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교회의 모습(건축양식)은 시대의 사상과 그에 따른 이미지에 의해 변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실재론적인 신학을 가졌던 중세에 고딕이라는 양식이 출현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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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7
학위논문(석사) --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 신학석사(M.Div) 과정 , 2007
2007
한국어
236 판사항(4)
서울
73p. ; 27cm
참고문헌: p. 7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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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교회의 모습(건축양식)은 시대의 사상과 그에 따른 이미지에 의해 변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실재론적인 신학을 가졌던 중세에 고딕이라는 양식이 출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신의 현현과 하늘과 맞닿은 땅의 만물들의 계층성 그리고 수많은 장식들의 상징 등 고딕은 철저하게 실재적 신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본 논문의 처음에 제기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 땅에 지어진 수많은 고딕외형을 가진 개신교회들은 과연 고딕에 맞는 교회론을 가지고 있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고딕은 중세시대에 어울리는 양식이었고 그마저도 유명론의 등장과 함께 더 이상 축조되지 않았던 양식이다. 그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땅 위에 새롭게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중세의 교회에 반기를 들었던 루터와 칼뱅의 교회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루터와 칼뱅의 교회론이 특별히 오늘날 개신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이를 살펴보는 것은 현대의 개신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교회론을 왜곡하고 있는지를 반추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1) 루터와 칼뱅의 '보이지 않는 교회'
루터의 종교개혁의 중심 원리는 인간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될 뿐이지 행위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교회가 정한 규율을 열심히 지키고 자주 신앙고백을 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구원받은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의식과 투쟁하였다.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는 루터의 교회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어 교회 또한 의롭게 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 즉 '성자들의 모임'이라고 정의하며 이들이 진정 구원받은 사람들이며 진정한 교회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그리스도의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된 자들은 오직 하느님만이 알고 계시는 까닭에 감추어져 있고 불가시적이다. 루터는 이런 선택된 불가시적 교회와 성자들과 죄인들이 혼합되어 있는 경험적 교회를 다음과 같이 구별하였다.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믿음 안에 있는 영혼의 영적 모임이다. 아무도 자기 몸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따라서 본래적이며 실재적이고 참되고 본질적인 그리스도교는 영 안에 존재하는 것이지 어떤 외형적인 것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성서가 거룩한 교회와 그리스도교에 관하여 말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두 개의 교회들을 두 개의 구별된 명칭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본래적이고 기본적이며 본질적이고 참된 첫 번째 교회를 우리는 영적이고 내면 적인 그리스도교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인간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외형적인 두 번째 교회를 우리는 물질적이고 외형적인 교회라고 부를 수 있다.
칼뱅도 루터와 유사한 방법으로 불가시적 교회를 설명한다."성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교회에 대하여 언급한다. 때때로 그것은 하느님의 현존 안에 실제로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현존에는 은총에 의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과, 성령의 성화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참 구성원의 된 사람들만이 받아들여진다. 교회는 오늘날 지상에서 살고 있는 성인들뿐만 아니라 태초부터 선택된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다. 그렇지만 자주 '교회'라는 명칭은 유일한 하느님과 그리스도에게 신앙을 고백한 지상에 널리 퍼져있는 온 무리의 사람을 가리킨다. 세례를 받음으로서 우리는 그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며, 성찬에 참여함으로서 우리는 참 교리와 사랑 안에서의 우리의 일치를 입증한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협력하며, 말씀 선포를 위해서 그리스도가 제정한 교직은 유지된다. 이러한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이름과 외적 현상 이외에는 그분의 어느 것도 갖지 못한 많은 위선자들이 혼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불가시적인 전자의 교회가 오직 하느님의 눈에는 가시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인간들의 '교회'라고 불리는 후자의 교회를 존중해야 하며 그 교회와 영적 교류를 유지해야 한다." 칼뱅의 이러한 주장은 가시적 교회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에서 루터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칼뱅에게 교회의 존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영원한 뜻에 속하는 영역이었고, 가시적 교회는 하느님이 말씀과 성례전과 그리고 권징의 교직을 통하여 선민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하느님이 예비해 주신 수단들로 이해한 것이었으므로 결국 그의 예정론에 입각한다면, 루터가 말한 선택된 '진정한 교회'를 하느님에게 이끄는 수단으로서의 '가시적 교회'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
부연하자면, 전통적 개혁신학은 교회를 '성도들의 교제'(communio sanctorum)라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교제'라고 번역한 라틴어 '꼬뮤니오'라는 말은 '연합, 참여, 나눔'등을 의미한다. 교회가 성도들의 교제이라는 말은 교회가 성도들이 영적으로 연합하여 하느님께 예배하며 그를 섬기고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며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의 공적 집회들과 교회 생활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적 요소는 성도들이다. 만일 성도들이 없다면 교회도 없을 것이다. 물론 교회의 건물은 필요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이지 않고 부수적이다.
2) 현대 개신교회건축의 문제
교회는 단순히 건축물이 아니므로, 교회의 건립은 단순히 외형적 건립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개신교의 교회론의 기초이다. 외적 교회(건물)는 교회의 모임을 위해 필요할 뿐이다. 교회 건립은 일차적으로 성도들이 모이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참된 교회 건립이란 순수한 복음 진리를 선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하며,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장하도록 양육하는 것이다. 성도들의 교제로서의 교회의 실상이나 전체 모습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교제'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것은 수평적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정시춘에 따르면, 교회건축은 교회의 본질과 사명으로부터 설정되는데, 이 본질과 사명은 '성령 안에서의 성도의 교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의 공동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살아있는 몸', '하느님의 백성' 등이 기초가 된다고 한다. 결국 교회론이 변형되고 발전해 왔다 하더라도 이 기본적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 중심에는 '무형'의 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세에 예전의 극적 효과를 위하여 또 상징성의 담보를 위하여 건축은 실용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과도한 건축적 역량을 교회건축에 쏟아 부었고, 이를 통해 종교 개혁가들의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들은 교회가 그 본질과 사명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허례와 허식을 철폐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종교 개혁가들에 의해 제시된 교회는 '말씀선포 중심의 교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교회 내부의 장식과 외부의 화려함은 사라지고, 소박한 설교단 (Pulpit)과 회중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이는 개신교회들의 뿌리로 본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고딕양식의 성당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유형적인 실재를 추구하고, 수직적 관계를 철저하게 추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개신교회들은 실재론적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로만 가톨릭교회를 긍정하여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한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개신교회들은 오히려 외형적 교회에만 관심을 쏟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교회론을 어딘가에 내버리고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멋으로 새워 놓은 첨탑과 의미도 모른 체 만들어 놓은 장미창 등 고딕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부에 들어가면 사정없이 분할해 놓은 공간이 교회론의 부재를 심각하게 말해주고 있다.
무엇이 오늘날의 개신교회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교회론을 왜곡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건축에 철학이 없다는 것은 건축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꼭 건축철학의 부재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종교개혁이 버렸던 교회의 상징체계와 의미들을 오늘날의 교회가 장식요소로 받아들여 쓰고 있는 데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리고 세(勢)를 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더욱 크게 멋있게 건물을 짓는데 좋은 양식이 고딕이기 때문이다. 고딕의 웅장한 규모와 특유의 상승감은 다른 여타의 건축양식을 압도하며 군림한다. 추측컨대, 현대의 개신교회들은 고딕 특유의 상징과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규모와 장식만을 도용하고 있는 것이다. 즉, 중세의 고딕성당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바탕 하여 이미지와 건축 사이에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를 항상 감각과 함께 있는 감각적인 질료 내지는 형상이라고 보아 '미'란 감각적인 물질을 존재케 해주는 조건이라는 것이라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미'와 연계하여 '모방론'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가 말하는 모방이란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작용으로서 감각적인 대상의 참다운 재현을 뜻한다. 인간은 감각을 통해 눈앞에 있는 물체를 알아볼 수 있고, 또한 감각적인 것에서 참다운 존재를 찾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인간 본연의 모방은 바로 이 감각적인 것의 참다운 존재를 모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항을 받은 고딕미술은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영혼을 고양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개방적이고 외향적이며 과시적인 성격을 강하게 보이고 있다. 그런데 현대의 개신교회들은 사상이 부재된 체 이러한 개방적, 외향적, 과시적 성격만을 도용하여 교회론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오늘날 개신교회 건축이 가야할 방향
중세의 성당은 글을 읽을 줄 몰랐던 일반 대중들의 성서였고 사람들이 알아야 할 종교적인 교리를 가르쳐주는 곳이었다. 이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인류가 살아온 이야기,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으로 이루어진 구원의 역사, 하느님의 뜻을 품고 있는 자연의 세계, 하느님께로 가기 위한 올바른 삶의 길인 미덕의 세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이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생활에서의 일과 학문의 세계가 시각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래서 성당은 신학 그 자체이기도 했거니와 돌로 된 백과사전이기도 했다. 중세미술은 비유를 통한 형상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해 주는 것과 동시에 여러 가지의 상징성으로 하느님의 뜻을 전해 주는 것이었다.
교회를 모임으로 정의한 종교개혁의 교회론적 틀 속에서 이야기 할 때, 교회건축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단지 그 모임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할 뿐, 특별한 상징체계와 의미를 가지는 건물은 오히려 스스로의 교회론을 왜곡시킬 수 있다. 종교개혁시대의 교회는 장식을 최대로 배재하고 기능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었다. 또한 장식 없는 교회건물의 실내는 청빈과 순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와 같은 다문화시대에 전통적인 교회론만을 고집한다는 것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그 전통은 계승하되,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말아야 한다. 계속해서 변화되고 발전되는 교회론의 수용을 통해 교회도 그 나름의 대답을 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그동안의 양적 팽창 위주의 성장이 급격히 정체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질적 성장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예배실에 대한 요구로부터, 교육, 친교, 봉사 등 교회의 다른 활동을 위한 공간적 요구가 제기되었고, Missio Dei (하느님의 선교)라는 새로운 선교적 관점을 받아들이면서 지역사회의 열린 교회로서의 사회적 공간에 대한 요구들도 높아지고 있다. 정시춘에 따르면,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교회 건축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교회교육이 강조됨으로서 주일학교가 중요한 교회기능으로 건축에 반영되기 시작하였고, 지역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교회건축의 주변 환경과의 조화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동시에 교회의 사회화 현상에 따라 지역사회 활동기능을 위한 공간을 교회건축에 포함하거나, 교회의 시설을 주중에 지역사회와 관련된 다양한 용도로 전환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공간의 융통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교회가 성도들의 교제를 넘어서 복음을 선포하는 기능과 하느님의 선교에 동참하고 그 도구로서의 역할을 해야한다는 점에서 정시춘 교수의 말은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위기를 겪고 있는 이 땅의 그리스도교는 어쩌면 이러한 교회론의 부재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을 무시한 채 권위적 색채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대형교회들은 지역주민들의 눈총을 받고, 대형화의 길을 걸으며 자본에 잠식당하고 부패해가는 교회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그리스도는 없고 맘몬이 그 자리를 대신한 교회들의 모습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을 떠나 차라리 없어져야 할 존재들로 보이기 일쑤이다. 교회론의 재정립은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일이다. 교회론이 바로 서야 비로소 교회가 교회다워 질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건축은 이 교회론을 충분히 반영하여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외형적 대형화의 모습을 버리고, 주변 환경과 지역적 특색을 고려하여 지역을 포용하는 형상을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규모의 문제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디자인의 문제, 혹은 다른 문제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반복했던 실수들을 되풀이하게 될 뿐이다.
상징이라는 것이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 개신교회건축은 그 기능에 충실하면 된다. 집회의 장소로서, 지역사회의 공적 공간으로서, 선교의 도구로서의 교회의 이상적 모습이 무엇인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건축가들은 계속해서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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