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한중 양국 정부는 부국강병을 위해 근대화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를 위한 노력 가운데 하나가 청년 학생들에게 留學을 장려하거나 지원하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적지 않은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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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20
학위논문(석사) --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 동아시아학과 , 2020. 2
2020
한국어
서울
A study on the policies of study-abroad in Japan during the late 19th century and early 20th century : By comparing with Chinese study-abroad policy in Japan
vi, 127 p. : 삽화 ; 30 cm
지도교수: 배항섭
참고문헌: p. 121-125
I804:11040-000000157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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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한중 양국 정부는 부국강병을 위해 근대화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를 위한 노력 가운데 하나가 청년 학생들에게 留學을 장려하거나 지원하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적지 않은 청년 학생들이 구국의 방법을 찾기 위해 해외 유학의 길에 올랐다. 특히 한국과 중국의 청년 학도들이 가장 많이 유학한 나라는 가까운 일본이었다. 한국과 중국에서 일본으로 많은 유학생을 보낸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① 가까워서 여비를 아낄 수 있으니 많은 학생을 파견할 수 있다. ② 일본어는 중국어나 한국어와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쉽게 파악할 수 있다. ③ 서양 서적은 복잡한데 이를 이미 일본인들이 간략하게 요약하고 참작하여 고쳐놓았다. ④ 한ㆍ중ㆍ일 삼국의 생활습관이 유사하여 도일 유학생들은 쉽게 현제 생활에 적응할 수 있어서 적은 노력으로 많은 성과를 낼 수 있다.
이에 따라 아직 현대 교육 체제가 완비되지 않았던 19세기 말부터 중국과 한국에서는 渡日 留學을 통해 근대적 인재를 양성하고 향후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그들을 활용하고자 하였다.
한국과 중국의 도일 유학생 파견 및 유학 정책에 대해서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등에서 이미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왔다. 그러한 연구를 통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한국과 중국의 일본 유학생 파견에 대해서도 비교적 충실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들은 거의 대부분이 일국사적 시야에서만 이루어져 왔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한국과 중국의 도일 유학생 파견이나 그와 관련된 정책이 가지는 특징과 의미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비교사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중 양국의 도일 유학을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관비유학생 파견의 지속성 및 도일 유학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정도이다. 한국의 근대 도일 유학은 친일 세력의 강약에 따라 크게 변화하였다. 한국의 도일 유학생 파견은 국내외적 정세 변화에 따른 굴곡이 극심하였으며, 한국 정부의 재정난까지 더해지면서 유학생 파견정책이 불안정하고 취약한 특징을 보여주게 되었다. 갑오개혁 시기에는 신분제도 및 과거제도의 폐지가 선포되었지만, 전통적 지식인이나 민중들의 반일정서가 오래전부터 강하였기 때문에 일본 및 친일적 관료들의 영향 아래 실시된 갑오개혁에 대한 사회적 적대감도 매우 높았다. 이후 일본의 침략행위가 노골화하면서 일본에 대한 한국사회의 반발심도 더욱 커졌고, 관비 유학생 파견이나 자발적으로 일본에 유학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어려워지기도 했다.
반면, 중국에서는 도일 유학생의 파견이 지속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중국의 경우 한국과 달리 중앙 정부만이 아니라, 오히려 지방 각 성의 주도로 유학생의 파견이 이루어졌다는 점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한국의 경우 개항 이후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舊來의 중앙집권적인 정치문화가 지속된 반면, 중국에서는 19세기 후반에 들어 국내외적 위기가 고조되면서 反滿 분위기가 심화되었고, 紳士 등에 의한 지방자치적 경향이 점증하고 있었다. 더구나 청 왕조를 반대하는 혁명파는 국내의 여러 제한을 벗어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에 따라 20세기 초의 일본은 중국 혁명의 기지로 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한국의 경우는 1905~1910년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 국권 회복을 위해 적지 않은 사비유학생이 도일 유학을 통해 능력을 키우고 구국양책(救國良策)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국처럼 일본에서 적극적으로 혁명세력을 집결하여 자기나라의 정부를 공격하는 상황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이는 이때 중국의 경우 직면한 과제가 주로 내부적, 사회·민족적 모순이었던 반면, 한국인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외세로부터의 침입 및 식민의 위기였다는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연구에서는 한중 양국의 도일 유학을 19세기 말(1880년대 초반)부터 20세기 초반(1910년)으로 국한하여 살피고자 한다. 1880년대 초반은 한국에서 도일 유학생을 처음으로 파견한 시기라는 점, 그리고 1910년은 한국이 일본의 병합을 당한 해라는 점에 주목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에서 도일 유학생을 파견한 시점은 한국에 비해 늦었지만, 초기 유학 정책을 살피기 위해서는 양국 가운데 최초의 도일 유학생이 파견되는 1880년대를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또 1910년은 중국과 관련해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해가 아니지만, 중국에서도 이 시기가 되면 국내 정세의 변화에 따라 유학생의 수가 급격히 줄어든다. 따라서 1910년이 한일 병합이 일어났다는 점을 중시하여 1910년까지로 시기를 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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