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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후보

        다중적 근대의 모색

        방상근(Bang, sangkeun),와타나베히로시(Watanabe, Hiroshi) 서강대학교 현대정치연구소 2013 현대정치연구 Vol.6 No.1

        본 논문은 19세기말 유길준과 후쿠자와 유키치가 서구문명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되고 있었는지에 그 차이를 주목하여 양자의 사상적 특징을 밝히고자 한다. 선행연구에서는 대체로 유길준의 사상을 후쿠자와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면서, 문명의 표준이 서구문명에 놓여져 있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후쿠자와가 유교와 기독교를 비판하고 서구문명이 지닌 경쟁의 요소를 수용하여 독립정신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과는 달리, 유길준의 경우 문명의 표준은 유교에 있었고 유교의 정(政)과 교(敎)의 관점에서 서구문명을 이해하고자 했음을 보이고자 한다. 즉 유길준은 ‘교’의 측면에서 유교를 서구문명의 기독교와 동등한 차원에서 견지하고자 했으며, ‘정’의 측면에서는 서구문물과 제도를 통해서 유교의 정을 보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다중적 근대라는 관점에서 19세기 조선과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유길준과 후쿠자와 유키치가 근대서구의 ‘문명’을 어떻게 수용하고 이해했는지를 다시 살펴보는 것은 우리가 걸어온 근대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뿐만 아니라, 이미 근대화를 완성하고 세계화를 지향해가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 우리의 문명이 걸어가야 할 길을 모색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함의를 준다. This paper tries to find the difference in the political thoughts on the essence of western civilization between Fukuzawa Yukichi and Yu Gil-Jun in the late 19th century. Former studies usually tell that both of them regarded the western civilization as their model to follow. But this paper seeks to show the fact that, unlike Fukuzawa Yukichi who criticized confucianism and accepted the western spirit of competition to secure national independence, Yu Gil-Jun tried to retain confucian spirit as model to follow and understood the western civilization in the confucian way of governing, namely politics(政) and reclamation(敎). This fact implies that Yu Gil-Jun thought confucianism as equivalent to christianity in function of reclamation and accepted the western civilization to improve legal and institutional system. This kind of difference in accepting and understanding the western civilization in l9th century gives us the chance to reflect on the future of modern civilization in the context of multiple modernities.

      • KCI등재

        조선 세조대 여진정책과 역사화해: ‘중화공동체론’의 관점에서

        방상근(Sangkeun Bang) 고려대학교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2020 평화연구 Vol.28 No.2

        이 글에서 필자는 조선의 여진정책이 종래 이해되어온 바와 같이 ‘오면 어루만져 주고 가면 추격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나 혹은 ‘당근과 채찍’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은위병행(恩威竝行) 정책만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제시한다. 조선의 국왕들, 특히 세조는 단지 여진족이 변방의 환란이 되지 않도록 회유를 통해 그들의 내침을 방지하는 기미책(羈縻策)에만 머물지 않았다. 세조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여진족 내부의 갈등과 반목에 깊숙이 개입하여 그들의 화해를 중재하였고, 이를 통해 동북아지역에서 ‘조선이 주도하는 평화’(Pax Koreana)를 실현하고자 했다. 조선은 태조 이래로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를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이적들이 명나라와 맺은 사대관계와는 성질이 다른 것이었다. 정도전은 이적(夷狄) 중의 하나인 조선을 중화(中華)로 간주하여 다른 이적과의 차별성을 설정했다. 그는 『조선경국전』에서 천자(명)와 제후(조선)를 수직적 관계가 아닌 동일한 원리[道]에 의해 존재하는 수평적 관계로 설명했다.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를 ‘원리적 수평성’으로 설정하고 명과 함께 ‘중화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이 정도전 이후 지속된 조선의 국가전략이었다. 이는 명나라와 함께 ‘평천하’의 한 부분을 담당하겠다는 주체적인 전략이며, 조선은 중국의 다른 주변국과는 다르다는 ‘조선 예외주의’ 전략이었다. 이 글은 조선의 중화공동체 전략이 세조대에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여진정책과 화해라는 관점에서 검토한다. Jeong Do-jeon(鄭道傳), so-called the architect of Joseon dynasty, explain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authority of Ming"s emperor and that of Joseon"s king was not vertical but horizontal in his manuscript of Constitutional Law(『朝鮮經國典』). He set the relationship as principal horizontality and planned to form the Zhonghua(中華) community with the Ming dynasty. It was a kind of ‘exceptionalism strategy’ in which Joseon was different from other neighboring barbarian tribes. Also it was a subjective strategy to take part of maintaining peace in the northern area with the Ming Dynasty. This article examines how his national strategy for the Zhonghua community was embodied and realized in the era of King Sejo from the viewpoint of frontier policy and historical reconcil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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