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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중신학, 해방신학과 목회현장의 문제

        주재용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연합신학대학원 1985 연세대학교 연신원 목회자 하기 신학세미나 강의집 Vol.- No.5

        우선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기 전에 신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혹은 신학이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가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신학은 언제나 역사와 함수관계를 가지고 형성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를 떠나서는 신학이란 있을수도 없고 형성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신학을 사전적인 정의로써 ‘하나님에 관한 학문’, 또는 ‘하나님에 관한 이론’이라고 말하지만 이 설명에 뒤따르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변을 해야 하며 ‘그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알려지는가’하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성서의 말씀을 따른다고 하여 하나님을 창조주, 역사의 주님, 살아계신 분이라고 말하지만 그 각각의 표현들이 지닌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묻고 대답하는 것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저 단지 ‘하나님에 대한 학문’이라고만 써놓아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대답은 결론적인 대답은 될 수 있지만 이 대답까지 이르는 과정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 KCI등재

        A Trinitarian Logic of Divine Love

        Jin Hyok Kim(김진혁)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연합신학대학원) 2015 신학논단 Vol.82 No.-

        본 논문은 중세의 대표적 신비주의 신학자 성 빅토르 리샤르의 삼위일체에 대한 이성적 논증과 이에 대한 현대 신학자들의 해석을 연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성으로 신 존재 증명은 가능하나 삼위일체는 계시와 교회의 권위로만 알려질 수 있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달리, 리샤르는 신적 자비를 분석함으로써 삼위일체를 이성적으로 논증하고자 했다. 사랑은 최소 두 인격, 즉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를 전제한다. 그런데 신은 완전하기에 그분의 사랑도 완전하다. 완전한 사랑은 정의상 자기애나 둘 만의 사랑에 함몰되지 않고, 사랑을 밖으로 흘려보내어 그 기쁨을 누군가 나눔으로써 그 이타성을 완성하게 된다. 그렇기에 완전한 사랑은 사랑의 기쁨을 향유하며 그 온전함을 완성할 제3의 인격을 요구한다. 삼위일체에 대한 리샤르의 이성적 논증은 완전한 존재인 신의 사랑도 완전하다는 중세 스콜라신학적 전제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이성은 새로운 신학적 지식을 독자적으로 만들거나 기존 지식을 해체하기 보다는, 성서와 전통이 증언하는 신앙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지식을 형성하고 대상을 분석하는 비판적 기능을 주로 하는 근대적 이성과 차별성을 보이는 리샤르의 종교철학적 입장은 그의 신비주의 저작에 자주 등장하는 ‘사랑으로 불붙은 이성’이라는 개념에 잘 응축되어 있다. 리샤르의 삼위일체론은 관계라는 차원에서 인격을 보게 할 뿐만 아니라, 인격 형성의 근본 원리로 이타적 사랑인 자비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적절성을 가질 수 있다. 특별히 한스 우스 폰 발타자, 리챠드 스윈번, 콜린 건튼 등의 현대 신학자들은 리샤르의 삼위일체론을 전유해 독특한 신학과 종교철학을 형성했다. 리샤르의 통찰이 가진 균형감은 특정 근현대 철학을 선호하는 학자적 관심에 따라 약해질 수 밖에 없었지만, 이들은 약 900여 년 전 활동했던 신비주의 신학자가 던져주는 지혜의 현대적 의미를 새롭게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중세의 대표적 신비주의 신학자 성 빅토르 리샤르의 삼위일체에 대한 이성적 논증과 이에 대한 현대 신학자들의 해석을 연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성으로 신 존재 증명은 가능하나 삼위일체는 계시와 교회의 권위로만 알려질 수 있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달리, 리샤르는 신적 자비를 분석함으로써 삼위일체를 이성적으로 논증하고자 했다. 사랑은 최소 두 인격, 즉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를 전제한다. 그런데 신은 완전하기에 그분의 사랑도 완전하다. 완전한 사랑은 정의상 자기애나 둘 만의 사랑에 함몰되지 않고, 사랑을 밖으로 흘려보내어 그 기쁨을 누군가 나눔으로써 그 이타성을 완성하게 된다. 그렇기에 완전한 사랑은 사랑의 기쁨을 향유하며 그 온전함을 완성할 제3의 인격을 요구한다. 삼위일체에 대한 리샤르의 이성적 논증은 완전한 존재인 신의 사랑도 완전하다는 중세 스콜라신학적 전제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이성은 새로운 신학적 지식을 독자적으로 만들거나 기존 지식을 해체하기 보다는, 성서와 전통이 증언하는 신앙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지식을 형성하고 대상을 분석하는 비판적 기능을 주로 하는 근대적 이성과 차별성을 보이는 리샤르의 종교철학적 입장은 그의 신비주의 저작에 자주 등장하는 ‘사랑으로 불붙은 이성’이라는 개념에 잘 응축되어 있다. 리샤르의 삼위일체론은 관계라는 차원에서 인격을 보게 할 뿐만 아니라, 인격 형성의 근본 원리로 이타적 사랑인 자비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적절성을 가질 수 있다. 특별히 한스 우스 폰 발타자, 리챠드 스윈번, 콜린 건튼 등의 현대 신학자들은 리샤르의 삼위일체론을 전유해 독특한 신학과 종교철학을 형성했다. 리샤르의 통찰이 가진 균형감은 특정 근현대 철학을 선호하는 학자적 관심에 따라 약해질 수 밖에 없었지만, 이들은 약 900여 년 전 활동했던 신비주의 신학자가 던져주는 지혜의 현대적 의미를 새롭게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 KCI등재

        East Asian Appropriation of Religious Pluralism: the case of Hick’s religious pluralism in Korean Theology of Indigenization

        Iljoon Park(박일준)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연합신학대학원) 2022 신학논단 Vol.107 No.-

        본 논문은 존 힉(John Hick)의 다원주의와 한국신학 간의 상요작용을 탐문한다. 힉의 종교다원주의는 한국 토착화 신학자들에게 종교 간 대화의 필요성을 자각시켰다. 비록 한국 사회가 역사적으로 그리고 전통적으로 다-종교적 사회이긴 했으나, 이 여러 종교들은 각자의 종교의 정체성을 위해 갈등과 투쟁에 몰입하기 보다는 민중들이 각자의 도(道)와 덕(德)을 함양하는데 기여해왔던 사회문화적 전통이 있다. 그런데 이런 문화전통은 역설적으로 다른 종교들과의 만남을 타자와의 만남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만남 혹은 내면의 독백으로 만들어버리는 효과를 갖고 있었다. 힉의 종교다원주의가 한국신학자들에게 자각시켜 주었던 것은 바로 종교 간 대화의 필요성인데, 이는 인격 내면의 통합과 성숙을 위한 도와 덕의 차원에서라기 보다는 다른 종교를 타자 혹은 타자성으로 인식해야 할 필요성을 자각시켜 주었던 것이다. 대화는 기본적으로 나의 독백이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과 소통이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일부로 당연시 여겨왔던 다른 종교들을 나와 전혀 다른 타자로 인식하는 문제로서 말이다. 따라서 이는 더 나아가 한국 신학자들에게 ‘타종교의 신학’ 개념을 촉매했는데, 기독교 신학자가 주체가 되어 타종교를 대상으로 탐구하는 학문분야로서의 신학이 아니라, 타종교인들이 주체가 되어 신학적으로 기독교 신학자들과 대화하는 신학, 즉 종교-간-대화의 신학의 필요성을 촉진하였다. This paper explores interactions between John Hick’s religious pluralism and Korean theology. Hick’s idea of religious pluralism awakened Korean theologians of indigenization about a necessity of interreligious dialogue. Although Korean society has been multi-religious, different religions have worked for people to build up the Way (Dao, 道) and to nurture Virtue (De, 德). It means that encounter with different religion for Koreans has been internal dialogue or monologue for develop one’s personality. However, Hick’s idea of religious pluralism stimulated Korean theologians to think of interreligious dialogue not only for inner maturity but also for acknowledging the otherness or alterity that has taken as ‘us’ for granted. It further catalyzed an idea of theology of other religions whose subject is not Christianity but other religions.

      • 교회성장과 창의적 목회

        곽요셉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연합신학대학원 1999 연세대학교 연신원 목회자 하기 신학세미나 강의집 Vol.- No.19

        이 강의 목적은 교회성장신학의 부정적 의미를 긍정적 의미로 변환시키고자 함이며, 그 교회성장신학 안에 있는 이해의 관점에서 복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선교신학과 교회성장의 이해라는 배경 아래서 전달하고자 합니다. 신학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성장은 신학의 발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신학은 위로부터의 신학 또는 아래로부터의 신학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하심 안에서 이해하는 범위와 하나님이 역사하심의 사건을 통해서 이해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기독론적으로 말하자면 예수가 성육신, 부활한 것과 그의 말씀 자체 안에서 예수를 이해하면 위로부터의 신학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공생애에 초점을 맞추어서 신학을 하면 아래로부터의 신학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서구신학에는 선교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선교를 하려고 하지만 선교가 무엇인가, 또 어떻게 선교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평신도는 물론이거니와 목회자까지도 재해석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존 신학이 선교에 대한 제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신학대학에서도 그들의 커리큘럼 안에 선교신학을 필수과목으로서, 과목 외에는 넣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신학적 관점에서 신학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해야 한다면 변증신학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에서 복음을 증거 할 때, 증거 받은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여러 거짓 선기자들이 나타날 때, “복음은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많은 과정이 있었고 우리들은 그 과정을 신학적으로 사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 신학을 생각해 봅시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학을 초대교회 사람들이 잘못 이해해서 예수는 단순한 인간이거나, 아니면 한 때만 하나님이었다는 영지주의적 관점을 받아들였을 때, 그러한 이해가 잘못되었다고 설명해 주기 위해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설득하고 그 지식을 언어로 전달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바로 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 KCI등재

        Toward A Reconciliation of Two Old Testament Disciplines, ‘History of Ancient Israel’ and ‘Old Testament Theology’ in Korea

        TaekJoo Woo(우택주)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연합신학대학원) 2016 신학논단 Vol.86 No.-

        이 논문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 연구에 등장한 소위 맥시멀리스와 미니멀리스트 논쟁을 염두에 두고 구약학의 두 연구 분과인 ‘고대 이스라엘 역사’와 ‘구약신학’을 화해시키고 구약신학의 규범적 과제를 추구하는 방안을 제안하는 데 목적이 있다. 가블러 이후 역사연구와 신학연구는 구약성서를 해석하는 별개의 학문으로 자리 잡아 왔다. 그동안의 구약신학은 역사-서술적 과제에 집중해 온 반면 구약신학의 규범적 과제를 수행하는 일에는 소홀했다. 아히로트와 폰라트가 좋은 사례이다. 문제는 역사 이해에 달려 있다. 이 두 연구 분과를 화해시키고 구약신학의 규범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와 신학, 그리고 허구와 사실의 이분법이 극복되어야 한다. 역사는 일종의 과거 사건의 문학적 표현이며 그래서 해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역사와 신학 모두 해석 작업의 결과이다. 역사는 편향성을 지닌 문서적 증언이다. 여기에 허구 개념을 논의하는 자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허구라는 장르는 실제 현실의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에 사실적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따라서 허구라는 표현에 매달려 신학적 논의가 방해를 받을 이유는 없다. 다음으로 구약신학은 “과거의 의미”와 “현재의 의미”를 전환시키는 해석학이 필요하다. 우리는 가다머의 통합의 해석학 중에서 렌스키의 거시 사회학을 통한 지평 융합을 추천한다. 렌스키의 방법론은 발전된 형태의 농경사회 모델과 고대 이스라엘과 한국의 지평을 통합시켜 준다. 한 걸음 나아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한국의 역사적 경험은 “역사적 유비의 역학”을 통해 한국 신앙공동체를 위한 구약신학의 규범적 과제 수행에 유용하다. ‘이스라엘 역사’와 ‘구약신학’이란 두 구약학 연구 분과는 ‘가상현실’로 이루어진 컴퓨터 게임의 두 가지 규칙과 같아서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컴퓨터 게임에 몰입하듯이 한국의 구약신학이 위기의 한국교회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규범적 구약신학이라는 결과물을 내놓기를 희망한다. 이 논문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 연구에 등장한 소위 맥시멀리스와 미니멀리스트 논쟁을 염두에 두고 구약학의 두 연구 분과인 ‘고대 이스라엘 역사’와 ‘구약신학’을 화해시키고 구약신학의 규범적 과제를 추구하는 방안을 제안하는 데 목적이 있다. 가블러 이후 역사연구와 신학연구는 구약성서를 해석하는 별개의 학문으로 자리 잡아 왔다. 그동안의 구약신학은 역사-서술적 과제에 집중해 온 반면 구약신학의 규범적 과제를 수행하는 일에는 소홀했다. 아히로트와 폰라트가 좋은 사례이다. 문제는 역사 이해에 달려 있다. 이 두 연구 분과를 화해시키고 구약신학의 규범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와 신학, 그리고 허구와 사실의 이분법이 극복되어야 한다. 역사는 일종의 과거 사건의 문학적 표현이며 그래서 해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역사와 신학 모두 해석 작업의 결과이다. 역사는 편향성을 지닌 문서적 증언이다. 여기에 허구 개념을 논의하는 자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허구라는 장르는 실제 현실의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에 사실적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따라서 허구라는 표현에 매달려 신학적 논의가 방해를 받을 이유는 없다. 다음으로 구약신학은 “과거의 의미”와 “현재의 의미”를 전환시키는 해석학이 필요하다. 우리는 가다머의 통합의 해석학 중에서 렌스키의 거시 사회학을 통한 지평 융합을 추천한다. 렌스키의 방법론은 발전된 형태의 농경사회 모델과 고대 이스라엘과 한국의 지평을 통합시켜 준다. 한 걸음 나아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한국의 역사적 경험은 “역사적 유비의 역학”을 통해 한국 신앙공동체를 위한 구약신학의 규범적 과제 수행에 유용하다. ‘이스라엘 역사’와 ‘구약신학’이란 두 구약학 연구 분과는 ‘가상현실’로 이루어진 컴퓨터 게임의 두 가지 규칙과 같아서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컴퓨터 게임에 몰입하듯이 한국의 구약신학이 위기의 한국교회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규범적 구약신학이라는 결과물을 내놓기를 희망한다.

      • KCI등재
      • 신학과 기독교교육

        Homribhausen, E.G.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1964 현대와 신학 Vol.1 No.1

        물론 많은 교육자들이 아직 “신학”에 대해서 미심쩍은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신학의 역사를 환기시켜, 그 도그마티즘, 그 불관용, 반동주의, 분열성, 합리주의 혹은 감상주의를 들추어낸다. 신앙을 견지하고 보존해 오느라 몇몇 신학자가 새 지식과 새 형편에 항거한 일이 있긴 하다. 이들이 심각하게 그랬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아직 신학을 경멸하는 이들은 우리 시대에 와서, 대두한 새 신학을 좀 알아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신학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신학은 인간의 한 학문이고, 따라서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이다. 궁극적인 것을 다루기는 하리라. 그러나 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신학이다. 그러므로 신학의 재료와 그 목적을 심각하게 이정해준다 하더라도, 신학자체를 그보다 더 심각하게 보아서는 안된다. 더구나, 신학은 기독교신앙의 총합체가 아니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또 인격자들이 모인 공동체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지적인 판단이라든가, 신학적 전체이상의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인격만큼이나 또 사람들이 인품만큼이나 포괄적이고 심원하다. 기독교의 교리를 지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을 참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비종교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인격의 전체성은 하나님에 대한 응답에 집결되어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성서와 의리와 사회적인 관계 등이 다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요컨대 신학은 기독교교육자들이 쓰는 단 하나밖에 없는 방법은 아닌 것이다. 인간의 전체생활에 대한 복음의 전체적 대면이 이 신학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고지식한 사색이 교육에서는 기본적인 것이긴 하다. 그러나 사색은 언제나 그 이외에 여기 수반하는 여러 요소들과 항상 긴밀하게 연관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기독교교육은 본래 “전 기독교 공동사회”의 과제인 것이다. 그래 신학을 응용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 지적인 진리의 전달을 이 과제의 총체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신학, 혹은 체계적인 기독교의 진리는 인체의 골조와 비교할 수 있다. 무슨 구조가 거기에 꼭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주 다 쓸어져버리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르치는 기독교에는 구조가 있어야한다. 체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골조가 전부는 아닌 것이다. 신학의 체계도 그렇다. 기독교는 문화요, 거기에는 노래와 상징과 자전, 문예, 색조, 그리고 그 이외에 여러 것이 다 합해져있다. 신학적교리는 이 문화를 다 한데 짜놓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들과 떨어져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신학은 기독교교육에는 없어서는 안 될 기본적인 요소다. 그래서 기독교교육자들 사이에는 언제나 신학적 논쟁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교육자들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되찾고, 오늘의 기독교가 가진 잘못된 점을 수정하며, 알맞은 방법으로 기독교의 신앙을 전해 밝혀서, 기독교에 몸 바치고 있는 여러 사람을 도와 하나님 안에서 원만하고 성숙한 생을 가지도록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 KCI등재
      • 예배 신학

        박은규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연합신학대학원 1989 연세대학교 연신원 목회자 하기 신학세미나 강의집 Vol.- No.9

        한국 개신교회는 선교 백주년을 지난 후 기독교인의 생활 전반에 대한 자기 반성과 자기 비판을 시도하였다. 그중 예외없이 “한국 개신교회의 예배 신학은 이대로 좋은가?”라는 물음이 출현하였다. 이 물음은 예배의 통전을 추구하는 신학도에게는 가장 긴급한 것이다. 왜냐하면, 현장에서 교역하는 목회자들은 수 많은 예배의 문제점들 중 “예배 신학의 빈곤”을 제 1순위로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배신학의 빈곤”이란 “예배신학의 이해부족”뿐 아니라 “예배신학의 토착적 적용의 결여”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고, 게다가 지나친 신비주의적 추구와 종교혼합적 예배 심정의 표현에 따른 복합적 문제성을 포함한다. 이런 점에서 나의 물음은 세가지로 집약된다. “예배신학의 빈곤을 입증하는 예배의 문제점들은 무엇인가?” “한국 개신교회는 어떤 예배신학을 어떻게 적용해 나가야 하는가?” 그리고 “예전신학자로서의 목사는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

      • KCI등재후보

        ‘신학적 미학’에 대한 선교신학적 연구

        김영동(Young-Dong Kim)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연합신학대학원) 2011 신학논단 Vol.64 No.-

        Van der Leeuw’s Sacred and Profane Beauty: the Holy in Art is the pioneering masterpiece of the Theological Aesthetics. I will investigate this book for the renewal of the Korean theology and missions. I want to find out how might we construct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holy and the beautiful, in order that the reader(theological students, local church pastors, and missionaries) may understand independence and interdependence between the holy and the beautiful. In this unique and highly significant book van der Leeuw reveals his thesis: the reunification of the holy and the beauty. His impassioned and brilliant investigation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holy and the beautiful is founded upon the conviction that for too long the religious have failed to seriously contemplate the beautiful, associating it as they do with the kingdom of sensuality and impermanence. In truth, as van der Leeuw again and again affirms, the holy has never been absent from the arts, and the arts have never been unresponsive to the holy. The book is so organized that the different arts are treated one after another in six parts: the dance, drama, beautiful words, the pictorial arts, architecture, and music. Van der Leeuw describes each of the arts in its original unity with the religious and then analyzes its historical disjunction and alienation. After a penetrating investigation of the structural elements within the arts which illuminates a crucial dimension of the religious experience, he points toward the reemergence of an appropriate theological aesthetics on which a reunification of the arts could be founded. The last part is devoted to a general theological aesthetics. In this research I have undertaken to show that Korean church and mission could be renewed, when they understand the essential unity of the holy and the arts(or beautiful) and when they discover paths and boundaries for reaching the unity of the holy and the beautiful. God speaks not just through truth and goodness, but also through beauty. If Korean church could reach to the harmony ‘faith seeking knowledge’(fides quaerens intellectum) and ‘faith seeking beauty’(fides quaerens pulchrum), then she can find freshly ‘the other’ and will find the reason to love ‘the other’. In that case she will be the salt and light in/for the world. Van der Leeuw’s Sacred and Profane Beauty: the Holy in Art is the pioneering masterpiece of the Theological Aesthetics. I will investigate this book for the renewal of the Korean theology and missions. I want to find out how might we construct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holy and the beautiful, in order that the reader(theological students, local church pastors, and missionaries) may understand independence and interdependence between the holy and the beautiful. In this unique and highly significant book van der Leeuw reveals his thesis: the reunification of the holy and the beauty. His impassioned and brilliant investigation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holy and the beautiful is founded upon the conviction that for too long the religious have failed to seriously contemplate the beautiful, associating it as they do with the kingdom of sensuality and impermanence. In truth, as van der Leeuw again and again affirms, the holy has never been absent from the arts, and the arts have never been unresponsive to the holy. The book is so organized that the different arts are treated one after another in six parts: the dance, drama, beautiful words, the pictorial arts, architecture, and music. Van der Leeuw describes each of the arts in its original unity with the religious and then analyzes its historical disjunction and alienation. After a penetrating investigation of the structural elements within the arts which illuminates a crucial dimension of the religious experience, he points toward the reemergence of an appropriate theological aesthetics on which a reunification of the arts could be founded. The last part is devoted to a general theological aesthetics. In this research I have undertaken to show that Korean church and mission could be renewed, when they understand the essential unity of the holy and the arts(or beautiful) and when they discover paths and boundaries for reaching the unity of the holy and the beautiful. God speaks not just through truth and goodness, but also through beauty. If Korean church could reach to the harmony ‘faith seeking knowledge’(fides quaerens intellectum) and ‘faith seeking beauty’(fides quaerens pulchrum), then she can find freshly ‘the other’ and will find the reason to love ‘the other’. In that case she will be the salt and light in/for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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