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논쟁을 다루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논쟁의 과정과 교회의 결정사항도 살펴보았다. 또한 각자의 삶이 얼마나 그의 신학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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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2004
학위논문(석사) --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 신학과 역사신학전공 , 2005. 2
2004
한국어
231.09 판사항(4)
대전
50p. ; 26cm.
참고문헌: p. 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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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논쟁을 다루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논쟁의 과정과 교회의 결정사항도 살펴보았다. 또한 각자의 삶이 얼마나 그의 신학에 영향을 미쳤는지도 살펴보았다. 펠라기우스의 삶은 자료의 부족을 통하여, 많은 경우 어거스틴의 글을 통하여 조명하게 된다. 따라서 펠라기우스의 삶을 우리가 과연 얼마나 올바로 조명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삶을 하나의 관점을 가지고 본다면, 어거스틴의 삶에 대한 어거스틴의 해석도 펠라기우스의 삶에 대한 어거스틴의 해석도 모두 신학적인 자료가 될 수 있다. 당시의 상황은 도덕적으로 타락해 있던 상황이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실마리를 찾는다면, 그들의 각 삶이 타락한 시대에서 타락했는지 아니면 타락한 시대에 타락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는지를 살피는데서 단서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타락한 시대에 태어난 마음껏 타락했던 사람이지만, 반면에 펠라기우스는 타락한 시대에 태어나 타락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다른 하나의 실마리는 각자가 타락한 시대를 인간이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했는지를 통해서이다. 타락한 시대에 타락을 경험했던 어거스틴은 자신의 의지로 그 나락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다만,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한 후에야 그는 그 속에서 벗어나 은총 안에 거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삶이 변한 후 그는 타락한 시대를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없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타락에 외형적으로 타락에 빠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 타락을 개혁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바로 자유의지를 가진 한 인간인 그 자신이 타락한 시대를 변화시키려 노력했다. 이처럼 각자의 삶은 각자의 신학이 은총이냐, 자유의지냐에 대한 강조점의 차이를 유도한다.
기독교 세계가 이전 시대에 형성했던 교리나 고백은 교회의 역사 가운데서, 개개 신학자들의 관점들과는 혼동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역할을 감당해 왔다. 펠라기우스 논쟁에 대한 결정사항들 또한 적지 않게 죄론과 은총론의 역사에서 한 단락을 의미한다. 다만 오늘의 우리가 이 논쟁을 재해석할 때에 우리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계승 발전시켜야 할 논점들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은 교회 신학의 중요한 기초를 제시해준다. 왜냐하면 구원신학에 있어 은총과 자유의지의 관계를 핵심 되는 문제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구원신학의 관계를 본 구도에서 보는 순간, 어거스틴이 교회의 은총신학을 정립시켰다는데서 중요하게 여길 수 있으나, 한편, 구원신학의 중심에 자유의지를 끌어들였다는 데에서 펠라기우스를 더 중요하게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전까지의 신학이 은총 즉 하나님 중심의 하강적인 구도의 신학이 주류를 이루었다면, 펠라기우스는 구원에 있어 자유의지 즉 인간의 상승적인 구도를 대두시켰기 때문이다.
431년 7월 22일 에베소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펠라기우스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끝을 맺었지만 펠라기우스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특히 우리 가운데서도 종파적 운동의 강한 영향을 입고 있는 곳에서는 더욱 펠라기우스주의가 만연된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을 자꾸 우리에게 끌어내리려고 한다면 그것은 펠라기우스주의가 된다. 그렇게 펠라기우스주의는 지금까지도 일부 기독교회 안에 존속하고 있고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며, 자유의지의 선행을 주장한다. 이에 더하여 자유주의를 유발시키기도 한다.
디도서 2장 14절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미 구원을 얻은 성도라 할지라도 교만하거나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다해 거룩하게 살려는 도덕적 노력을 계속하고 선한 일에 열심을 다하는 친 백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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