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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敎會의 未來像 : 敎會의 새 方向

        네드 버어 맥케니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1966 현대와 신학 Vol.3 No.1

        이 시대에 가장 큰 특징이 하나 있다고 하면, 그것은 기왕의 기구와 가치를 거리낌없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라고 볼 수 있겠다.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교회도 여기서예외는 되지 않는다. 이것은 확실히 반가운 현상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무슨 큰 피해를 받을런지 모른다고 바라보는 것은 어설픈 일이요, 또 철 모르는 말밖에는 안된다. 말이 시작되고 나면 으례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교회는 이미 제 세상이 지난 세월을 걸어 가고 있는 것이요, 그것은 교회가 지금껏 실패해 온 흔적이라든가 약점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는 말들을 자연스럽게 해제낀다. 쓸모가 없는데도 살려고 발을 버틴다든가, 남이 꾸어 준 시간 속에서 허황하게 시간을 보낸다든가 하는 말을 막해 낸다. 생활의 모습과 그 형태가 바꿔졌으니 교회 역시 좀 다른 기독교의 조직체로서 개혁할 필요가 있게 않겠느냐 하는 말투다. 물론 여기 동감이 전혀 안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평가가 그저 한 쪽만 보고 하는 말이지 속이 다 째인 말이 아닌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 이유를 다음 세 가지고 들 수 있겠다. 곧 첫째, 사람이란 것은 제 아무리 저희들끼리 따로 살고, 또 변두리에서 동떨어져 산다 해도 공동체 안에서 피해 나와 살할 수는 없는 존재인 것이다. 둘째는 가정이란 것은 그 중점을 어디에다가 두든지 간에우리 문명생활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째로는 사람끼리 서로 한 마음을 품어 지내는 휴대인 친교는 기독교의 참 본질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 이외에도 우리 입이 할 말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말하나 안하나 엄연히 존재하게끔 되어 있다. 곧 교회는 시간에 관계없이 항존하는 기관이다. 기독교 신앙이 우리 생에서 떠나지 않는 한, 교회도 결코 떠나지 않는다. 바울은 가끔 그의 서신 가운데서 개인이라든가 '저들 집에 있는 적은 교회'(parishes)라 하는 것이다. 거기는 신앙과 충성이 있었던 곳이었다. 기이전에만 해도 예루살렘에 오순절의 축복을 기다리는 '교회'가 배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오순절에 이르러, 새 발길을 옮겨 놓게 되고, 그래서 그것이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교회의 모습을 갖추고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상, 예술의 열 두 제자들이 바로 이 교회가 아니었겠는가? 교부들이 교회를 제일 처음 창설하신 분은 그리스도 그 분이라고 공헌했을 때, 그 말은 핵심을 균중한 말이라 보아서 틀림이 없으리라 본다. 이 말을 가만히 살펴보면 교회가 시간을 초월해서 우리 시대에 현존한다는 국면을 강조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교회' 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뿌리를 박고 있는 한, 먼 미래 속에 계속해 존재할 것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의미의 말을 할 수가 있다. 곧 지방 교회가 없는 곳에 에큐메니칼적인 교회 일치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존 웨슬리가 벌써 말해 놓은 것처럼 "성서를 보면 고립된 교회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지방 교회는 세계 교회의 축소판이요, 원소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조직된 교회의 본질이요 진수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제목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이 교회가 계속해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고, 그저 "어떤 모양을 장차 교회가 가지게 될 것인가"하는 문제에 요약될 수 있으리라 본다. 어떻게 교회가 앞으로 그 모습을 바꾸게 될 것인지? (왜 이러한 문제가 나오게 되느냐 하면, 이제 교회는 완전히 변천하는 사회에 대한 목회로 그 기능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교회는 어디에다가 강조점을 두게 될 것인가? 옛날의 교회 형태에서 재확인할 만한 요소가 있을텐데 그것은 어떤 것이겠는가? 영원한 진리는 만고에 불변하는 법이다. 그러나 "새 형편에 이르면 새로운 형태의 의무가 생겨나는 법" 도 이 세상에는 있는 것이다. 우리 다 예언적인 직분을 말할 때 어떤 제한을 두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 나도 여기에는 조금도 이의가 없다. 나는 지난 20여년간 미국의 여러 지방에서 주로 도시교회를 세군데가 시무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세 교회에 갈 때마다, 언제나 새로운 형태의 기술과 또 생소하고도 독특한 새 프로그램을 구사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들 프로그램이 완전히 전무후무한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 그때의 경험에는 그것들이라야먄 통하는 독특성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 기초해서 나는 미래의 '지방에 흩어진 교회'가 걸어 가야 할 방향을 모색, 이를 제시해 볼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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