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unwihaeng was sent to console the return of the Lord of Tsushima and congratulate on birth of a son of the Lord. The party of Tsushima pressed the Munwiyokgwan(問慰譯官) for omission of the statement to congratulate the birth of the son in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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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Munwihaeng was sent to console the return of the Lord of Tsushima and congratulate on birth of a son of the Lord. The party of Tsushima pressed the Munwiyokgwan(問慰譯官) for omission of the statement to congratulate the birth of the son in th...
The Munwihaeng was sent to console the return of the Lord of Tsushima and congratulate on birth of a son of the Lord. The party of Tsushima pressed the Munwiyokgwan(問慰譯官) for omission of the statement to congratulate the birth of the son in the document(書契) of the Yaejoe(禮曹) but the Munwiyokgwan serenely explained the situation and their appeal was relieved. After diplomatic ceremony, both parties made their requests. The party of Tsushima wanted to purchase drugs that are interested by Dokukawa Bakuhu, requested to restore the suspended voyage of private ships, asked to elevate diplomatic level, and requested to move Waegwan(倭館) to Busancastle. The Munwiyokgwan explained or postponed answers to their requests but wanted Tsushima to mediate purchase of military materials and asked to relive the complaint on congestion of cotton. In the talk between the Lord faced the Munwiyokgwan, the Lord asked about the status of Joseon pressed by Qing Dynasty and, asserting that they might give external support, asked movement of Waegwan again. The Munwiyokgwan tried not to make any diplomatic mistake by vindicating the situation of Joeson reasonably. A Munwiyokgwan was sent in 1651 during a state funeral of Joeson but both parties conflicted in relation to the dresses of the diplomatic mission. The Munwiyokgwan said that they worn white official belts because they were in a state funeral but the party of Tsushima oppose saying that white official belts did not meet congratulatory ceremony. The party of Tsushima intended to clarify that the purpose of such Munwihaeng was the return visit to two times of envoys for the state funeral of King Injo and Inauguration of King Hyojong. The party of Tsushima raised the problem that Joeson merchants had a serious difficulty in payment in silver currency in the market of Waegwan and added the complaint in the quality of cotton. The Munwiyokgwan said that Gyeongsangdo’s cotton in maximum and that, if there was any dissatisfaction concerned, the situation had to be understood.
국문 초록 (Abstract)
1640년 문위행은 쓰시마 번주가 대마도로 돌아온 것을 위로하고 번주의 득남을 축하하려는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쓰시마측은 예조서계에 득남 축하의 구절이 없는지를 다그쳐 물었으나, 문...
1640년 문위행은 쓰시마 번주가 대마도로 돌아온 것을 위로하고 번주의 득남을 축하하려는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쓰시마측은 예조서계에 득남 축하의 구절이 없는지를 다그쳐 물었으나, 문위역관의 차분한 설명에 무색해지고 말았다. 외교의례 후에 양측은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제기하였다. 쓰시마측은 막부의 관심사인 약재 구입을 요청했고, 중단된 사선의 도해권 회복을 부탁했다. 외교 의례의 격을 높여달라고 하였고 부산성으로 왜관 이전을 요구하였다. 문위역관은 해명 또는 유보적인 답변을 하면서도, 쓰시마측에게 군사물자의 구매 중개를 요청하고 목면 적체의 불만을 누그러뜨려 달라고 하였다. 번주와 문위역관이 대면한 자리에서, 번주는 청에 압박된 조선의 처지를 캐물으며 자신들이 외원이 될 수 있음을 내세워 왜관 이전을 재차 요구하였다. 문위역관은 중태에 빠진 본국의 처지를 이치에 맞게 변호하여 외교적 누를 남기지 않으려 하였다. 1651년 문위행은 조선의 국상 중에 파견되어, 양측 간에 사신의 복장을 둘러싸고 해석을 달리하였다. 문위역관은 상중이므로 백색 관대를 착용하였다고 했는데, 쓰시마측은 길례에 백색 관대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반발하였다. 쓰시마측은 문위행이 인조 국상에 조위하고 효종 즉위에 하례한 2번의 사자에 대한 답방임을 명시하려고 하였다. 쓰시마측은 조선 상인들이 왜관 開市에서 은화를 빚지는 것이 심각하다고 제기했다. 목면의 품질 요구는 강도가 높았다. 문위역관은 교린의 실정론으로 양해를 부탁하였다.
참고문헌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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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학술지 인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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