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文对肃宗主导的宗庙御宝制作和《宗庙仪轨》的编纂及其意义进行了整理。 宗庙是国王为了国家供奉王室的祖上表其诚意的地方。然而随着壬辰倭乱的发生, 不仅造成宗庙建筑的消失, 还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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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文对肃宗主导的宗庙御宝制作和《宗庙仪轨》的编纂及其意义进行了整理。 宗庙是国王为了国家供奉王室的祖上表其诚意的地方。然而随着壬辰倭乱的发生, 不仅造成宗庙建筑的消失, 还导...
本文对肃宗主导的宗庙御宝制作和《宗庙仪轨》的编纂及其意义进行了整理。
宗庙是国王为了国家供奉王室的祖上表其诚意的地方。然而随着壬辰倭乱的发生, 不仅造成宗庙建筑的消失, 还导致了祭祀典礼的规模缩小, 甚至废除。战乱后, 由宣祖时期开始的宗庙复原及整理在肃宗时期告一段落。
1705年(肃宗31年)4月起至9月,肃宗整理了宗庙正殿和永宁殿即太祖和显宗时期共计22室的构成品。同时,因仁祖时期李适的动乱丢失了明宗的御宝。肃宗时期向明宗呈上的御宝因已有着足够充分的适当性,仅在御宝上刻上了上谥。
随后, 肃宗向太祖的妃子神懿王后, 太祖的四祖及他们的妃子进献了御宝, 为太祖增添了光环。同时, 为供奉在永宁殿的始祖格王室的祖上举办王室典礼, 奉上未有的御宝, 完成了宗庙的整备工作。由肃宗主导的宗庙正殿和永宁殿的整备共制作了10颗金宝, 耗时5个月完成了整备工作。因此, 王室的先祖全部被列为宗庙整顿的对象。即肃宗填补了由战乱引起的损失和朝鲜前期未整理的约200年以上的宗庙典礼的空白。
1705年《宗庙仪轨》的编纂延续了明宗, 神懿王后及太祖的四祖御宝制作。同时, 肃宗根据宗庙正殿以及与永宁殿相关的改修、补修、重建等各种事件, 收集了御册和御宝等物品目录的变化, 并将整理的内容收录在《宗庙誊录》。因此, 具有统一性的《宗庙誊录》概括了宗庙的御册和御宝相关的物品的变迁以及宗庙正殿、永宁殿神室的国王和王后的现况, 确保了叙述体系中带来变化的便利性。即, 1705年《宗庙誊录》的增修既遵守了基本的形式, 也展现了反映肃宗时期宗庙的变化及编纂的特征。
《宗庙仪轨》的编纂是对宗庙正殿和永宁殿进行专门的综合及整理的工作。建筑物的样式、仪礼、仪物、制度等体系在以朝鲜前期流传下来的《国朝五礼仪》为基础做出的。然而从朝鲜前期起至肃宗时期发生了一系列的变化, 为完善这一内容, 对各类史料进行了调查。作为便于接触的《承政院日记》在仁祖时期以后, 针对各王朝的研究, 具有多方面的丰富的记录, 因此优先对此进行了调查。此外, 也调查了官撰资料及大臣文集。
1706年(肃宗32年)12月, 强调了耗时1年6个月的《宗庙仪轨》宗庙仪典的重要性, 分为国王的御览用和宗庙署的分上用总计2部进行制作。最终《宗庙仪轨》编纂而成, 一部呈给国王亲自检阅并保管, 另一部则供奉在宗庙。
《宗庙仪轨》不仅包括了朝鲜的宗庙典章和实务相关的历代记录, 而且具有最先以整备的形式整理的特征。只是《宗庙仪轨》不分卷, 共计4册书。《宗庙仪轨》的内容可用册分类。 《宗庙仪轨》的第一册是宗庙正殿和永宁殿相关的图说, 第2册是宗庙的制度和相关事项, 第三册是与变礼相关的事项, 第4册是宗庙署的宗庙管理和典礼的实际运营相关的事项。
另外, 《宗庙仪轨》不仅包含了《宗庙誊录》的内容, 乃至‘仪轨’本身也直接涵盖了宗庙正殿和永宁殿相关变化的具体事项, 因此可以举行并实际运营宗庙的典礼。
朝鲜后期, 《宗庙仪轨》的意义莫过于原封不动的接受《国朝五礼仪》的仪礼和图说。同时, 由于反映了肃宗时期的追加和变化局面, 使其具备了‘典礼书’的性格和‘时用书’的效用性。
这样, 《宗庙仪轨》中「移还安」·「祧迁」·「庙见」的仪註在肃宗时期全部以新的仪註整理建立。这些仪礼以《宗庙仪轨》仪註的形式正式确立为文书, 之后英祖时期《国朝续五礼仪》中编制为国家典礼的仪註。因此, 通过肃宗对《宗庙仪轨》的编纂以此确立新的仪註, 归结于经过朝鲜前期和壬乱至肃宗时期, 适用并强调贯穿仪礼的连通性和肃宗时期变化的状况。因此《宗庙仪轨》集朝鲜前期起流传下来的关于宗庙的信息之大成, 确立了宗庙仪礼的典范。
因此, 《宗庙仪轨》是肃宗时期根据变化, 对《国朝五礼仪》和之后遗漏的或是新配置的图说和仪註进行修改编纂而成的。此外, 肃宗重新整顿了为从战乱的废墟到朝鲜的再跳跃提供的文物典章。当时, 由于时代性导致在仪礼部分中只提及到了宗庙, 但是对宗庙的制度和典礼重新进行了整顿。
본고에서는 숙종이 주도한 宗廟의 御寶 제작과 宗廟儀軌의 편찬과 그 의의를 정리해보았다. 종묘는 국왕이 국가를 위하여 왕실의 조상을 모시고 그의 정성을 다하는 공간이다....
본고에서는 숙종이 주도한 宗廟의 御寶 제작과 宗廟儀軌의 편찬과 그 의의를 정리해보았다.
종묘는 국왕이 국가를 위하여 왕실의 조상을 모시고 그의 정성을 다하는 공간이다. 그런데 壬辰倭亂이 발생하면서 종묘 건물의 소실은 물론 전례의 축소 및 폐지가 잇따랐다. 전란 이후 宣祖代 이래로 조선은 종묘를 복원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양란 이후 진행되던 종묘에 대한 정비과정은 숙종대에 들어와서 일단락되었다.
1705년(숙종 31) 4월에서 9월까지 숙종은 宗廟 正殿과 永寧殿의 즉 태조와 현종대에 이르는 총 22실의 구성품을 정비하였다. 어보 구성품의 정비는 明宗 어보의 재제작으로 이어졌다. 인조대 李适의 난으로 사라진 명종의 어보는 國葬에서 명종에게 올린 어보가 이미 존재했었던 충분한 타당성에 따라서 상시만을 새긴 어보로 다시 제작되었다.
이어서 숙종은 太祖의 妃인 神懿王后와 태조 四祖와 그들의 妃에게 어보를 추보하면서 태조의 권위를 세웠다. 동시에 영녕전에 모신 왕실의 조상에게 왕실전례를 행하면서 갖추지 못했던 어보를 채워서 종묘의 정비를 마무리했다. 이로써 숙종이 주도한 종묘 정전과 영녕전의 정비는 모두 金寶 10顆를 제작하여 추상하면서 5개월 동안에 정비를 끝마쳤다. 결국 이를 통해 왕실의 先祖 모두가 종묘 정비의 대상이 되었다. 즉 숙종은 전란의 피해와 조선 전기의 정리되지 않은 약 200년 이상의 종묘 전례에 관한 공백을 채워나갔다.
명종과 신의왕후 그리고 태조 四祖의 어보 개조는 1705년(숙종 31) 종묘의궤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숙종은 종묘 정전 및 영녕전과 관련된 개수, 보수, 중건 등의 여러 사안들에 따른 어책과 어보를 비롯한 물품 목록의 변화를 수집하여 정리한 내용을 宗廟謄錄에도 남겼다. 그 결과 통일성을 갖춘 종묘등록은 종묘의 어책과 어보의 관련한 물목의 변천과 종묘 정전과 영녕전 신실의 국왕과 왕후별로 현황을 한 권의 책으로 요약하고, 서술체계에 변화를 주어 편리성이 확보되었다. 즉, 1705년도 종묘등록의 증수는 기존의 형식을 준수하면서 숙종대 종묘의 변화상을 반영하여 편찬한 것이 특징이다.
종묘의궤의 편찬은 종묘를 중점적으로 종합하여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건물의 양식, 의례, 의물, 제도 등의 체계는 조선 전기부터 내려오는 國朝五禮儀를 저본으로 하였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서부터 숙종대로 잇따른 변통된 상황들이 발생되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사료가 조사되었다. 접근성이 용이한 承政院日記는 인조대 이후로 왕대별로 상고할만한 다방면의 기록을 가장 풍부하게 지니고 있어 우선적으로 조사되었다. 이외에도 대신들의 문집을 비롯한 관찬자료들도 조사되었다.
1706년(숙종 32) 12월, 1년 6개월의 기간이 소요된 종묘의궤는 종묘 전례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국왕의 어람용과 종묘서의 분상용으로 총 2부가 제작되었다. 마침내 종묘의궤의 편찬은 국왕이 陪進하고 종묘에 봉안하는 의식으로 마무리되었다.
종묘의궤는 조선의 종묘 典章과 실무에 관한 역대 기록을 망라하면서도 최초로 정비된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 특징이다. 다만 종묘의궤는 卷의 구별이 없이 총 4책으로 이루어져있다. 종묘의궤의 내용으로 책을 분류할 수 있다. 종묘의궤의 1책은 종묘 정전과 영녕전과 관련된 圖說, 2책은 종묘의 제도와 관련한 사항, 3책은 變禮에 관련한 사항, 4책은 종묘서의 종묘 관리 및 전례의 실제적인 운영에 관련한 사항을 담고 있다.
종묘등록에서 종묘 정전과 영녕전과 관련된 개수, 보수, 중건과 전례논쟁 등에 변화에 따른 어책과 어보 및 그 구성품의 목록의 변천만을 나타냈다. 종묘의궤는 종묘등록의 내용도 포함하면서, 더 나아가 ‘의궤’ 자체만으로도 종묘 정전 및 영녕전과 관련된 변화의 세부사항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어 종묘 정전과 영녕전의 전례의 거행과 실제적으로 운영될 수 있게 하였다.
조선 후기에 있어 종묘의궤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국조오례의의 의례와 도설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시에 숙종대의 추가 혹은 변화양상을 함께 반영함으로써 ‘典禮書’로서의 성격과 ‘時用書’로서의 효용성을 지녔다.
이렇듯 종묘의궤에는 「移還安」·「祧遷」·「廟見」의 儀註가 숙종대에 전적으로 새로운 의주로 정리[創定]되었다. 그리고 이 의례들은 종묘의궤의 의주라는 형태로 공식적으로 문서화되어 정립되었으며, 이후 영조대 國朝續五禮儀에 국가전례의 의주로 편성되었다. 결과적으로 숙종이 종묘의궤의 편찬을 통해서 새로운 의주를 정립한 것은 결국 조선 전기와 양란을 거쳐 숙종대까지 이어진 의례의 연결성과 숙종대 변화된 상황을 적용하고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따라서 종묘의궤는 조선 전기부터 내려오는 종묘에 관한 정보를 모두 집대성하여 종묘의례의 典範을 성립시켰다.
그러므로 종묘의궤는 숙종대 변화상에 맞추어 국조오례의와 그 이후의 누락되거나 새로 마련된 도설과 의주를 다듬고 손질해서 편찬된 것이다. 또한 숙종은 전란의 폐허로부터 조선의 재도약을 위한 문물 전장을 재정비하였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국가의례에서 종묘의 초점을 맞추어 그 제도와 전례를 다시 정비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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