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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대 『國朝續五禮儀』 편찬과 정치적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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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T14604729

      • 저자
      • 발행사항

        성남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2017

      • 학위논문사항
      • 발행연도

        2017

      • 작성언어

        한국어

      • 발행국(도시)

        경기도

      • 형태사항

        ; 26 cm

      • 일반주기명

        지도교수: 권오영

      • UCI식별코드

        I804:41054-200000683541

      • 소장기관
        •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우편복사 서비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도서관 소장기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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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국가의례란 나라와 왕실을 운영하는 질서나 의식이다. 조선시대는 법과 예를 주축 으로 하여 운영된 사회로서 『경국대전』과 『국조오례의』가 조선시대의 법전과 예전을 대표하여 편찬되었다. 법전과 예전은 함께 다루어야 할 주제이지만 본 연구에서는 의례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결정에는 조선시대가 법치사회인지 예치사회인지 또는 법이 우선하는지 예가 우선하는지에 대한 논란의 문제가 작용하 였다. 이 논란에 대한 고민을 덜기 위해 연구 범위를 좁혀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그 관계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여기에 시기 문제를 개입해보면 영조 시대의 산물은 『속대전』과 『속오례의』이다. 본고에서는 범위를 의례서 연구로 제한하여 영조 시대를 조명해 보려고 한다.

      춘추전국시대에 의례를 기록하였던 『예기』·『주례』·『의례』에서 유교를 바탕으로 한국가의례의 어원을 찾는데, 삼례로 불리는 이들 의례서 가운데 『주례』의 예제 부분이 강조되어 ‘五禮儀’라는 이름의 의례서가 조선시대 국가의례서의 자리를 차지해왔 다. 국가의례의 운영을 담당했던 ‘오례의’가 계속해서 같은 이름을 유지하더라도, 그리고 오례서에 담긴 의식 절차의 항목명이 같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시대의 사상과 이념이 반영된 의례서의 내용이 같을 수 없다. 고려 말에 수용된 성리 학이 조선화 과정을 거쳐 탄생한 이념의 결과물을 『속오례의』로 보려고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영조 시대에 왜 『속오례의』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성종대의 『오 례의』 완성 이후 영조가 270년이나 지난 시점에 새삼 새로운 의례서를 만들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본 연구에서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속오례의』의 구성체제인 序例와 儀註를 분석해보았다. 특히 56개의 의주 하나하나에 대한 검토를 통해 당대 정치적 현안이 무엇인지를 파악해보고 이에 따른 왕과 신하들의 의중까지 읽어보고자 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본론을 세 개의 장(Ⅱ, Ⅲ, Ⅳ)으로 구성하였다. 먼저 Ⅱ장 『국조속 오례의』 편찬 배경에서는 1. 오례의의 시행, 2. 『오례의』 개정 논란, 3. 『속오례의』 편찬 배경으로 나누어 살폈다.

      1절에서는 16~17세기의 오례의와 주자가례 시행의 논란을 살펴보기 위해 세 가지 쟁점을 꼽아보았다. 이 쟁점들은 Ⅲ~Ⅳ장과의 연계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데 주안점을 둔 것으로, 첫째 복제문제를 다루었다. 복제문제에서 나타난 의례의 충돌은 사림 들이 주장해오던 庶人들의 3년상제가 확립되고, 졸곡 후 관리들이 집무할 때의 차림이 흑립·백립 문제에서 백모·백대로 정해지면서 주자가례의 실행으로 이어졌다. 둘째, ‘命使奉迎’이라 하여 신하가 왕비를 맞이해오던 예가 사림들의 주장에 따라 국왕의 친영례로 실현된 것은 1517년(중종 12) 문정왕후를 친영례로 맞이하였을 때이다. 중종대와 선조대의 시행을 거친 이 친영의례는 영조대에 가서야 『속오례의』에 納妃親迎儀라는 정식 의례로 실리게 된다. 셋째, 遷陵문제는 학문적·철학적 입장이 다른 훈구파와 사림파, 또는 훈구파와 척신파 간의 갈등 안에서 살펴본 의례 논쟁이 다. 16세기에 이루어진 천릉에는 昭陵과 禧陵, 靖陵이 있는데, 소릉 천릉은 사림들이 의리와 명분을 앞세워 요구해온 일이 실현된 사례이다. 그리고 희릉 천릉은 권신 김안로가 훈구세력인 정광필을 제거하려는 술수에서 시작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정권을 장악한 척신 김안로의 전횡을 중종이 처단했다는 데 의의를 가지는 사건이다. 정릉 천릉은 명종이 친정체제의 구축을 통해 왕권 확립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리고 훈척신과 사림파의 갈등구조를 17세기의 寧陵 천릉에까지 확장해보면, 의례를 명목으로 한 정치적 대립을 확인할 수 있다. 寧陵을 천릉한 뒤 척신인 김우 명이 사림의 대신인 송시열을 배척하기 위해 新陵에 表石 세우는 일을 반대하였다. 복제나 친영례, 천릉문제에서 『오례의』 의례 시행과 국가례에 대한 주자가례의 적용을 두고 벌어진 각 당파 간의 입장 차이를 확인하였다.

      2절에서는 『오례의』 개정 논란을 다루었다. 17세기 초반 침류대시사 활동을 통한 진한고문파와 당송고문파의 인적 구분을 예학에도 적용해보면 진한고문파는 남인 또는 서인의 소론으로 연결되고, 당송고문파는 서인 또는 서인의 노론으로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인과 서인의 대결 구도는 17세기 예송문제라는 큰 정치적 사건 으로 이어지며, 노론과 소론은 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이므로 본고에서는 이 분열을 『오례의』의 개정논의에서 찾아보았다. 서인학계의 대표적 예학자인 김장생의 예학은 그의 아들 김집에게로 연결되며 김집이 제기한 『오례의』의 개정논의가 발생한 시점은 인조 말년으로, 서인 분열의 시초로 일컬어지는 한당과 산당의 구분이 있었던 시기와 일치한다. 이를 빌미로 서인 내의 분열의 조짐을 확인할 수 있다. 김집은 『오례의』 개정을 주장하고 이경석은 『오례의』를 고수하였는데, 준론 쪽의 덕망 있는 원로인 김상헌은 『오례의』 개정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정태화는 이경석에 동조하는 입장을 보이며 서인 내의 준론-완론의 구분이 있을 때 완론 쪽에 서게 된다. 그러므로 『오례의』 개정에 대한 찬-반의 대립적 입장은 서인을 준론 -완론으로 나눌 수 있는 구실이 되기도 한다. 이 분열은 다시 조선후기 의례서 편찬 에서 이루어지는 노론과 소론 간의 대립구도와 관련되므로 『오례의』 개정에서 다루 어지는 학파·정파에 대한 논의는 조선후기 의례 제정자들의 정치적 연원을 고려한 것이다.

      3절에서는 『속오례의』 편찬 배경을 『속오례의』 편찬의 필요성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1474년(성종 5)에 『오례의』가 편찬되고 그로부터 270년이 지난 1744년 (영조 20)에 『오례의』의 증보편에 해당하는 『속오례의』의 편찬이 이루어지는데, 겉으로 드러난 『속오례의』 편찬 이유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의에 맞지 않은 부분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오례의』의 실질적인 편찬 이유에는 분명 왕권강화의 측면에서 이해해볼 수 있는 정치적 이유가 존재한다. 왕세자와 왕세손의 길례·가례 의절을 보완한 『속오례의보』, 그리고 흉례편을 보완한 『상례보편』도 영조의 왕위 정통성 문제가 해결된 시점에 진행된 왕권강화 작업이다.

      Ⅲ장 『국조속오례의』 편찬과 보완 의례서에서는 1. 편찬 과정, 2. 구성과 내용, 3. 보완 의례서의 편찬을 살펴보았다.

      1절의 편찬 과정에서는 『속오례의』의 편찬 발단과 전개를 다루었다. 1)항 편찬 발단은 『속오례의』를 편찬하라는 왕명이 내려진 1740년(영조 16)의 기사에서부터 시작된다. 숙종 때 임금에 대한 신하의 복제를 收議한 것이 『주례』 이후에 처음 있는 일이었는데 아직도 이루어진 서적이 없으니 印出하여 반포해야 한다는 특진관 尹陽 來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이 기사에서 『속오례의』 편찬을 불러일으킨 군신복제 논의에 등장한 『주례』를 주목해보았는데, 군신복제에 『주례』의 사상적 의미가 작용 하였는지에 대한 검토보다는 『주례』를 이념으로 삼은 소론이 왕에게 선택되어 『속 오례의』 편찬자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크게 부각시켜 보았다. 경종 연간에 발생한 임인옥사를 소론 측의 무고로 판정한 사건인 경신처분이 『속오례의』 편찬 논의가 대두되었던 1740년(영조 16)에 이루어진다. 이후 아무리 노론이 정권의 주도권을 잡았다 하더라고 노론 일당만으로 정권이 형성되지는 않는다. 신임사 처분에 있어서 소론에 의해 혐의를 벗고 그들의 동의를 얻고자 했던 왕의 입장에서는 소론세력을 정권에서 완전히 배제시킬 수 없었다. 이에 따라서 노·소론을 주축으로 한 연합정권을 유지하여 탕평책을 재정립하게 된 시점에 왕은 소론을 의례서 편찬자로 등용하기 위해 『주례』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였다.

      1)항에서 『주례』와 군신복제논의, 편찬자 구성의 관계를 밝히는데 할애하였다면 2)항 편찬 전개에서는 『속오례의』의 일자별 편찬 작업에 대한 세부 논의를 실록과 『승정원일기』 기사를 근거로 하여 1744년(영조 20) 8월 27일의 완성에 이르는 시점 까지 서술하였다.

      2절의 구성과 내용에서는 『속오례의』의 길·가·빈·군·흉례의 내용을 다루었다. 먼저, 『오례의』를 기준으로 삼아 『속오례의』 의주가 『오례의』 의주의 어느 위치에 추가되는지를 명시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오례의』의 전반적인 내용이 파악되어야 추가 또는 증보된 내용도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알 수 있으므로, 오례의 개별 항목의 정의·연원·개념·형성과 특징 등 사전적 내용을 서술하여 Ⅳ장에서 『속오례의』 의주의 시행시기를 논의하고 특징을 밝히기 위한 밑바탕으로 삼았다. Ⅳ장에서는 이오례의 내용을 기본으로 해서 증보된 내용만 다루었으므로 의례의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절이 되도록 하였다.

      3절의 보완 의례서의 편찬에서는 왕세자와 왕세손의 길례·가례를 보완한 『국조속 오례의보』와 흉례를 보완한 『국조상례보편』을 살펴보았다. 『속오례의』에 이어 노론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속오례의보』와 『상례보편』의 편찬 시기는 1740년(영조 16) 경신처분을 통해서 노론이 출사의 명분을 회복하고 왕위 정통성 시비가 끝난 뒤이 면서 1749년(영조 25) 왕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이다. 『속오례의보』는 1751년(영조 27)에 편찬되었고, 두 차례의 편찬을 거치는 『상례보 편』의 처음 편찬 시기는 1752년(영조 28), 그다음은 6년 뒤인 1758년(영조 34)이다. 의소세손이 1750년 8월 27일에 태어나 1752년(영조 28) 3월 4일 3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하였는데, 1752년(영조 28) 1월 『상례수교』가 만들어진 것은 첫째 아들이었던 효장세자의 빈인 효순현빈이 1751년(영조 27) 11월 14일에 죽음으로써 영조가 흉례로 구성된 국가전례서의 편찬을 명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757년(영조 33) 2월 15일에 영조비 정성왕후 서씨(66세), 3월 26일에 숙종비 인원왕후 김씨 (71세)가 잇달아 승하하자 『속상례보편』을 만들고 이를 합쳐 1758년(영조 34)에 『상 례보편』을 만들었다.

      Ⅳ장 『국조속오례의』와 『국조속오례의보』·『국조상례보편』 의주의 시행시기와 특징 에서는 1. 『속오례의』 의주 시행시기, 2. 『속오례의보』와 『상례보편』 의주의 시행시 기, 3. 특징을 서술해보았다.

      1절에서는 『속오례의』 길·가·빈·군·흉례를 다시 성격별로 분류하여 시행시기를 살폈다. 『속오례의』는 의주명이나 의주 끝 부분에 연혁이 기록되어 있어 시행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연혁을 좇아 『속오례의』에 수록된 의주 56항목의 시행시기를 하나씩 짚어보면 영조 이전과 영조대 처음 시행된 의례의 항목 수가 비슷한 비율을 보인다.

      2절의 『속오례의보』와 『상례보편』도 1절과 같은 방식으로 검토하였다. 1·2절에서는 의례서에 나오는 연혁의 시행시기에 의거하여 실록과 『승정원일기』의 실제 시행 사례를 확인하는 작업을 거쳤다.

      3절에서는 1·2절의 결과를 바탕으로 영조 이전과 영조대 처음 시행된 의례에 의미를 부여해보았다. 영조 이전에 시행된 의례는 先朝가 시행하였지만 의례서에 명문 화되지 못한 경우도 있고, 시도는 하였지만 실제 의례 시행으로까지 연결되지 못한 경우도 있다. 이 의례들이 영조가 선왕의 뜻을 계승한 것으로서 ‘자식으로서 부모의 뜻을 잘 잇고 하시던 일을 잘 발전시키는 것이란 뜻’의 계술을 표방한 것이라고 한다면, 나머지 절반은 영조가 새롭게 시행한 의례이다. 『속오례의』 의주는 기존 의례의 개정이 아니라 『오례의』의 의주는 그대로 두고 새로운 의례를 증보한 것인데 영조 자신이 처음 시행하는 의례라고 하면서도 반드시 선왕의 권위를 빌렸다. 영조가 계술하고자 했던 선왕의 권위에는 부왕 숙종이 자처하였던 ‘君師’의 지위도 있었다. 이 때문에 영조는 의례 시행에 있어서 요순 이래로 자신이 처음 시행한다는 자부심을 드러내었다. 영조는 의례를 통해 왕의 정통성과 절대성을 내세우고 왕위의 정당 성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왕실의 위상을 높이고 국가중흥의 군주로 거듭나고자 하였다.

      의례서 편찬자들의 당색을 보면 『속오례의』는 소론, 『속오례의보』와 『상례보편』은 노론이다. 당시 노소 연합정책을 펴고 있던 영조에게 이 구성은 우연이 아니었다. 영조는 의례서에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반영하기 위해 노론과 소론, 어느 한 쪽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영조의 정책 구상 아래 만들어진 『속오례의』의 편찬자는 소론으로 구성되었고, 의주 항목에는 사림의리에서 연결되는 노론의 의리가 수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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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의례란 나라와 왕실을 운영하는 질서나 의식이다. 조선시대는 법과 예를 주축 으로 하여 운영된 사회로서 『경국대전』과 『국조오례의』가 조선시대의 법전과 예전을 대표하여 편찬...

      국가의례란 나라와 왕실을 운영하는 질서나 의식이다. 조선시대는 법과 예를 주축 으로 하여 운영된 사회로서 『경국대전』과 『국조오례의』가 조선시대의 법전과 예전을 대표하여 편찬되었다. 법전과 예전은 함께 다루어야 할 주제이지만 본 연구에서는 의례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결정에는 조선시대가 법치사회인지 예치사회인지 또는 법이 우선하는지 예가 우선하는지에 대한 논란의 문제가 작용하 였다. 이 논란에 대한 고민을 덜기 위해 연구 범위를 좁혀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그 관계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여기에 시기 문제를 개입해보면 영조 시대의 산물은 『속대전』과 『속오례의』이다. 본고에서는 범위를 의례서 연구로 제한하여 영조 시대를 조명해 보려고 한다.

      춘추전국시대에 의례를 기록하였던 『예기』·『주례』·『의례』에서 유교를 바탕으로 한국가의례의 어원을 찾는데, 삼례로 불리는 이들 의례서 가운데 『주례』의 예제 부분이 강조되어 ‘五禮儀’라는 이름의 의례서가 조선시대 국가의례서의 자리를 차지해왔 다. 국가의례의 운영을 담당했던 ‘오례의’가 계속해서 같은 이름을 유지하더라도, 그리고 오례서에 담긴 의식 절차의 항목명이 같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시대의 사상과 이념이 반영된 의례서의 내용이 같을 수 없다. 고려 말에 수용된 성리 학이 조선화 과정을 거쳐 탄생한 이념의 결과물을 『속오례의』로 보려고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영조 시대에 왜 『속오례의』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성종대의 『오 례의』 완성 이후 영조가 270년이나 지난 시점에 새삼 새로운 의례서를 만들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본 연구에서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속오례의』의 구성체제인 序例와 儀註를 분석해보았다. 특히 56개의 의주 하나하나에 대한 검토를 통해 당대 정치적 현안이 무엇인지를 파악해보고 이에 따른 왕과 신하들의 의중까지 읽어보고자 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본론을 세 개의 장(Ⅱ, Ⅲ, Ⅳ)으로 구성하였다. 먼저 Ⅱ장 『국조속 오례의』 편찬 배경에서는 1. 오례의의 시행, 2. 『오례의』 개정 논란, 3. 『속오례의』 편찬 배경으로 나누어 살폈다.

      1절에서는 16~17세기의 오례의와 주자가례 시행의 논란을 살펴보기 위해 세 가지 쟁점을 꼽아보았다. 이 쟁점들은 Ⅲ~Ⅳ장과의 연계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데 주안점을 둔 것으로, 첫째 복제문제를 다루었다. 복제문제에서 나타난 의례의 충돌은 사림 들이 주장해오던 庶人들의 3년상제가 확립되고, 졸곡 후 관리들이 집무할 때의 차림이 흑립·백립 문제에서 백모·백대로 정해지면서 주자가례의 실행으로 이어졌다. 둘째, ‘命使奉迎’이라 하여 신하가 왕비를 맞이해오던 예가 사림들의 주장에 따라 국왕의 친영례로 실현된 것은 1517년(중종 12) 문정왕후를 친영례로 맞이하였을 때이다. 중종대와 선조대의 시행을 거친 이 친영의례는 영조대에 가서야 『속오례의』에 納妃親迎儀라는 정식 의례로 실리게 된다. 셋째, 遷陵문제는 학문적·철학적 입장이 다른 훈구파와 사림파, 또는 훈구파와 척신파 간의 갈등 안에서 살펴본 의례 논쟁이 다. 16세기에 이루어진 천릉에는 昭陵과 禧陵, 靖陵이 있는데, 소릉 천릉은 사림들이 의리와 명분을 앞세워 요구해온 일이 실현된 사례이다. 그리고 희릉 천릉은 권신 김안로가 훈구세력인 정광필을 제거하려는 술수에서 시작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정권을 장악한 척신 김안로의 전횡을 중종이 처단했다는 데 의의를 가지는 사건이다. 정릉 천릉은 명종이 친정체제의 구축을 통해 왕권 확립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리고 훈척신과 사림파의 갈등구조를 17세기의 寧陵 천릉에까지 확장해보면, 의례를 명목으로 한 정치적 대립을 확인할 수 있다. 寧陵을 천릉한 뒤 척신인 김우 명이 사림의 대신인 송시열을 배척하기 위해 新陵에 表石 세우는 일을 반대하였다. 복제나 친영례, 천릉문제에서 『오례의』 의례 시행과 국가례에 대한 주자가례의 적용을 두고 벌어진 각 당파 간의 입장 차이를 확인하였다.

      2절에서는 『오례의』 개정 논란을 다루었다. 17세기 초반 침류대시사 활동을 통한 진한고문파와 당송고문파의 인적 구분을 예학에도 적용해보면 진한고문파는 남인 또는 서인의 소론으로 연결되고, 당송고문파는 서인 또는 서인의 노론으로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인과 서인의 대결 구도는 17세기 예송문제라는 큰 정치적 사건 으로 이어지며, 노론과 소론은 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이므로 본고에서는 이 분열을 『오례의』의 개정논의에서 찾아보았다. 서인학계의 대표적 예학자인 김장생의 예학은 그의 아들 김집에게로 연결되며 김집이 제기한 『오례의』의 개정논의가 발생한 시점은 인조 말년으로, 서인 분열의 시초로 일컬어지는 한당과 산당의 구분이 있었던 시기와 일치한다. 이를 빌미로 서인 내의 분열의 조짐을 확인할 수 있다. 김집은 『오례의』 개정을 주장하고 이경석은 『오례의』를 고수하였는데, 준론 쪽의 덕망 있는 원로인 김상헌은 『오례의』 개정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정태화는 이경석에 동조하는 입장을 보이며 서인 내의 준론-완론의 구분이 있을 때 완론 쪽에 서게 된다. 그러므로 『오례의』 개정에 대한 찬-반의 대립적 입장은 서인을 준론 -완론으로 나눌 수 있는 구실이 되기도 한다. 이 분열은 다시 조선후기 의례서 편찬 에서 이루어지는 노론과 소론 간의 대립구도와 관련되므로 『오례의』 개정에서 다루 어지는 학파·정파에 대한 논의는 조선후기 의례 제정자들의 정치적 연원을 고려한 것이다.

      3절에서는 『속오례의』 편찬 배경을 『속오례의』 편찬의 필요성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1474년(성종 5)에 『오례의』가 편찬되고 그로부터 270년이 지난 1744년 (영조 20)에 『오례의』의 증보편에 해당하는 『속오례의』의 편찬이 이루어지는데, 겉으로 드러난 『속오례의』 편찬 이유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의에 맞지 않은 부분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오례의』의 실질적인 편찬 이유에는 분명 왕권강화의 측면에서 이해해볼 수 있는 정치적 이유가 존재한다. 왕세자와 왕세손의 길례·가례 의절을 보완한 『속오례의보』, 그리고 흉례편을 보완한 『상례보편』도 영조의 왕위 정통성 문제가 해결된 시점에 진행된 왕권강화 작업이다.

      Ⅲ장 『국조속오례의』 편찬과 보완 의례서에서는 1. 편찬 과정, 2. 구성과 내용, 3. 보완 의례서의 편찬을 살펴보았다.

      1절의 편찬 과정에서는 『속오례의』의 편찬 발단과 전개를 다루었다. 1)항 편찬 발단은 『속오례의』를 편찬하라는 왕명이 내려진 1740년(영조 16)의 기사에서부터 시작된다. 숙종 때 임금에 대한 신하의 복제를 收議한 것이 『주례』 이후에 처음 있는 일이었는데 아직도 이루어진 서적이 없으니 印出하여 반포해야 한다는 특진관 尹陽 來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이 기사에서 『속오례의』 편찬을 불러일으킨 군신복제 논의에 등장한 『주례』를 주목해보았는데, 군신복제에 『주례』의 사상적 의미가 작용 하였는지에 대한 검토보다는 『주례』를 이념으로 삼은 소론이 왕에게 선택되어 『속 오례의』 편찬자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크게 부각시켜 보았다. 경종 연간에 발생한 임인옥사를 소론 측의 무고로 판정한 사건인 경신처분이 『속오례의』 편찬 논의가 대두되었던 1740년(영조 16)에 이루어진다. 이후 아무리 노론이 정권의 주도권을 잡았다 하더라고 노론 일당만으로 정권이 형성되지는 않는다. 신임사 처분에 있어서 소론에 의해 혐의를 벗고 그들의 동의를 얻고자 했던 왕의 입장에서는 소론세력을 정권에서 완전히 배제시킬 수 없었다. 이에 따라서 노·소론을 주축으로 한 연합정권을 유지하여 탕평책을 재정립하게 된 시점에 왕은 소론을 의례서 편찬자로 등용하기 위해 『주례』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였다.

      1)항에서 『주례』와 군신복제논의, 편찬자 구성의 관계를 밝히는데 할애하였다면 2)항 편찬 전개에서는 『속오례의』의 일자별 편찬 작업에 대한 세부 논의를 실록과 『승정원일기』 기사를 근거로 하여 1744년(영조 20) 8월 27일의 완성에 이르는 시점 까지 서술하였다.

      2절의 구성과 내용에서는 『속오례의』의 길·가·빈·군·흉례의 내용을 다루었다. 먼저, 『오례의』를 기준으로 삼아 『속오례의』 의주가 『오례의』 의주의 어느 위치에 추가되는지를 명시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오례의』의 전반적인 내용이 파악되어야 추가 또는 증보된 내용도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알 수 있으므로, 오례의 개별 항목의 정의·연원·개념·형성과 특징 등 사전적 내용을 서술하여 Ⅳ장에서 『속오례의』 의주의 시행시기를 논의하고 특징을 밝히기 위한 밑바탕으로 삼았다. Ⅳ장에서는 이오례의 내용을 기본으로 해서 증보된 내용만 다루었으므로 의례의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절이 되도록 하였다.

      3절의 보완 의례서의 편찬에서는 왕세자와 왕세손의 길례·가례를 보완한 『국조속 오례의보』와 흉례를 보완한 『국조상례보편』을 살펴보았다. 『속오례의』에 이어 노론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속오례의보』와 『상례보편』의 편찬 시기는 1740년(영조 16) 경신처분을 통해서 노론이 출사의 명분을 회복하고 왕위 정통성 시비가 끝난 뒤이 면서 1749년(영조 25) 왕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이다. 『속오례의보』는 1751년(영조 27)에 편찬되었고, 두 차례의 편찬을 거치는 『상례보 편』의 처음 편찬 시기는 1752년(영조 28), 그다음은 6년 뒤인 1758년(영조 34)이다. 의소세손이 1750년 8월 27일에 태어나 1752년(영조 28) 3월 4일 3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하였는데, 1752년(영조 28) 1월 『상례수교』가 만들어진 것은 첫째 아들이었던 효장세자의 빈인 효순현빈이 1751년(영조 27) 11월 14일에 죽음으로써 영조가 흉례로 구성된 국가전례서의 편찬을 명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757년(영조 33) 2월 15일에 영조비 정성왕후 서씨(66세), 3월 26일에 숙종비 인원왕후 김씨 (71세)가 잇달아 승하하자 『속상례보편』을 만들고 이를 합쳐 1758년(영조 34)에 『상 례보편』을 만들었다.

      Ⅳ장 『국조속오례의』와 『국조속오례의보』·『국조상례보편』 의주의 시행시기와 특징 에서는 1. 『속오례의』 의주 시행시기, 2. 『속오례의보』와 『상례보편』 의주의 시행시 기, 3. 특징을 서술해보았다.

      1절에서는 『속오례의』 길·가·빈·군·흉례를 다시 성격별로 분류하여 시행시기를 살폈다. 『속오례의』는 의주명이나 의주 끝 부분에 연혁이 기록되어 있어 시행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연혁을 좇아 『속오례의』에 수록된 의주 56항목의 시행시기를 하나씩 짚어보면 영조 이전과 영조대 처음 시행된 의례의 항목 수가 비슷한 비율을 보인다.

      2절의 『속오례의보』와 『상례보편』도 1절과 같은 방식으로 검토하였다. 1·2절에서는 의례서에 나오는 연혁의 시행시기에 의거하여 실록과 『승정원일기』의 실제 시행 사례를 확인하는 작업을 거쳤다.

      3절에서는 1·2절의 결과를 바탕으로 영조 이전과 영조대 처음 시행된 의례에 의미를 부여해보았다. 영조 이전에 시행된 의례는 先朝가 시행하였지만 의례서에 명문 화되지 못한 경우도 있고, 시도는 하였지만 실제 의례 시행으로까지 연결되지 못한 경우도 있다. 이 의례들이 영조가 선왕의 뜻을 계승한 것으로서 ‘자식으로서 부모의 뜻을 잘 잇고 하시던 일을 잘 발전시키는 것이란 뜻’의 계술을 표방한 것이라고 한다면, 나머지 절반은 영조가 새롭게 시행한 의례이다. 『속오례의』 의주는 기존 의례의 개정이 아니라 『오례의』의 의주는 그대로 두고 새로운 의례를 증보한 것인데 영조 자신이 처음 시행하는 의례라고 하면서도 반드시 선왕의 권위를 빌렸다. 영조가 계술하고자 했던 선왕의 권위에는 부왕 숙종이 자처하였던 ‘君師’의 지위도 있었다. 이 때문에 영조는 의례 시행에 있어서 요순 이래로 자신이 처음 시행한다는 자부심을 드러내었다. 영조는 의례를 통해 왕의 정통성과 절대성을 내세우고 왕위의 정당 성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왕실의 위상을 높이고 국가중흥의 군주로 거듭나고자 하였다.

      의례서 편찬자들의 당색을 보면 『속오례의』는 소론, 『속오례의보』와 『상례보편』은 노론이다. 당시 노소 연합정책을 펴고 있던 영조에게 이 구성은 우연이 아니었다. 영조는 의례서에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반영하기 위해 노론과 소론, 어느 한 쪽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영조의 정책 구상 아래 만들어진 『속오례의』의 편찬자는 소론으로 구성되었고, 의주 항목에는 사림의리에서 연결되는 노론의 의리가 수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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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study, which examined Gukjosokoryeui(hereafter referred to as Sokoryeui), was conducted to understand King Yeong-jo’s own philosophy which he maintained in his ruling of the country. Examination of the political history of this period, which will hopefully lead to an enhanced understanding of Yeong-jo’s intentions behind the publication of Sokoryeui, is also attempted.

      Previous studies on rituals of the Joseon Dynasty have primarily focused on certain changes or shifts in ceremonial procedures. The exploration of their origin, what they symbolized, how they proceeded, and how they evolved over time, are all genuinely important subjects. But in order to understand why a new ritual book was published 270 years after Gukjosokoryeui was completed, the examination should go deeper. And
      to do that, this study examines the political history of the time.

      First of all, this study examined the contents of both Gukjo-oryeui and Sokoryeui, to identify the characteristics of the latter. Analyzed after that were the ‘Seo’rye’ and ‘Uiju’ portions in Sokoryeui, with all the dates of the implementations of those individual orders (as clarified in all 56 Uiju entries) particularly kept in mind. The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and the Diaries of the Royal Secretariat were consulted, as it was necessary to confirm the actual implementation of these orders, and because they also revealed why King Yeong-jo gave birth to this new ritual book, and what his efforts eventually meant.

      Secondly, the focus of examination moved on to the ‘architects’ of Sokoryeui. As it was published by the government, officials in charge of compilation & publication were all appointed by king Yeong-jo. So, the question of what kind of people they actually were is more than important in ascertaining the king’s original intentions. The parties they belonged to and the political color of those parties were also particularly closely examined, as it was imperative to determine what the king and the appointed officials ‘shared’ with each other, in terms of academic and political agendas.

      Also, in an attempt to shed more light upon the meaning of Sokoryeui, the Law code Sokdaejeon -which was published roughly in the same period- is reviewed here as well. Ritual books and law codes tended to go hand-in-hand during the Joseon period. And King Yeong-jo’s era was no exception, as Sokdaejeon and Sokoryeui shared both individuals and intentions behind their respective publications.

      To summarize certain points that are made above, it can be said that first of all Sokoryeui was in nature a ‘supplementary publication’ to existing ritual books. Previous studies on Sokdaejeon and Sokoryeui merely believed that they were published as a result of certain enhancement projects concerning dynastic culture and institutions. However, it is clear that Sokoryeui should not be regarded as a mere ‘revised’ version of Gukjo-oryeui, as Sokoryeui‘s entire volume only adds up to a quarter of that of Gukjo-oryeui. In fact, Sokoryeui was not a book that collected and contained all revised protocols which had been accumulating for over 270 years since the compilation of Gukjo-oryeui. It was a collection which contained new protocols, selected (with an agenda in mind) by King Yeong-jo himself, and that means Sokoryeui was not an ordinary project of enhancing existing ritual books, at all.

      The second point to be made would be the fact that most of the scholars drafted in the task of publishing Sokoryeui were from the “Soron” party, probably because they were the ones who primarily based their ideology on Jurye. King Yeong-jo was recently cleared from certain accusations made against him, so he allowed the “Noron” party members to return to the government. And right after that, as another attempt at the “Tangpyeong policy,” he appointed “Soron” party members to the task, while honoring the philosophy of fidelity in general, and therefore garnering the support of the “Noron” party members in the process. By doing so, he was able to position himself as the king with necessary dignity and legitimacy.

      Third, Sokeuiryeui was composed of rituals which were designed to elevate the status of the king as well as his own royal authority. As reflected in this book, it is more than evident that what he wanted was to demonstrate himself as a legitimate ruler who inherited the lineages of Kings Hyo-jong, Hyeon-jong and Suk-jong. The fact that rituals for Sukbin Choi –his lowborn biological mother- were added also shows that. And rituals for crown princes, queens, and crown princesses were also added in order to elevate the image of the royal family. In the process, King Yeong-jo continued to argue that he was only following his father’s(Suk-jong’s) footsteps. Essentially he was borrowing his predecessor’s authority, to validate and justify the birth of a new ritual book.

      And finally, it should be said that Confucian Ritualism was well reflected in Sokoryeui. King Yeong-jo intended to strengthen his royal status and authority but did not go against the basic ideology. As Neo-Confucianism -that had earlier been introduced to people on the Korean peninsula during the late Goryeo period- was now fully embedded in the minds and practices of the Joseon people after over three centuries, Confucian Ritualism also settled into in Sokoryeui.

      While a revision project of culture and institution was planned and undertaken by King Suk-jong -starting with Jeonnoktonggo and Yegiyupyeon- and then culminated in Daejeotongpyeon and Gukjo-oryetongpyeon by King Jeongjo, Sokdaejeon and Sokoryeui of the Yeong-jo era were products of an effort to acquire legitimacy and orthodoxy in one’s succeeding the thr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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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study, which examined Gukjosokoryeui(hereafter referred to as Sokoryeui), was conducted to understand King Yeong-jo’s own philosophy which he maintained in his ruling of the country. Examination of the political history of this period, which wi...

      This study, which examined Gukjosokoryeui(hereafter referred to as Sokoryeui), was conducted to understand King Yeong-jo’s own philosophy which he maintained in his ruling of the country. Examination of the political history of this period, which will hopefully lead to an enhanced understanding of Yeong-jo’s intentions behind the publication of Sokoryeui, is also attempted.

      Previous studies on rituals of the Joseon Dynasty have primarily focused on certain changes or shifts in ceremonial procedures. The exploration of their origin, what they symbolized, how they proceeded, and how they evolved over time, are all genuinely important subjects. But in order to understand why a new ritual book was published 270 years after Gukjosokoryeui was completed, the examination should go deeper. And
      to do that, this study examines the political history of the time.

      First of all, this study examined the contents of both Gukjo-oryeui and Sokoryeui, to identify the characteristics of the latter. Analyzed after that were the ‘Seo’rye’ and ‘Uiju’ portions in Sokoryeui, with all the dates of the implementations of those individual orders (as clarified in all 56 Uiju entries) particularly kept in mind. The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and the Diaries of the Royal Secretariat were consulted, as it was necessary to confirm the actual implementation of these orders, and because they also revealed why King Yeong-jo gave birth to this new ritual book, and what his efforts eventually meant.

      Secondly, the focus of examination moved on to the ‘architects’ of Sokoryeui. As it was published by the government, officials in charge of compilation & publication were all appointed by king Yeong-jo. So, the question of what kind of people they actually were is more than important in ascertaining the king’s original intentions. The parties they belonged to and the political color of those parties were also particularly closely examined, as it was imperative to determine what the king and the appointed officials ‘shared’ with each other, in terms of academic and political agendas.

      Also, in an attempt to shed more light upon the meaning of Sokoryeui, the Law code Sokdaejeon -which was published roughly in the same period- is reviewed here as well. Ritual books and law codes tended to go hand-in-hand during the Joseon period. And King Yeong-jo’s era was no exception, as Sokdaejeon and Sokoryeui shared both individuals and intentions behind their respective publications.

      To summarize certain points that are made above, it can be said that first of all Sokoryeui was in nature a ‘supplementary publication’ to existing ritual books. Previous studies on Sokdaejeon and Sokoryeui merely believed that they were published as a result of certain enhancement projects concerning dynastic culture and institutions. However, it is clear that Sokoryeui should not be regarded as a mere ‘revised’ version of Gukjo-oryeui, as Sokoryeui‘s entire volume only adds up to a quarter of that of Gukjo-oryeui. In fact, Sokoryeui was not a book that collected and contained all revised protocols which had been accumulating for over 270 years since the compilation of Gukjo-oryeui. It was a collection which contained new protocols, selected (with an agenda in mind) by King Yeong-jo himself, and that means Sokoryeui was not an ordinary project of enhancing existing ritual books, at all.

      The second point to be made would be the fact that most of the scholars drafted in the task of publishing Sokoryeui were from the “Soron” party, probably because they were the ones who primarily based their ideology on Jurye. King Yeong-jo was recently cleared from certain accusations made against him, so he allowed the “Noron” party members to return to the government. And right after that, as another attempt at the “Tangpyeong policy,” he appointed “Soron” party members to the task, while honoring the philosophy of fidelity in general, and therefore garnering the support of the “Noron” party members in the process. By doing so, he was able to position himself as the king with necessary dignity and legitimacy.

      Third, Sokeuiryeui was composed of rituals which were designed to elevate the status of the king as well as his own royal authority. As reflected in this book, it is more than evident that what he wanted was to demonstrate himself as a legitimate ruler who inherited the lineages of Kings Hyo-jong, Hyeon-jong and Suk-jong. The fact that rituals for Sukbin Choi –his lowborn biological mother- were added also shows that. And rituals for crown princes, queens, and crown princesses were also added in order to elevate the image of the royal family. In the process, King Yeong-jo continued to argue that he was only following his father’s(Suk-jong’s) footsteps. Essentially he was borrowing his predecessor’s authority, to validate and justify the birth of a new ritual book.

      And finally, it should be said that Confucian Ritualism was well reflected in Sokoryeui. King Yeong-jo intended to strengthen his royal status and authority but did not go against the basic ideology. As Neo-Confucianism -that had earlier been introduced to people on the Korean peninsula during the late Goryeo period- was now fully embedded in the minds and practices of the Joseon people after over three centuries, Confucian Ritualism also settled into in Sokoryeui.

      While a revision project of culture and institution was planned and undertaken by King Suk-jong -starting with Jeonnoktonggo and Yegiyupyeon- and then culminated in Daejeotongpyeon and Gukjo-oryetongpyeon by King Jeongjo, Sokdaejeon and Sokoryeui of the Yeong-jo era were products of an effort to acquire legitimacy and orthodoxy in one’s succeeding the thr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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