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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國 古代 山城 集水池 硏究

        오승연 동아대학교 대학원 2024 국내박사

        RANK : 248652

        고대 산성에서 물과 관련된 시설은 지표수 저장을 위한 못(池)과 지 하 용출수를 이용하기 위한 우물, 샘으로 구분된다. 지금까지 산성의 못 은 저수지, 저수조, 집수정, 우물, 연못, 연지, 원지 등으로 다양하게 불 렸으나 ‘산성의 지표수를 모으기 위한 못’이란 뜻의 가장 적절한 용어 인 ‘산성 집수지’를 선택하였다. 지금까지 신라와 백제를 합쳐 대략 42개 성, 102기의 집수지가 발굴 되었다. 그 중 속성 추출이 용이한 36개 성 79기 집수지를 대상으로 소 개하고 일반적 축조 공정을 분석, 제시하였다. 이어서 집수지의 축조재 료, 평면형태, 단면형태, 면석의 축조상태, 규모 등을 기준으로 분류를 시도하였다. 분류 결과, 신라는 5형식, 백제는 3형식, 통일신라는 2형식으로 설정 가능하다. 요약하면 신라는 수직, 바른층쌓기, 중·대형이고 백제는 경 사, 허튼층쌓기, 중·소형이 특징이다. 신라는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목조집수지(Ⅰ형식)가 유행하 였다. 그리고 6세기 중반 경, 짧은 기간 동안 목재와 석재를 함께 사용 한 집수지(Ⅱ형식)를 사용하다가 곧이어 석축집수지로 완전히 전환된다. 이후 삼국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중반까지는 앞선 목조집수지의 기본 구조(장방형, 수직)에 재료만 석재로 바뀐 집수 지(Ⅲ형식)와 재료와 평면플랜 모두 새로 채택(원형, 계단)된 집수지(Ⅳ 형식), 전혀 이질적(부정형, 허튼층)인 집수지(Ⅴ형식)가 함께 사용된다. 신라가 통일을 이룩한 직후에는 앞선 시기의 영향(원형·방형, 수직·계 단)이 남아 있는 집수지(통·신Ⅰ형식)가 축조되다가 9세기 중반 이후 후삼국 시대에 이르면 이전 시기에 보이지 않던 경사형 단면을 가진 집 수지(통·신Ⅱ형식)가 주류를 이루게 되면서 신라 산성 집수지의 전개는 막을 내리게 된다. 백제 산성 집수지는 큰 흐름에서는 목재에서 석재로 변화했다고 추정할 수는 있겠으나 공산성과 마로산성, 고락산성에서 백 제 Ⅰ형식(목조-목곽고+점토집수정)과 Ⅲ형식(석축) 집수지가 공존하 는 것으로 보아 시간적 선후 관계는 신라만큼 뚜렷하지 않다. 그리고 신라와 백제는 집수지의 규모와 배치 관계가 다르다. 신라는 중·대형의 집수지를 집중시키는 배치 경향이고 백제는 중·소형 집수지 를 분산시키는 경향이다. 집수지의 규모와 분산과 집중이라는 배치 방법 의 차이를 통해 신라와 백제의 산성 운영 시스템 자체가 달랐음을 짐작 할 수 있다. 고대 산성 집수지의 수원은 강우에 의한 우수를 원천으로 하되, 상시 사용 가능한 수원은 계곡의 지표수이다. 곡부 입지 집수지는 성내 지표 수를 수원으로 하고, 성 내부에 계곡이 없다면 부득이하게 성 바깥 계곡 에서 물을 길어 날랐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산성 집수지에는 반드 시 물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백제 목곽고는 계곡에 입지한 경우 집수지로, 구릉에 입지한 경우는 창고로 사용되었음을 규명하였다. 집수지는 수질 확보와 규모 문제를 고려하면 식수로 사용하기에 부적 합하다. 집수지의 주요 기능은 성내 유수 조절, 방화수, 정원으로서의 원 지, 제장 등으로 볼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기능은 성내 유 수 조절과 방화수 기능이다. 정원의 원지나 제장으로서의 기능은 특정 유적에만 국한된 현상으로서 기본적 기능에 더해진 부가적 기능이다. Within the ancient mountain fortresses of Korea, There existed two distinct types of water-related facilities : ponds for storing surface water and springs or wells for utilizing underground spring water. Historically, these ponds were referred to by various terms such as 'reservoir,' 'water storage tank,' 'water collection pond,' 'well,' and 'pond.' To establish uniformity from now on, I will use the term 'mountain fortress water collection pond'. So far, 102 mountain fortress water collection ponds across 42 fortresses built by Silla or Baekje have been excavated. In this study, 79 mountain fortress water collection ponds out of 36 fortresses , which conveniently classified by attribute. The study delved into the excavation of these ponds, analyzing their construction processes and general attributes. Classification efforts were made based on materials, bottom and wall shapes, stone and rock construction conditions, and sizes. Results indicated that Silla and Unified Silla featured vertically and orderly constructed water collection ponds, generally of larger scales. In contrast, Baekje's ponds were somewhat disorderly and smaller to medium-sized. Evolutionary patterns emerged, with Type 1 ponds (surrounded by wooden walls) prevalent in late 5th to mid-6th century Silla. Type 2 ponds, featuring walls of wood and stone, emerged briefly around the mid-6th century. Subsequently, wooden walls disappeared, leaving only stone walls. Three new types (Types 3, 4, and 5) were introduced from the mid-6th to mid-7th century, coinciding with the peak of conflicts among the three kingdoms. Post-unification, Unified Silla Type 1 ponds retained previous influences, while Unified Silla Type 2 ponds with inclined cross-sections emerged in the 9th century, marking the end of Silla Mountain water collection pond development. Baekje exhibited shifts from wood to stone in water collection ponds, with coexisting Types 1 and 3 in certain fortresses, complicating chronological determination. Silla concentrated medium to large ponds, whereas Baekje dispersed medium to small ponds, hinting at distinct fortress operating systems. Water sources varied, with rainwater for Godae Mountain Fortress and groundwater for year-round accessibility. Valleys within fortresses sourced surface water, while those lacking valleys drew water from outside. Regardless, ponds needed constant water supply. Baekje's Mokgwakgo used valleys as water collection ponds, contrasting hill-based locations used for warehousing. Despite unsuitability for drinking due to water quality and size, water collection ponds served essential roles in fortress water flow control and fire prevention, with additional functions such as landscaping and religious services appearing in just a few historic sites.

      • 신라 석축산성 연구

        심종훈 동아대학교 대학원 2024 국내박사

        RANK : 150382

        본 연구는 삼국시대 신라의 주축 관방시설로 운용된 석축산성을 대상으로 한다. 대체로 신라 석축산성은 각 유적의 부분적인 조사만 진행되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학술적 성과가 거의 보고되지 않은 곳도 있는 등 조사의 편차가 매우 크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의 신라 석축산성에 대한 연구도 대부분 단일유적이나 시ㆍ군 및 광역자치단체별 석축산성 또는 개별 유구(성벽ㆍ성문ㆍ수구ㆍ집수지 등)가 중심이되어 단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아직 신라 석축산성 전반에 대한 고고학적 특징과 성격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로 부분적으로만 연구되는 경향을 초래하였고, 특히 보수ㆍ복원이라는 미명 하에 고고학적 조사의 대부분이 성벽을 중심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신라 석축산성의 특징은 ‘현문’ㆍ‘외벽 바른층쌓기’ㆍ‘기단보축’등 몇 가지로 정리되고 있다고 하여도 무방하다. 이마저도 고구려ㆍ백제ㆍ가야 등과의 접경지역에 축조된 석축산성은 해당 유적의 조사자와 연구자 등에 따라 각기 다른 축성세력을 주장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조사ㆍ연구 현황은 무엇을‘신라 석축산성’이라 할 수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도록 하였다. 아울러 신라 석축산성의 구성요소가 무엇인지, 그 구성요소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변천되는지, 그리고 각 구성요소의 시기적 변천과정에서 신라가 선택한 정형화된 축조기법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신라가 석축산성을 축조하고 변화ㆍ발전시키면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나갔는지에 대한 의문이 본 연구의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우선, ‘석축산성’의 개념을 정리한 후, 수도권ㆍ강원권ㆍ충청권ㆍ전라권ㆍ경상권 등 광역권으로 나누어 신라 석축산성의 규모(둘레)와 상대고도, 입지 등의 현황을 정리하였으며 전국적 분포양상으로도 종합하였다. 그리고 신라 석축산성을 구성하는 요소 중 형식분류와 변천과정이 파악되는 6가지(체성ㆍ외벽보축ㆍ성문ㆍ치성ㆍ수구ㆍ집수지 등)를 선별하여 각각의 특징을 정리하고 형식을 분류하였다. 그 결과, 외벽면석(체성) 1~4형식, 외벽보축 1~5형식, 성문 1~3형식, 치성 1~4형식, 수구 1~3형식, 집수지 1~6형식으로 분류하였으며 고고학적 조사결과에 따라 각 구성요소는 1형식부터 출현하여 최대 6형식까지 변화함을 밝혔다. 그리고 이러한 신라 석축산성은 구성요소의 변천과정과 연동하여 시간적 변화에 따라 축성의 공간적 범위도 달라진다는 것을 인지하고 출현부터 소멸에 이르기까지 총 5단계의 축성과정을 설정하였다. 축성 1단계는 소백산맥 북서쪽 일원에 보은 삼년산성을 필두로 신라의 석축산성이 처음 출현하는 시기로서 본격적인 영토확장을 위한 준비 단계에 해당된다. 이 단계는 외벽면석(체성) 1형식, 외벽보축 1ㆍ2형식, 성문 1ㆍ2형식, 치성 1ㆍ2형식, 수구 1형식, 집수지 1형식으로 구성되며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집중적인 축성이 이루어진다. 축성 2단계는 충청권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강유역을 점유하는 과정과 그 후에 공고한 영역화를 위한 축성사업이 이루어진 시기로 하남 이성산성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이 단계에는 외벽면석(체성) 2형식, 외벽보축 2ㆍ3형식, 성문 2ㆍ3형식, 수구 1~3형식, 집수지 2ㆍ3형식으로 구성되는데, 특히 외벽면석 2형식은 신라 석축산성의 면석형태를 정형화하면서 삼국통일 이전까지 체성 축조의 기술이 완성되면서 정형화된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 단계는 6세기 전반에서 후반에 집중적인 축성이 이루어지는 북진기로 파악하였다. 축성 3단계는 창녕 목마산성 등의 경남 내륙지역을 중심으로 축성이 이루어진 시기로 가야세력을 병합한 후 서쪽으로 소백산맥을 경계로 백제와 직접적인 접경을 이루는 과정에서 집중적인 축성사업이 이루어졌다. 이 단계는 외벽면석(체성) 2형식, 외벽보축 2ㆍ3형식, 성문 2형식, 수구 2ㆍ3형식, 집수지 2ㆍ3형식으로 구성되며 직전 단계와 큰 차이는 보이지 않지만, 축성사업의 주축 공간이 한강유역으로부터 경남 내륙지역으로 완전하게 전환되면서 축성의 분기를 이룬다. 이 단계는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전반에 집중적인 축성이 이루어지는 서진기로 파악하였다. 축성 4단계는 석축산성 출현 후 한강유역으로의 북진, 가야세력 병합과정에서의 서진사업이 안정적으로 정리됨에 따라 통일 전 마지막 축성공간으로서 거제 둔덕기성 등이 분포하는 남해연안을 선택한 시기에 해당된다. 이 단계는 외벽면석 2형식, 외벽보축 3ㆍ4형식, 성문 3형식, 수구 3형식(추정), 집수지 4형식으로 구성된다. 시기적으로는 7세기 전반에서 후반에 집중되는데, 신라로서는 가야를 병합하고 고구려와 백제와 대립하면서도 삼국통일을 위한 마지막 전략적 선택으로서 대왜방어(對倭防禦)를 위한 남해연안의 축성사업을 기획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이 단계의 축성을 통해 삼국통일 전의 관방체계 등 군사적 기반을 완비하였다는 점에서 삼국통일기로 명명하였다. 마지막으로 축성 5단계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축성의 공간이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되는 시기이다. 이 단계는 외벽면석(체성) 3ㆍ4형식, 외벽보축 5형식(지대석), 성문 3형식, 수구 3형식, 집수지 5ㆍ6형식 등 각 구성요소의 마지막 형식으로 구성된다. 1~4단계와 비교하면 이 단계는 축성의 패러다임이 완전하게 전환되는데, 통일 후 새롭게 편입된 지역에 대한 안정적인 통치와 경영, 그리고 수많은 전쟁을 경험하면서 체득한 유사시 방어체계 등을 염두에 두고 축성사업이 이루어진다. 시간적으로는 8세기 전반에서 9세기 전반에 걸쳐 이루어지는데, 신라 석축산성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되며 이후 기단석축형 판축토성 등이 주축 축성대상으로 자리잡으면서 소멸하게 된다. 상술한 것처럼 신라 석축산성은 여러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는데, 각 요소들은 기술적 발전을 통해 점차 효율적이면서도 높은 방어력을 가질 수 있도록 변화되었다. 즉, 신라는 각 구성요소별로 기술과 기능의 완성도를 높이면서 정형화하였으며 이들을 묶어 체계화(Systematization)하였다. 석축산성의 체계화는 출현하는 5세기 후반부터 소멸하는 9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350여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신라의 영토확장에서 삼국통일, 그리고 통일 후의 안정적 통치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핵심적인 관방시스템으로 기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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