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에서는 근대천황제(近代天皇制)가 성립되어 가던 1880년대 후반 일본의 미술행정을 구키 류이치라는 미술행정가를 중심으로 재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 작업은 미술행정가 구키에게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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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1
2011
한국어
구키 류이치(九鬼隆一) ; 메이지정부(明治政府) ; 미술행정 ; 번벌(藩閥) ; 제국박물관
서울
v, 59 p. ; 26 cm
지도교수: 조명철
참고문헌(p. 55-59)과 부록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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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근대천황제(近代天皇制)가 성립되어 가던 1880년대 후반 일본의 미술행정을 구키 류이치라는 미술행정가를 중심으로 재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 작업은 미술행정가 구키에게 독자성을 부여하려는 시도이며, 나아가서는 메이지정부의 미술행정을 내부적인 관점으로부터 재조망해 보려는 것이다.
일본미술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직후에 나타난 폐불훼석(廢佛毁釋)과 구화주의(歐化主義)의 만연 등으로 인하여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점차 고미술 보호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고, 구미(歐美)에서의 일본미술 애호 역시 메이지정부로 하여금 일본미술을 되돌아보게 하였다. 미술교육 분야에서도 서양미술을 대신하여 일본미술이 주요 과목으로 채택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미술을 보존, 진흥시켜 나갈 조직으로서 미술박물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구키는 미술행정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산다번(三田藩) 출신의 구키는 신분적 혜택을 받으며 비교적 수월하게 메이지정부에 출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메이지정부는 소수의 유력번(有力藩) 출신자가 아닌 경우, 고위직에 오르기가 어려운 구조였다. 국비유학생 소환 과정에서 구키는 메이지정부의 이러한 폐쇄적인 성격을 지적하였는데, 이것은 약소번(弱小藩) 출신으로서 느꼈을 기득권 세력에 대한 반감과 원망의 표현이었다. 반대로 구키의 위와 같은 현실 모순에 대한 절박한 이해는 향후 정치성향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후 구키는 문부성(文部省) 시기에 스승인 후쿠자와와는 노선을 달리하여 유교이념에 기초한 보수적인 교육정책의 채택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일본이 지향하게 될 천황권 신장과 그 방향이 부합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나아가 구키는 ‘메이지 14년의 정변’ 과정에서는 후쿠자와로부터 확실히 등을 돌려 실권자인 이토 히로부미의 조슈벌(長州閥)에 편입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구키는 이토의 조슈벌에 속해 있으면서도 이토의 정치적 경쟁자인 오쿠마 시게노부에게 접근한다. 이와 같은 구키의 유동적 행동은 약소번 출신자가 번벌정부(藩閥政府)에서 출세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한편, 구키의 미술인식 성립에는 페놀로사라는 인물의 영향이 상당하였다. 메이지정부의 고용외국인(雇用外國人) 페놀로사는 『미술진설(美術眞說)』이라는 연설을 통하여 위기에 빠진 일본 미술의 자신감을 일깨우는데 크게 공헌한 인물로서, 구키는 이러한 페놀로사와 미술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였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미술이론적인 시각에서 구키가 페놀로사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움직였다고 이해하는 연구경향이 파생되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연구경향에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고, 양자가 맡았던 역할과 시대적 흐름이라는 측면에서 재평가될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양자 간의 차이는 미술박물관 설립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페놀로사는 1880년대 중반 미술행정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는 보물조사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방책으로서 미술박물관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순수한 일본 미술의 보호와 발전의 측면에서 접근하였던 페놀로사의 보물조사와 박물관 설립 노력은 메이지정부의 복잡한 정치적 요인으로 인하여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페놀로사의 뒤를 이어 구키는 1887년부터 메이지정부의 미술행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이때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한 것은 페놀로사가 이루지 못한 미술박물관 설립이었다. 그러나 구키도 정치적 문제에서 기인한 예산 문제에 부딪혀 실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구키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산을 최대한 절약하고 있다는 점과 보물조사와 미술박물관 설립을 제실(帝室)과 연결시킴으로써, 최고 결정권자였던 이토 히로부미의 의지를 확고히 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구키의 활동은 또한 당시 메이지정부의 국내외 현안과도 상통하였기 때문에 더욱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한편, 이것은 구키의 과거 행적에서 보이는 보수적 성향과 메이지정부의 실력자들과 맺은 우호적 관계의 연장선상에서도 이해가 가능하다. 미술박물관 설립과 이후 예산 확보 과정에서는 이토와 오쿠마의 원조가 매우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미술박물관 설립 과정에서 나타나는 구키의 특징적인 활동들을 페놀로사 등과는 구분되는 미술행정가 구키의 독자적 역할로 파악할 수 있겠다.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1880년대 후반 메이지정부의 미술행정이 천황권의 강화와 국민국가 성립에 공헌하였다는 고착화된 논의를 재검토해 본다면, 구키 류이치라는 약소번 출신의 관료가 메이지정부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선택하였던 자기 생존 논리와 자신의 미술 애호에서 발단한 신념을 실제화 시키고자 하였던 의도의 복합적인 작용 속에서, 1880년대 후반 일본의 미술행정이 보수적인 근대 천황제 국가의 성립에 이바지할 수 있었다는 이해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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