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Национальный большевизм и депортация советских корейцев с Дальнего Востока
Чо Хо Ён(조호연) 한국슬라브유라시아학회 2004 슬라브학보 Vol.19 No.2
러시아의 기록관 자료가 공개되기 시작한 1990년대 이래로, 1937년의 한인(고려인) 강제이주의 역사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연구가 발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연구가 주로 국사 전공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관계로 스탈린 체제라는 포괄적인 구도 속에서 이 주제가 다루어지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잘 알려진 바대로, 스탈린이 한인들을 강제이주 하기로 결정한 원인으로 연해주 지역에서 한인들이 일본을 위한 첩자활동을 전개하였다는 이유가 흔히 거론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기에, 첩자활동이라는 것은 강제이주를 단행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였다. 왜냐하면 첩자활동 얘기가 나용 1937년은 숙청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기로서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기소(起訴)내용을 조작하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1937년의 한인들의 강제이주의 배경으로 소련의 민족정책의 변화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소련 정권은 그 태동에서부터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지 토대 위에 서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러시아에서만 프롤레타리아트 정권이 성립된 상황에서 어떻게 국제주의를 구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소련 정권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쩔 수 없이 대러시아인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적 색채를 강화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러시아사 연구자들은 이런 현상을 분석하기 위하여 “민족주의적 볼셰비즘”이라는 용어를 점점 자주 거론하고 있다. 물론 “민족주의적 볼셰비즘”이라는 말 자체는 독일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처음 만들었고, 우스트랼로프(N. V. Ustrialov) 등 소위 “방향전환파”라고 불린 일군의 러시아 망명객들이 1920년대에 이런 경향을 지닌 노선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기에 “민족주의적 볼셰비즘”이 분명한 색채를 띠게 된 것은 한인들의 강제이주가 단행되기 3년 전인 1934년이었다. 그 증거로서 스탈린에 의하여 추진된 대러시아인 중심의 러시아 역사교과서 개편 작업 등을 들 수 있다. 국내적으로는 가족의 해체 등의 위기,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파시즘 세력으로부터의 공세에 직면한 스탈린으로서는 민족문제에 관한 한 이전의 국제주의적인 모습을 공개적으로 탈피하고, 대러시아인 중심의 민족주의를 강화함으로써 국력을 집결하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대러시아인 중심의 “민족주의적 볼셰비즘”이 강화된 이후에, 민족 구성원 전체가 처음으로 강제이주 당한 사람들은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인교포들이었다. 하필이면 왜 한인들이냐 하는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100개 이상이나 되는 소련 구성 민족들 가운데서 한인들만이 가진 특성에 주의를 돌릴 필요가 있다. 가령, 한인들은 과거 제정 러시아 시기에 정복되었다거나 합병된 민족이 아니었다는 점, 한반도에 위치한 자신들의 모국이 일본에 의하여 강점되어 있었다는 점,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특히 탁월한 농업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 등이 한인들을 통째로 중앙아시아로 이주하려는 소련 정부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스탈린 시대에는 한인들 이외에도 민족 전체의 강제이주는 흔한 일이었다. 가령, 볼가강 유역의 독일인들, 크림의 타타르인들, 체첸인들, 칼미크인들, 발카르인들, 카라차이인들, 인구슈인들 등도 강제이주라는 고통을 경험하였다. 그렇지만 이들 민족들은 모두 2차 대전 기간에 강제이주 당한 경우였고, 그 이전에 민족 전체가 집단 이주 당한 경우는 연해주의 한인교포들이 유일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스탈린 체제,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여 “민족주의적 볼셰비즘”이 강화됨으로써 가장 먼저 피해를 입은 민족이 바로 한인교포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