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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眞德女王 崩年(654) 空位와 金春秋의 踰年(655) 즉위 = When Silla King Kim Chun-chu was crow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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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630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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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he ancient Korean record (Samkuksagi) of Kim Chun-chu's succession to the throne and the ancient Japanese record(Nihonsoki). The former is 654 and the latter is 655. But the same Korean record shows that Kim Chun-chu became king and formed a cabinet in 655. The previous Silla kings formed a cabinet just in the year they ascended, and only Kim Chun-chu did so in 655, the second year on the throne. The timing of the Cabinet formation coincides with the Korean and Japanese records.
    In Japanese records, the information that Kim Chun-chu was a nobleman, not a king, in 654 suggests that there was a succession feud in Silla. That year, Goguryeo and Baekje, which were watching the internal feud of Silla, launched a massive attack. Silla was in danger. Then Silla nobles built Kim Chun-chu as king. Kim Chun-chu, who is close to the Chinese emperor, was the only one who could call in Chinese Troop. In January 655, Kim Chun-chu was crow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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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he ancient Korean record (Samkuksagi) of Kim Chun-chu's succession to the throne and the ancient Japanese record(Nihonsoki). The former is 654 and the latter is 655. But the same Korean record shows that Kim Chun-chu bec...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he ancient Korean record (Samkuksagi) of Kim Chun-chu's succession to the throne and the ancient Japanese record(Nihonsoki). The former is 654 and the latter is 655. But the same Korean record shows that Kim Chun-chu became king and formed a cabinet in 655. The previous Silla kings formed a cabinet just in the year they ascended, and only Kim Chun-chu did so in 655, the second year on the throne. The timing of the Cabinet formation coincides with the Korean and Japanese records.
    In Japanese records, the information that Kim Chun-chu was a nobleman, not a king, in 654 suggests that there was a succession feud in Silla. That year, Goguryeo and Baekje, which were watching the internal feud of Silla, launched a massive attack. Silla was in danger. Then Silla nobles built Kim Chun-chu as king. Kim Chun-chu, who is close to the Chinese emperor, was the only one who could call in Chinese Troop. In January 655, Kim Chun-chu was crow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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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三國史記』에는 金春秋가 654년 4월 왕위에 즉위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日本書紀』에는 654년 11월 경 金春秋가 新羅王이 아니라 臣下인 伊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三國史記』에 眞智王⋅眞平王⋅善德女王⋅眞德女王은 각각 즉위 원년에 上大等을 임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金春秋만 유독 즉위 2년(655) 正月에 그렇게 한 것으로 나와 있다. 武烈王의 踰年卽位(655년)가 남긴 사료상의 흔적으로 보이며, 『日本書紀』와 『三國史記』가 일부 일치․대응되는 부분이다.
    654년 11월 경 金春秋가 伊湌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은 新羅 群臣들의 반대로 그의 왕위계승이 이루지지 않은 것을 반영한다. 金春秋는 무리한 즉위를 시도하지 않았다. 무력을 앞세운 그의 즉위는 毗曇의 亂과 같은 內亂의 재발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麗濟 두 나라가 분규의 소지를 안고 있는 新羅의 왕위 계승을 지켜보고 있었고, 결국 그해 대대적인 침공을 하여 新羅내정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654년 8월 이후 麗濟․靺鞨의 대대적인 포위 공격으로 新羅의 33개성이 함락되는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金春秋를 왕으로 밀고 있었던 金庾信이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고, 群臣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閼川도 왕경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왕위계승문제를 두고 新羅조정이 분열된 현상을 여실히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대세력들과 팽팽한 긴장이 흐르는 상태에서 그가 수도를 떠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내분이 외침에 대한 저항력을 갉아먹자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최악의 상황에 도달하고 나서야 진실을 보게 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대외적 위기는 群臣들이 金春秋를 王位에 추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655년 正月에 金春秋는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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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國史記』에는 金春秋가 654년 4월 왕위에 즉위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日本書紀』에는 654년 11월 경 金春秋가 新羅王이 아니라 臣下인 伊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三國史...

    『三國史記』에는 金春秋가 654년 4월 왕위에 즉위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日本書紀』에는 654년 11월 경 金春秋가 新羅王이 아니라 臣下인 伊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三國史記』에 眞智王⋅眞平王⋅善德女王⋅眞德女王은 각각 즉위 원년에 上大等을 임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金春秋만 유독 즉위 2년(655) 正月에 그렇게 한 것으로 나와 있다. 武烈王의 踰年卽位(655년)가 남긴 사료상의 흔적으로 보이며, 『日本書紀』와 『三國史記』가 일부 일치․대응되는 부분이다.
    654년 11월 경 金春秋가 伊湌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은 新羅 群臣들의 반대로 그의 왕위계승이 이루지지 않은 것을 반영한다. 金春秋는 무리한 즉위를 시도하지 않았다. 무력을 앞세운 그의 즉위는 毗曇의 亂과 같은 內亂의 재발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麗濟 두 나라가 분규의 소지를 안고 있는 新羅의 왕위 계승을 지켜보고 있었고, 결국 그해 대대적인 침공을 하여 新羅내정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654년 8월 이후 麗濟․靺鞨의 대대적인 포위 공격으로 新羅의 33개성이 함락되는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金春秋를 왕으로 밀고 있었던 金庾信이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고, 群臣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閼川도 왕경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왕위계승문제를 두고 新羅조정이 분열된 현상을 여실히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대세력들과 팽팽한 긴장이 흐르는 상태에서 그가 수도를 떠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내분이 외침에 대한 저항력을 갉아먹자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최악의 상황에 도달하고 나서야 진실을 보게 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대외적 위기는 群臣들이 金春秋를 王位에 추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655년 正月에 金春秋는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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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김현구,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 Ⅲ" 일지사 2004

    2 朱甫暾, "이기백고희한국사학논총 上" 일조각 1994

    3 연민수, "역주 일본서기 3" 동북아역사재단 2014

    4 윤진석, "신라 至都盧葛文王의 ‘攝政’" 한국고대사학회 (55) : 71-107, 2009

    5 윤진석, "신라 中古期의 왕위계승과 ‘攝政’" 대구사학회 126 : 31-60, 2017

    6 윤진석, "백제멸망기 ‘태자’ 문제의 재검토 - 관련사료 분석과 기존견해 비판을 중심으로 -" 부경역사연구소 (29) : 113-142, 2011

    7 韓㳓劤, "韓國通史" 乙酉文化史 1969

    8 李基東, "韓國史講座 古代編" 일조각 1982

    9 주보돈, "金春秋와 그의 사람들" 지식산업사 2018

    10 박순교, "金春秋, 외교의 승부사" 푸른역사 2006

    1 김현구,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 Ⅲ" 일지사 2004

    2 朱甫暾, "이기백고희한국사학논총 上" 일조각 1994

    3 연민수, "역주 일본서기 3" 동북아역사재단 2014

    4 윤진석, "신라 至都盧葛文王의 ‘攝政’" 한국고대사학회 (55) : 71-107, 2009

    5 윤진석, "신라 中古期의 왕위계승과 ‘攝政’" 대구사학회 126 : 31-60, 2017

    6 윤진석, "백제멸망기 ‘태자’ 문제의 재검토 - 관련사료 분석과 기존견해 비판을 중심으로 -" 부경역사연구소 (29) : 113-142, 2011

    7 韓㳓劤, "韓國通史" 乙酉文化史 1969

    8 李基東, "韓國史講座 古代編" 일조각 1982

    9 주보돈, "金春秋와 그의 사람들" 지식산업사 2018

    10 박순교, "金春秋, 외교의 승부사" 푸른역사 2006

    11 朱甫暾, "迎日冷水里新羅碑에 대한 基礎的 檢討" 6 : 1989

    12 "資治通鑑"

    13 "舊唐書"

    14 川崎晃, "法制と社会の古代史" 慶應義塾大学出版会 2015

    15 坂本太郞, "日本書紀 下" 岩波書店 1965

    16 小島憲之, "日本書紀 3" 小學館 1998

    17 "日本書紀"

    18 崔熙俊, "新羅外賓迎接儀禮硏究" 高麗大學校 2018

    19 장원섭, "新羅 삼국통일 연구" 학연문화사 2018

    20 李基白, "新羅 政治社會史 硏究" 일조각 1974

    21 金瑛河, "新羅 中古期의 政治過程試論" 4 : 1988

    22 權悳永, "古代韓中外交史" 일조각 1997

    23 山尾幸久, "古代の朝日關係" 塙書房 1989

    24 "冊府元龜"

    25 李基白, "上大等考" 19 : 1962

    26 "三國史記"

    27 이강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왕대력 비교 연구" 고려사학회 (21) : 41-109, 2005

    28 朱甫暾, "『日本書紀』의 편찬배경과 任那日本府設의 成立" 15 : 1999

    29 서영교, "『新唐書』日本傳에 보이는 唐高宗 令出兵援新羅 璽書의 背景" 역사학회 (237) : 1-25, 2018

    30 전덕재, "8세기 신라의 대일외교와 동아시아 인식" 일본연구소 44 : 27-50, 2015

    31 윤선태, "752년 대일교역과 買新羅物解" 24 :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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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23 통합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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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1-01 등재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9-01-01 등재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7-01-01 등재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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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79 0.79 0.74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72 0.66 1.364 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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