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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덴티티의 장소로서의 경주 = Kyongju as a Place of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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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The image of Kyŏngju as a local Confucian town changed radically with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Architectural scholar Sekino Tadashi's study of Kyŏngju's historical remains placed the city under heavy Japanese scrutiny and signaled its conversion from Confucian city to ancient capital of Silla. Kyŏngju was meticulously re-spatialized, by colonial officials and settlers alike, through a sustained project aimed at discovering and preserving the remains of Silla and, in doing so, suppressing any surviving traces of Koryŏ and Chosŏn. Their survey and development of Kyŏngju created new appearances and instilled new conditions for experiencing the city. Hence, Korean writers, from Yi Kwangsu to Yi T’aejun, had no choice but to see and experience Kyŏngju according to the spatial representations produced and disseminated by the Japanese. Despite the regulated experience, their understanding of Kyŏngju's space differed greatly from that of the Japanese settlers and travelers: they believed a revelation instrumental to their self-awareness was hiding within the relics and legends. Regardless of its intentions, the colonial reorganization of Kyŏngju provided the cultural resources for awakening a Korean national self-consciousness and laid the foundation for the sanctification of the city which would later become invaluable in forming a South Korean national culture. This essay examines how Japanese colonialism transformed the spatial representations of Kyŏngju and how Korean writers came to perceive, imagine, and render Kyŏngju with cultural meanings. My reading of Hyŏn Chin’gŏn and Yi T’aejun will reveal that Kyŏngju became a symbolic source for Korean self-definition and self-reflection in conflict with Japanese representations and ideolog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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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image of Kyŏngju as a local Confucian town changed radically with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Architectural scholar Sekino Tadashi's study of Kyŏngju's historical remains placed the city under heavy Japanese scrutiny and signaled its convers...

    The image of Kyŏngju as a local Confucian town changed radically with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Architectural scholar Sekino Tadashi's study of Kyŏngju's historical remains placed the city under heavy Japanese scrutiny and signaled its conversion from Confucian city to ancient capital of Silla. Kyŏngju was meticulously re-spatialized, by colonial officials and settlers alike, through a sustained project aimed at discovering and preserving the remains of Silla and, in doing so, suppressing any surviving traces of Koryŏ and Chosŏn. Their survey and development of Kyŏngju created new appearances and instilled new conditions for experiencing the city. Hence, Korean writers, from Yi Kwangsu to Yi T’aejun, had no choice but to see and experience Kyŏngju according to the spatial representations produced and disseminated by the Japanese. Despite the regulated experience, their understanding of Kyŏngju's space differed greatly from that of the Japanese settlers and travelers: they believed a revelation instrumental to their self-awareness was hiding within the relics and legends. Regardless of its intentions, the colonial reorganization of Kyŏngju provided the cultural resources for awakening a Korean national self-consciousness and laid the foundation for the sanctification of the city which would later become invaluable in forming a South Korean national culture. This essay examines how Japanese colonialism transformed the spatial representations of Kyŏngju and how Korean writers came to perceive, imagine, and render Kyŏngju with cultural meanings. My reading of Hyŏn Chin’gŏn and Yi T’aejun will reveal that Kyŏngju became a symbolic source for Korean self-definition and self-reflection in conflict with Japanese representations and ideolog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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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1902년 건축학자 세키노 다다시(関野貞)의 보고를 통해 경주의 고적이 일본인들에게 알려진 이후 경주는 신라의 도읍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인식되고 개발되기 시작했다. 식민지 정부의 관리를 비롯한 일본인 거류민은 신라 유적의 발굴과 보존 사업을 주축으로 경주의 공간을 재편하면서 그곳에 잔존한 고려와 조선의 자취를 억누르고 그곳을 신라 구도로서 재생하고자 했다. 그들의 경주 조사와 개발은 경주의 새로운 광경을 창출한 동시에 사실상 경주 경험의 새로운 조건을 창출했다. 1917년 조선 남부 순례 중에 경주를 방문한 이광수를 시작으로 조선인 작가들은 일본인이 개발한 유람 행로를 따라 경주를 여행하고 일본인이 만들어낸 표상 구조에 의존하여 경주를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일본인 거류민이나 여행자와 같은 방식으로 경주를 이해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경주의 고적과 전설에서 조선인의 자각에 유용하다고 믿어지는 어떤 계시를 구하고 있었다. 경주 공간의 식민주의적 재편은 그 의도와 무관하게 조선인의 민족의식의 발양에 적합한 문화적 자원을 공급했으며 나중에 한국 국민문화 구축의 중요한 수단의 하나를 이루는 경주의 성지화(聖地化)에 토대를 제공했다. 경주는 식민지 조선인이 당대의 집합적 삶의 요구에 맞게 스스로를 형성하는 데에 유용한 상징과 이야기의 원천이 되었다. 현진건에게 박제상의 이야기는 현대의 자주적인 조선인의 전상(前像)을 담고 있으며, 이태준에게 오릉의 경관은 특유의 미적 감수성을 지닌 동양인이라는 의식을 북돋운다. 그들의 경주 텍스트는 흥미롭게도 1920년대와 1940년대 사이에 일어난 조선관의 중대한 변화, 즉 일본에 대립하는 자주 민족으로서의 조선에서 일본 제국의 한 지방으로서의 조선으로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경주에 관한 현진건과 이태준의 텍스트는 그곳이 조선인 아이덴티티의 구성에 준거가 되는 장소의 하나였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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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2년 건축학자 세키노 다다시(関野貞)의 보고를 통해 경주의 고적이 일본인들에게 알려진 이후 경주는 신라의 도읍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인식되고 개발되기 시작했다. 식민지 정부의 관리...

    1902년 건축학자 세키노 다다시(関野貞)의 보고를 통해 경주의 고적이 일본인들에게 알려진 이후 경주는 신라의 도읍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인식되고 개발되기 시작했다. 식민지 정부의 관리를 비롯한 일본인 거류민은 신라 유적의 발굴과 보존 사업을 주축으로 경주의 공간을 재편하면서 그곳에 잔존한 고려와 조선의 자취를 억누르고 그곳을 신라 구도로서 재생하고자 했다. 그들의 경주 조사와 개발은 경주의 새로운 광경을 창출한 동시에 사실상 경주 경험의 새로운 조건을 창출했다. 1917년 조선 남부 순례 중에 경주를 방문한 이광수를 시작으로 조선인 작가들은 일본인이 개발한 유람 행로를 따라 경주를 여행하고 일본인이 만들어낸 표상 구조에 의존하여 경주를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일본인 거류민이나 여행자와 같은 방식으로 경주를 이해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경주의 고적과 전설에서 조선인의 자각에 유용하다고 믿어지는 어떤 계시를 구하고 있었다. 경주 공간의 식민주의적 재편은 그 의도와 무관하게 조선인의 민족의식의 발양에 적합한 문화적 자원을 공급했으며 나중에 한국 국민문화 구축의 중요한 수단의 하나를 이루는 경주의 성지화(聖地化)에 토대를 제공했다. 경주는 식민지 조선인이 당대의 집합적 삶의 요구에 맞게 스스로를 형성하는 데에 유용한 상징과 이야기의 원천이 되었다. 현진건에게 박제상의 이야기는 현대의 자주적인 조선인의 전상(前像)을 담고 있으며, 이태준에게 오릉의 경관은 특유의 미적 감수성을 지닌 동양인이라는 의식을 북돋운다. 그들의 경주 텍스트는 흥미롭게도 1920년대와 1940년대 사이에 일어난 조선관의 중대한 변화, 즉 일본에 대립하는 자주 민족으로서의 조선에서 일본 제국의 한 지방으로서의 조선으로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경주에 관한 현진건과 이태준의 텍스트는 그곳이 조선인 아이덴티티의 구성에 준거가 되는 장소의 하나였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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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이태준, "「동방정취」, 『무서록』" 무서록 1941

    2 南富鎭, "「慶州と奈良のあいだ」. in : 『文學の植民地主義』" 世界思想社 2006

    3 이익, "해동악부" 문자향 2008

    4 최석영, "한국 박물관의 ‘근대적’ 유산" 서경문화사 2004

    5 이순자, "일제강점기 고적조사사업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2007

    6 김현숙, "일제 강점기 경주고적보존회의 발족과 활동. in : 시각문화의 전통과 해석" 예경 2007

    7 황종연, "신라의 발견-근대 한국의 민족적 상상물의 식민지적 기원. in : 신라의 발견" 동국대 출판부 2008

    8 박광현, "식민지 조선과 박물관의 정치학 -재조선(在朝鮮) 식민 사회의 형성 과정과 관련하여-" 일본연구소 0 (0): 59-89, 2009

    9 허병식, "식민지 조선과 ‘신라’의 심상지리. in : 신라의 발견" 동국대 출판부 2008

    10 심진경, "식민상상력과 연애소설의 성정치 내선결혼의 문제를 중심으로" 민족문학사학회 (28) : 163-189, 2005

    1 이태준, "「동방정취」, 『무서록』" 무서록 1941

    2 南富鎭, "「慶州と奈良のあいだ」. in : 『文學の植民地主義』" 世界思想社 2006

    3 이익, "해동악부" 문자향 2008

    4 최석영, "한국 박물관의 ‘근대적’ 유산" 서경문화사 2004

    5 이순자, "일제강점기 고적조사사업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2007

    6 김현숙, "일제 강점기 경주고적보존회의 발족과 활동. in : 시각문화의 전통과 해석" 예경 2007

    7 황종연, "신라의 발견-근대 한국의 민족적 상상물의 식민지적 기원. in : 신라의 발견" 동국대 출판부 2008

    8 박광현, "식민지 조선과 박물관의 정치학 -재조선(在朝鮮) 식민 사회의 형성 과정과 관련하여-" 일본연구소 0 (0): 59-89, 2009

    9 허병식, "식민지 조선과 ‘신라’의 심상지리. in : 신라의 발견" 동국대 출판부 2008

    10 심진경, "식민상상력과 연애소설의 성정치 내선결혼의 문제를 중심으로" 민족문학사학회 (28) : 163-189, 2005

    11 이태준, "석양" 깊은샘 2 : 1988

    12 김부식, "삼국사기" 동서문화사 1976

    13 박영희, "반월성을 떠나면서" 69 : 1926

    14 조윤정, "내선결혼 소설에 나타난 사상과 욕망의 간극" 한국현대문학회 (27) : 241-276, 2009

    15 현진건, "고도순례-경주" 국학자료원 6 : 2004

    16 권덕규, "경주행" 1920

    17 조성환, "경주에 가거든" 학고방 2010

    18 이동화, "경주기행" 신문관 1922

    19 이병기, "가을의 경주를 찾아" 1927

    20 大坂六村, "趣味の慶州" 慶州古蹟保存会 1931

    21 大木春三, "趣味のの朝鮮の旅" 朝鮮印刷株式會社 1927

    22 大町芳衛, "滿鮮遊記" 大阪屋號書店 1919

    23 田山錄彌, "滿鮮の行樂" 大阪屋號書店 1924

    24 李福休, "海東樂府"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5 : 2002

    25 有山輝雄, "海外観光旅行の誕生" 吉川弘文館 2002

    26 閔周冕, "東京雜記" 朝鮮光文會 1911

    27 朝鮮總督府, "朝鮮鐵道旅行便覽" 1923

    28 中村亮平, "朝鮮慶州之美術" 芸艸堂 1929

    29 関野貞, "朝鮮建築調査報告" 東京帝国大学工科大学 学術報告 1904

    30 関野貞, "朝鮮の建築と芸術" 岩波書店 1941

    31 木村静雄, "朝鮮に老朽して" 帝國地方行政學會朝鮮本部 1924

    32 奧田悌, "新羅舊都 慶州誌" 玉村書店 1920

    33 慶州古蹟保存會, "新羅舊都 慶州古蹟案內" 1934

    34 大坂六村, "慶州の伝說" 田中東洋軒 1932

    35 中根隆行, "帝國日本の‘滿鮮’観光誌と古都慶州の表象" 2009

    36 大坂金太郎, "在鮮回顧十題" 45 : 1967

    37 黃鍾淵, "儒敎の鄕邑から東洋の古都へ" 214 : 2010

    38 유진오, "『화상보』 상" 삼성출판사 1972

    39 "『국역 경주읍지』, 경주: 경주문화원"

    40 민족문화추진회, "『新增東國輿地勝覽』3, 忠淸道·慶尙道" 1967

    41 田中聡, "‘朝鮮古代史’の形成と大坂金太郎" 岩波書店 6 : 2002

    42 Lefebvre, Henri, "The Production of Space" Blackwell 1991

    43 Young, Louise, "Japan's Total Empire: Manchuria and the Culture of Wartime Imperialism"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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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04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미등록 -> The Studies in Korean Literature KCI등재
    2016-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2-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등재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8-01-01 등재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6-01-01 등재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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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6 0.6 0.78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79 0.84 1.467 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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