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공관복음의 악한 포도원 농부 비유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성경적 연구 : 마태복음 21장 33-46절 석의 통한 성경적 연구
심명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23 국내석사
우선,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복음 중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 구원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악한 포도원 농부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구약의 선지자들의 하나님의 대언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선지자들에게 고통을 주고 때리고 죽였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으로 이 땅에 보내셨으나 유 대 종교 지도자들은 회개하지 않고 이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거짓 선지자로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이기로 한 것을 비유로 암시하고 있다. 이 비유는 결국 예수께서는 복음은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전해진다는 나타낸다. 즉, 복음은 모든 백성이 예수 그 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저는 이 비유를 통해 당시 예수 그리스도가 왜 포도원 비유를 했고, 왜 예수 자신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교회 를 세우는 것을 구약과 신약의 성경적 이유와 근거를 밝히고자 한다. 이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유대교에서 구약에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이시며 그리스도이시 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인간의 죄사함을 위해 이 땅에 성육신하여 하나님의 어린양 으로 속건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원죄에 대한 진노를 해소하신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 누구든지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나타내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원죄에 대한 법정 적 개념인 하나님의 진노를 해소하기 위해 속죄 대속물(Penal Substitution)로 죽으 신 것이다. 이 비유의 성경적 해석을 위해 당시 헬레니즘 시대의 토지제도와 사회경제적 배경 안에서 역사비평과 본문 비평을 통해 신학적 의미를 찾는다. 특히, 돌에 대한 구약의 비유와 신약의 비유를 연구하여, 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학적 의미를 밝힌다. 특히, 유대교 문서 탈굼과 예수 의 메시아적 성경적 해석과 예정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해 예수 하나 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는 것을 나타낸다. 끝으로, 마태복음 21장 33-46절의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해 구약에 기다리던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 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성경적으로 밝힌다. 궁극적으로 저의 연구는 공관복음의 악한 포도원 비유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성경적 연구를 통해 모든 민족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을 받고 인간의 영혼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 백성이 된다 는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다.
강대훈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이제까지 예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여러 가지 각도에서 연구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얻은 결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예복’은 ‘혼인잔치비유’가 독립된 하나의 비유이며 누가복음의 비유와 전혀 다른 상황에서, 다른 목적으로, 다른 시기에 주어졌음을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혼인잔치비유’(22:1-14)는 ‘알레고리적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비유를 해석하는 관점이 양분된다. 알레고리는 개작과 직결된다고 이해하는 학자들은 복음서 저자나 초대교회에 의해 개작된 본문을 재구성하여 비유의 원형을 찾으려고 한다. 이들은 예레미아스의 주장을 따르고 있는데, 예레미아스는 22:1-14은 구원사의 개요를 설명해 주는 ‘알레고리화’한 ‘개작’이라고 본다. 그는 마태복음의 비유에 ‘예복’ 부분이 첨가되어 ‘역사적 예수 자신의 소리’에서 멀어졌다고 본다. 예레미아스와 같은 입장에서 해석하는 학자들은 마태복음과 비슷한 본문을 담고 있는 누가/도마복음서를 비교하면서 세 비유는 동일한 본문의 다른 판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질문은 ‘비유’에 대한 그들의 신학적 선이해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알레고리화가 심할수록 개작의 정도가 심하다는 것은 해석학적 선이해에 따른 것이지 수긍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가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처음부터 알레고리가 주어질 수 있고, 알레고리라는 양식을 선정하는 자유가 예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는 ‘직유’의 특성만을 갖고 있지 않고 알레고리까지 포함하고 있다. 처음부터 알레고리로 주어졌다면 독자는 비유의 원형을 찾는 시도를 하기보다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예복’이 주는 ‘의미’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마태/누가복음의 차이점은 각 비유가 주어졌던 ‘상황성’이 달랐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예복’은 각 비유가 주어졌던 ‘상황성’이 달랐다는 것을 말해 주는 단서가 되는 것이다. ‘예복’은 혼인잔치비유가 누가복음의 잔치비유와는 다른 시기에, 다른 장소에서, 다른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그러므로 22:1-14에서 비유의 화자가 기대하는 교회는 ‘예복’이 없는 누가복음의 비유에서 기대하는 교회와 다르다. 각 비유는 다른 시기에 다른 결론과 목적을 위해 독립적으로 주어졌고, ‘예복’은 이 독립성을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예복’은 ‘역사적 예수의 목소리’를 찾는 단서가 아니라 하늘나라에 대한 다양한 증언을 들려주는 기회를 제공한다. 2. 예복의 의미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행함과 칭의로 구분된다: ‘예복’을 삶과 관계된 무엇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은 Davies, Marshall, Blomberg, Bruce, Beasley-Murray, Carson, Ryle, Luz, Linnemann, Redderbos, Scott, Stendahl, Stock, Allen, Albright & Mann, Jeremias, Wenham, Carter, Patte, France, Floyd, Hagner, Hoekema, 권성수, 김득중, 양용의, 오덕호, 정훈택, 최갑종, 홍창표 등이다. ‘예복’의 의미에 대해, 마태복음 외의 본문의 연구를 통해서 의견을 밝히는 학자들은 요한계시록 19:8에 근거하는데, 이필찬, 핸드릭슨은 ‘세마포’를 ‘성도들의 정결한 삶’으로 규정한다. ‘예복’을 ‘칭의’와 관련된 무엇으로 보는 학자들은 Gardner, Lenski, Barton, Tasker, Kistemaker, 박윤선 등이다. 우리는 본 논문에서 칭의론적인 접근은 마태복음의 문맥에서는 맞지 않으며, 바울신학의 ‘의’를 마태신학의 ‘의’와 지나치게 조화시키려는 데서 나온 해석학적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3. pw/j의 용례를 분석하면 ‘예복’은 충격과 놀라움을 주는 그 무엇이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pw/j의 용례를 분석해 보면, pw/j는 ‘의문부사’로 14번 쓰였다(6:28; 7:4; 10:19; 12:4; 12:26,29,34; 16:11; 21:20; 22:12,43,45; 23:33; 26:54). pw/j가 쓰인 문장을 보면 pw/j는 의문의 의미 보다는 ‘감탄’이나 ‘놀라움’, 그리고 ‘가능성과 관련된 의미’를 전해 주는 구실을 한다. EDNT의 분석에 의하면 신약성경의 문맥에서 pw/j는 9개의 의미로 쓰이는데, ‘불가능성’을 뜻할 때(눅 8:18; 요 9:10,19,26; 롬 4:10), ‘놀라움’을 강조하는 수사적 표현을 할 때, ‘거부’(disapproval)를 강조할 때(마 7:4; 22:12; 막 12:35; 눅 6:42; 12:56) 쓰인다. 마태복음과 신약성경에서 쓰인 pw/j는 불가능한 일이나 거부되어야 할 일이 일어났을 때의 놀라움을 강조할 때 쓰인 ‘수사적인 표현법’이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친구여’(e`tai/re)는 거짓 제자들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e`tai/re’와 ‘pw/j’는 ‘놀라움’과 관련하여 쌍을 이루는 표현법이다. 그렇다면, 22:12의 경우, ‘pw/j’가 ‘심판’, ‘책망’, ‘거부’를 나타낸다면 ‘pw/j’로 시작하는 ‘질문’ 보다 ‘판결’의 의미를 갖게 된다. 왕은 예복을 입지 않은 ‘이유’와 잔치 자리에 들어오게 된 ‘방법’에 대해 묻지 않는다. 최후 심판의 때에 왕이 이미 잔치에 참여하는 자격을 상실한 사람에게 행할 것은 심판뿐이다. “그는 침묵했다”(o` evfimw,qh)는 표현도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는 의미보다는 소명이나 변명의 기회가 박탈 당했다는 것에 더 가깝니다. ‘유구무언’ 자체가 심판의 의미를 강하게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최종 심판의 때에는 소명의 기회는 없다. ‘pw/j’로 연결되는 왕의 ‘질문’은 최후 심판의 때에 ‘거부’라는 판결이 된다. 그렇다면 놀라움을 주는 기준인 ‘예복’은 무엇인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혼인잔치를 베푼 왕(22:2)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받고 거절당한다. 충격적인 일을 선교적 교회가 경험할 것이지만 삶의 열매를 맺지 않은 ‘이유’는 제시되지 않고 있다. 다만 놀라운 일을 목격하게 될 사실만을 알려 준다. 4.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의 용례를 분석해 보면, ‘행함’이 결여되었을 때 이런 평가를 받는다: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마태복음에 쓰인 유일한 표현으로(8:12; 13:42,50; 22:13; 24:51; 25:30) 하나님의 통치에서 추방당하고 벌을 받는 이미지를 그린다. 돌이키기에는 너무 시간이 늦었을 때 이 표현이 쓰인다. 이 표현이 나타난 본문을 보면, 이 표현은 모두 최후 심판이 벌어지는 상황을 그리고 있는 문맥에 쓰인다. 이런 문맥과 함께 혼인잔치비유의 예복을 연결시켜 보면, 고백은 구원의 보증이 되지 않는다. ‘믿음’과 ‘행위’ 중에서 어느 것 하나가 결여되면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에 해당하게 된다. ‘하늘나라백성’과 관련해서 쓰인 용례(22:13; 24:51; 25:30)를 볼 때도, 합당한 ‘행위’나 ‘사역’이 결여되었을 때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합당한 행함’이 기준이 되어 이 기준에 합당하지 않으면 바깥 어둠에 쫓겨나 울며 이를 갈게 된다. 22:13의 판결을 받게 되는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22:12)은 부름에 합당한 행실을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에 쫓겨나게 된다.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합당한 행위가 결여되었을 때 내려지는 최종적인 판결이다.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행위’가 결여되었을 때 혼합된 교회를 향하여 내려지는 심판이므로, 이 평가의 기준이 되는 ‘예복’은 ‘행위’가 된다. 5. 연속되는 세 비유의 문맥에서 ‘예복’은 선교적 교회에 ‘행함’을 요구하는 ‘경고’가 된다: 연속되는 세 비유는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공통점으로 삼고 있는데, 하늘나라 백성은 ‘열매맺는 백성’으로 소개된다. 그리고 긍정적으로만 소개되었던 하늘나라의 백성에게도 심판이 적용된다. 하늘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은 가려지게 된다. 그런데 세 번째 비유에서는 앞의 두 비유와 다르게 ‘두 조건’이 나타난다. 세 번째 비유에서 하늘나라 백성이 되는 첫 조건은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적 교회는 또 다른 조건, 곧 ‘행위’를 조건으로 제시받는다. 혼인잔치비유는, 경고를 받고 있는 대상을 ‘교회’라고 명확하게 지목하고 있는 점에서 앞의 두 비유와 차이점을 보인다. 그러므로 두 번째 조건인 ‘예복’은 ‘교회’를 향한 경고 역할을 하면서 ‘예복’으로 경고를 받는 대상은 다름아닌 선교적/혼합체인 교회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6. 마태신학의 구속사에서 예복이 갖는 의미: 예수께서 가르치신 이 구속사관을 마태는 자신이 처한 교회 현실에 적용한다. 마태는 교회의 ‘혼합체적 특성’ 때문에 예수님의 혼인잔치비유가 필요했다. 혼합체인 교회의 모습은 산상설교에서 ‘참된 제자’와 ‘거짓 제자’로 구분되어 나타난다. 13장에서 알곡과 가라지로 나타난다. 혼합체인 교회는 22:1-14에도 나타난다. 사거리에서 오는 누구에게나 교회는 열려있었으므로 가라지도 함께 섞이게 되었다. ‘예복’은 이런 교회의 혼합성을 보여 주는 ‘표지’가 된다. ‘예복’은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거짓 제자들로 판명될 가능성을 알려주는, ‘경고’의 기능을 한다. 한편, 예복은 ‘이미’와 ‘아직’의 구속사에서 교회가 긴장할 것을 촉구한다. 구속사의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혼합체인 교회 중에서, ‘예복’을 입은 사람들만이 ‘아직’이 ‘완성’이 되는 그날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 7. 마태신학의 중심 주제에서 갖는 ‘예복’의 의미: 기독론과 교회론이 마태복음에 나타난 구속사에 있어서 중심 주제며 서로 연결되어 전개된다. 마태복음에는 기독론과 함께 교회론적인 주제, 즉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누가 예수님의 참 제자인지 기록하고 있다. 22:1-14에는 기독론과 교회론이 요약하듯이 강조된다. ‘예복’은 기독론과 교회론의 핵심을 다룬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탄생한 교회를 향해서 던진 ‘예복’ 이야기는 “누가 하늘나라의 참된 백성인가?”를 묻고 경고하고 격려하고 기준을 잡아준다. 교회의 구성원들 중에서 참된 하늘나라 백성이라면(교회론) 예복(그리스도의 제자에 합당한 행위)을 입어야 하기 때문에 ‘예복’은 마태복음의 교회론과 기독론을 함께 담고 있는 비유어가 된다. 예수님의 참 제자 또는 하늘나라의 참된 백성이라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증거로서 ‘열매’나 ‘행함’을 보여야 한다. 8. ‘미래의’ 하늘나라 잔치에 참여하는 자격인 ‘예복’: 하늘나라의 잔치에 ‘현재’ 참석하는 사람들은 ‘혼합된’ 채로 잔치를 맛보지만 미래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사람은 ‘예복’을 입어야만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 하늘나라 잔치를 ‘현재’ 즐기고 오늘의 잔치에 참여하는 데는 ‘예복’이 자격으로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나라 잔치의 현재성이 끝나고 ‘아직’이 ‘완성’되는 순간, ‘예복’이 없는 사람은 결코 참석할 수 없다. 하늘나라 잔치를 즐기며 기쁜 감정을 경험해도 미래의 하늘나라 잔치에 참여한다는 보증을 얻지는 못한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결여되면 미래의 하늘나라 즐거움에서 쫓겨난다. 9. 하늘나라 백성됨의 조건으로서의 ‘예복’: 마태복음에서는 하늘나라 백성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잣대는 ‘열매’나 ‘행위’다. ‘행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실제 믿음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증거가 된다. 아무리 잔치의 흥을 누렸더라도 황태자의 잔치에 참여할 자격은 ‘행함’과 ‘열매’다. 종말에는, ‘예복’을 입지 않아서, 즉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받게 될 것이다(3:10; 5:13; 5:22,29,30; 7:19,23,27; 12:37; 13:41,49; 23:33; 25:46). 그리고 ‘예복’은 하늘나라 백성의 조건인 ‘의’의 개념을 갖고 있다. dikaiosu,nh에 집중하여 ‘의’를 살펴보면, 마태복음의 ‘의’는 사람의 의와 하나님의 의를 포괄하는 의미를 갖는다. ‘의’(dikaiosu,nh)는 언약관계에 어울리는 하나님과 사람들의 행동이다. 언약 관계에서 보면 의란 하나님의 계명을 좇는 행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선한 행동,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이다. 그러므로 참된 의(dikaiosu,nh)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마태가 제자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의 ‘구별된 표시’다. ‘예복’은 ‘의’와 같은 개념 또는 유사한 의미를 갖는 술어로서, “언약관계에 어울리는 백성의 삶”,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 “하늘나라 백성의 구별된 표시”라고 정리할 수 있다. 칼빈이 강조한 것처럼 “믿음이란 선행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선행은 오직 믿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부름받았다면 부름에 합당한 ‘행함’이 나와야 한다. 이 행함은 부르심에 대한 인격적 반응이다. 만일 이러한 삶과 순종이 없으면 이스라엘이 실패한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패배한 일이 교회에도 ‘연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복’은 하늘나라 백성의 탄생과 대체에 있어서 연속성의 근거가 된다. 10. ‘선교적’/‘혼합된’ 교회를 향한 경고로서의 ‘예복’: 혼인잔치비유의 심판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만 관련된 주제가 아니다. 혼합된 교회를 향한 경고로 행함이나 열매가 사용된 것처럼, ‘예복’은 마지막 날에 누가 참된 하늘나라 백성인지, 누가 거짓으로 하늘나라 백성 행세를 했는지, 판단의 기준이 된다. 예복을 입지 않고 편안하게 있을 때, 심판이 올 수 있으므로 교회는 ‘우리는 아니다’라고 하기 보다 긴장해야 한다. 11. 하늘나라 백성의 ‘지향점’ 또는 ‘목적’으로서의 ‘예복’: ‘예복’은 선교적 교회의 지향점 역할을 한다. 현실의 선교적 교회는 ‘예복’의 경고를 통해서, 선교적 교회가 과연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돌아보게 된다. 하나님이 하늘나라 백성을 ‘열매맺는 백성’으로 부르셨다면 ‘예복’은 부르심의 목적이 된다. ‘열매맺음’과 ‘예복입음’을 연결시켜서 본다면, ‘예복’은 하늘나라 백성을 부르신 ‘목적’이 된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열매를 맺는 삶은 하늘나라 백성을 부르신 구원의 목적이며 의도가 된다. 무엇보다, 혼합체인 교회가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예복’이 제시된다. ‘예복’은 승리를 경험할 하늘나라 백성됨의 ‘표지’요 ‘목적’이 된다. 이러한 요약과 결론을 오늘의 현실 교회에 적용해 보자: “누가 하늘나라의 참된 백성인가?” 이 물음은 혼인잔치비유가 오늘의 교회를 향해 묻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 활동에 참여하여 하늘나라의 잔치를 즐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청함에 응답하여 잔치의 흥을 즐기고 있다. ‘주여 주여’라며 고백하기도 하고, 찬송하기도 하며, 놀라운 일을 행하기도 하며, 예배에 참여하여 흥분하기도 하며, 감격하기도 한다. 이러한 교회는 마태복음에 나타난 ‘선교적 교회’요 ‘혼합된 교회’다. 그런데, 잔치에 참여한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칭의’라는 옷을 입었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돌아 볼 생각도 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가라지가 뽑히고 거짓 제자가 제거되는 것처럼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쫓겨날 것이라는 경고는 다름 아닌 ‘교회’를 향해 주어졌다는 사실을 혼인잔치비유는 강조하며 경고한다. 만일 오늘의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백성들이 참된 하늘나라 백성이라면 반드시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자로서 인격적인 반응을 나타내야 한다. 이 반응은 삶의 열매로 드러난다. 소금과 소금맛이 분리될 수 없듯이, 참으로 믿는 자는 참으로 행동한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믿음과 행위는 분리해서 생각할 주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먹고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부름받지 않았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도록 부름받았다. 이 땅의 소금은 ‘교회’는 믿음과 삶이 분리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한다. 선교적 교회는 마지막 날에는 변명의 기회없이 심판선언만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오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면서 하늘나라의 참된 백성답게 열매맺는 인생을 지향해야 한다. 이러한 삶이나 열매는 교회를 교회라고 인정하게 하는 ‘표지’ 역할을 한다. 표지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심판 선언을 들을 ‘친구’ 속에 자신이 포함될 수도 있으므로, 교회는 믿음에 상응하는 삶을 늘 점검해야 할 것이다: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마 22:12).
본 논문은 로마서에 나타난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진술과 긍정적인 진술 사이의 모순을 해명함으로 바울의 율법신학을 이해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Ⅱ장에서 바울의 율법신학에 대한 연구사를 살펴보았는데, 종교개혁자들은 이신칭의를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율법을 이해했으며 단지 루터와 깔뱅 사이에 소위 율법의 제3기능이라고 하는 구약성경의 도덕법에 대한 유효성에서 차이가 났을 뿐이다. 루터는 구약 율법이 신약 성경과 일치하는 한에 있어서만 구속력이 있다고 주장한 반면에, 깔뱅은 구약의 도덕법이 신자들에게 의무적인 것임을 주장하였다. 이런 전통적인 흐름에 대해 20세기 초엽 브레데는 바울의 신학에서 믿음에 의한 칭의가 중심적인 가르침이 아니라며 바울 당시 유대교에 대한 논쟁적인 반응으로 바울신학의 대표적인 중심축은 구속에 대한 종말론적인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또 스텐달은 정통적으로 주장되어온 것처럼 바울의 이신칭의 문제가 단지 죄용서를 구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탐구라는 점에 대해 반박하면서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문제였음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전통적인 입장에서 바울의 율법관 연구는 그 한계를 드러내고 이제는 바울의 사상을 그 당대 역사적 상황에서 전망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 것이다. 샌더스는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며 유대교의 율법관에 대해 바울이 율법주의적으로 보았다는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들에 대해 지금까지 학계는 찬반으로 나뉘어 토의하고 있다. 다음으로 Ⅲ장에서 바울 이전의 율법이해를 전승사적으로 살펴봄으로 바울의 율법관이 어떤 흐름 가운데서 나타났는지를 살펴보았다. 먼저 구약에 있어서 율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했고, 이스라엘은 그를 그들의 하나님으로 인정했다. 이런 구약의 기본적인 원리가 율법의 직접적인 기초이다. 따라서 율법을 어길 때 그 관계는 깨어지거나 붕괴된다. 구약성서와 예수 시대를 잇는 쿰란공동체는 자신들을 하나님의 언약공동체로 보고 그 공동체의 가입은 철저한 율법 수행을 전제하고 있다. 한편 쿰란 공동체의 성서 해석은 신약 공동체의 성서 해석과 공통점이 있는데, 두 공동체는 모두 성서를 종말론적으로 해석하고, 자신들의 성서 해석자들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특정 지도자의 성서 해석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한편 역사적 예수는 메시아 시대의 토라 선포자이다. 예수는 십계명에 대해서는 동기까지 포함한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였지만 제의적 계명에 대해서는 율법의 약화내지는 폐지를 주장했다. 예수에게서 율법의 강화는 좁은 의미의 윤리적 계명에 해당되고, 율법의 약화는 제사와 제의 규범에 관계된다. Ⅳ장에서 로마서에 대한 배경 이해를 위해 바울 저술 당시의 로마 교회를 살펴보았는데, 형태는 회중이 모이는 교회의 모습을 아직 갖추지 못한 가정 교회였으며 구성원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공존하는데 유대인 추방령인 글라우디오 칙령의 영향으로 이방인이 우세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 방문을 앞두고 로마 교회에 있을지도 모를 자신에 대한 오해를 불신시키기 위해 일종의 자기 추천서 형식으로 자신의 복음을 변증적인 목적으로 썼다. 그 후에 Ⅴ장에서 본격적으로 로마서에서 율법에 대해 바울이 진술하는 내용 중에서 부정적인 진술들과 긍정적인 진술들을 나누어 석의 방법론으로 살펴보았다. 먼저 부정적인 진술은 하나님의 진노를 이루는 율법(롬4:15)과 범죄를 더하게 하는 율법(롬 5:20상) 그리고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롬 7:5)이라는 세 구절로 요약해 보았다. 부정적 진술을 말하는 율법은 벗어나야 할 대상이다. 죄를 자극하고 충동질하는 율법이 사라지지 않는 한 죄의 권세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죄와 사망과 함께 무서운 삼두체제를 이루고 있는 세력이다. 이를 바울은 율법을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음으로 긍정하는 진술 죄를 깨닫고 정죄하는 율법(롬 3:20),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 율법(롬 3:21),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 계명(롬 7:12)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수여한 율법(롬 9:4)이라는 네 구절로 요약해 보았다. 이처럼 율법에 대한 긍정적인 묘사를 이해하는 것은 부정적인 진술보다 훨씬 수월하다. 율법의 기원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하나님께 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며 복음의 의를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율법은 생명과 구원을 증거하고 지시하고 있지 그 자체가 생명과 구원이 아니라는 점에서 분명히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율법이 그를 좇는 이들에게 생명과 구원의 법이 되려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인정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할 때 바울이 가장 이상적인 법으로 묘사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Ⅵ장에서 변증법적으로 이 대조적 진술을 해명해 보았다. 바울은 전통적인 유대인으로 긍정적인 진술을 하였는데 다메섹에서 부활한 그리스도와의 이후에 부정적인 진술이 나타났다고 본다. 부정적 진술과 그 반제인 긍정적 진술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합이 이루어진다.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며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 즉 완성이 되신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요구를 신자들로 하여금 성취케 하는 이가 성령이다. 하지만 신자 앞에는 성령을 좇음으로 인한 생명과 육신을 좇음으로 인한 사망이 놓여 있어 끊임없는 선택을 요청받는다. 대조적 진술에 대해 이원적으로 시간적으로 구분할 수 없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낫다는 상대적인 해석에는 한계가 있다. 한편에는 부정적인 진술이 있고 그 반대편에 위치한 긍정적인 진술이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통합되는 변증법적인 해석이 타당하다 할 것이다. 끝으로 Ⅶ장에서 바울의 율법신학을 마태 그리고 야고보와 비교하였다. 바울과 마태는 율법과 그리스도를 보는데서 시각차가 나타나는데, 바울은 율법과 예수의 단절을 시도하는데 비해 마태는 그리스도를 율법의 새로운 해석자 또는 내면까지 강화한 율법의 완성자로 본다. 이런 차이는 바울은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였음을 인정할 때 풀린다. 이방인 개심자들에게 도덕법을 제외한 율법은 자칫 멍에가 될 수 있다. 반면에 마태 공동체는 바울을 파송한 안디옥 교회 근처 시리아에 거주했기에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나름의 유대적 요소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율법을 약화시킬 이유가 이방인에 비해 적다. 다음으로 야고보와의 비교에서 발견된 차이점은 구원에 있어 믿음과 행위의 역할이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한 반면에 야고보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며 헛것이며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런 차이는 먼저 믿음과 행위라는 같은 용어를 다르게 사용한데서 발생하며, 바울도 행위에 대한 최후 심판을 남겨 두었기에 양자 모두 믿음과 행위가 구원의 요소라고 말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의 최후심판은 공력에 대한 심판이며 성령을 구원의 보증이라 한 점 그리고 로마서 8장 31절 이하에서 단지 칭의 받은 사람이 미래 구원을 받을 때 가질 확신만은 논한 것을 보면 현재의 칭의와 미래의 구원에 대한 뚜렷한 구별을 발견할 수 없다. 하지만 야고보서가 바울의 선포를 오용하여 좋은 행실을 맺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엄중한 경고가 됨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분쟁의 신학적 요인 분석 연구 : 고전 1장13절의 수사적 질문 해석을 중심으로
황동하 安養大學校 神學大學院 2004 국내석사
지금까지 논자는 고린도 전서에 나타나고 있는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던 고린도 교인들의 분쟁과 파당의 주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고린도 교회에 어떤 문제들로 나타났으며, 더불어 바울은 이 문제들에 관하여 어떤 가르침을 제시했는지에 관해 고찰을 하였다. 그 결과 고린도 교회 안에는 분쟁과 파당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분쟁과 파당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의 신학적인 특성이 반영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분쟁의 신학적인 원인으로 알게된 기독론과 교회론, 세례론이 고린도전서 전반에 걸쳐 어떻게 고린도 교회에 영향을 미쳤었는지, 그리고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침을 베풀었는지에 관하여도 고찰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론적으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첫째,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것은 단순하게 그들의 상황을 나열하기 위함이 아니라 분쟁과 분열에 휩싸여 있던 고린도 교회를 '하나'로 연합하려는 목적에서 기록을 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을 다루면서 '다 같을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권면하였다. 사도 바울의 목적은 처음부터 고린도 교회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만들려는데 있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분쟁과 파당을 형성하게 된 주된 원인으로 그 분파들 간의 신학적인 차이인 기독론, 교회론, 세례론(고전 1:13)을 지적하면서 이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오해를 바르게 제시함으로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분열, 파당 문제를 해결하여 교회를 하나되게 하려고 본 서신을 기록한 것이다. 둘째,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를 통해 자신의 기독론을 그리스도는 한 분 그리스도임을 강조한 형태로 제시한다(고전 3:11, 3:23, 8:6, 11:1, 3, 12:5, 12:27). 지금 고린도 교회는 한 분 그리스도를 여러 명의 그리스도 혹은 한 분 그리스도를 여러 갈래로 쪼개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를 나누지 말라고 교훈 하였던 것이다. 셋째, 고린도 전서의 교회론에서 사도 바울은 사역자들의 사역의 결과를 가지고 나누이고 있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가 되라고 강조한다(고전 3:4, 5, 11, 4:2, 12:4-31, 14:26-33). 사역자는 하나님이 세우신 자들이며, 이들은 단지 주인 되신 하나님과 그 일에 충성할 뿐 그들의 사역의 결과로 나누이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교훈 하였다. 넷째, 고린도 전서의 세례론에서 사도 바울은 세례를 집례한 사람을 두고 분쟁하고, 파당을 형성하여 나누이는 것은 세례의 진정한 의미를 상실한 것이라고 말한다. 세례는 한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한 몸으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이 되었음을 확인시켜 교훈 하였다(고전 10:3-4). 이상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접한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분열, 파당 문제를 고린도 교인들 간의 신학적인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해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음을 고린도 전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원했다(고전 1:10). 서로를 인정하고 사랑으로 행하기를 바랬다(고전 16:14). 우리의 몸이 하나인 것처럼 고린도 교회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몸에 지체가 많은 것처럼 고린도 교회 안에도 각자의 직임과 은사에 따른 많은 지체가 공존하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 지체들은 서로가 유기적인 연합을 이루며, 몸의 머리인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져 통일체를 이루어야 됨을 제시했다. 즉,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되어야 됨을 교훈해 주었다. 결국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분열, 파당 문제를 그 원인이 신학적인 문제에 있었음을 즉시하고, 이 신학적 주제의 바른 해석을 통해 교회를 하나되게 하려고 했었던 것임을 결론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고린도전서를 대하는 분들은 항상 이 신학적 문제를 염두에 두고, 연구하고 설교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이제 본 연구를 통해 바울 사토가 고린도 교회를 향해 가졌던 마음과 자세, 그리고 그가 제시한 교회의 하나됨에 관한 교훈들은 현금의 한국 교회에 귀한 도전과 경각심으로 나가옴을 제시해 본다. 즉,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뱌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향해 가졌던 그 마음은 이 시대의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라 사려된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섬겨 나가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진심으로 힘써야 하겠다.
본 논문은 고별설교를 분석하여 고별설교에 나타난 고별설교의 신학적 기능과 메시지를 찾고 요한공동체가 당면한 삶의 자리와 관련지어 이 설교의 의미를 찾는데 그 중점을 두고 있다. 고별설교는 다양한 전승의 단계를 통하여 형성된 문서이지만, 문학적으로 통일성이 있는 문서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서 본문의 맥락 속에서 강조되는 개념을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면서 서술해 나갈 것이다. 문학적 방법과 더불어 당시에 널리 알려졌던 수사학적 방법도 사용하여 본문의 의도를 보다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한다. 본 논문은 고별설교를 기술하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구조와 내용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서론에서는 고별설교 연구의 중요성과 연구방법론을 제시하고 요한복음 연구동향을 다양한 학자들을 통해 알아본다. 2장에서는 요한복음의 구조와 고별설교의 위치를 연구한다. 요한복음 내에서 고별설교가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고찰하고 이런 고찰을 바탕으로 고별설교의 통일성과 문학적, 수사학적 구조에 대해서 알아본다. 3장에서는 고별설교의 양식, 구조, 배경을 살펴보고 내용분석을 통해서 세밀한 본문 이해를 시도하며, 고별설교의 신학적 의도가 무엇인지 분석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 4장에서는 고별설교에 나타난 삶의 자리와 신학적 기능을 살펴본다. 특히 요한복음의 고별설교가 제기하는 신학적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결론에서는 각 장을 통해 살펴본 신학적 메시지를 정리하고, 고별설교가 오늘의 우리들에게 전하고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본 논문은 요한복음서의 고별설교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고별설교는 역사적으로 그 가치를 올바로 인정받지 못했으나, 본 논문을 통해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고별설교는 분명한 신학적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요한 복음의 고별설교의 목적은 어떻게 요약될 수 있는가? 첫째, 무엇보다도 요한공동체에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한공동체에 있어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던 회당으로부터의 출회는 그리스도론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독특한 그리스도론적 발전을 이루면서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뿌리를 둔 신앙집단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형성해 나갔다. 둘째, 요한공동체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공동체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요한공동체는 그리스도와의 역사적 거리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시대의 교회였다. 따라서 역사적 그리스도와의 거리를 극복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으며, 이러한 역할은 요한복음서의 독특한 성령 이해인 보혜사를 통하여 수행되었다. 그러므로 고별설교가 강조하는 교회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공동체이다. 셋째, 요한공동체는 세상을 향한 공동체라는 점을 강조한다. 예수의 모든 설교가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고별설교는 유언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이 설교를 우리의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첫째로 14장에서 볼 수 있듯이 절망 속에 살고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씀의 근거가 되고 위로의 주님을 만나게 해주어야 한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다 근심과 염려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주님의 지체로서 이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어야 한다. 이 세상 어디에도 소망이 없으며 위로가 없기 때문에 교회는 위로의 주님을 만나게 해주고 소망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15장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과 바른 관계는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관계란 것을 성도들에게 일깨워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공과 승리의 비결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주님과의 관계가 포도나무와 그 가지처럼 유기적이지 못한 것을 알아야한다. 교회는 유기체이지 조직체는 아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본래의 목적대로 주님의 유기체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16장에서 보여주듯이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 그 의미가 무엇이며 그의 사역을 통한 승리의 방법을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이며 이 성령은 주님의 구원사역을 택한 백성들에게 적용하고 완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사역에 대한 깊은 고찰과 기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주님의 고별설교는 그의 설교의 결론이며 핵심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오늘의 잘못된 신앙에서 벗어나 성령의 선교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무엇보다 교회가 새롭게 각성하는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의 말씀을 현실 속에서 재현하는 것이다. The Purpous of this thesis is to find the both theological function and message of the farewell address which appeared in the same address by analyzing of the farewell address, also willing to focus on finding the meaning of this address in connection with the living situation that St. John's Community facing with. Though the farewell addrss is the record which had been built up through various steps of transmission, it can be recognized as a document that contains of literary uniformity/consistency. Therefore, this thesis will going to describe with concentration upon grasp of the emphasized concept in the veins of text in St. John's Gospel: Using of literary method as well as the rhetorical method which was widely known at that time, this Thesis is about to grasp more correctly of the purposeful meaning of the text. In description of the farewell address, this study will be developed in the following structure and contents: At the Introduction Chapter, The importance and study method on the study of farewell address would be presented, also will locate the research movements with respect to St. John's Gospel through various scholars. At Chapter 2, I will research on the Structure of St. John's Gospel as well as the position of the farewell address: It will be studied with reference to 'what's functioning', on 'which position' that the farewell address does in St. John's Gospel, and by standing on the basement of such research, the uniformity and the literary, rhetorical Structures of the Farewell address would be also looked into. In Chapter 3, I will look around of the mode, the structure and the background of the farewell address was, and an attempt to do a detailed understanding of the text through the contents-analysis, and will clarify that what is the theological intention of the farewell address through a close breakdown. In Chapter 4, I would like to find out the 'space of life' and 'theological function' those appeared at the farewell address. Especially, To pursue what is the theological message for which the farewell address in St. John's Gospel raised up. At the Conclusion Chapter, It would be arranged those theological messages that have been produced from each chapters shown above, and to present what is its meaning which the farewell address wish to deliver to all of us in today. This Thesis was made an attempt to the purposes of a comprehensive analysis as well as an explanation of the farewell address in St. John's Gospel. Although the farewell address has not been acknowledged historically its own worth properly, but in accordance with this research through this thesis, the farewell address has an apparent theological purpose itself. Such being the case, how could the farewell address in St. John's Gospel be summarized? At First, before everything else it emphasizes of the close relationship to the St. John Community together with Jesus Christ. An expulsion from the church-community, the most painful experience in St. John's community was done by the theory of Christ. Accordingly, they forwarded the forming of their self-characteristics as a religious faith community which rooted in the relationship with Christ, on establishing a development of their specific Christology. Secondly, the purpose is placed at there to stress that the St. John's community is the cooperative association benefiting by the guidance of the Holy Spirit. The St. John's community had to really be a church that forcedly be experienced the historical distance to Jesus Christ. Consequently, an overcoming of 'the distance to historical Christ' was an important problem, such surmounting function has been performed by the 'Holy spirit messenger' as a peculiar understanding concept on the Holy Spirit. Therefore, the church emphasized at the farewell address is the community that situated under guidance of the Holy Spirit. Thirdly, it is quite emphasizes that the St. John's community is the community towards for the real world. Knowingly all of the preachings by Jesus are important at all, but since the farewell address among them has a testamental character, it has more important meaning. If so, how to apply this Preaching into our real living? At first, as seenable at chapter 14, we should let those people who are living in the desperateness able to meet with the Lord in consolation that is the foundation of comforting words. As a matter of fact, all of human being are living under anxieties and worries. Accordingly, church should soothe them and also give them desire, too. As that's why there is no desire and consolation in anywhere in the world, Church must do arrange to locate them to meetable with the Lord, and should provide desires to them, as well. Secondly, as shown at chapter 15, Church should let those christians awaken to know that the right relationship with the Lord is as likely as that of grapevine tree and its branches. This is the just secret for success and triumph. However, Church at today must recognize the fact that current real relationship with the Lord is not quite organic than likely as grapevine tree and its branches. Church is an organic body, not a systemic body. On the point of such view, Churches must be reformed to enable them become the organic bodies with the Lord in compliance with the original purpose thereof. Thirdly, as seen at chapter 16, we can then become to master of what is the meaning of the Lord sent us the Holy spirit messengers, and we pretty obtainable of the winning ways through those Services done by the messengers. Now is the era of the Holy spirit, and this Holy spirit are being applied and completing for those people who selected the Lord's rescue service. Therefore, there should be a deep consideration and an attempt for the Holy Spirit's service. Now, the Lord's farewell address is the conclusion and also the kernel of his address. So the why, we should comply with these words as those what he gives us in today. When it comes out so to real, we can participate to mission work to evangelize for the Holy Spirit by escaping from the wrong faith of us in today, the first of all there could be appearable in our sight of a newly awakened services by the churches. That is nothing but to revive of the Lord's words into the real world.
본 연구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방언에 관하여 연구하는 것이다. 본 연구는 신약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로서 방언이 나오는 내용을 다룰 것이다. 먼저 그간 방언에 관한 외국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를 밝히고, 국내에서의 학문적 선행연구들을 소개한다. 이후 다양한 국내 성경과 영어 성경에 나타난 방언과 관련된 용어들의 번역을 보고 신약 본문에 나타난 방언들을 연구할 것이다. 그러나 특히 본문을 통한 다양한 주장 중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내용을 반박한다. 단순히 오늘날의 방언 현상이 2000년 전의 방언과 같은 것이라는 주장, 또한 사도행전이나 고린도 전서에서의 방언이 차별 없이 모두 외국어 기적이라는 주장 등에 근거가 미약함을 연구하여 보였다. 신약의 저자들은 방언을 규정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들은 청중들에게 전제되어 있다. 사도행전은 방언에 관해 구약과 관련하여 예언의 성취와 바벨탑 사건, 새 창조, 만민선교와 관련한 신학적 접근을 하며 바울서신은 선교와 목회 적으로 그 오해된 교정 그리고 올바른 활용에 집중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론과 성령의 은사 간 상관관계성 연구
하나님은 인간 세계에 교회를 허락하셨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 을 이 땅에 이루어 가신다. 우리는 그의 동역자로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교회로 모이는 성도들을 섬기며, 교회를 통해서 지역과 나라를 섬긴다. 따라서, 교회는 기독교 신학과 목회에서 아주 중요한 거점이며, 생명의 자리이다. 그러나, 현실의 교회를 바라보면 교단에 따라, 담임목회자에 따라 제 각각의 모습이 만연하다. 오직 성도들의 모인 수와 건물 예배당의 위용만 드높이기 위해 애쓰는 모습들도 있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에 안타까워하면서, 진실된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 특히, 성령의 은사에 대한 허용들이 교회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나는데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은사의 바른 사용은 무엇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만, 그 허용의 정도에 따라서 교회의 모습이 건강할 수도 있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대의 목회는 성령에 의한 목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본 논문의 출발이다. 성경적으로 바른 교회의 모습과 그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바른 사용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신약문헌을 기록한 저자들 가운데 교회론의 문제에 대해 가장 심오한 성찰을 기울인 사람은 바로 바울일 것이다. 따라서, 신약의 여러 교회를 세운 바울 사도의 서신들에서 성경적인 정답을 찾으려고 한다. 특히, 교회에 당면한 문제를 바른 교회론으로 해결하며, 나아가 교회 안에서 일어난 성령의 은사 사용에 대한 문제들을 가장 바르게 해결하는 고린도전서 12장을 연구하여 본 논문과 오늘날의 목회현장의 질문들에 대한 바른 성경적 관점과 해답을 찾고자 한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전체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성령의 은사 사용에 대한 부분과 교회론에 대한 부분이다. 바울은 왜 고린도교회의 문제들을 정리하면서 왜 교회론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신학을 가져왔을까?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신학은 바울만의 독특한 신학이다. 이 신학을 통해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들을 정리하고 있다. 또한, 이 신학을 바탕으로 하여 고린도교회의 성령의 은사 사용에 대한 문제들을 해결한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고린도전서 12장 전체를 연구하여 성경적으로 바른 교회론과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은사 사용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찾아낸 답은 현재 우리가 사역하는 교회의 현장에 바르게 적용될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신영미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20 국내석사
신약성경의 성전관(聖殿觀)에 관한 연구 본 연구는 신약성경의 성전관(聖殿觀)에 관하여 하나의 개념으로 나타낼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연구이다. 연구 동기로는 첫째, 신약성경은 마태복음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함께 성전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둘째, 누가행전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이 그 기능과 역할을 상실했다고 보는 사상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먼저 예수를 새로운 성전으로 보는 견해, 하늘을 성전으로 보는 견해, 교회 공동체를 성전으로 보는 견해, 새 예루살렘을 성전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 정리하고 분석하였다. 특히, 누가행전은 사탄이 성전에 있는 것(눅 4:9), 예수가 성전을 ‘너희의 집’이라 부르신 것(눅 13:35), 스데반이 하나님께서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심을”(행 7:48) 주장한 것, 성전에 있는 하나님의 대행자와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갈등 국면들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 자체가 성전으로서의 자격과 역할 그리고 제 기능을 잃었다고 하는 사상을 뒷받침하는 학자들의 견해를 통해 본 논지를 전개하였다. 본론에서는 신약성경을 다섯 부분으로 분류하여 신약성경의 성전관을 다루었다. 첫째로 누가행전을 통해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더 이상 성전의 기능과 역할을 하지 못하는 근거를 제시하였으며, 둘째로 마태·마가복음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상실된 기능과 역할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종으로 사명을 감당 하실 예수께로 대체되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셋째로 요한문헌을 통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신 곳, 즉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시는 곳이 성전이 됨을 읽을 수 있었다. 넷째로, 바울서신을 통해 성전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몸, 거룩한 성도, 교회 공동체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심으로 성전이라 불려지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 ‘한 새 사람’, ‘한 몸’을 이루어 진정한 성전으로 만들어짐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에 나타난 구약의 다양한 장소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이 드러난다. 이러한 일련의 연구를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곳이 성전이다.’라는 일관된 하나의 명제를 ‘신약성경의 성전관(聖殿觀)’으로 볼 수 있다.
로마서 9-11장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선택과 구원에 대한 연구
황은주 호남신학대학교 일반대학원 2025 국내석사
로마서 9-11장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선택과 구원에 대한 연구 황은주 신학과 호남신학대학교 대학원 본 연구는 로마서 9-11장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집단적· 구속사적 선택 해석 틀 속에서 재조명한다. 이를 통해 바울의 논증이 이 스라엘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언약적 신실하심을 일관되게 옹호하고 있음을 논증한다. 로마서 9장은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계획을 제시하고, 11장은 이스라엘의 ‘부분적 완악함’이 ‘이방인의 충만함’을 이 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적극적으로 기능함을 보여 준다. 특히 ‘그리고 이와 같이’라는 연결 표현은 이러한 역동적 과정이 “온 이스라엘”의 궁극적 구원으로 나아가는 순차적 흐름으로 가리킨다. 이때 “온 이스라엘”은 역사적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선택받은 총수를 의미한다. 본 연구는 그들의 구원이 역사 속에서 현재적으로 지속되는 과정으로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은 종말론적 대규모 회심 해 석과 대체주의적 해석에 대해 신학적 대안을 제시한다. A Study on the Election and Salvation of Israel in Romans 9-11 HWANG, EUN-JU Department of Theology Honam Theological University & Seminary This study re-examines Israel's salvation in Romans 9–11, shifting the interpretative framework to corporate and redemptive-historical election. It demonstrates that Paul’s argument is a consistent defense of God’s unwavering covenantal faithfulness to the community of Israel. While chapter 9 establishes God's sovereign plan, chapter 11 shows that Israel's “partial hardening” actively serves the divine economy by facilitating the “fullness of the Gentiles.” The connective 'and in this way' signifies this dynamic sequence leading to the ultimate salvation of “all Israel.” The thesis asserts that “all Israel” refers to the full number of the elect within the historical Jewish nation, whose salvation is realized through a current, ongoing process in history. This interpretation offers a robust theological alternative to both eschatological mass conversion and supersessionist the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