of King s Buyou mother-King Taejo-wang(太祖王), King Chadae-wang(次大王) and the genealogy of Jaesa(再思)-King Sindae-wang(新大王) were separated. The genealogy of King Taejo-wang was identified as the royal family of jolbon(卒本), and the genealogy of King Sindae-wang was identified as the royal family of Kugnae(國內) The Change of Royal family from Sonobu(消奴部) to Gyerubu(桂婁部) and Capital Transfer from Jolbon(卒本) Region to Guknae(國內) region mean the same history. With current data, Capital Transfer period can be estimated to be the period between King Taejo-wang(太祖王) and King Sindae-wang(新大王). From the article that King Sindae-wang(新大王) served as a ritual at the Firt King Shrine, and the article that King Sindae-wang(新大王) was the first king maded a royal tomb in Guknae(國內) region on Koguryo-Bongi, I think that King Sindae-wang king was on the changeover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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