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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를 통해서 본 한국교회 예언적 설교의 회복 : 함석헌의 예언적 외침을 중심으로

        문상원 장로회신학대학교 2016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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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를 통해서 본 한국교회 예언적 설교의 회복 본 논문은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를 바탕으로 한 예언적 메시지를 통해 한국 교회 강단에서 예언적 설교의 회복을 신학적으로 연구하려 하였다. 이를 위한 신학적인 기초 작업으로 예언적 설교의 정의와 함께 예언적 설교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바로 잡고자 문헌 고찰하였다. 이어서 구약과 신약성경 속 예언자와 예언적 설교를 비교하고 특징을 살펴봄을 통해 성경 속의 예언자와 예언적 설교를 살핌으로 믿음의 공동체와 예언적 설교사역의 목회적 의미와 함께 예언적 설교를 통해 세워지는 예언적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은 시대와 사회를 변혁하심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전반적인 한국교회의 설교 상황을 살펴보면서 한국교회의 강단이 개인적인 구원과 신앙생활에 대한 설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도 설교의 사회적인 차원과 사회를 세워가는 믿음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책임과 역할에 있어 예언적 기능이 그동안 무기력할 정도로 약한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예언적인 설교를 회복한다 함이 개인과 사회에 대한 믿음을 공언이며 이를 위해서는 설교의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의 두 바퀴를 고르고 바르게 함이 필요한 것이다. 본 논문은 함석헌의 생애와 사역, 그의 씨알사상과 그를 통해 확인되어지는 신앙관, 교회에 대한 이해를 살핌을 통해 그가 한국 사회와 한국 기독교에 외친 예언자적 외침을 살펴보았다. 특히 그동안 신학적 논의가 민감했고 무교회주의자로 그간 각인되어 왔던 그의 교회관에 대하여, 함석헌 스스로가 밝힌 글과 강연을 바탕으로 재평가해 보고자 하였다. 초기에 교회 ‘조직’의 무용성을 이야기하던 그의 시각이, 후기로 갈수록 기독교와 교회의 현실을 살리고 새로운 시대에 힘을 더하기 위해 조직은 부분적으로 필요하다는 태도로 변해 감을 확인하였다. 이어서 함석헌의 역사인식과 민중인식 시각으로 본 한국 기독교와 교회 비판을 살펴보면서 혼란의 시대에 두 눈을 감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할 민중들을 외면하고 소외시키는 한국 기독교를 함석헌은 매우 강하게 비판하였다. 함석헌은 제도화, 형식화 되어 배타적인 자세를 보이는 종교는 더 이상 밀물과 같이 밀려오는 새로운 시대를 담을 수 있는 새종교가 아님을 선포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담은 새종교를 꿈꾸는 것이다. 권위적이고 제도적인 종교로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담을 수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수도 없는 것이다. 함석헌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은 민중들의 입술을 통해 증거된다고 보았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는 함석헌이 제시하는 예언적 메시지로 한국교회의 종교적인 문제해결과 함께 역사성, 사회성의 회복, 그리고 민중의식의 회복을 들었다. 시대의 역사와 사회를 향한 거룩한 책임을 가지고 맞섬과 대듦을 통한 개혁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도전을 듣고 이에 대한 책임을 갖는 것이 신앙이요 이것이 함석헌의 예언적 외침을 통한 한국교회와 강단의 종교개혁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Ⅳ장에서는 한국교회 예언적 설교의 회복을 위한 방안으로 함석헌이 한국 기독교에 던진 예언적 메시지를 바탕으로 설교자의 예언자적 정체성 회복, 설교의 사회성 회복, 설교의 공동체성 회복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나서 함석헌의 역사와 사회를 함께 읽는 정신과 책임감, 불의한 세상의 정황에 예언자적 저항정신을 계승한 설교자와 그들의 설교를 연구하려 하였으나, 신학적이고 제도적인 어려움과 함께 실제 그의 예언적 메시지와 사상을 계승한 설교자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는 문제로 본 연구는 함석헌의 예언적 저항정신을 함양한 설교자를 선정하는데 있어, 역사적 계승의 차원이 아닌 동일한 예언적 저항정신이 나타나는 설교자를 둘 선정하여 그들이 전한 예언적 설교를 살펴보았다. 위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역사와 사회, 그리고 민중과 생명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목회와 설교사역에 힘쓴 두 명의 목회자 배민수와 김기석의 설교를 살펴보았다. 배민수는 신앙과 이념이 공존과 대립을 반복하던 시기에 사회적인 목회와 함께 예언적 설교를 감당하였고, 김기석은 아직도 이념의 대립이 끝나지 않은 분단의 시기에 생명과 평화를 주안점으로 삼아 시대를 관통하는 예언적인 설교에 힘쓰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렇게 함석헌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책임, 불의에 저항정신으로 맞서는 예언자적 신념,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그것들을 고민하며 성경적인 메시지를 선포하려 애쓰는 설교자의 설교를 통하여 한국교회 강단의 예언적 설교의 회복의 방안과 가능성을 함께 살펴 보았다.

      • 함석헌의 ‘씨알'사상을 통해 본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회통(會通) 가능성 연구

        우상범 강릉원주대학교 교육대학원 2020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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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초록 함석헌의 ‘씨ᄋᆞᆯ’사상을 통해 본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회통(會通) 가능성 연구 우 상 범 江陵原州大學校 敎育大學院 倫理敎育專攻 ‘씨ᄋᆞᆯ’의 일반적이고 관례적이며 공식적인 영문 표기는 ‘the People’이다. 이는 함석헌이 창간한 『씨ᄋᆞᆯ의소리』(1970년 4월 창간호)의 영문 표기 ‘Voice of the people’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참고로 ‘the people’이 ‘the People’로 쓰인 것은 1978년 6월 제74호부터이며, 현재 ‘함석헌기념사업회’에서 계속 발간하고 있는 『씨ᄋᆞᆯ의소리』의 영문 표기 역시 ‘Voice of the People’이다. 이는 ‘씨ᄋᆞᆯ’의 태생이 『大學』의 첫 구절 가운데 ‘在親民’의 ‘民’을 씨알로 풀어 쓴 데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관련 논문들의 영문 표기 역시 그 선례를 따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역사성을 담은 고유명사로서의 의미를 존중하는 바이나, 본 논문에서 굳이 ‘씨ᄋᆞᆯ’의 영문 표기를 ‘Ssial’로 쓴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함석헌이 사용한 ‘씨ᄋᆞᆯ’은 그 당시 ‘민중(民)’을 대체하는 사회・정치적 개념로써 그 의미가 있기도 하지만, 인간 속에 내재된 ‘하느님의 씨(明德)’의 뜻까지 포괄하는 종교・철학적 언어로 확대・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즉 영어의 ‘the People’은 후자의 뜻을 담아내기 어렵다는 이유이다. 물론 동학(東學)의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처럼, ‘중생(衆生)이 부처’(衆生是佛)이고 ‘하느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라는 뜻으로 본다면, 이미 ‘the People’ 속에도 그 의미가 담겨있다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적 탐구 끝에 얻어지는 해석이지, ‘the People’이 가지고 있는 사전적 의미는 아니다. 다른 하나는 함석헌의 사상을 대표하는 ‘씨ᄋᆞᆯ’을 ‘the People’로 번역한 것은 그 당시 상황과 잡지라는 매체 등을 고려할 때 나름대로 이해가 되지만, 그의 씨ᄋᆞᆯ사상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본다면, ‘the People’은 ‘씨ᄋᆞᆯ’이라는 고유한 한글의 의미, 특히 󰡐ㆍ󰡑의 의미를 다 내포할 수 없다. 함석헌은 스승 유영모와 함께 우리말로 우리 생각을 전개해나간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따라서 우리말로 된 우리 사상의 본의(本義)를, 그 고유성과 독창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는 그 원어 발음 그대로를 영문 표기화 하는 것이 학술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참고로, 여기서 ‘Ssial’의 표기는 국립국어원의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영문 규정(2014. 12. 5. 개정 고시 반영)’에 따른 것이며, ᄋᆞᆯ의 ‘ᆞ’는 영문으로 표기할 길이 없어, 알의 ‘ㅏ’에 해당하는 ‘a’로 표기했음을 밝혀둔다. 그리고 ‘씨ᄋᆞᆯ’이란 말의 형성과정과 그 의미에 대한 상세한 사항은 본 논문 <Ⅱ-1. ‘씨ᄋᆞᆯ’사상의 형성과 의의>와 <Ⅱ-2. ‘씨ᄋᆞᆯ’의 의미>에서 살펴볼 수 있다. 본 논문은 불교와 그리스도교라는 거대한 두 종교의 회통(會通) 가능성을, 20세기 한국의 함석헌, 그의 ‘씨ᄋᆞᆯ’사상을 중심으로 살펴 본 연구물이다. 여기서 회통(會通)은 서로 다른 물줄기가 만나 아우러지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섞임’의 의미가 아니라, ‘아우르는 과정’을 통해 보다 크고 높고 성숙된 흐름으로, 새로운 차원과 새로운 질서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두 종교는 매우 다르다. 그 근원이 완전히 다른 물줄기라는 것이다. 지역적으로 불교는 동양을, 그리스도교는 서양을 대표하는 종교이다. 그리고 특성상으로는 전자는 깨달음의 종교이고, 후자는 계시의 종교이다. 그래서 이를 ‘안으로부터의 해탈 enlightenment from within’과 ‘밖으로부터의 구원 salvation from without’이라고 특징적으로 부르기도 한다. 절대적 실체가 없음을 누구나 깨닫기만 하면 붓다가 될 수 있다는 불교를, 그리스도교는 무신론이나 다신론이라고 비판한다. 반면에 전능한 신과 무기력한 인간, 일방적인 계시와 강요되는 복종, 이런 구조의 그리스도교를 불교는 신 중심적이고 비합리적 신앙이라고 비판한다. 혹은 서로를 비판조차 하지 않은 채, 아예 무관심하거나 냉담한 자세로 일관할 뿐이다. 이처럼 도저히 마주하기조차 어려운 이질적인 두 종교 사이의 간극(間隙)이, 좀 더 높은 자리에서, 즉 회통(會通)의 새로운 차원에서 보면 상호 침투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같은 곳을 지향하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더 나아가 자기 지역, 자기 국가, 자기 민족, 자기 종교만을 내세우며 갈등과 반목, 혹은 무관심으로 치닫고 있는 이 세상에 타자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길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사실 다르다는 측면에서 보면, 불교는 불교대로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대로 그 안에서 다르다. 그렇게 나누다 보면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사람의 수만큼 다른 종교가 있다고 극단적으로 말해야 할 것이다. 하기야 좋은 의미로 간디는 “이 세상에는 사람 수 만큼이나 많은 종교가 존재한다.”라고 얘기했다. 이처럼 다름이란 것은 갈등과 반목의 원인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존중과 조화의 전제가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본 논문은 함석헌과 그의 ‘씨ᄋᆞᆯ‘사상을 호출했다. 함석헌은 동서(東西) 정신을 아우른 한국 현대 사상가이자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하고 있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회통(會通)은 그리스도교의 한국적 ‘뿌리박음’[토착화]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이런 함석헌의 ‘한국적 그리스도교’는 이 땅에 처음으로 그리스도교가 소개된 이후 백 년이 지나 시작된 것이다. 이는 역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신라에 불교가 전래 된 이후 백 년 뒤에 원효가 ‘신라불교’라는 새 터를 닦고, 조선이 성리학의 이념으로 나라를 세운 지 백 년이 흐른 후에 퇴계가 ‘조선 성리학’이라는 새 밭을 일군 것에 비견되고 있다. 회통(會通)의 과정에서 각 종교는 변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변화를 혼합주의나 수정주의로 매도(罵倒)하는 것은 마치 시냇물들이 만나서 큰 강을 이루는 것을 가로막고, 애벌레가 번데기를 거쳐 나비로 성장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처음 그대로 남아있는 종교는 없다. 세상에 완결된 종교는 없다. 그 어떤 종교도 그 시대와 세계의 산물이어서, 모든 생명체와 같이 자라야 하며, 때론 자기 혁명을 통해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 말은 새로운 시대와 세계를 만나면 다시 성장하고 성숙해서, 새로운 종교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는 역사를 보면 자명해진다. 지금까지의 그리스도교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고, 헬레니즘의 정신적 뿌리는 고대 그리스 사상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제 동양으로 유입된 그리스도교는 동양의 ‘유불도’(儒佛道) 사상과 조우(遭遇)하며 영향을 주고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함석헌의 ‘씨ᄋᆞᆯ’사상이라는 ‘두물머리’[合水點]에서 만난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살펴봄으로써 이질적인 종교나 사상이 어떻게 아우러질 수 있고, 또 그것이 얼마나 서로를 성장・성숙시킬 수 있는지를, 본 논문에서 알아보고자 했다. 이 글의 주요 구성과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본론이 시작되는 Ⅱ장부터 시작해 보자. 먼저 <Ⅱ-1 ‘씨ᄋᆞᆯ’사상의 형성과 의의>에서는 ‘씨ᄋᆞᆯ’이란 말의 태생과 그 말의 속뜻, 그리고 ‘씨ᄋᆞᆯ’사상이 가지는 의의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런 후에, <Ⅱ-2 ‘씨ᄋᆞᆯ’의 의미>에 대하여 알아보았는데, 그 의미는 크게 ‘종교・철학적 의미’와 ‘사회・정치적 의미’로 구분했다. 이는 본 논문의 전체적 구조, 즉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아우르는 ‘두물머리’로서 ‘씨ᄋᆞᆯ’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분이다. 그 이유는 Ⅲ장을 요약하면서 밝혀질 것이다. 이어서 <Ⅱ-3 ‘씨ᄋᆞᆯ’의 체(體)와 용(用)>에서는 『중용』(中庸) 1장 첫 문장의 풀이와 간디・함석헌의 비폭력 사상을 통해, ‘씨ᄋᆞᆯ’의 체(體)와 용(用)으로서 생명과 평화를 다루었다. Ⅱ장의 마지막인, <Ⅱ-4 ‘씨ᄋᆞᆯ’의 실체성(實體性, substantiality) 문제>에서는 ‘씨ᄋᆞᆯ’의 실체성을 둘러싼 의문을 불교의 ‘무아’(無我) 개념과 함께 생각해봄으로써,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아우르는 ‘두물머리’로서 ‘씨ᄋᆞᆯ’의 기반을 확인해보았다. Ⅲ장에서는 이러한 ‘씨ᄋᆞᆯ’사상의 토대 위에, 본 논문의 주제인 두 종교 간의 회통(會通)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앞에서 언급한 ‘씨ᄋᆞᆯ’의 의미로 접근해 보면, ‘종교・철학적 의미’로서 ‘씨ᄋᆞᆯ’은 <Ⅲ-1 ‘대각’(大覺)과 ‘메타노이아’(metanoia), 그리고 ‘생각’>과 <Ⅲ-2 ‘무아’(無我)과 ‘케노시스’(kenosis), 그리고 ‘자리’>에 해당하고, ‘사회・정치적 의미’로서 ‘씨ᄋᆞᆯ’은 <Ⅲ-3 ‘자비’(慈悲)와 ‘아가페’(agapē), 그리고 ‘같이’>와 <Ⅲ-4 ‘정토’(淨土)과 ‘바실레이아’(basileia), 그리고 ‘뜻’>과 연결된다. 이 둘은 ‘씨ᄋᆞᆯ’의 체(體)와 용(用)이며, 이(理)와 사(事)이다. 또한 이 양자(兩者)는 불이(不二)적 관계이기 때문에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 <Ⅲ-2>와 <Ⅲ-3>에 대해 철저히 깨닫고 인식의 전환을 이루는 것이 <Ⅲ-1>이며, 이것이 이 땅에 온전히 도래하고 실현되는 것이 <Ⅲ-4>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Ⅳ장의, <Ⅳ-1 ‘씨ᄋᆞᆯ’사상과 동서(東西) 정신의 회통(會通)>에서는 지금껏 살펴 본, ‘씨ᄋᆞᆯ’사상을 정리하며 동서(東西) 정신의 ‘두물머리’로서 그 역할을 다시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Ⅳ-2 남겨진 과제와 앞으로의 전망>에서는 3가지 과제를 제시하였다. 첫째 유영모와 함석헌의 ‘씨ᄋᆞᆯ’사상의 집대성(集大成)화, 둘째 다양한 종교・사상의 ‘두물머리’로서 ‘씨ᄋᆞᆯ’사상의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검토, 셋째 ‘씨ᄋᆞᆯ’사상의 현실적 적용과 참여가 그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그러한 ‘씨ᄋᆞᆯ’사상이 세계사상사 속에서 진정 큰 봉우리로 우뚝 설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 주제어 : 씨ᄋᆞᆯ, 회통, 뿌리박음, 대각, 메타노이아, 생각, 무아, 케노시스, 자리, 자비, 아가페, 같이, 정토, 바실레이아, 뜻. Abstract A Study on the Possibility of Hoetong(會通, Harmonization) between Buddhism and Christianity through Ham Seok-heon’s ‘Ssial’ Thought Woo Sang-bum Major in Ethics Education Graduate School Education GangneungWonju National University Summary The general, customary and official English marker of '씨ᄋᆞᆯ' is 'the People'. This can be found in the origin of the English-language marker 'Voice of the people' in the book 『씨ᄋᆞᆯ의 소리』 published by Ham Seok-heon (first issue in April 1970). For reference, ‘the people’ was used as ‘the People’ since No.74 June, 1978, and the English flag of 『씨ᄋᆞᆯ의 소리』 which is currently published at the ‘Ham Seok-Heon Memorial Association’ is also "Voice of the People". This seems to be due to the fact that the birth of '씨ᄋᆞᆯ' was written by solving the '民' of '在親民' in the first passage of 『大學(Daehak)』. Therefore, it is true that the English flag of most related papers also follows the precedent. Although it respects the meaning of the proper noun containing such history, it is for two reasons that this paper has written the English marker of '씨ᄋᆞᆯ' as 'Ssial'. One is that ‘씨ᄋᆞᆯᆞ’ used by Ham Seok-heon is meaningful as a social and political concept that replaces ‘the people(民)’ at that time, but it was expanded and deepened into a religious and philosophical language that encompasses the meaning of ‘the seed of God(明德)’ inherent in human beings. In other words, the English word 'the People' is difficult to capture the latter meaning. Of course, like Donghak's 'Man is the heaven'(人乃天), if you think that 'All beings is Buddha'(衆生是佛) an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it should be interpreted that the meaning is already in ‘the People’. But it is an interpretation obtained after philosophical inquiry, not the dictionary meaning of 'the People'. The other is that the translation of ‘씨ᄋᆞᆯ’, which represents the thought of Ham Seok-heon, as ‘the People’, is understandable considering the situation at that time and the media of the magazine, but in the overall context of his ideas, ‘the People’ cannot contain all the meanings of the unique Korean words ‘씨ᄋᆞᆯ’. Ham Seok-heon is a representative philosopher who developed our thoughts in Korean with his teacher Yoo Young-mo. Therefore, in order to maximize the uniqueness and originality of Korean ideology in Korean, it is considered that it is academically desirable to write the original pronunciation of English as it is. For reference, the notation of 'Ssial' is based on the 'Korean Romanization English Regulations (2014.12.5. Revised Notification)' of the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Language, and the ‘ᄋᆞᆯ’ of ‘ᆞ’ is not written in English, so it is revealed that it is written as 'a' corresponding to ‘ㅏ’ of ‘알’. And the details of the formation process and its meaning of the word ‘씨ᄋᆞᆯ’ can be found in this paper, <Ⅱ-1. The formation and Significance of ‘Ssial’ Thought> and <Ⅱ-2. The meaning of ‘Ssial’>. This paper is a study that focuses on the possibility of Hoetong(會通, Harmonization) between two great religions, Buddhism and Christianity, centered on the 20th century Korea's Ham Seok-heon and his ‘Ssial’ thought. Here, Hoetong(會通) can be likened to the meeting and blending of different streams of water. It does not simply mean 'mixing', but it means entering a new dimensions and a new order, with a larger, higher, more mature flow through the ‘all-encompassing process’. First of all, the two religions are very different. The source is a completely different stream. Regionally, Buddhism is the East, and Christianity is the religion representing the West. And by nature, the former is the religion of enlightenment, and the latter is the religion of revelation. So, it is also characteristically called 'enlightenment from within' and 'salvation from without'. Christianity criticizes Buddhism as atheism or polytheism that anyone can realize that there is no absolute substance and become a Buddha. On the other hand, Buddhism criticizes almighty God and helpless human being, one-sided revelation and forced obedience, and Christianity of this structure as a god-centered and irrational faith. Or they just consistently remain in an indifferent or callous attitude without even criticizing each other.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reveal that the gap between these two disparate religions, which are hard to even face, is interpenetrating at a higher level, that is, from the new dimension of Hoetong(會通), and ultimately aiming for the same place. Furthermore, would it be my excessive greed if I hope to provide a clue to a minimum understanding of others in this world, which is escalating into conflict, antagonism, or indifference, with only its own region, its own country, its own people, and its own religion? In fact, in terms of being different, Buddhism is different in it as Buddhism, and Christianity is different in it as Christ. If you divide it like that, you will have to say in extreme terms that there are religions as different as the number of everyone in a strict sense. In a good sense, Gandhi said, "There are as many religions in the world as there are people." It is true that such difference is the cause of conflict and antagonism, but we must not forget that it is the premise of respect and harmony. At this point, this paper called Ham Seok-heon and his ‘Ssial’ Thought. This is because Ham Seok-heon is a Korean modern thinker and philosopher who encompasses the spirit of East and West. In particular, the Hoetong(會通) of Buddhism and Christianity, which is paying attention to here, is a process that must be passed for Korean ‘Ppuribageum’[indigenization] of Christianity. Ham Seok-heon's ‘Korean Christianity’ began a hundred years after Christianity was first introduced to this land. In the historical context, it is compared to the fact that Wonhyo built a new site called ‘Silla Buddhism’ a hundred years after Buddhism was handed down to Silla, and that Toegye opened of a new field called ‘Choson Neo-Confucianism’ a hundred years after Choson established the country with the ideology of Neo-Confucianism. In the course of Hoetong(會通) each religion change. Blaming these changes as syncretism or revisionism is like blocking streams from meeting and forming a large river, and fearing caterpillars to grow into butterflies through pupae. There is no religion that maintains the same religion as the first. There is no completed religion in the world. Any religion is a product of that time and the world, so it must grow like all living things, and sometimes it must be reborn through its own revolution. This means that any religion should grow and mature again when it meets a new era and the world, and be reborn as a new religion. This reasoning becomes self-evident when we look at history. Christianity so far cannot rule out the influence of Hellenism, and it is clear that the spiritual roots of Hellenism are ancient Greek thought. If so, Christianity, which has flowed into the East, cannot help but encounter and interact with the thoughts of ‘Yubuldo’(儒佛道, Confucianism · Buddhism · Taoism) in the East. In this context, I wanted to find out in this paper how heterogeneous religions and ideologies can be encompassed and how they can grow and mature each other by looking at Buddhism and Christianity met in the 'Dumulmeori'(合水點, confluence) of Ham Seok-heon's ‘Ssial’ Thought. The main composition and contents of this article are summarized as follows. Let's start with Chapter Ⅱ, where the main subject begins. First of all, in <Ⅱ-1 'Formation and Significance of ‘Ssial’ Thought>, we looked at the origin of the word ‘Ssial’, its the hidden connotation, and the significance of ‘Ssial’ Thought. After that, we examined <Ⅱ-2 Meaning of ‘Ssial’>, which was largely divided into ‘religious and philosophical meanings’ and ‘social and political meanings’. This is a very important distinction in understanding the overall structure of this paper, namely ‘Ssial’ as the 'Doomulmeori' that encompasses Buddhism and Christianity. The reason will be revealed by summarizing Chapter Ⅲ. Subsequently in <Ⅱ-3 Essence(體) and Influence of Suchness(用) of ‘Ssial’>, we dealt with life and peace as Essence(體) and Influence of Suchness(用) of ‘Ssial’ through the interpretation of the first sentence of 『the Doctrine of Mean』(中庸) Chapter 1 and the nonviolence(ahiṃsā) thoughts of M. K. Gandhi and Ham Seok-heon. In the last part of Chapter Ⅱ, <Ⅱ-4 the substantiality problem of ‘Ssial’>, we confirmed the foundation of ‘Ssial’ as ‘Dumulmeori’ encompassing Buddhism and Christianity by considering the question surrounding the substantiality of ‘Ssial’ along with the concept of Non-self(anattan, anātman) in Buddhism. In Chapter Ⅲ, the Possibility of Hoetong(會通) between the two religions, the subject of this paper, was examined on the basis of such ‘Ssial’ Thought. When approaching with the meaning of ‘Ssial’ mentioned above, ‘Ssial’ as a ‘religious and philosophical meanings’ correspond to <Ⅲ-1 'Enlightenment’(大覺), 'Metanoia', and 'Saenggak’(thought)> and <Ⅲ-2, 'Non-self'(無我), 'Kenosis', and 'Jari’(emptiness)>. And ‘Ssial’ as a ‘social and political meanings’ is connected to <Ⅲ-3 'Mercy'(慈悲), 'Agapē', and 'Gachi'(together)> and <Ⅲ-4 'Pure Land'(淨土), 'Basileia' and 'Tteus'(meaning, will)>. These two are Essence(體) and Influence of Suchness(用) of ‘Ssial’, and the two are Universal-Principle(理) and Particular-Phenomena(事). Also, both are one and two, two and one at the same time because they are the relationship of non-duality(不二). And in other aspects, it is <Ⅲ-1> to realize <Ⅲ-2> and <Ⅲ-3> thoroughly and achieve a change of awareness, and <Ⅲ-4> is the complete arrival and materialization of this land. Finally, in chapter Ⅳ, <Ⅳ-1 ‘Ssial’ Thought and Hoetong(會通) of East-West spirit>, we summarized ‘Ssial’ Thought, which we have seen so far, and reconfirmed the role as ‘Dumulmeori’ of East-West spirit. And in <Ⅳ-2 Remaining Tasks and Future Prospects>, three tasks were presented. First the great synthesis of Yoo Young-mo and Ham Seok-heon's ‘Ssial’ Thought, second the multi-faceted and multi-layered examine of ‘Ssial’ Thought as ‘Dumulmeori’ of various religions and thoughts, third the practical application and participation of ‘Ssial’ Thought. And In the last order, this paper predicted that such ‘Ssial’ Thought would stand as a truly great peak in the history of world thought. □ Keywords : Ssial, Hoetong, Ppuribageum, Enlightenment, Metanoia, Saenggak, Non-self, Kenosis, Jari, Mercy, Agapē, Gachi, Pure Land, Basileia, Tteus.

      • 함석헌의 고난사관의 현대적 이해 : 「뜻으로본 한국역사」를 중심으로

        이준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1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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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함석헌의 고난사관의 현대적 이해에 관한 연구이다. 이 연구는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중심으로 했고 그가 저술한 책들과 한국사학자들의 변증 기타 함석헌에 대한 연구서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 논문은 제I장 서론, 제II장 역사가로서의 함석헌, 제III장 함석헌의 역사 이해, 제IV장 함석헌의 한국사 이해, 제V장 함석헌의 고난사관에 대한 현대적 이해, 제VI장 함석헌의 무교회주의의 비판적 성찰, 제VII장 결론의 순서로 전개 되었다. 논문의 간략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함석헌은 당시 무교회주의 신자로서 예수의 고난을 우리 역사를 해석하는 새로운 틀로 제시하였다. 그래서 한국사를 고난의 역사로 정의하였다. 이러한 고난의 역사는 식민지 시절 그리고 민주화 운동기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역사에 대한 새로운 안목과 통찰을 심어주었던 것이 분명하다. 특별히 한국 교회와 신학대교에서 강조되어야 할 역사의식이나 올바른 기독교적 역사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목회자들도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적 역사교육이 교회와 신학대학에서 이루어질 때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회에 대해 더 깊은 책임의식을 느낄 것이다. 또한 이 사회의 구성원과도 더 효과적이고 의미 있는 만남을 형성해 나갈 것이며 이 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심어줄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신적 영역에 대해 더 폭넓게 이해를 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함석헌은 종교, 정치, 사회, 역사를 주제로 많은 글을 썼다. 그러나 그는 종교학자, 언론인, 혹은 역사가라는 공식직함을 한번도 갖고 있지 않았다. 함석헌은 한국 역사의 기조를 고난으로 파악하였다. 그의 한국사 인식은 실증적인 역사연구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민지 현실 속에서 오산학교 중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면서 빠져들었던 깊은 자괴감과 절망감 속에서 얻어낸 직관과 통찰의 결과였다. 함석헌을 한국사학사에서 높게 평가해 주는 이들도 있다. 이만열의 회고에 의하면 “우리 시대의 가장 용감한 언론인이자 가장 탁월한 역사학자인 한 사람이었던 천관우는 함선생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두고, 한국 근대 사학사에서 어떤 특정한 사관을 가지고 한국사를 일관되게 꿰뚫어 본 거의 유일한 역사책이며, 자기는 그 책을 손에 잡은 후 시간을 잊고 탐독할 수 있었노라고 극찬한 적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천관우는 함석헌을 평하며, “우리의 역사를 사료(史料)의 창고가 아닌 펄펄 뛰는 역사로 만들었다” 고도 했다. 이 기백은 자신의 학문적 여정을 더듬으면서, 자신에게 민족주의적 사상을 심어준 두 권의 책을 소개하였다. 그 첫 번째는 신채호의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고, 두 번째의 책은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였다. 이기백은 스스로 이 함석헌의 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함석헌의 사관에서 ① 역사는 진보·발전하는 것 ② 역사는 사실에 대한 해석이 중요하다는 것 ③ 역사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에 대한 강조이다. 함석헌의 종교사상, 그의 역사 이해에 영향을 주었던 사상적 배경 및 영향으로서 ① 성서 속의 예언자 사상 ② 동양 고전, 특히 노자와 장자, 불교의 화엄경 ③ 간디의 불살생, 비폭력, 평화사상 ④ H.G. 웰즈, 마찌니, 우치무라, 조지폭스, 떼이야르 드 샤르댕, 특히 유영모를 들었다. 고난의 사관은 예레미야를 내몰고 호세아를 떠밀고 요나를 끌어냈던 영에 의해 외부로 표출된 믿음의 고백 같은 것이었다. 성경 속에서 발견한 한국사에 대한 고난은 “이 고난이야말로 한국이 쓰는 가시 면류관”, “여태껏 학대받은 계집종으로만 알았던 그가 그야말로 가시 면류관의 여왕” 이었음을 그에게 자각시켜 주었던 것이다. 함석헌은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한다. 고난은 불의의 죄를 씻고, 인생을 깊고 위대하게 만들며, 또한 인생을 하나님께 이끈다. 한국 역사가 고난의 역사인 것은 역사를 낳는 것이 아가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 고난을 다른 종교적 차원과 세계사적 사명으로 승화시킨다. 즉 우리의 민족적 성격은 ‘착함’(仁)인데, 그 착한 바탕이 미래의 세계역사에 큰 사명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역사는 도덕적 싸움의 역사로 바라보는 그는 “이 불의의 짐을 원망도 않고 회피도 않고 용감하게 진실하게 지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말한다. 세계의 불의를 담당함으로써 인류의 역사를 도덕적으로 한층 올리는 것, 세계사의 하수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사명이다.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6·25전쟁까지의 한국 역사를 정리하고 있다. “겪어야 하는 고난을 다 겪고, 당하여야 하는 시련을 다 당한 후, 인류는 저들의 빛나는 후손을 이 세계의 모리아산 ‘한나라’에 보내어 일찍이 자기네 조상의 피로부터 성별한 이 땅을 조물주 안에 영원한 게티스버그(Gettysburg)로 드리고 눈물과 감사로 기도하는 날이 올 것이다.” 함석헌이 한국사를 논하면서 우리에게 주는 뼈아픈 교훈은 바로 “우리 선 자리는 우리가 아는 이상으로 뜻이 깊고 큰 자리다.” 라는 큰 깨달음이다. 가 독립이었다면, 그런 시대에 침묵하고 청의 고증학자들처럼 학문적인 고증에만 치우치고 민족적 아픔은 외면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의 역사서술은 그 어떠한 역사학자들보다 민족의 현실에 다가간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시대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선에서 학생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새로운 비전적 사명을 심어주려 했고, 그것이 비록 「성서조선」에서는 삭제 당했다하더라도 한국사의 격동기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열정을 심어준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사 연구는 선학들의 눈물어린 노력으로 선교사관, 민족교회사관, 그리고 민중사관으로 이어지면서 개설적인 통사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무리한 사관의 적용이나 실증적인 연구성과의 부족으로 사실의 구명보다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이 일부 국사학자들의 참여로 많이 극복되었다. 그러나 지나친 실증의 추구는 신앙 공동체라는 특수사의 특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발생시켰다. 이러한 의미에서 함석헌의 고난사관은 사회학적, 종교사적 접근방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의 고난사관은 성령의 역사로 인한 미국 교회의 한국성장이라는 일부 보수적인 선교사관과 지나친 실증에 매몰되어 전체의 역사를 현상학적인 인과론으로만 파악하려고 하는 실증적 한국교회사 서술에 간격을 매꾸어 줄 수 있는 중간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곧 한국교회를 한국 민족 민중과 연결 지어주고 구체적으로 나타난 역사적 사실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역사가의 직관적 통찰을 함석의 고난사관은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현상학적으로 벌어지는 역사적 사건위에 부단히 그것을 기독교적 관점으로 바라보려는 역사인식 또한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의 고난사관을 한국교회가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아야 한다. 정녕 그는 한국 현대역사의 들판에서 외롭게 서 있는 광야의 소리로서만이 아니라 뜻 있는 역사속에 기독교사상가로서 그 의미를 새겨야 할 것이다. 21세기 미래 한국을 짊어질 젊은 후배들에게 함석헌의 고난사관의 현대적 이해를 통해 귀퉁이를 밝히는 작은 촛불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 함석헌의 윤리와 사상의 비판적 연구

        황정진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2007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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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1년 3월 13일 평안도 용천군에서 태어난 함석헌이 성장하고 자란 때는 20세기 초반 몰락하는 조선왕조에 세계 열강들의 모진 식민지 쟁탈이 벌어진 시기였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미 유년 시절 기독교를 만나고 사립 기독교 소학교를 다니며 신앙을 키웠다. 고등보통학교 시절에 3・1 운동이 일어나 함석헌은 직접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하여 나눠주면서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이해를 키워나갔다.이러한 성장 과정의 영향으로 함석헌 사상의 주요 틀은 ‘고난’과 연관되어 펼쳐진다. 독립운동으로 학교를 중단했던 함석헌은 사촌인 함석규 목사를 통해 남강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민중, 민족, 기독교 정신을 배우며 사상의 틀을 형성했다. 또한 당시 교장으로 부임했던 유영모에 의해 동양사상을 접하는 계기도 마련되었다.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그곳에서 우찌무라 간조를 만나 무교회주의를 접하고 김교신, 정상훈 등의 동기들과 ⌜성서 조선⌟을 통해 무교회주의자로서 활동하였다. 귀국하여 오산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면서 역사 강의를 위해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 역사”를 ⌜성서 조선⌟에 연재하면서 그의 사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활동과 함께 여러 번의 옥고를 치루게 되는데, 함석헌은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하면서 불교경전 등 다양한 책들을 접하면서 사상의 폭을 넓혔고, 해방 후 월남하여 유영모와의 만남을 통해 동양적 사색의 방식과 내용을 본격적으로 체득하게 된다.1948년부터는 함석헌이 직접 이끄는 모임을 시작하여 강좌와 집회를 계속하였고, 1956년부터는 ⌜사상계⌟에 글을 발표하기 시작함으로써 당시 군사 정부에 대한 반독재 투쟁에 깊이 간여하기 시작했다.함석헌의 사상은 또 한 번의 변화를 이루게 되는데, 1947년 월남 직후 병역 거부 운동을 하는 퀘이커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1962년 미국 여행 기간 퀘이커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1970년 퀘이커 세계 대회에 참석하면서 퀘이커의 세계적 지도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퀘이커 운동의 공동체성과 사회적 실천 운동으로 함석헌은 1970년대 이후 정치적 투쟁을 활발히 하면서 민중 운동의 대변지로서 역할을 하게 되는 월간지 ⌜씨의 소리⌟를 창간하였다. 이후 왕성한 강의와 민중과 민주주의를 위한 대 정치투쟁을 하고 여러 번의 옥고를 치루었다. 그의 생애 말년에 함석헌은 담도암으로 투병하다가 1989년 2월 4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함석헌의 사상은 한마디로 표현하기에는 그 폭이 매우 넓다.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동양 사상과 불교 경전, 무교회주의와 퀘이커, 간디의 사상 등 동양과 서양의 학문을 두루 포함하며 대 종합 통일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이처럼 폭넓은 사상들 가운데에도 일관되게 흐르는 그의 사상의 주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고난의 역사’에서 시작하여 민족 통일과 민주화, 세계 평화를 지향한다. 또한 사상가로서 뿐만이 아니라 운동가로서 함석헌은 평생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일관되게 실천하는데, 그 방법론으로 사랑을 바탕으로 한 비폭력 투쟁을 강조하였다.오늘날 함석헌 사상에 대한 연구는 다각도로 이루어져, 기독교 신학에서 뿐만 아니라 교육과 정치 행정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연구,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그의 사상에 대한 기독교 윤리학적 접근과 그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강조한 비폭력과 평화, 민주주의와 초기의 무교회주의자로서 현실 기독교회에 대한 비판, 퀘이커로서 사회 공동체의 실천 강조 등은 기독교 사회 윤리적 접근을 통해 이 시대에 많은 교훈을 줄 것이다. Ham Sok Hon(함석헌) was born on March 13th 1901 in the city named of Yongchon in Pyongan Province. He was born and grew up in the beginning of 20th century, in which powerful countries at that time fought over dominion of the declining Chosun Dynasty. In his childhood, Ham Sok Hon converted to Christianity, attending Christian elementary school, and had kept the Christian faith ever since. When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broke out in his high school, he was greatly influenced to pursue a deeper understanding of history, while participating in a role to distribute declaration letters of independence and Korean national flags, which had been secretly made.Under these circumstances of his youth, the basis of his thoughts developed in relation to “hardships.” Seeking to further participate in movements of independence. He dropped out of school, and was encouraged by pastor Ham Sok kyu(함석규), who was his cousin, to enter Osan School founded by Yi Seung Hoon(이승훈). While studying there, he broadened his understanding about people, the nation of Korea, and Christianity. He had an encounter with eastern philosophies as well, motivated by Yu Young Mo(유영모), the principal of the school at the time.After he graduated from this Osan School, he entered Tokyo Teachers’ College, where he met Uchimura Kanzo(內村鑑三) by whom he was introduced to a Non-church movement(Mookyohoejooeui). He later became a proponent of Non-church and published a serial magazine, “Bible Korea”(Sungseu Chosun) with Kim Kyo Shin(김교신) and Chung Sang Hoon(정상훈). After returning to Korea from Japan, he started his teaching career in Osan School, while continuing to write articles for “The Bible Korea.” His thoughts became widely recognized when he started writing articles on Korean history from the biblical perspective. However, Ham Sok Hon was arrested and imprisoned several times because of these kinds of activities, but his imprisonment gave him more opportunities to read many books about Buddhism and other Eastern religions. These experiences broadened the horizons of his thoughts. After liberation from Japanese colonial rule, he moved to South Korea, where he met Yu Young Mo and gained a deeper understanding about the Eastern philosophies.From 1948 Ham Sok Hon started leading his own academic meeting and giving enlightening lectures to the public. From 1956, he took part in a protest against a military dictatorship at that time by writing articles in “Sasangge”(사상계).In 1947 he moved to South Korea and heard about the Quakers who had been known for their refusal to serve in the military. He was interested and underwent another major change in his thoughts. In 1962, during his trip to the US, he studied in a Quakers school. He attended Quakers world assembly in 1970. He worked as a leader of the Quakers participating in Quakers relief work. Later he published the monthly magazine “The Voice of the People”(Ssie Ahl Eui SoRee) speaking for the grass-roots movements(민중운동). His active lectures and involvement in a political struggle to achieve democracy resulted in several imprisonments. On February 4 of 1989, he died after fighting with cancer for years.Ham Sok Hon’s ideology is too broad to explain in just a few words. His ideology was based on Christianity, combined with oriental philosophies, Buddhism, The Non-churchism, and Quakers. He was even influenced by Gandhi. However, there is a consistent theme in his broad ideology. That is “The history of hardships” according the providence of God, which leads to the unity of people, democracy, and world peace. He dedicated his life acting out what he believed to be true as an activist, as well as a great thinker. He emphasized non-violence as a methodology based on love.Ham Sok Hon’s ideology has been studied by many people and applied in various fields such as Christian theology, education, politics and philosophy. However, not many approaches from Christian ethics have been made to his ideology. Christian ethics approach to his ideology will give more valuable lessons which are needed to live in this time of history.

      • 함석헌의 새 종교론에 대한 연구

        이성정 호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999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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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상에서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 그의 종교이해, 그리스도교와 교회에 대한 그의 비판, 그리고 대안으로서의 새 종교론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우리가 함석헌의 이러한 사상을 살펴보는 것은 서론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 땅에 종교개혁의 한 외침으로 우리가 받아들이고 귀기울임으로 인해서 이 땅에 교회가 새롭게 새롭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로 거듭나고, 개혁되는 역사를 이루어가야 함을 깨닫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본다. 물론 깨닫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개혁되는 역사가 하루빨리 앞당겨지기를 염원하는 맘이 그 안에는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부족하지만 본인은 함석헌의 새 종교론이 그의 그리스도교와 교회에 대한 비판의 대안으로서 제시되었음을 얘기하고 싶다. 어쩌면 어거지 맞추기 식의 얘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분명 이 땅의 잘못 되어가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보면서 새 종교가 필요하다고 외쳤다는 것이요, 그 새 종교의 모습을 이러해야 한다고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비판들 하나 하나를 어떻게 새 종교의 모습으로 대안 제시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서술하려고 한다. 먼저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 중에 "그리스도교만이 종교가 아니다"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것은 그의 "종교는 하나다"라는 사상 속에서 나오게 된 비판이다. 즉 하나님이 한 분이니 종교도 하나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 속에서 대안으로 제시되는 새 종교의 모습은 "하나됨"이다. 그는 하나님도 하나요, 종교도 하나요, 세계도 하나될 터이니 당연히 새 종교는 하나됨의 종교일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기에 "그리스도교만이 종교가 아니다"라는 그의 비판에 대한 대안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두번째 비판은 "그리스도교는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에 대해서 등돌리고 있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이며, "나 혼자만 천당"이라는 극히 이기주의적인 구원관의 결과로 함석헌은 비판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써 그려진 새 종교의 모습은 "뚫려 비침" 이다. "뚫려 비침"은 인간, 인격을 하나의 통일된 존재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히 영과 육, 성과 속,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갈라서 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천당만을 생각하고, 나는 선택되었기에 거룩하다고 생각함으로써, 더러운 세상, 더러운 사회, 구원받지 못할 역사에 대해서 등을 돌리고 돌아서버리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의 대안으로써 "뚫려 비침"은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세번째 비판은 "그리스도교는 민중을 위하지 않는다" 이다. 이 비판은 "종교는 현실을 건지자는 데 있고, 그 현실은 곧 민중"이라는 그의 사상 속에서 제시된 것이다. 곧 종교는 민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종교가 할 일은 민중을 살리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민중을 섬기고 민중을 위해서 싸워야 함은 당연한데, 그리스도교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대안으로 그려진 새 종교의 모습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됨"이다. 함석헌은 그가 새 종교의 모습으로 "하나됨"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새 종교는 언제나 '죽일 놈'만이 들고 나오지 않았던가?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여 있는 것들을 폐함으로써' 과거에 세계를 늘 구원하신 하나님이 미래에도 그렇게 또 구원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새 종교를 이룩하는 주역으로 그가 제시하는 무리가 곧 민중이 아닌가? 그가 민중을 새 종교 이룩의 주역으로 보고 있는 것은 곧 종교가 민중을 위한 것임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가 민중을 위하지 않는 것은 비판 받아 마땅하고, 새 종교는 민중에 의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 비판 마지막은 "그리스도교의 속죄론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가 속죄론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보는 가장 큰 이유는 속죄는 교리로 이루어 질것이 아니라 체험으로만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안은 "합리성"이다. 속죄는 철저히 체험되고 경험되었을 때 만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합리성"에서 얘기하는 이지 또는 과학적 사고에 대한 존중의 사상이 충분히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다. 이제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이다. 첫번째 비판은 "교회가 하느님을 가두었다"이다. 이 비판은 교회가 하느님을 독점하여 그 이름을 팔아 민중을 억누르고 착취하는 기관이 되었다는 것으로, 자본주의와 타협한 교회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대한 대안의 모습은 "하나됨"과 "뚫려 비침"이다. 새 종교의 주역이 민중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됨"이 대안이 될 수 있으며, 새로운 인격으로 교회가 거듭날 때 교회가 맘몬과의 타협 관계를 청산하고 하느님께로 온전히 돌아갈수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교회는 권위를 잃고 죽었다"이다. 교회가 왜 권위가 없고, 기백이 없을까? 그것은 교회가 기업화되어 정치권력과 담합하기 때문이요, 천당만 찾다보니 사회악과 싸울 생각을 하지 못해 기백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은 "하나됨"이다. 민중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기업화되고 정치권력과 손잡게 되었기 때문이며, 영과 육을 구별하기에 사회악에 대해 싸울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번째는 "교회는 교회당만 늘린다"이다. 이 비판 역시 앞의 두 비판과 비슷한데 바로 자본주의와 손 잡은 교회, 민중을 등진 교회에 대한 비판이다. 덧붙여서 돈으로 교회 경영도 좌지우지되는 한심함을 말하고 있다. "하나됨"으로 민중에 대해 생각하고, "뚫려 비침"으로 새 인격을 형성해서 자본주의와의 관계 청산은 물론, 교회 경영을 하나님 뜻대로 이루어 갈수 있게 된다. 네번째는 "보수주의 교회는 참교회가 아니다"이다. 보수교회일 수록 교파싸움이 많다는 것과 '재벌교회'를 지향한다는 것인데, 이에 대한 대안으로는 "하나됨"이다. 교파싸움은 하나님의 하나되게 하심에 역행하는 인간의 욕심이요, 내 교회만 생각하는 지교회 중심주의가 '재벌교회'를 지향하게 한다. 따라서 "하나됨"이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다섯번째는 "성직자는 민중을 속이는 위선자이다"이다. 교회가 민중을 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도 민중을 속이고 있다는 이 비판은 참으로 날카로운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이 비판의 대안으로는 "하나됨“ ”뚫려 비침"이다. 민중을 교회의 주인으로 생각하게 될 때, 성직자가 민중을 속일 수 없을 것이요, 성직자가 새로운 인격으로 거듭나게 되면 민중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서술 내용이 다소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함석헌의 비판 내용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외쳐지는 음성임에 부인할 수 없다는 것과 그가 그리는 새 종교의 모습은 그의 비판 내용들을 모두 몰아낼 수 있는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제 함석헌의 새 종교론이 과연 18세기의 종교개혁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18세기의 종교개혁이 당시의 완악해진 교회의 모습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비판에서 이루어졌음에서 개혁정신의 전승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단계면에서 보면, 18세기의 종교개혁은 개혁의 완성단계에 속한다고 볼 수 있고, 함석헌의 새 종교론은 그 과정단계에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불연속성도 있다. 또 18세기의 종교개혁이 유럽이라는 국한된 곳에서의 개혁이라고 한다면, 함석헌의 새 종교론은 전 세계를 향한 개혁의 밑그림을 설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함석헌도 한국이라는 상황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비판이 철저히 한국 상황 속에서 바라보고 지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정신의 전승, 기독교의 끊임없는 개혁의 측면에서 본다면 역시 함석헌의 새 종교론과 18세기의 종교개혁을 연결지어 연구해보는 것도 매우 흥미있는 작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위치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교회를 바라보면서 개혁되어야 겠다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물이 고여 썩을 대로 썩어있고, 부패할대로 부패해 있다고 판단해도 결코 무리는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이미 30여년 전부터 고쳐야 한다. 개혁해야 한다는 외침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외부에서가 아니라 이 땅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신앙 선배 가운데는 우리가 본받고 쫓아야할 훌륭한 선배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그래도 기분 좋은 것이고,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 신앙 선배들의 외침 하나하나에 귀기울일 때이다. 그들이 도대체 뭐라고 외쳤었는지 한 마디 한 마디 다시 찾아내고 깊이 살펴봐야한다. 오늘 우리가 하지 않으면 이 땅의 외침이 그대로 묻혀버리게 될 것이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땅에 희망은 없다고 생각된다. 미국의 어떤 학자가 미래에 대해서 한 말들은 귀가 쏠깃하면서, 우리와 같은 말을 쓰는 우리의 신앙 선배가 하는 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흘러보내는 과거의 잘못들을 우리는 다시 답습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이 땅에 이미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는 귀기울여야 한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겸허한 자세로 우리의 언어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을 무시하거나, 외국에 들려진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자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단지 우리 민족에게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다는 것이요, 그 하나님의 음성은 이 땅의 백성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고, 삶으로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땅의 신앙 선배들의 발자취를 찾고, 그 분들이 물려주신 신앙 유산들을 캐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거기에서 오늘 우리의 잘못들을 발견하고, 개혁의 흐름에 동참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이 오늘이 시대에,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라 생각한다.

      • 함석헌의 씨알사상이 유아교육과정에 주는 함의

        박윤정 인천대학교 일반대학원 2021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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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study is a literature study that clarifies the implications of Ham, Sokhon's thought of Ssial on the curriculum for young children. For this reason, the writings and books showing Ham, Sokhon's view of the world and his thoughts, as well as a number of literature that studied his ideas, were targeted for research. In response to future society, the government is also moving towards a paradigm turning point by implementing the『2019 Revised Nuri Curriculum』in the field of early childhood education from 2020. There is a need to change the current understanding and perception of the curriculum for young children, and research is needed accordingly. As one of these efforts, this study investigated the implications of Ham, Sokhon's thought of Ssial to the curriculum for young children. Ham, Sokhon was an intellectual and practitioner who encompassed the philosophy of the East and the West, criticized the times, and awakened the people. In his thoughts, there is a worldview of subjectivity and coexistence, faith and resistance, love and peace. Based on this philosophical understanding, he gave birth to Ssial and shouted his whole life to wake up Ssial who resisted hardship. But the resistance he claimed must be peace. This study analyzed the educational implications of Ham, Seok-hun's ‘Thought of Ssial’ and suggested a method that could be applied to the educational process of young children. From the perspective of Ham, Sokhon's view of the people, the existence of children must be recognized, and a subjective and democratic right must be guaranteed. Therefore, it should be a collaborative curriculum that creates children's learning as an educational community, liberating them from the subject-object, teacher-child relationship. As for the contents of the curriculum, solidarity education and global citizenship education were proposed on the basis of Ssial’s thought. Solidarity education and global citizenship education are competencies which are required for the future society. In solidarity education, we emphasized aspects of attitudes that can be connected organically as well as a sense of community and cooperation. In addition, the global citizenship education for the well-being and prosperity of the world viewed from the perspective of the Ssial’s thought, is an indispensable citizen image in our time as a global person. Therefore, it should be a global citizenship education that provides opportunities to actually practice, including the formation of knowledge for life respect and peace. In addition, child's play does not react passively to what a teacher provides, but rather makes a lively resistance in his or her own way, extending anew and switching to other forms of play. A play-centered curriculum should be established so that children can freely immerse themselves in the play that is formed through these differences and repetitions. For a successful realization of the curriculum, the study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the role of teachers, responding sensitivity and supporting the children. It also suggested an on-going evaluation, in which educational records can be made of the child’s life. This study implies the importance and urgency of finding a plan to increase a teacher’s competency in the current curriculum for young children where the teacher’s autonomy is emphasized. This study also suggests in finding a practical curriculum that can cultivate knowledge, skills, and attitudes in solidarity education and global citizenship education. This study suggests that Ham, Sokhon’s thought of Ssial which aims for a whole-human perspective should be made through a study from a holistic perspective. Furthermore, this study suggests that research, based on the context and phenomena of lively young children resisting and playing in their own way, should be conducted together from a post-structuralism perspective. In the future, based on these studies, research on the curriculum for young children that communicate and respond to changes in paradigm should be continuous. 이 연구는 함석헌의 씨알사상이 유아교육과정에 주는 함의를 밝히는 문헌 연구이다. 이를 위하여 함석헌의 철학적 면모와 씨알사상을 보여주는 그의 글과 저서 및 그의 사상을 연구한 다수의 문헌을 연구의 대상으로 하였다. 미래 사회에 대한 부응으로 유아교육 분야에서도 2020학년도부터 『2019 개정 누리과정』을 실시하며 패러다임의 전환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유아교육과정에 대한 기존의 이해와 인식이 달라져야 할 필요성이 있고 그에 따른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 연구는 함석헌의 씨알사상이 유아교육과정에 주는 함의를 연구하였다. 함석헌은 동서양의 철학을 아우르고 시대를 비판하며 민중을 일깨워 준 지식인이며 실천가였다. 그의 사상 속에는 주체성과 상생, 믿음과 저항, 사랑과 평화의 세계관이 들어 있다. 이러한 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그는 씨알을 탄생시켰으며 고난에 저항하는 씨알을 깨우고자 전 생애를 바쳐 외쳤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저항은 반드시 평화이어야만 한다. 이 연구에서는 함석헌의 씨알사상 고찰을 통하여 교육적 의미를 분석하였고 이를 통하여 현재의 유아교육과정에 적용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제시하였다. 함석헌이 민중을 바라보았던 씨알의 관점으로 유아의 존재는 인정받아야 하며, 주체적이고 민주적인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체와 객체로서의 교사-유아 간의 관계에서 벗어나 교육공동체로서 유아와 함께 배움을 만들어 가는 교육과정이 되어야 한다. 교육과정의 내용으로는 씨알사상에 근거하여 연대교육과 세계시민교육을 제안하였다. 연대교육과 세계시민교육은 미래 사회에 요구되는 역량으로서 연대교육에서는 협력의 공동체 의식뿐만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태도의 측면을 강조하였다. 또한 씨알사상의 전 지구적 시각에서 바라본 세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세계시민교육은 세계인으로서 우리 시대에 반드시 요구되는 시민상이다. 따라서 생명 존중과 평화를 위한 지식 측면의 형성을 비롯하여 실질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세계시민교육이 되어야 한다. 또한 유아의 놀이는 교사가 제공하는 것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법으로 생동적인 저항을 하며, 새롭게 뻗어나가 다른 형태의 놀이로 전환한다. 이러한 차이와 반복을 통하여 형성되는 놀이에 유아들이 자유롭게 몰입할 수 있도록 놀이중심의 교육과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 연구는 교육과정의 성공적 실현을 위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며 지지하는 교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하였고, 유아의 삶 전체가 교육적 기록이 되는 과정중심의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안하였다. 이 연구는 교사의 자율성이 매우 강조되는 현재의 유아교육과정 속에서 교사의 역량을 키우기 위한 방안 모색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시사하였다. 아울러 연대교육과 세계시민교육의 지식 및 기술과 태도를 기를 수 있는 실천적 교육활동 모색을 제안하였다. 또한 이 연구를 통하여 전 인류적인 관점을 지향하고 있는 함석헌의 씨알사상이 홀리스틱 관점에서의 연구로 이루어져야 함을 제언하였고, 유아들 자신만의 방식대로 저항하며 놀이하는 유아의 생동적인 모습은 맥락과 현상에 대한 연구와 함께 포스트구조주의적 관점에서의 연구에 대해 제언하였다. 앞으로 이러한 연구를 토대로 패러다임의 변화에 소통하고 부응하는 유아교육과정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함석헌 씨알사상과 언론활동에 대한 연구 : 『사상계』와 『씨알의 소리』 중심으로

        박현윤 경남대학교 대학원 2022 국내박사

        RANK : 247807

        본 연구는 함석헌의 언론관과 언론활동에 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함석헌의 씨알사상에 대한 탐색이 필요하며, 특히 함석헌 씨알사상의 태동 배경에서부터 씨알사상의 주요 내용 등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또 함석헌의 언론활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함석헌 스스로 가지고 있는 언론에 대한 태도나 입장 등의 언론관(言論觀)에 대해서도 연구가 필요하다. 함석헌의 대표적인 언론활동은 『사상계』와 『씨&#4363;&#4510;&#4527;의 소리』에서였다. 일본 유학에서 친목을 도모했던 김교신과 15여년간 함께 했던 무교회 동인잡지 『성서조선』지 기고 활동을 시작으로 종교전문잡지 『말씀』 창간과 각종 일간지와 잡지에 글을 기고했던 함석헌은 『성서조선』이 폐간 당하고, 해방되면서 『사상계』에 집중적으로 원고를 기고하게 된다. 『사상계』 폐간 시점에 즈음하여 함석헌 스스로 직접적인 언론활동을 펼치게 되는데, 그것이 월간 잡지, 『씨&#4363;&#4510;&#4527;의 소리』 창간이다. 함석헌은 자신의 씨알사상 실현을 위해 기본적으로 선택한 관로(管路)가 있다.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은 간디의 비폭력적이고 평화적 저항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이러한 측면에서 언론활동을 택했으며, 이러한 선책은 생애 중반기부터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초지일관, 끝까지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함석헌은 언론활동을 위해 자신만의 언론관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민중을 우선시하는 민중주의적 언론관과 게릴라전식 언론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게리라전식 언론관, 정치권력에 관심을 두지 않는 언론관, 그리고 간디로부터 온 비폭력 저항의 언론관 등이 함석헌의 언론활동의 바탕이 되는 주요 언론관이다. 함석헌은 이같은 언론관의 바탕 위에서 다양한 언론활동을 펼쳤으며, 가장 돋보이는 언론활동은 『사상계』에 자신의 글을 기고한 언론활동과 직접 창간하고 발행했던 『씨&#4363;&#4510;&#4527;의 소리』였으며, 이러한 함석헌의 장기적인 언론활동의 실천은 씨알사상 실현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함석헌은 모든 민중이 하나가 되고, 민중이 주체가 되는, 그리고 민중의 사회를 염원했으며, 이러한 사회를 위해 갖가지 탄압과 압박을 받으면서도 변함없는 언론활동을 실천했던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의 언론활동은 함석헌의 씨알사상의 확산을 위한 실천의 도구였을뿐만 아니라 씨알사상의 실현을 위해 ‘죽어야 산다’는 각오로 언론활동에 나섰던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의 씨알사상 실현을 위한 언론활동의 실천은 민중이 주인이 되어 부활을 꿈꾸는, 완성된 생명철학으로 거듭남과 맞물려 있다. This study aims to study Ham Seok-heon's media views and media activities. First of all, it is necessary to search for Ham Seok-heon's Ssial thought, and in particular, understanding of the main contents of Ssial thought from the background of Ham Seok-heon's Ssial thought should come first. In addition, in order to study Ham Seok-heon's media activities, it is also necessary to study the media views such as his attitude and position toward the general media. Ham Seok-heon's representative media activities were in "Sasanggye" and "Ssial's Voice". Starting with writing for “Seongseo Joseon”, a non-church literary coterie magazine, with Kim Kyo-shin, who had been friends with him while studying in Japan for 15 years, he published a religious magazine, “Word” and contributed articles to various daily and magazines. Since then, as "Seongseo Joseon" was closed and liberated, he has intensively contributed the manuscript to "Sasanggye". And at the time of the closing of "Sasanggye" he began his own direct media activities, which was the founding of the monthly magazine, "Ssial's Voice". Ham Seok-heon has a path that he basically chose to realize his Ssial thought. That is, above all, Gandhi's nonviolent and peaceful resistance. Therefore, Ham Seok-heon chose to engage in media activities in this respect, and this choice did not stop from the middle of his life until the end of his life. Ham Seok-heon maintained his own media view for such media activities. The main media views that are based on Ham Seok-heon's media activities are the democratic media views that prioritize the people, the Guerrilla media views that do not care about political power, and the non-violent media views from Gandhi. Ham Seok-heon carried out various media activities on the basis of this press view, and the most prominent thing is his contribution to "Sasanggye" and "Ssial's Voice" which was directly published by himself. In addition, Ham Seok-heon's long-term practice of media activities was the biggest purpose of realizing Ssial thought. Ham Seok-heon wished for a people's society where all the people became one, the people became the main body, and for this society, he practiced constant media activities under various oppression and pressure. Therefore, Ham Seok-heon's media activities were not only a tool of practice for the spread of Ham Seok-heon's ideas, but also he did media activities with the determination to “live only when you die”. to realize this idea.. Therefore, Ham Seok-heon's practice of media activities for the realization of Ssial thought is in line with the reborn as a completed thought of life, in which the people dream of becoming masters and reviving.

      • 함석헌의 평화론 연구

        정새날 한신대학교 대학원 2019 국내석사

        RANK : 247775

        이 논문은 함석헌의 평화사상에 대한 탐구를 목적으로 한다. 함석헌의 평화 이해는 비폭력 평화에 근거를 두고 있으나 거기서 더 나아가, 평화를 선택하거나 가능성을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닌 생명에게 부여된 절대명령으로 보았다. 또 물리적 폭력의 문제 뿐 아니라 정신적 폭력의 측면까지 조명하며 자유로운 정신운동이 평화임을 말했다. 이러한 함석헌의 평화사상은 모든 피조세계를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로 이해하는 전체의식에 근거한다. 함석헌은 피조세계 일부의 손상이 곧 전체의 손상이라고 이해하였고, 모든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것만이 함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다. 함석헌은 평화를 방해하는 본질적 요인으로 국가지상주의를 꼽는다. 힘을 모아 세력을 이루려는 움직임은 국가를 낳았고, 이는 지닌 것을 불려내고 지켜내기 위해 폭력을 공인한다. 국가지상주의를 뛰어넘어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결집된 힘이 필요하지만, 이는 재차 국가지상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힘이어야 한다. 함석헌은 이 평화운동이 꺼지지 않는 생명력을 지닌 씨ᄋᆞᆯ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목적 뿐 아니라 수단 역시 평화로운 방식인 비폭력투쟁으로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는 방해자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이는 사회운동이나 정치운동의 차원으로 접근해서는 그 동력원이 금세 고갈된다. 함석헌은 평화운동이 종교적 신념을 지닌 정신운동으로 수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평화운동을 수행할 힘을 결집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하며, 이 공동체는 정치권력화 되지 않아야 하며, 비폭력적이어야 하고, 종교적 신념을 지닌 정신운동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이 땅의 평화에 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조건을 만족할 수 있으므로 교회와 평화운동은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 함석헌의 종교사상

        박훈 호남신학대학교 대학원 1998 국내석사

        RANK : 247775

        무관의 제왕처럼 생각과 말에서 누구 못지않게 폭넓은 사상가요 자유인이었던 함석헌에게 어떤 칭호를 붙인다면 그를 다시 좁은데다 가두어 놓는 셈이 될 것이다. 그래도 그의 이름 밑에 가끔 괄호를 치고 칭호를 붙인다면 그것은 “종교인”이라는 칭호일 것이다. 종교인 함석헌은 종교라는 상품을 팔아 먹고 사는 직업적인 종교가가 아니고 종교속에서 삶의 본질과 가치를 찾고 종교로서 역사와 문명을 해석하려고 했던 종교주의자였으며, 종교적 가치를 삶 속에서 실현하려 했던 참종교인이었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함석헌이 말한 종교는 곧 삶이요 생명 그 자체의 통체로서의 존재양식이지 생명의 일부분이 아니다. 폴 틸리히의 표현대로 말하면 종교란 인간 생명 전체의 깊이의 차원이지 인간정신기능의 일부분이거나 특수기능이 아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현실의 심장이요 현실의 눈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종교를 해석해 볼 때 한국 기독교는 벌써 늙고 힘을 상실한 하나의 사상체계로 전락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의 감정들에 심취하여 자체의 함성만 요란한 하나의 집단이 되어버린 느낌을 떨칠수가 없다. 함석헌은 현대 종교가, 한국 기독교가 국가주의 숭배, 권력과 황금만능에 빠져있다고 치부하고 있다. 한국기독교는 미국의 자본주의 민주정치가 하나님이나 되는 양 절대숭배하고 특정 정치이념에 자기를 내어 맡기는 우를 범했다. 중산계층의 종교심에 영합하여 건물을 짓고 사업을 벌리고 있는 현실속에 있는 한국의 기독교를 함석헌은 그의 종교사상속에서 꼬집고 있는 것이다. 함석헌은 한국기독교를 바라보면서 결국 종교는 이런것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종교는 믿는자 만의 종교가 아니다. 시대전체, 사회 전체의 종교다. 종교로서 구원을 얻는 것은 신자가 아니요 그 전체요 종교로써 망하는 것도 교회가 아니요, 그 전체다.” 종교가, 한국기독교가 민중들에게 외면당하고, 그들에게 생명을 못줄 때 이미 병든 제도적 종교기관이 된다는 것이 그의 종교사상이다. 함석헌의 종교사상은 사상의 체계가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영에 불붙은 그의 영혼의 광휘체험이요, 쏟아져 흐르는 용암의 불덩이요, 삶 그 자체였다. 그의 산 체험자이지 결코 이론체계에 습합하는 자가 아니었다. 오늘 우리는 함석헌의 종교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지금까지 기독교가 견지해온 초역사나 탈역사, 세속사와 구속사의 틀에만 가두어 놓는 것에서 벗어나서 신과 인간의 통전적인 것으로서의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함석헌의 종교사상은 신앙과 민족의식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 관점에서 민족과 종교를 연결시켰다는데 그 의의를 두고 함으로 우리들은 그의 사상적 체계속에서 종교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며 추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 함석헌의 하느님 이해

        김수산나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2013 국내석사

        RANK : 247759

        이 논문의 목적은 우선 함석헌의 하느님 관(觀)을 살펴보는 것에 있는 것인 만큼, 이 중에서 특별히 몇 가지 사상을 중점으로 함석헌이 하느님 이해를 하는 데 있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Ⅱ장에서는 함석헌 사상의 틀인 기독교사상과 동양사상의 형성과 그들의 만남 과정을 고찰한다. 구체적으로 함석헌이 어렸을 적부터 접한 기독교 사상의 초기 형성에 영향을 미친 무교회 신앙과 후기 기독교사상의 내용을 형성하는 퀘이커 신앙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기독교 신앙의 연속성과 심화의 내용을 기술하고자 한다. 또한 동양사상 중에서도 천(天) 사상, 시천주(侍天主) 사상, 한밝 사상, 노장 사상과 함석헌의 기독교 사상과의 연관성을 고찰한다. Ⅲ장에서는 그의 하느님 이해가 구체적으로 발현되는 모습을 그의 자연의 역사 이해, 역사 이해, 씨알사상과의 연계성을 통해 연구하고 기술하고자 한다. 먼저 자연사(history of nature)와 역사(history)로 나누어 함석헌의 하느님 관(觀)을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과정과 함께 모든 제도적 종교를 비판․극복하는 새로운 대안으로써의 ‘보편적 진리’를 하느님과 연관 지어 논술하고자 한다. Ⅳ장 결론에서는 그의 사상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통해 현재 한국교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전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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