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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16-17세기 유학자의 유람록으로 본 금강산 불교 = Mt. Kungang Buddist through record of excursion written by confucian between 16th century and 17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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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is a manuscript that is given consideration to Mt. Kumgang Buddist through Mt. Kumgang record of excursion in 27 volumes of confucian written between the 16th century and the 17th century. As the record of excursion, I could identify that 118 temples and hermitages of Mt. Kumgang whereabouts continuously rise and fall. Many disciples were practicing asceticism in temple and hermitage that is stayed a high priest of Buddhism, but Mt. Kumgang temple used to be become empty because they mobilized construction of Namhansanseong after the Imjin War.
      Most Mt. Kumgang sightseers used temple as an accommodation. So there were naturally association between confucian scholars and Buddhist monks, and then confucian scholars also wrote an epitaph of Buddhist priests or letter. When they communicate well with each other, they used to dispute about philosophical problems such as Samadhi and Prajna, Principle and Force and so on till late at night. I think that confucian scholars are interested in Buddhism and reduce an negative awareness about Buddhism through these exchanges of opinions.
      Meanwhile, there are many cases that sightseers ride and climb in a palankeen which monks bear. The record of excursion of Jeong Yeop(鄭曄) and Lee Se-gu(李世龜) was recorded that palankeen bearer monk originated in Yang Sa-on(楊士彦) who went sightsee Mt. Kumgang between 1565 and 1572. Actually, it seems to be the late 16th century when the custom of palankeen bearer monk speads throughout the country because we couldn't discover mention a palankeen bearer monk in Mt. Kumgang and Mt. Jiri record of excursion. I think this is because the statue of Buddhism depreciated after the death of Queen Munjŏng in the reign of King Myongj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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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is a manuscript that is given consideration to Mt. Kumgang Buddist through Mt. Kumgang record of excursion in 27 volumes of confucian written between the 16th century and the 17th century. As the record of excursion, I could identify that 118 tem...

      This is a manuscript that is given consideration to Mt. Kumgang Buddist through Mt. Kumgang record of excursion in 27 volumes of confucian written between the 16th century and the 17th century. As the record of excursion, I could identify that 118 temples and hermitages of Mt. Kumgang whereabouts continuously rise and fall. Many disciples were practicing asceticism in temple and hermitage that is stayed a high priest of Buddhism, but Mt. Kumgang temple used to be become empty because they mobilized construction of Namhansanseong after the Imjin War.
      Most Mt. Kumgang sightseers used temple as an accommodation. So there were naturally association between confucian scholars and Buddhist monks, and then confucian scholars also wrote an epitaph of Buddhist priests or letter. When they communicate well with each other, they used to dispute about philosophical problems such as Samadhi and Prajna, Principle and Force and so on till late at night. I think that confucian scholars are interested in Buddhism and reduce an negative awareness about Buddhism through these exchanges of opinions.
      Meanwhile, there are many cases that sightseers ride and climb in a palankeen which monks bear. The record of excursion of Jeong Yeop(鄭曄) and Lee Se-gu(李世龜) was recorded that palankeen bearer monk originated in Yang Sa-on(楊士彦) who went sightsee Mt. Kumgang between 1565 and 1572. Actually, it seems to be the late 16th century when the custom of palankeen bearer monk speads throughout the country because we couldn't discover mention a palankeen bearer monk in Mt. Kumgang and Mt. Jiri record of excursion. I think this is because the statue of Buddhism depreciated after the death of Queen Munjŏng in the reign of King Myongj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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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고는 16-17세기에 찬술된 유학자의 금강산 유람록 27편을 통해 금강산 불교를 고찰한 글이다. 그 유람록을 통해 금강산 소재의 118개 사찰과 암자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高僧이 있는 寺庵에는 많은 제자들이 함께 수행하고 있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남한산성 축조에 동원되면서 금강산 사찰이 텅 비다시피 했던 때도 있었다.
      금강산 유람객들은 대부분 사찰을 숙식처로 사용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유학자와 승려 사이에 교류가 있었고, 유학자들이 승려 비문을 써주거나 글씨를 써주기도 했다. 대화가 통하는 경우에는 밤늦도록 定慧나 理氣 등의 철학적 문제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유학자들이 불교에 관심을 가지거나 불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줄일 수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유람객들은 승려들이 메는 가마를 타고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가마를 메는 藍輿僧은 1565년부터 1572년 사이 금강산을 유람했던 楊士彦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鄭曄과 李世龜의 유람록에서 기록하고 있다. 실제 1572년 이전 금강산이나 지리산의 유람록에서는 남여승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없으므로 남여승의 관습이 확산된 시기는 16세기 후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明宗代 文定王后 승하 후 불교계의 위상이 하락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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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16-17세기에 찬술된 유학자의 금강산 유람록 27편을 통해 금강산 불교를 고찰한 글이다. 그 유람록을 통해 금강산 소재의 118개 사찰과 암자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모습을 확인할 수 ...

      본고는 16-17세기에 찬술된 유학자의 금강산 유람록 27편을 통해 금강산 불교를 고찰한 글이다. 그 유람록을 통해 금강산 소재의 118개 사찰과 암자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高僧이 있는 寺庵에는 많은 제자들이 함께 수행하고 있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남한산성 축조에 동원되면서 금강산 사찰이 텅 비다시피 했던 때도 있었다.
      금강산 유람객들은 대부분 사찰을 숙식처로 사용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유학자와 승려 사이에 교류가 있었고, 유학자들이 승려 비문을 써주거나 글씨를 써주기도 했다. 대화가 통하는 경우에는 밤늦도록 定慧나 理氣 등의 철학적 문제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유학자들이 불교에 관심을 가지거나 불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줄일 수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유람객들은 승려들이 메는 가마를 타고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가마를 메는 藍輿僧은 1565년부터 1572년 사이 금강산을 유람했던 楊士彦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鄭曄과 李世龜의 유람록에서 기록하고 있다. 실제 1572년 이전 금강산이나 지리산의 유람록에서는 남여승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없으므로 남여승의 관습이 확산된 시기는 16세기 후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明宗代 文定王后 승하 후 불교계의 위상이 하락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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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六友堂遺稿"

      2 "樂全堂集"

      3 김탁, "金剛山의 由來와 그 宗敎的 意味" 1 : 1993

      4 이호승, "지리산유람록으로 본 산림문화 가치분석" 경북대학교 대학원 2012

      5 최석기, "지리산 유람록–용이 머리를 숙인 듯 꼬리를 치켜든 듯" 보고사 2008

      6 이종수, "조선후기 불교의 수행체계 연구 : 삼문수학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2010

      7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신구문화사 2010

      8 최윤정, "조선후기 금강산의 불교" 동국대학교 대학원 2008

      9 이창훈, "조선시대 유람록에 나타난 지리산 경관자원의 명승적 가치" 상명대학교 대학원 2014

      10 이상균, "조선시대 關東遊覽의 유행 배경" 인문과학연구소 (31) : 167-196, 2011

      1 "六友堂遺稿"

      2 "樂全堂集"

      3 김탁, "金剛山의 由來와 그 宗敎的 意味" 1 : 1993

      4 이호승, "지리산유람록으로 본 산림문화 가치분석" 경북대학교 대학원 2012

      5 최석기, "지리산 유람록–용이 머리를 숙인 듯 꼬리를 치켜든 듯" 보고사 2008

      6 이종수, "조선후기 불교의 수행체계 연구 : 삼문수학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2010

      7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신구문화사 2010

      8 최윤정, "조선후기 금강산의 불교" 동국대학교 대학원 2008

      9 이창훈, "조선시대 유람록에 나타난 지리산 경관자원의 명승적 가치" 상명대학교 대학원 2014

      10 이상균, "조선시대 關東遊覽의 유행 배경" 인문과학연구소 (31) : 167-196, 2011

      11 탁효정, "조선시대 王室願堂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2012

      12 곽뢰, "신라 오대산문수신앙 연구" 동국대 2016

      13 신동하, "신라 불국토사상의 전개양상과 역사적 의의"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0

      14 최석기,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6" 보고사 2013

      15 최석기,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5" 보고사 2013

      16 최석기,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4" 보고사 2010

      17 최석기,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3" 보고사 2009

      18 최석기,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돌베개 2007

      19 이종수, "삼국·통일신라시대 山寺의 정착과 보살주처신앙의 성립" 경남문화연구원 (49) : 191-216, 2016

      20 황금순, "낙산(洛山)설화와 고려수월관음도, 보타산 관음도량" 불교학연구회 18 : 93-118, 2007

      21 고영섭, "금강산의 불교신앙과 수행전통 : 표훈사, 유점사, 신계사, 건봉사를 중심으로" 보조사상연구원 34 : 305-353, 2010

      22 "默守堂集"

      23 "香湖集"

      24 "養窩集"

      25 智冠, "韓國高僧碑文總集"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0

      26 "韓國佛敎全書 第9冊"

      27 "靑溪集"

      28 "農巖集"

      29 "谷雲集"

      30 "謙庵集"

      31 "蒼谷集"

      32 "苔泉集"

      33 "秋潭集"

      34 "白軒集"

      35 "白湖全書"

      36 "白洲集"

      37 "潛窩遺稿"

      38 "河陰集"

      39 한국학문헌연구소, "楡岾寺本末寺誌" 아세아문화사 1977

      40 "東洲先生逸稿"

      41 "木齋集"

      42 이상균, "朝鮮時代 遊覽文化 硏究" 강원대학교 대학원 2013

      43 "月沙集"

      44 "新溪集"

      45 "敬菴集"

      46 "敝帚遺稿"

      47 허흥식, "指空의 遊歷과 定着" 가산불교문화진흥원 (창간) : 1991

      48 "懶隱集"

      49 "恥齋遺稿"

      50 "寤齋集"

      51 "守夢集"

      52 "大方廣佛華嚴經"

      53 이영운, "17·18세기 하동 쌍계사의 배치와 전각구성의 변화 : 지리산 유람기 분석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대학원 2011

      54 이경순, "17-18세기 士族의 유람과 山水空間 인식" 서강대학교 대학원 2014

      55 박진영, "15-17세기 금강산유람기 연구" 동국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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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6-05-15 학회명변경 한글명 : 남명학연구소 -> 경남문화연구원
      영문명 : The Nammyonghak Study Institute -> Institute of Gyeongnam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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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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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지 인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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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66 0.66 0.53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2 0.5 0.98 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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