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대일관계는 그 어느 시기보다 교류가 적었다.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의 일본관련 기사의 대부분이 왜구와 관계된 기사이다보니, 일반적으로 고려시대의 일본은 고려후기...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https://www.riss.kr/link?id=T11775140
서울 :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 2009
학위논문(석사) --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 역사교육전공 , 2009.8
2009
한국어
서울
60 장 ; 26 cm.
단면인쇄임
지도교수: 박현숙
참고문헌 : p. 51-60
0
상세조회0
다운로드고려시대의 대일관계는 그 어느 시기보다 교류가 적었다.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의 일본관련 기사의 대부분이 왜구와 관계된 기사이다보니, 일반적으로 고려시대의 일본은 고려후기...
고려시대의 대일관계는 그 어느 시기보다 교류가 적었다.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의 일본관련 기사의 대부분이 왜구와 관계된 기사이다보니, 일반적으로 고려시대의 일본은 고려후기 왜구의 이미지가 고려와 일본과의 관계를 규정짓는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실제 고려전기 일본과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후삼국을 통일한 太祖를 비롯하여 고려전기의 왕들은 일본과의 공적인 외교관계를 수립시켜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 속에서 국내외적인 안정을 취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 국내적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고려전기의 왕들에게 대외적으로 국가의 위상을 인정받고, 안정적인 외교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국내정치 세력을 장악할 수 있는 핵심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조는 재위 기간 동안 중국에 12차례에 걸쳐 사절을 파견하였는데, 일본에도 2차례에 이르는 사절을 파견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는 9세기 이후 자국의 폐쇄적 외교정책과 고려를 통일신라의 연장선에서 이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이 遣唐使 파견을 중지한 배경에는 신라의 비협조적 태도와 신라해적에 따른 공포와 경계로 말미암아 일본으로 하여금 고려를 적대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平將門의 난과 같은 내부적인 혼란 속에서 외부적 요인이 일본 정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했던 지배층들은 대외교섭을 더욱 경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양국간의 공적교섭은 결렬되었으나, 光宗과 成宗代의 일본 사료를 살펴보면 교역은 존재하였다. 단지 이 교섭의 성격은 고려의 중앙정부와 무관한 형태로 진행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고려 초기 중앙집권화의 미비로 인한 지방 세력들의 독자적인 교역의 형태가 존재하지 않았나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11세기 초 동여진 해적의 침입 시, 고려수군이 동여진 해적에게 납치되었던 일본인 포로들을 구해 송환하자 양국 간에는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 나갔다. 물론 이러한 와중에도 일본에서는 고려에 대한 경계는 쉽사리 불식되지 못했지만, 이전과 달리 일본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고려 표류민의 송환을 돕고, 도망친 범죄자를 붙잡아 송환시키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高麗史』에서 표류기사는 23건인데 그 가운데 고려 백성이 일본에 표류하여 송환된 기록은 5건이며, 모두 11세기의 기사임을 보아도 양국의 관계가 10세기와 다른 우호적인 관계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뚜렷이 확인 할 수 있다.
이후 文宗代에 이르러 일본상인을 비롯하여 일본의 在地勢力 등이 고려의 八關會的 秩序에 편입하여 상업활동을 전개하는 등 고려건국 이후 양국이 가장 활발한 교류를 가졌다. 11세기 말 고려의 延平島 巡檢軍에 의해 송상인과 일본인이 타고 있는 선박이 拿捕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후의 기록은 급감하나, 일본인들의 왕래가 이후에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가 일본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를 파악하는 데에는 사료의 빈약함 때문에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드나, 고려가 초기에 지속적으로 교섭을 시도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일본을 문화ㆍ경제적적 이익을 위한 교섭국이라기보다는 대외적 안정을 위한 정치적 대상으로 인식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고려가 다원적 국제관계 속에서 거란의 침입을 격퇴하고 정치ㆍ군사적 우위를 확보하며 독자적인 천하관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팔관회를 통해 조공책봉체제와 같은 형태로 교역을 실시하였고, 팔관회 질서 속에 朝賀하러 오는 일본상인들의 증가로 말미암아 일본을 夷狄視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초기에 비하여 양국의 관계에 있어서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던 이 시기에 고려에서 문종의 지병을 고치기 위해 의사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일본은 처음에 의사파견을 긍정적으로 검토를 하지만, 결국 병을 고쳐주지 못할 경우 수치가 될까 두려워 거절을 하게 된다. 그리고 거절사유에 대한 명분을 찾기 위해 고려첩장을 면밀하게 검토하여 문체의 6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며 무례함을 지적하는데, 그러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도 일본의 중앙정부는 고려를 번국으로 인식하였던 부분이 엿보이나, 大宰府와 같은 재지세력은 고려를 상국으로 인식했던 것으로도 보인다. 일본의 지방세력과 중앙정부가 가진 고려와 교류 차이만큼, 각자 고려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차이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고려의 의사요청은 받아들여지지 못했으나 양국의 관계를 후퇴시키진 못하였다. 일본 중앙정부와의 관계는 더 나아가진 못하였으나 일본의 재지세력과 상인들의 고려내왕은 지속되었고, 고려상인들의 일본진출도 함께 이루어졌던 기록들이 찾아진다. 이러한 가운데 양국의 진봉체제가 성립되어 元 干涉期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교역이 존재하였다.
목차 (Table of Cont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