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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세기 전반 광주목(廣州牧)의 백자 번조 연구 = A Study on the White Porcelain Makings in Gwangju(廣州) in the First Half of the 15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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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7957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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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history of Porcelain Makings in Gwangju(廣州) began when buncheong ware (粉靑沙器) was produced at the Gohyeon Kiln (羔峴), which is now presumed to be Dosu-ri, Gwangju in the early Joseon Dynasty, around the second half of the 1410s. And in the 1420s, Buncheong ware kilns spread to Seokgul-ri (石掘里), Beoleulcheon (伐乙川), Sosan (所山), and Chohyeon (草峴), which coincided with the period when Hanyang (漢陽) was settled down as the capital of Joseon, accompanined by rapid population increase and government encouragement for the use of porcelain.
      From the early 1420s to 1430s, the high-quality white porcelain made in Beoleulcheon (which is now presumed to be in Sangbeoncheon-ri, Gwangju) was presented to the court. And in the 1440s, the white porcelain manufacturing techniques were improved and the quality of the white porcelain was improved through the reward and punishment of the government, as well as competition between potters. In particular, in Gwangju, there was a development of the firing method of white porcelain due to the improvement of kiln furniture, which provided the basis for Gwangju to become an advanced region, surpassing Goryeong (高靈) and Namwon (南原) in white porcelain.
      It is presumed that, in Gwangju, kilns for white porcelain were not relocated after the buncheong ware kilns were closed; rather, a transition from buncheong ware to the white porcelain occurred within the same area. Therefore, considering the latest time of use of buncheong ware kilns, it can be proposed that stack-firing white porcelain production took place in Gwangju in the late 1430s at the latest.
      From the 1430s, the consumption trend of consumers in Hanyang changed from buncheong ware to white porcelain. However, saggar-firing white porcelain, made for the court, was not easily available, and the amount of production was not large. In the end, it was stack-firing white porcelain of Gwangju that was mass-produced to meet the demand, as well as the tastes of the noble families and the general mar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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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history of Porcelain Makings in Gwangju(廣州) began when buncheong ware (粉靑沙器) was produced at the Gohyeon Kiln (羔峴), which is now presumed to be Dosu-ri, Gwangju in the early Joseon Dynasty, around the second half of the 1410s. And ...

      The history of Porcelain Makings in Gwangju(廣州) began when buncheong ware (粉靑沙器) was produced at the Gohyeon Kiln (羔峴), which is now presumed to be Dosu-ri, Gwangju in the early Joseon Dynasty, around the second half of the 1410s. And in the 1420s, Buncheong ware kilns spread to Seokgul-ri (石掘里), Beoleulcheon (伐乙川), Sosan (所山), and Chohyeon (草峴), which coincided with the period when Hanyang (漢陽) was settled down as the capital of Joseon, accompanined by rapid population increase and government encouragement for the use of porcelain.
      From the early 1420s to 1430s, the high-quality white porcelain made in Beoleulcheon (which is now presumed to be in Sangbeoncheon-ri, Gwangju) was presented to the court. And in the 1440s, the white porcelain manufacturing techniques were improved and the quality of the white porcelain was improved through the reward and punishment of the government, as well as competition between potters. In particular, in Gwangju, there was a development of the firing method of white porcelain due to the improvement of kiln furniture, which provided the basis for Gwangju to become an advanced region, surpassing Goryeong (高靈) and Namwon (南原) in white porcelain.
      It is presumed that, in Gwangju, kilns for white porcelain were not relocated after the buncheong ware kilns were closed; rather, a transition from buncheong ware to the white porcelain occurred within the same area. Therefore, considering the latest time of use of buncheong ware kilns, it can be proposed that stack-firing white porcelain production took place in Gwangju in the late 1430s at the latest.
      From the 1430s, the consumption trend of consumers in Hanyang changed from buncheong ware to white porcelain. However, saggar-firing white porcelain, made for the court, was not easily available, and the amount of production was not large. In the end, it was stack-firing white porcelain of Gwangju that was mass-produced to meet the demand, as well as the tastes of the noble families and the general mar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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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최근 지표조사 자료들을 기존 고고학자료, 사료들과 함께 분석하여 먼저, 15세기 전반 광주목에 분청사기 가마들이 출현하여 확산, 증가하는 현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지역에 비해 광주목에서 선진적으로 백자가 번조되는 배경과 특징들에 대해 고찰하였다.
      조선시대 광주목에서 자기가 번조되기 시작한 때는 조선 초, 대략 1410년대 후반으로, 지금의 광주시 도수리로 추정되는 고현 자기소에서 분청사기가 번조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1420년대에 들어와 석굴리, 벌을천, 소산, 초현 등지로 분청사기 가마가 확산되는데, 한양이 조선의 도성으로 안착하며 호구가 급증하고 조정에서 자기의 사용을 독려하던 시기와 맞물려있다.
      1420년대 초∼1430년대에는 지금의 광주시 상번천리의 벌을천 자기소 분청사기 가마에서 갑발을 이용하여 번조한 양질 백자가 진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440년대가 되면 조정의 유인과 압박, 그리고 장인들의 경쟁을 통해 백자 제조기술이 개선되고 나아가 백자의 품질이 향상되었다. 특히, 광주목에서는 요도구 개발에 부합되는 번조법의 발전이 있었다고 추정되며, 이는 광주목이 백자 번조에 있어 고령, 남원을 제치고 선진지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한편, 광주목에서는 분청사기 가마가 폐요된 후, 지역을 옮겨서 백자가 생산된 것이 아니라 동일한 권역 내에서 분청사기→백자로의 전환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분청사기 가마의 하한을 고려하면 늦어도 1430년대 후반에는 광주목에서 포개구이 백자가 생산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1430년대부터 한양의 도자 수요자들의 소비 성향이 분청사기에서 백자로 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상납되는 양질의 갑번 백자는 당연히 쉽게 구할 수 없었고, 번조 양도 많지 않았다. 결국 사대부가 및 일반 시중의 눈높이뿐만 아니라 수요에 맞추어 대량 생산되어 나온 것이 바로 광주목의 포개구이 백자였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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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지표조사 자료들을 기존 고고학자료, 사료들과 함께 분석하여 먼저, 15세기 전반 광주목에 분청사기 가마들이 출현하여 확산, 증가하는 현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지...

      최근 지표조사 자료들을 기존 고고학자료, 사료들과 함께 분석하여 먼저, 15세기 전반 광주목에 분청사기 가마들이 출현하여 확산, 증가하는 현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지역에 비해 광주목에서 선진적으로 백자가 번조되는 배경과 특징들에 대해 고찰하였다.
      조선시대 광주목에서 자기가 번조되기 시작한 때는 조선 초, 대략 1410년대 후반으로, 지금의 광주시 도수리로 추정되는 고현 자기소에서 분청사기가 번조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1420년대에 들어와 석굴리, 벌을천, 소산, 초현 등지로 분청사기 가마가 확산되는데, 한양이 조선의 도성으로 안착하며 호구가 급증하고 조정에서 자기의 사용을 독려하던 시기와 맞물려있다.
      1420년대 초∼1430년대에는 지금의 광주시 상번천리의 벌을천 자기소 분청사기 가마에서 갑발을 이용하여 번조한 양질 백자가 진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440년대가 되면 조정의 유인과 압박, 그리고 장인들의 경쟁을 통해 백자 제조기술이 개선되고 나아가 백자의 품질이 향상되었다. 특히, 광주목에서는 요도구 개발에 부합되는 번조법의 발전이 있었다고 추정되며, 이는 광주목이 백자 번조에 있어 고령, 남원을 제치고 선진지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한편, 광주목에서는 분청사기 가마가 폐요된 후, 지역을 옮겨서 백자가 생산된 것이 아니라 동일한 권역 내에서 분청사기→백자로의 전환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분청사기 가마의 하한을 고려하면 늦어도 1430년대 후반에는 광주목에서 포개구이 백자가 생산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1430년대부터 한양의 도자 수요자들의 소비 성향이 분청사기에서 백자로 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상납되는 양질의 갑번 백자는 당연히 쉽게 구할 수 없었고, 번조 양도 많지 않았다. 결국 사대부가 및 일반 시중의 눈높이뿐만 아니라 수요에 맞추어 대량 생산되어 나온 것이 바로 광주목의 포개구이 백자였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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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호남의 자기소·도기소-나주목" 2017

      2 최명지, "한국 가마터 발굴현황 조사 2-분청사기 上" 국립광주박물관 2020

      3 국립광주박물관, "한국 가마터 발굴현황 조사 2-분청사기 上" 2020

      4 심지연, "중부지역 분청사기 가마터 조사 현황과 성격" 국립광주박물관 (창간) : 2018

      5 방병선, "중국도자사 연구" 景仁文化社 2012

      6 김삼기, "조선후기 제지수공업 연구" 중앙대학교 대학원 2003

      7 김동수, "조선초기 한성부의 성립과 도시기능의 발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2010

      8 朴成柱, "조선초기 遺明 使節에 대한 일고찰" 경주사학회 19 : 2000

      9 구유리, "조선전기 인화상감자기(印花象嵌瓷器)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16

      10 윤효정, "조선전기 官窯白磁의 器皿體系와 성격"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20

      1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호남의 자기소·도기소-나주목" 2017

      2 최명지, "한국 가마터 발굴현황 조사 2-분청사기 上" 국립광주박물관 2020

      3 국립광주박물관, "한국 가마터 발굴현황 조사 2-분청사기 上" 2020

      4 심지연, "중부지역 분청사기 가마터 조사 현황과 성격" 국립광주박물관 (창간) : 2018

      5 방병선, "중국도자사 연구" 景仁文化社 2012

      6 김삼기, "조선후기 제지수공업 연구" 중앙대학교 대학원 2003

      7 김동수, "조선초기 한성부의 성립과 도시기능의 발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2010

      8 朴成柱, "조선초기 遺明 使節에 대한 일고찰" 경주사학회 19 : 2000

      9 구유리, "조선전기 인화상감자기(印花象嵌瓷器)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16

      10 윤효정, "조선전기 官窯白磁의 器皿體系와 성격"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20

      11 고준휘, "조선시대 경상도지역 자기가마 연구 : 구조변화를 중심으로" 부산대학교 대학원 2012

      12 박형순, "조선 초기 司饔房과 貢納磁器 연구" 충북대학교 대학원 2019

      13 김토담, "조선 전기 자기 가마 연구" 목포대학교 대학원 2020

      14 김영원, "조선 전기 도자사" 2011

      15 박정민, "조선 전기 관요의 성립과 그 명칭에 대한 일고찰" 3 : 2014

      16 박정민, "조선 15세기 전반 경기도 永平縣의 백자제작 배경과 특징" 한국불교미술사학회 (44) : 267-291, 2015

      17 박경자, "조선 15세기 자기공납에 관한 연구" 충북대학교 대학원 2009

      18 한신대학교 박물관, "용인의 도요지" 1999

      19 明知大學校博物館, "용인 자연휴양림 조성부지내 유적 용인 초부리 백자가마 발굴조사보고서" 2009

      20 양구백자박물관, "양구 백자·백토 학술자료집" 2012

      21 방병선, "북한산 청자 가마 발굴의 의미:여말선초 도자 제작 기억, In 강북구 수유동 가마터 발굴조사보고서" 서울역사박물관 2013

      22 강경숙, "미술사, 자료와 해석-秦弘燮先生賀壽論文集" 2008

      23 박정민, "명문백자로 본 15세기 양구(楊口)지역 요업의 성격" 한국불교미술사학회 (32) : 75-102, 2009

      24 경기도자박물관, "김영훈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2016

      25 강경숙, "광주지역 가마출토 분청사기와 백자" 2001

      26 경기도자박물관,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주변지역 1차 발굴조사보고서" 2020

      27 경기도자박물관,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6차 발굴조사보고서" 2020

      28 경기도자박물관,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4차 발굴조사보고서" 2019

      29 한강문화재연구원, "광주 조선백자 요지-광주 조선백자 요지 보존·정비를 위한 5차 시·발굴조사" 2019

      30 국방문화재연구원, "광주 쌍동1지구 주택건설사업 추가부지 내 유적 발굴(시굴)조사 약식보고서" 2018

      31 경기도자박물관, "광주 신대리 29호 백자가마터" 2009

      32 한국문화유산연구원, "광주 신대리 167번지 제1종 근린생활시설 내 문화유적 시굴조사 약보고서" 2014

      33 서울역사박물관, "강북구 우이동 가마터 발굴조사보고서" 2014

      34 서울역사박물관, "강북구 수유동 가마터 발굴조사보고서" 2013

      35 이종민, "麗末~鮮初 硬質白磁로의 이행과정 연구" 호서사학회 (50) : 355-394, 2008

      36 이종민, "麗末~鮮初 瓷器 燔造法 변화와 요인" 조선시대사학회 (80) : 7-46, 2017

      37 大東文化財硏究院, "高靈 箕山里窯址-高靈 88올림픽高速道路擴張區間(第14工區)內 遺蹟 試·發掘調査報告書(第Ⅲ區域)" 2012

      38 大東文化財硏究院, "高靈 沙鳧里窯址-高靈 88올림픽高速道路擴張區間(第14工區)內 遺蹟 試·發掘調査報告書(第Ⅱ區域)" 2012

      39 世宗大學校 博物館, "驪州郡 陶磁遺蹟 分布地圖" 2004

      40 京畿道博物館, "驪州地域의 陶磁遺蹟" 2004

      41 尹龍二, "韓國陶瓷史硏究" 文藝出版社 1993

      42 韓國精神文化硏究院, "韓國白磁陶窯址" 1986

      43 강경숙, "蓮唐草文 變遷과 印花文 發生 試考-廣州 陶水里 粉靑沙器窯址 대접破片을 中心으로" 20 : 1983

      44 강경숙, "粉靑沙器硏究" 一志社 1986

      45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 "淺川巧全集" 1991

      46 윤우성, "朝鮮初期 慶尙道地域 官撰地理志의 編纂과 그 內容의 比較分析" 경남대학교 대학원 2020

      47 土地博物館, "文化遺蹟分布地圖-龍仁市" 2007

      48 朝鮮官窯博物館, "文化遺蹟分布地圖-廣州市" 2005

      49 광주문화원, "廣州의 地名由來" 2005

      50 광주시, "廣州市史" 2010

      51 海剛陶磁美術館, "廣州 牛山里 白磁窯址(Ⅱ)-17호 白磁窯址 發掘調査 報告書" 1999

      52 海剛陶磁美術館, "廣州 牛山里 白磁窯址" 1995

      53 海剛陶磁美術館, "廣州 建業里 朝鮮白磁窯址-建業里2號가마 遺蹟 發掘調査" 2000

      54 國立中央博物館, "京畿道廣州中央官窯(해설편)" 2000

      55 國立中央博物館, "京畿道廣州中央官窯(도판편)" 1998

      56 성윤길,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나주목(羅州牧)의 자기소(磁器所)·도기소(陶器所) 위치 연구" 국립문화재연구원 52 (52): 4-37, 2019

      57 김윤정, "15세기 조선과 명의 御用磁器 제작체제의 유사점과 차이점" 한국대학박물관협회 (85) : 101-124, 2015

      58 강경숙, "15세기 경기도 광주 백자의 성립과 발전" 한국미술사학회 237 : 1-1, 2003

      59 전승창, "15~16세기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 관요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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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20-07-29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archaeology -> Archaeology: Journal of the Jungbu Archaeological Society KCI등재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10-04-23 학회명변경 한글명 : 서울경기고고학회 -> 중부고고학회
      영문명 : Seoul Kyonggi Archaeology Society -> The Jungbu Archaeological Society
      KCI등재후보
      2010-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9-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7-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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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04 1.04 0.98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98 0.95 2.135 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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