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鄕歌硏究를 둘러싼 昏迷와 疑問 : 「風謠」에 關한 諸問題를 中心으로
池憲英 忠南大學校 文理科大學 國語國文學會 1972 語文論志 Vol.1 No.-
8.15 光復以後 再出發한 韓國 學界가 量的으로나마 豊登을 보이고 있음은 多幸하고 고마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 學界는 8.15~6.25間의 祝祭 機運 속에서 고요히 새 出發한 듯이 보이지마는, 實은 숨은 소용돌이와 회호리가 이골에도 휘몰아쳤던 것을 看過할 수 없겠다. 이에다 6.25의 試鋉은 脆弱한 基盤에 不請客이 闖入할 틈을 벌리었으나 이 激動은 오히려 能力과 眞贋을 判別하는 作用을 하였고 또 硏究 資料의 移動과 露出을 몰아온 契機도 마련하였던 것인가 한다.
池憲英 충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어문연구회 1967 語文硏究 Vol.5 No.-
이상에서 논술해 내려온 것을 재종합하여 결론을 내리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첫째로, 웅진주 (도독부 13현) 우술군 지역 (웅진지동)의 어느 산맥의 능선상에 웅령·취리산은 위치하여 있고 회맹 맹단은 그 유적을 남기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첫째로, 우술군지역 (복신등 백제복흥군중의 강동부대가 침투활동했던 백제령의 동단)에 옹산성 (대책 및 소책) 유적이 위치하여 있고 이 옹산성 근방에 웅현성 축성의 유적이 남아 있으며 웅현정도 웅현·옹산 근방에 비정될 것으로 보여진다. 이 결론에서 우리는 새로히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할 수가 있겠다. 1. 우술군 지역내에 위치하여 있던 웅현(축성)과 웅령(축단)은 동일지명이 사서에 양양으로 기록된 것일까? 2. 그렇지 않으면 우술군 지역내에 양개지명 웅령(축단)·웅현(축성)이 각각 자리잡고 있는 것일까? 3. 나아가서, 「취리산회맹」은 「웅령회맹」의 반복재연이었으므로 그 회맹단은 동일한 장소가 아니었을까? 다시 말하면 웅령은 혹이나 취리산이라고도 불렸던 것이나 아닐까? 그리고 웅현(축성) 웅현정의 위치를 찾기 위하여서는 이와 긴밀불가결의 관계를 지니고 있는 옹산성·혜포 및 투도송염하던 웅진도로와 신라 문무대왕의 고구려 북정행로 등의 비정문제가 대두되게 되고 옹산성의 전략적 위치 등이 논급되어야 할 것으로 안다. 따라서 본논문이 제기하고 있는 웅령회맹 맹단 및 취리산회맹 맹단의 위치비정 이와 부대되어 제기될 웅현(축성)의 위치 비정문제는 (1) 「옹산성에 대하여 -웅현 및 혜포의 비정」 (2) 「지라성 (일운조류성)에 대하여 -두량이성의 비정」 의 양개 논몬을 완료한 다음에 이를 지명학적 현지에서 다시 결말지어야만 하게 되었다.
池憲英 충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어문연구회 1970 語文硏究 Vol.6 No.-
이 논문이 내걸은 「炭峴」은 「三國史記」제이십팔 백제본기제육 의자왕 이십년조의 기록에 보이는 지명이다. 동조의 기록은 (1) 「六月……高宗詔左偉大將軍蘇定方……統兵十三萬以來征 兼以新羅王金春秋爲嵎夷道行軍總管將其國兵與之合勢 定方引軍 自城山濟海 至國西德勿島 新新王羅遺將軍金庾信 領精神兵五萬以赴之. 王聞之會群臣 問戰守之宜 佐平義直 進曰……先與唐人決戰可也. 達率尙永等曰 不然……先使偏師擊羅軍 折其銳氣 然後 伺其使而保國矣. 王猶豫不知所從. 時佐平興首 得罪流竄古馬彌知之縣 遣人問之曰 事急矣. 如之何而可乎. 興首曰 唐兵旣衆 師律嚴明 況與新羅 共謀기角 若對陣於平原廣野 勝敗未可知也. 白江惑云伎伐浦 炭峴或云沈峴 我國之要路也. 一夫單槍 萬人暮當 宜簡勇士往守之. 使唐兵不得入白江 沿流而不得方舟 羅軍升炭峴 由俓而不得幷馬 當此之時 縱兵擊之. 譬如殺在籠之鷄 離網之魚也·王然之. 又聞唐羅兵 己過白江·炭峴 遣將軍階伯 師死士五千出黃山 與羅兵戰 四合皆勝之 兵寡力屈 竟敗 階伯死之. 於是 合兵禦熊津口瀕江屯兵.」 라고 보여주고 있다. 이 기록(1)은 「炭峴」에 대한 역사지리적 고찰의 실마리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이 기록(1)에 「炭峴或云沈峴」이라 「或云 沈峴」이 덧붙여 있으므로 하여 「炭峴」은 그저 역사지리적 고찰로서만은 해결될 수 없는 새로운 과제를 제기시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