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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search Park Project와 新産業 Complexes

        後藤邦夫 啓明大學校産業經營硏究所 1989 啓明大學校ㆍ挑山學院大學國際學術세미나 Vol.1989 No.-

        日本에 있어서도 最近理念이라고 생각되는 이 發表의 內容은, 韓國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컸다고 하겠다. 특히 日本에 있어서의 第2次 大戰後 經濟發展狀況을 歷史的으로 검토하고, research Park의 理念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 과정을 해명한 것은 매우 印象的이었다. 특히 park라는 表現이, 工業地帶가 가지는 오염된 image를 전환시키고자하는 意圖에서 시작하여, 이제야 地域開發·都市政策·産業政策分野에 있어서 定着되어가고 있다는 지적이 주목을 끈다. 그리고 具體的인 事例硏究로서 日本의 「關西學術硏究都市」project를 상세히 紹介하고, 이것이 research Park의 集積으로서 파악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發表者는 이 Project에 실지로 관여하고 있으므로 그 報告에는 더욱 실감이 났다. 아무리 實質的이고 經濟的인 目前의 成長에 汲汲하더라도, 그 底邊에 항상 이와같은 遠大하고 高邁한 理念을 가지고 있어야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 發表者인 後藤邦夫敎授가 부득이 한 사정으로 참석못하고, 伊代田光彦敎授가 代讀하는 방법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眞意는 충분히 전달 되었다고 생각한다. 發表가 끝나고 전지한 討議가 있었다. 質疑應答 內容要旨를 다음에 기록하기로 한다. 李炳贊敎授로 부터의 關西學術硏究都市를 推進하는데 있어서 政府의 役割이 무엇인가의 질문에 庄谷邦辛敎授의 答辯이 있었다. 本人의 硏究가 아니기 때문에 명확한 答辯은 할 수 없다. 日本에 있어서는 關西計畵에 앞서 筑波學術硏究都市 建設이 있었다. 그 당시 通産省硏究所, 遞信省硏究所, 農林省硏究所가 老朽되어 뭔가 새로이 建設하지 않으면 안되어서 筑波大學이 있는 곳에 科學團地를 設定하여 推進 했었다. 現在 關西計劃은 日本의 財政狀態가 그 당시 보다 어렵기 때문에 國家에서 全的으로 推進하는 것은 不可能하고 民間의 協力에 의해서 推進하고 있다. 國土廳과 民間이 共同으로 推進하기 때문에 意見이 一致되지 않는 傾向도 있다. 다음에 東邱織物 李泳凞社長으로 부터 産業狀況 變動의 時期區分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또한 高度成長期에 이미 여러가지 問題가 發生 했을 것이다. 그러면 最近에 이와 같은 問題가 提起된 理由는 무엇인가에 관한 質問이 있었다. 여기에 대해 庄谷邦辛敎授의 答辯이 있었다. 日本의 社會變動은 학자에 따라서 歷史的으로 時期區分을 다르게 하고 있다. 後藤邦夫敎授는 工業發展에 초점을 맞추어서 時期區分을 행했다고 생각한다. 本人의 見解에 의하면 高度成長은 1966年부터 1973年까지로 본다. 高度成長기에 필연적인 問題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時期區分을 이렇게 한 것은, 社會問題로 表面化 되었다는 것이다. 公害問題로 田中首相이 日本列島改造論을 提示할 정도로 社會的으로 충분한 理由가 있었다. 18年동안 問題가 있었겠지만 그 당시에는 潛在的이었던 것이 社會的인 이유가 되어 顯在化된 것이 이 時期였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해 伊代田光彦敎授의 보충 답변이 있었다. 이 問題를 생각하는 데는 日本經濟의 變遷에 대해서 基本的인 背景을 考察해 볼 필요가 있다. 終戰直後에는 成長을 빨리 해서 國民生活을 豊富하게 해야 되겠다고 하는데 國民的인 合意가 이루어진 狀況이었다. 그래서 高度成長을 이룰 수 있었고 物質的인 生活은 높은 水準에 도달했으나 國民生活에 다음과 같은 問題點이 나타났다. (1) 高度成長으로 인한 公害 때문에 國民健康을 해치게 되었다. (2) 統計的으로 높은 成長을 기록하면서도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實質的인 國民生活은 풍요롭지 못했다. (3) 人口過密 또는 過疎地域이 생기고 범죄와 교통사고가 增加하는 등 社會的問題가 發生했다. 그래서 國民들은 GNP가 올라가고 高度로 成長한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한 것인가에 대한 問題意識을 갖고 그 意義를 轉換하게 되었다. 이것이 1970年代의 오일쇼크에 즈음하여 1975年경 사이에 일어난 日本經濟의 轉換點이 되었다. 즉 量보다 質에 더 重點을 두게 된 것이다. 最近에 와서는 財政赤字가 많기 때문에 社會福祉政策에 대하여 또한 反省을 하지 않으면 안될 立場에 있으나, 經濟成長 보다 福止優先主義를 취해야 겠다는 생각이 重要하게 대두되었다. 後藤邦夫敎授의 論文中에 特히 강조된 것과 같이, 高度成長 때문에 自然環境을 파괴 해서는 안되겠다고 하여 世界 어느나라 보다 公害에 대해서는 엄격한 規制를 加하는 立法이 體系的으로 完備되어 있다. 産業構造面에서 資源을 많이 消費하는 構造에서 資源을 적게 消費하는 産業構造 즉 서비스産業, 頭腦産業으로 轉換해야 되겠다고 하는 것에 國民的인 合意가 이루어져 가고 있다. 이와같이 公害를 規制하고 頭腦産業에 置重하다 보니 産業自體가 國際的으로 强한 競爭力을 形成하고 있다. 또 金漢圭敎授로 부터의 開發途上國에서는 여러가지 環境與件으로, 이 理論과 實際를 活用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지 않겠는가에 대한 質問에 庄谷邦辛敎授의 答辯이 있었다. 리서치파크(Research Park)는 歷史的인 連繫性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前提로 한다. 즉, 그 前身인 工業團地가 있었다는 것이다. 日本에서는 大企業을 中心으로 해서 1950年代부터 1960年代까지 工業團地가 이루어 졌다. 1958년 堺市를 中心으로한 臨海工業團地가 하나의 例다. 또한 中小企業에 의한 工業團地가 政府의 65%의 支援을 받아서 1961년에 이루어 졌다. 堺市 工業團地 造成에는 스텐포드大學의 A tool of industrial state란 著書를 활용 했었다. 開途國인 인식 뿐만 아니라 先進國의 實證調査를 根據로 한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有益하다고 생각한다. 日本에서는 炭鑛産業이 斜陽化되자 再開發하는 면에서 工業團地가 되기도 하고 公害를 防止하기 위한, 또는 住宅을 짓기 위한 目的등을 가지고 地方政府와 協力하여 工業團地가 상당한 發展과 效果를 보았다. 韓國에서도 工業團地는 상당한 發展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工業團地는 散發的으로 工場을 設置하는 것보다 集團的으로 設置하면 規模의 利益을 얻을 수 있고 또 現實的으로 바람직할 것이다. 리서치파크(Research Park)가 그러한 工業團地를 前身으로 하여 建設된 것 이라고 한다면, 工業團地의 內容이 高度의 技術을 要求하는 尖端技術産業으로 바뀌어 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工業團地를 發展 시켜야 한다는 것은 開發途上國도 필요하기 때문에 이러한 理論과 實際가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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