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1811년 신미 통신사행과 조선과 일본 양국의 문화 교류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1811년 신미 사행을 끝으로 ‘善隣과 友好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통신사행은 종말을 고하였다.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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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11
학위논문(박사) --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 동아시아학과 , 2011. 2
2011
한국어
811.9 판사항(22)
서울
Sinmi-Tongsinsa in 1811 and Joseon-Japan culture exchange
v, 222 p. : 삽도 ; 30 cm.
지도교수: 진재교.
부록: 일본인 성명 일람표.
참고문헌: p. 203-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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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811년 신미 통신사행과 조선과 일본 양국의 문화 교류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1811년 신미 사행을 끝으로 ‘善隣과 友好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통신사행은 종말을 고하였다. 게다가 신미사행은 예전의 통신사행들과 달리, ‘역지통신(易地通信)’이라 하여 에도가 아닌 츠시마(對馬)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예외적인’ 사행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신미사행의 특이성으로 인해 지금까지 사학계의 연구는 대개 신미사행 자체보다는 신미사행의 배경에 더 관심을 두었다. 그 결과 신미사행의 구성원이나 양국의 문화 교류에 대해서는 연구가 부진한 상황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신미사행의 전체 모습을 밝히고, 신미사행이 갖는 문화사적 의의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Ⅱ장에서는 辛未使行의 배경과 경위를 고찰하고 신미사행의 구성원과 여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신미사행의 배경과 경위에 관한 선행 연구를 토대로 하여, 易地通信의 배경을 검토해보았다. 특히 재정 위기와 일본에서의 조선 멸시관 대두에 관한 기존의 입장을 재검통해보았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주로 일본의 입장만을 고려하였기 때문에, 조선은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져왔다. 그러나 신미사행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고찰해보면, 조선은 오히려 당시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미사행은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 속에서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빚어진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Ⅲ장에서는 신미사행 관련 자료를 살펴보았다. 기존에 알려진 신미사행 관련 자료 외에 새로운 자료를 추가하였다. 또한 관련 자료는 조선측이 기술한 사행록과 일본측이 기술한 對馬島行 기록, 筆談唱酬集, 기타 자료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기타 자료는 신미사행 때 씌어진 자료는 아니지만, 신미사행을 위한 준비자료와 관련 지도, 그림 등을 포함하고 있다.
Ⅳ장에서는 필담 창수에 참여한 양국 문인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여기에서는 필담창수의 주체가 되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측 인사와 일본측 인사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조선측 인사는 書記 金善臣, 書記 李明五, 製述官 李顯相과 伴倘 李文哲이며, 일본측 인사는 書記 林述齋와 제자 松崎謙堂, 古賀精里와 제자 草場珮川, 유생 三宅橘園이다. 조선측 문인들은 당시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고 있었고, 양국의 문화 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이들이다. 그러나 현재 학계에서는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에 대한 연구는 신미통신사 뿐만 아니라 19세기 초 조선의 문화 수준을 규명하는 데 일조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Ⅴ장에서는 필담 창수의 양상과 주제에 대해 서술하였다. 먼저 󰡔擬答擬問󰡕과 󰡔後師錄󰡕이라는 자료를 통하여 일본측의 사전 준비 작업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신미사행 필담창수집을 토대로 하여, 주제별로 나누어 양국 문인의 필담 내용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Ⅵ장에서는 이상의 논의를 통해 신미사행의 문화사적 의의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계미사행으로 인해 변화되기 시작한 조선 후기 문인들의 일본관이 신미사행 때는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확인해보고, 신미사행 무렵 조선 사회의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홍대용의 연행을 시작으로 활발해지기 시작한 조선 후기 문인들과 해외 문인의 교류가 신미사행에는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또한 신미사행의 문화 교류가 어떻게 청조에 전해지는지도 살펴보았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1811year Sinmi Tongsinsa the last was diplomatic ceremony held in Tsusima Island(對馬島) not in Edo(江戶). This change in venue for the exchange of diplomatic documents is known as Yeogji-Tongsin(易地通 信). Various explanations have been giv...
1811year Sinmi Tongsinsa the last was diplomatic ceremony held in Tsusima Island(對馬島) not in Edo(江戶). This change in venue for the exchange of diplomatic documents is known as Yeogji-Tongsin(易地通
信). Various explanations have been given for it and for why Sinmi Tongsinsa was the last, for example the fiscal problem and disdain for Joseon in the late 18th century Japan.
However nobody took any notice of the Sinmi Tongsinsa in itself except Hujitsuka Chikashi(藤塚鄰), he noticed the aspect of the Joseon-Japan culture exchange. This paper also examine the culture exchange between Joseon and Japan in 1811year Sinmi-Tongsinsa. Sinmi Tongsinsa deserves our attention, first of all, there were remarkable people, Gim Seonsin(金善臣), I Myeongo(李明五), I Hyeonsang(李顯相) and I Muncheol(李文哲). They have significant literary talent, and showed ther ability to write poems and prose in Japan. Also they took an active part in a Joseon-Japan culture exchange. The interesting thing was they was related to Yeonhaengsa (燕行使) and Gim Jeonghui(金正喜), he represented the Joseon-China literature exchange. In the result, Sinmi-Tongsinsa expanded the Joseon-Japan culture exchange into East Asia including China.
목차 (Table of Cont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