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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全南지역 洋畵의 선구자 金鴻植에 關한 硏究

        김옥조 전남대학교 대학원 2000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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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근대회화사에서 서구적 조형기법이 도입된 지는 근 100년에도 못 미친다. 1910년 최초의 서양화가로 불리는 고희동이 동경미술학교에 유학하면서 한국양화의 역사는 시작된다고 보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을 통한 우회적인 경로를 거쳐 서구의 유화기법이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일본 유학을 통한 양화도입은 시대적 상창과 민족전통 회화관 사이에서 과도기적인 한계가 있었다. 특히 동경유학파가 익혀온 서구적 조형기법은 그 탄생의 기초가 진정한 예술운동의 발로라기 보다 일본의 서구화 정책과 대륙침략을 도모하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이었다. 때문에 근대 한국양화의 출발은 일제의 식민통치하에서 이뤄져 오늘날 역사적 해석이 명쾌하지 못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전남의 양화도입은 서울보다 13년여가 늦게 시작됐다. 여수출신의 金鴻植이 1923년 동경미술학교에 유학하면서부터이다 金鴻植은 호남근대화단의 개척자로 알려진 吳之湖 보다 3년이나 선배였다. 따라서 金鴻植에 대한 연구는 전남근대미술사의 물꼬를 트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전남근대미술사에 대한 흐름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예는 극히 드물다. 일반적으로 吳之湖가 동경유학을 끝내고 서울과 개성 등지서 활동하다 귀향한 1945년 전후를 전남양화의 태동기로 보는 것이 그 동안의 지배적인 시각이었다. 그러나 미술사적 입장에서 보면 湖南人으로 서구적 회화방식을 전공하고 이를 전남지역에 처음 들여온 화가는 金鴻植이었다. 물론 金鴻植은 1928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여수에 칩거하며 그림작업보다는 근대 계몽운동가로 더 폭넓은 활약을 했다. 일제체제에 항거하는 민족운동을 말할 것도 없고 청년운동, 농민운동, 사회단체활동 등 다방면에 발을 들여 여수라는 지역사회를 개화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 이런 활동을 하는 가운데 틈틈이 그림을 그렸고 해방이후 만년에는 만성리 인근 바닷가의 천성산 기슭에 아뜰리에를 짓고 들어가 남은 여생을 그림에 바쳤다. 이 같은 金鴻植의 근대기 민족의식을 일깨운 지사로서의 행적과 비록 전시회 한번 열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서양화 그림을 그렸고, 현재 유작이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전남근대회화사의 골간을 잡는 기준이자 출발점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는 곧 전남양화의 역사가 해방 전후로부터 50여년에 그친다는 일반적 논의를 명확히 하여 金鴻植이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한 시기를 전후로 바로 잡아 무려 20여년의 숨겨진 역사를 복원하게 되는 것이다. 전남의 양화역사는 한국 근대회화사와 10여년 안팎의 차이를 두고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와 미술계에서 묻혀져 있던 호남최초의 서양화가 金鴻植의 발굴 및 연구는 이처럼 전남 양화단의 흐름을 조망하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새로운 전남미술사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는 차원의 의미를 가진다 하겠다. 金鴻植이 펼친 근대 민족문화운동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를 정리하고 그가 남긴 유작을 통해 예술적 가치와 의미를 평가하는데 이 논문의 의미가 있다. 金鴻植에 대한 연구가 되지 않은 것은 전남근대 회화사에 대한 미술사적 접근 자체가 활발하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金鴻植에 대한 연구가 앞으로 근대 호남미술사를 연구하는 데 상당한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양화 토대를 잡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교수에게서 사사한 金鴻植은 집안의 반대로 파리유학을 포기하고 고향 여수에 칩거하며 그림을 그렸다. 거의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근대 개화운동을 주도하고 한편으로 울분과 좌절을 맛보며 이름없는 화가로서의 생애를 마친다. 뒤늦게 그의 존재가 알려지고 지방언론의 조명을 받으면서 급기야 전남도 미술협회와 국립현대미술관이 역사 이면으로 묻힐 뻔한 근대작가로 발굴해내 공식전시회에 초대함으로써 金鴻植에 대한 새로운 평가의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金鴻植의 회화세계는 자화상을 비롯 누드, 풍경, 정물, 설경 등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대상에 대한 진솔한 접근과 성실한 표현 방식으로 당시의 서구적 미술어법의 아카데믹한 면모를 보여준다. 작품의 구성 내용 면에 있어서도 당시 일제 치하의 음울한 민족적 기질을 한껏 화면에 살려낸다. 그러나 그의 생애가 밝혀지고와 유작들이 발굴되었지만 그의 예술적 평가는 아직 유보적인 입장이 우세하다. 그에게 영향을 준 후지시마 교수의 화격에 비하면 金鴻植의 유작은 작품성은 초보적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많은 까닭이다. 서양화 도입기의 낮은 수준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지 않지만 유작을 남겨 전남현대회화의 물길을 열었고 작고직전까지 붓을 잡았던 화가로서의 길을 걸어갔던 정성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It does not yet reached to 100 years since the western style has been introduced in Korean art history. Western art in Korea started in 1909 when Ko-Hidong who is regarded as the first western artist in Korea entered Tokyo art school, Japan to learn western art. That is, during the Japanese imperialism oil painting came to Korea via to indirect route. However there was a crash between western and traditional style in the beginning of art history in Korea. It was because it came from indirectly Paticullary introducing of western style by Tokyo students was not pure art oriented movement but rather a colonial program. This is the reason why the origin is not clear until now. In Chollanamdo, the western art introduced 13years later than Seoul. It was in 1923 when Kim-Hongsik from Yeosu started to learn western art in Tokyo art school. Kim-Hongsik was 3years senior than Oh-Chiho who is called a harbinger of Honam art. Therefore the study about Kim-Hongsik is important to clear the Chonnam art history. Until now the study of Chonnam art history is rare. Generally the year of 1945 when Oh-Chiho came to hometown is known as the begging of Chonnam art. But in the viewpoint of art history, the first Honam artist who introduced the western art into Chonnam was Kim-Hongsik. Kim was rather a enlightener then an artist in 1928 when he had came from Tokyo to Yeosu. He engaged in national movement, youth movement, etc and devoted himself to enlighten the Yeosu. In the meantime he painted every spare time. And after 1945 he constructed artlier at the beach near Mansungri mountain and had devoted himself to painting until he died. Kim-Hongsik maybe regared as the first western artist in Chonnam because of the facts that he was an elite who tried to enlighten the people and his painting is remained until now. Now we can retake the hidden 20-years of Chonnam art history. And now we can know that the Chonnam art history has started about 10 years later than it came to Korea. By studying Kim-Hongsik we can find the clue of the origin of Chonnam art and show the new direction of Chonnam art history. The purpose of this writing is to show his life in the viewpoint of his national- cultural movement and evaluate his value through his art Kim-Hongsik's art concludes a portrait, a nude, a landscape, a still life, a snow landscape etc. He touch objects academically, frankly and sincerly. He depicts the dark side of people supressed by Japanese imperialism. Now we can confirm that the first artist in Chonnam is Kim-Hongsik and Chonnam art started in earlier 192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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