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예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여러 가지 각도에서 연구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얻은 결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예복’은 ‘혼인잔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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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2004
학위논문(석사)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신학과 신약신학전공 , 2005. 2
2004
한국어
233.62 판사항(4)
서울
ii, 106p. ; 26cm.
참고문헌: p. 98-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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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예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여러 가지 각도에서 연구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얻은 결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예복’은 ‘혼인잔치비유’가 독립된 하나의 비유이며 누가복음의 비유와 전혀 다른 상황에서, 다른 목적으로, 다른 시기에 주어졌음을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혼인잔치비유’(22:1-14)는 ‘알레고리적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비유를 해석하는 관점이 양분된다. 알레고리는 개작과 직결된다고 이해하는 학자들은 복음서 저자나 초대교회에 의해 개작된 본문을 재구성하여 비유의 원형을 찾으려고 한다. 이들은 예레미아스의 주장을 따르고 있는데, 예레미아스는 22:1-14은 구원사의 개요를 설명해 주는 ‘알레고리화’한 ‘개작’이라고 본다. 그는 마태복음의 비유에 ‘예복’ 부분이 첨가되어 ‘역사적 예수 자신의 소리’에서 멀어졌다고 본다. 예레미아스와 같은 입장에서 해석하는 학자들은 마태복음과 비슷한 본문을 담고 있는 누가/도마복음서를 비교하면서 세 비유는 동일한 본문의 다른 판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질문은 ‘비유’에 대한 그들의 신학적 선이해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알레고리화가 심할수록 개작의 정도가 심하다는 것은 해석학적 선이해에 따른 것이지 수긍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가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처음부터 알레고리가 주어질 수 있고, 알레고리라는 양식을 선정하는 자유가 예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는 ‘직유’의 특성만을 갖고 있지 않고 알레고리까지 포함하고 있다. 처음부터 알레고리로 주어졌다면 독자는 비유의 원형을 찾는 시도를 하기보다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예복’이 주는 ‘의미’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마태/누가복음의 차이점은 각 비유가 주어졌던 ‘상황성’이 달랐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예복’은 각 비유가 주어졌던 ‘상황성’이 달랐다는 것을 말해 주는 단서가 되는 것이다. ‘예복’은 혼인잔치비유가 누가복음의 잔치비유와는 다른 시기에, 다른 장소에서, 다른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그러므로 22:1-14에서 비유의 화자가 기대하는 교회는 ‘예복’이 없는 누가복음의 비유에서 기대하는 교회와 다르다. 각 비유는 다른 시기에 다른 결론과 목적을 위해 독립적으로 주어졌고, ‘예복’은 이 독립성을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예복’은 ‘역사적 예수의 목소리’를 찾는 단서가 아니라 하늘나라에 대한 다양한 증언을 들려주는 기회를 제공한다.
2. 예복의 의미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행함과 칭의로 구분된다: ‘예복’을 삶과 관계된 무엇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은 Davies, Marshall, Blomberg, Bruce, Beasley-Murray, Carson, Ryle, Luz, Linnemann, Redderbos, Scott, Stendahl, Stock, Allen, Albright & Mann, Jeremias, Wenham, Carter, Patte, France, Floyd, Hagner, Hoekema, 권성수, 김득중, 양용의, 오덕호, 정훈택, 최갑종, 홍창표 등이다. ‘예복’의 의미에 대해, 마태복음 외의 본문의 연구를 통해서 의견을 밝히는 학자들은 요한계시록 19:8에 근거하는데, 이필찬, 핸드릭슨은 ‘세마포’를 ‘성도들의 정결한 삶’으로 규정한다. ‘예복’을 ‘칭의’와 관련된 무엇으로 보는 학자들은 Gardner, Lenski, Barton, Tasker, Kistemaker, 박윤선 등이다. 우리는 본 논문에서 칭의론적인 접근은 마태복음의 문맥에서는 맞지 않으며, 바울신학의 ‘의’를 마태신학의 ‘의’와 지나치게 조화시키려는 데서 나온 해석학적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3. pw/j의 용례를 분석하면 ‘예복’은 충격과 놀라움을 주는 그 무엇이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pw/j의 용례를 분석해 보면, pw/j는 ‘의문부사’로 14번 쓰였다(6:28; 7:4; 10:19; 12:4; 12:26,29,34; 16:11; 21:20; 22:12,43,45; 23:33; 26:54). pw/j가 쓰인 문장을 보면 pw/j는 의문의 의미 보다는 ‘감탄’이나 ‘놀라움’, 그리고 ‘가능성과 관련된 의미’를 전해 주는 구실을 한다. EDNT의 분석에 의하면 신약성경의 문맥에서 pw/j는 9개의 의미로 쓰이는데, ‘불가능성’을 뜻할 때(눅 8:18; 요 9:10,19,26; 롬 4:10), ‘놀라움’을 강조하는 수사적 표현을 할 때, ‘거부’(disapproval)를 강조할 때(마 7:4; 22:12; 막 12:35; 눅 6:42; 12:56) 쓰인다. 마태복음과 신약성경에서 쓰인 pw/j는 불가능한 일이나 거부되어야 할 일이 일어났을 때의 놀라움을 강조할 때 쓰인 ‘수사적인 표현법’이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친구여’(e`tai/re)는 거짓 제자들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e`tai/re’와 ‘pw/j’는 ‘놀라움’과 관련하여 쌍을 이루는 표현법이다. 그렇다면, 22:12의 경우, ‘pw/j’가 ‘심판’, ‘책망’, ‘거부’를 나타낸다면 ‘pw/j’로 시작하는 ‘질문’ 보다 ‘판결’의 의미를 갖게 된다. 왕은 예복을 입지 않은 ‘이유’와 잔치 자리에 들어오게 된 ‘방법’에 대해 묻지 않는다. 최후 심판의 때에 왕이 이미 잔치에 참여하는 자격을 상실한 사람에게 행할 것은 심판뿐이다. “그는 침묵했다”(o` evfimw,qh)는 표현도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는 의미보다는 소명이나 변명의 기회가 박탈 당했다는 것에 더 가깝니다. ‘유구무언’ 자체가 심판의 의미를 강하게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최종 심판의 때에는 소명의 기회는 없다. ‘pw/j’로 연결되는 왕의 ‘질문’은 최후 심판의 때에 ‘거부’라는 판결이 된다. 그렇다면 놀라움을 주는 기준인 ‘예복’은 무엇인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혼인잔치를 베푼 왕(22:2)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받고 거절당한다. 충격적인 일을 선교적 교회가 경험할 것이지만 삶의 열매를 맺지 않은 ‘이유’는 제시되지 않고 있다. 다만 놀라운 일을 목격하게 될 사실만을 알려 준다.
4.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의 용례를 분석해 보면, ‘행함’이 결여되었을 때 이런 평가를 받는다: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마태복음에 쓰인 유일한 표현으로(8:12; 13:42,50; 22:13; 24:51; 25:30) 하나님의 통치에서 추방당하고 벌을 받는 이미지를 그린다. 돌이키기에는 너무 시간이 늦었을 때 이 표현이 쓰인다. 이 표현이 나타난 본문을 보면, 이 표현은 모두 최후 심판이 벌어지는 상황을 그리고 있는 문맥에 쓰인다. 이런 문맥과 함께 혼인잔치비유의 예복을 연결시켜 보면, 고백은 구원의 보증이 되지 않는다. ‘믿음’과 ‘행위’ 중에서 어느 것 하나가 결여되면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에 해당하게 된다. ‘하늘나라백성’과 관련해서 쓰인 용례(22:13; 24:51; 25:30)를 볼 때도, 합당한 ‘행위’나 ‘사역’이 결여되었을 때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합당한 행함’이 기준이 되어 이 기준에 합당하지 않으면 바깥 어둠에 쫓겨나 울며 이를 갈게 된다. 22:13의 판결을 받게 되는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22:12)은 부름에 합당한 행실을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에 쫓겨나게 된다.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합당한 행위가 결여되었을 때 내려지는 최종적인 판결이다.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행위’가 결여되었을 때 혼합된 교회를 향하여 내려지는 심판이므로, 이 평가의 기준이 되는 ‘예복’은 ‘행위’가 된다.
5. 연속되는 세 비유의 문맥에서 ‘예복’은 선교적 교회에 ‘행함’을 요구하는 ‘경고’가 된다: 연속되는 세 비유는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공통점으로 삼고 있는데, 하늘나라 백성은 ‘열매맺는 백성’으로 소개된다. 그리고 긍정적으로만 소개되었던 하늘나라의 백성에게도 심판이 적용된다. 하늘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은 가려지게 된다. 그런데 세 번째 비유에서는 앞의 두 비유와 다르게 ‘두 조건’이 나타난다. 세 번째 비유에서 하늘나라 백성이 되는 첫 조건은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적 교회는 또 다른 조건, 곧 ‘행위’를 조건으로 제시받는다. 혼인잔치비유는, 경고를 받고 있는 대상을 ‘교회’라고 명확하게 지목하고 있는 점에서 앞의 두 비유와 차이점을 보인다. 그러므로 두 번째 조건인 ‘예복’은 ‘교회’를 향한 경고 역할을 하면서 ‘예복’으로 경고를 받는 대상은 다름아닌 선교적/혼합체인 교회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6. 마태신학의 구속사에서 예복이 갖는 의미: 예수께서 가르치신 이 구속사관을 마태는 자신이 처한 교회 현실에 적용한다. 마태는 교회의 ‘혼합체적 특성’ 때문에 예수님의 혼인잔치비유가 필요했다. 혼합체인 교회의 모습은 산상설교에서 ‘참된 제자’와 ‘거짓 제자’로 구분되어 나타난다. 13장에서 알곡과 가라지로 나타난다. 혼합체인 교회는 22:1-14에도 나타난다. 사거리에서 오는 누구에게나 교회는 열려있었으므로 가라지도 함께 섞이게 되었다. ‘예복’은 이런 교회의 혼합성을 보여 주는 ‘표지’가 된다. ‘예복’은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거짓 제자들로 판명될 가능성을 알려주는, ‘경고’의 기능을 한다. 한편, 예복은 ‘이미’와 ‘아직’의 구속사에서 교회가 긴장할 것을 촉구한다. 구속사의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혼합체인 교회 중에서, ‘예복’을 입은 사람들만이 ‘아직’이 ‘완성’이 되는 그날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
7. 마태신학의 중심 주제에서 갖는 ‘예복’의 의미: 기독론과 교회론이 마태복음에 나타난 구속사에 있어서 중심 주제며 서로 연결되어 전개된다. 마태복음에는 기독론과 함께 교회론적인 주제, 즉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누가 예수님의 참 제자인지 기록하고 있다. 22:1-14에는 기독론과 교회론이 요약하듯이 강조된다. ‘예복’은 기독론과 교회론의 핵심을 다룬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탄생한 교회를 향해서 던진 ‘예복’ 이야기는 “누가 하늘나라의 참된 백성인가?”를 묻고 경고하고 격려하고 기준을 잡아준다. 교회의 구성원들 중에서 참된 하늘나라 백성이라면(교회론) 예복(그리스도의 제자에 합당한 행위)을 입어야 하기 때문에 ‘예복’은 마태복음의 교회론과 기독론을 함께 담고 있는 비유어가 된다. 예수님의 참 제자 또는 하늘나라의 참된 백성이라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증거로서 ‘열매’나 ‘행함’을 보여야 한다.
8. ‘미래의’ 하늘나라 잔치에 참여하는 자격인 ‘예복’: 하늘나라의 잔치에 ‘현재’ 참석하는 사람들은 ‘혼합된’ 채로 잔치를 맛보지만 미래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사람은 ‘예복’을 입어야만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 하늘나라 잔치를 ‘현재’ 즐기고 오늘의 잔치에 참여하는 데는 ‘예복’이 자격으로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나라 잔치의 현재성이 끝나고 ‘아직’이 ‘완성’되는 순간, ‘예복’이 없는 사람은 결코 참석할 수 없다. 하늘나라 잔치를 즐기며 기쁜 감정을 경험해도 미래의 하늘나라 잔치에 참여한다는 보증을 얻지는 못한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결여되면 미래의 하늘나라 즐거움에서 쫓겨난다.
9. 하늘나라 백성됨의 조건으로서의 ‘예복’: 마태복음에서는 하늘나라 백성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잣대는 ‘열매’나 ‘행위’다. ‘행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실제 믿음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증거가 된다. 아무리 잔치의 흥을 누렸더라도 황태자의 잔치에 참여할 자격은 ‘행함’과 ‘열매’다. 종말에는, ‘예복’을 입지 않아서, 즉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받게 될 것이다(3:10; 5:13; 5:22,29,30; 7:19,23,27; 12:37; 13:41,49; 23:33; 25:46). 그리고 ‘예복’은 하늘나라 백성의 조건인 ‘의’의 개념을 갖고 있다. dikaiosu,nh에 집중하여 ‘의’를 살펴보면, 마태복음의 ‘의’는 사람의 의와 하나님의 의를 포괄하는 의미를 갖는다. ‘의’(dikaiosu,nh)는 언약관계에 어울리는 하나님과 사람들의 행동이다. 언약 관계에서 보면 의란 하나님의 계명을 좇는 행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선한 행동,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이다. 그러므로 참된 의(dikaiosu,nh)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마태가 제자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의 ‘구별된 표시’다. ‘예복’은 ‘의’와 같은 개념 또는 유사한 의미를 갖는 술어로서, “언약관계에 어울리는 백성의 삶”,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 “하늘나라 백성의 구별된 표시”라고 정리할 수 있다. 칼빈이 강조한 것처럼 “믿음이란 선행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선행은 오직 믿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부름받았다면 부름에 합당한 ‘행함’이 나와야 한다. 이 행함은 부르심에 대한 인격적 반응이다. 만일 이러한 삶과 순종이 없으면 이스라엘이 실패한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패배한 일이 교회에도 ‘연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복’은 하늘나라 백성의 탄생과 대체에 있어서 연속성의 근거가 된다.
10. ‘선교적’/‘혼합된’ 교회를 향한 경고로서의 ‘예복’: 혼인잔치비유의 심판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만 관련된 주제가 아니다. 혼합된 교회를 향한 경고로 행함이나 열매가 사용된 것처럼, ‘예복’은 마지막 날에 누가 참된 하늘나라 백성인지, 누가 거짓으로 하늘나라 백성 행세를 했는지, 판단의 기준이 된다. 예복을 입지 않고 편안하게 있을 때, 심판이 올 수 있으므로 교회는 ‘우리는 아니다’라고 하기 보다 긴장해야 한다.
11. 하늘나라 백성의 ‘지향점’ 또는 ‘목적’으로서의 ‘예복’: ‘예복’은 선교적 교회의 지향점 역할을 한다. 현실의 선교적 교회는 ‘예복’의 경고를 통해서, 선교적 교회가 과연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돌아보게 된다. 하나님이 하늘나라 백성을 ‘열매맺는 백성’으로 부르셨다면 ‘예복’은 부르심의 목적이 된다. ‘열매맺음’과 ‘예복입음’을 연결시켜서 본다면, ‘예복’은 하늘나라 백성을 부르신 ‘목적’이 된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열매를 맺는 삶은 하늘나라 백성을 부르신 구원의 목적이며 의도가 된다. 무엇보다, 혼합체인 교회가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예복’이 제시된다. ‘예복’은 승리를 경험할 하늘나라 백성됨의 ‘표지’요 ‘목적’이 된다.
이러한 요약과 결론을 오늘의 현실 교회에 적용해 보자: “누가 하늘나라의 참된 백성인가?” 이 물음은 혼인잔치비유가 오늘의 교회를 향해 묻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 활동에 참여하여 하늘나라의 잔치를 즐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청함에 응답하여 잔치의 흥을 즐기고 있다. ‘주여 주여’라며 고백하기도 하고, 찬송하기도 하며, 놀라운 일을 행하기도 하며, 예배에 참여하여 흥분하기도 하며, 감격하기도 한다. 이러한 교회는 마태복음에 나타난 ‘선교적 교회’요 ‘혼합된 교회’다. 그런데, 잔치에 참여한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칭의’라는 옷을 입었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돌아 볼 생각도 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가라지가 뽑히고 거짓 제자가 제거되는 것처럼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쫓겨날 것이라는 경고는 다름 아닌 ‘교회’를 향해 주어졌다는 사실을 혼인잔치비유는 강조하며 경고한다. 만일 오늘의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백성들이 참된 하늘나라 백성이라면 반드시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자로서 인격적인 반응을 나타내야 한다. 이 반응은 삶의 열매로 드러난다. 소금과 소금맛이 분리될 수 없듯이, 참으로 믿는 자는 참으로 행동한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믿음과 행위는 분리해서 생각할 주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먹고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부름받지 않았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도록 부름받았다. 이 땅의 소금은 ‘교회’는 믿음과 삶이 분리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한다. 선교적 교회는 마지막 날에는 변명의 기회없이 심판선언만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오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면서 하늘나라의 참된 백성답게 열매맺는 인생을 지향해야 한다. 이러한 삶이나 열매는 교회를 교회라고 인정하게 하는 ‘표지’ 역할을 한다. 표지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심판 선언을 들을 ‘친구’ 속에 자신이 포함될 수도 있으므로, 교회는 믿음에 상응하는 삶을 늘 점검해야 할 것이다: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마 22:12).
목차 (Table of Contents)
신학입문
장로회신학대학교 배정훈, 오방식, 이상억, 최진봉, 신형섭, 고원석, 장신근, 이병옥, 남성현, 박보경, 이한나, 김신웅, 이상일, 이창호, 고재길, 김은혜, 신옥수, 송용원, 김도훈, 박경수, 최영근, 서원모, 김태섭, 김철홍, 김문경, 이은우, 하경택조직신학
삼육대학교 제해종신학개론
우송대학교 Randlee Reddy실천신학입문
서울신학대학교 김형락신학입문
장로회신학대학교 박경수, 고원석, 신형섭, 이상억, 오방식, 최진봉, 배정훈, 이은우, 김철홍, 서원모, 이창호, 고재길, 김은혜, 신옥수, 백충현, 김도훈, 안교성, 장신근, 이병옥, 변창욱, 박보경, 조성환, 이상일, 김문경, 하경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